예송논쟁

최근 편집: 2023년 7월 9일 (일) 17:50

예송논쟁(禮訟論爭)은 조선 시대 현종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주 1]가 상복을 입는 법을 둘러싸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에 일어난 논란이다. 원래는 "예송(禮訟)"이라고만 했고, "논쟁"은 후대에 붙은 이름.

배경

충성의 관념이 지배하던 전근대에는 천명[주 2]을 받드는 신하를 황제라 하고, 황제를 받드는 신하를 왕이라 하고, 왕을 받드는 신하를 귀족[주 3]이라 하고, 귀족을 받드는 가장 마지막 계급을 백성이라 했다. 이러한 관습상 제도를 봉건제라 한다. 이 체계에서 왕은 본래 귀족 중에 황제가 특별히 뽑아준 귀족에 가까웠다.

이에 따라 조선 왕은 형식상 중원의 황제를 받드는 신하였는데, 조선의 특이한 점은 그 밑의 사회지도층이 봉건제의 귀족이 아니라 과거를 통과한 양반들이었고, 양반들은 특권을 누리지만 명목상 백성들과 같은 양민의 신분이었으며, 4대가 지나도록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일반 백성으로 도로 격하되었다.[주 4] 귀족의 관작은 조선 초에 일찌감치 폐지된 상태였다. 여기에서 왕의 지위에 의문이 생긴 것이다. 왕이 세습 귀족의 일종인데, 조선에는 왕 외에 세습 귀족이 왕족 말고는 없고 사대부 관료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왕은 (형식상 양민인) 사대부와 떨어져있는 신분인가, 아니면 왕은 (사실상의 귀족인) 사대부의 일종인가?

조선 전기에는 왕의 집권 명분이 강했으므로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인조반정삼전도의 굴욕은 왕의 정통성을 크게 해쳤다. 이 상태에서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둘째 아들인 효종을 세자로 하고 소현세자 일가는 그냥 숙청해버렸고, 이는 종법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효종이 죽자, 왕실의 어른인[주 5] 자의대비가 상복을 차남의 예로 입으면 효종의 왕위계승이 비정상적이라는 뜻이 되니 반역의 소지가 있게 되고, 장남의 예로 입으면 소현세자의 장례를 이미 장남의 예로 치렀으니 사실관계의 왜곡이자 예법 문란인 것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국조오례의에도 이렇다할 규정이 없었다.

신분제가 거의 사라지고 장례문화가 간소화된 현대인들에게는 별 쓸데없는 논쟁이지만, 그 시대에는 목숨이 걸린 논쟁이었다. 현종은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1차 예송(1659, 기해예송)

선왕인 효종이 승하하여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을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 서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다.
    사대부의 예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장례를 치를 때는 장남이든 차남이든 다 기년복을 입도록 하는 경국대전, 대명률이 근거이다.
  • 남인은 참최복(3년)을 주장하였다.
    효종이 장남은 아니지만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므로 의례에 규정된 3년을 똑같이 채우자는 것이다.

그 때까지 조선 왕실에서 아들을 위해 부모가 3년복을 입은 전례가 없었기도 했기에, 서인의 1년설이 채택되었다.

2차 예송(1674, 갑인예송)

선왕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였다. 이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을지가 또다시 논쟁거리가 되었다. 경국대전은 이 경우 맏며느리 상에는 기년복(1년), 다른 며느리는 대공복(9개월)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경국대전은 1차 예송에서 채택된 서인의 1년복설의 근거였으므로, 같은 논리로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서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 서인은 대공복(9개월)을 주장하였다.
  • 남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다.
    이는 국조오례의에서 왕통을 인정하는 경우의 규정을 따른 것이다.

남인의 1년설이 채택되었으며, 숙종대 경신환국 전까지 남인 우세 정국이 이어졌다.

부연설명

  1. '조대비' 또는 시호 '장렬왕후'라고도 부른다.
  2. 서양의 경우, 절대적인 유일신
  3. 중화권의 경우, 왕 밑의 귀족은 다시 공·후·백·자·남의 오등작으로 나뉜다.
  4. 조선 후기부터는 이 제도가 문란해져 양반이 폭증한다.
  5. 왕의 부모가 왕의 신하인지는 유구한 논란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