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논쟁(禮訟論爭)은 조선 시대 현종 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주 1]가 상복을 입는 법을 둘러싸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에 일어난 논란이다. 원래는 "예송(禮訟)"이라고만 했고, "논쟁"은 후대에 붙은 이름.
배경
충성의 관념이 지배하던 전근대에는 천명[주 2]을 받드는 신하를 황제라 하고, 황제를 받드는 신하를 왕이라 하고, 왕을 받드는 신하를 귀족[주 3]이라 하고, 귀족을 받드는 가장 마지막 계급을 백성이라 했다. 이러한 관습상 제도를 봉건제라 한다. 이 체계에서 왕은 본래 귀족 중에 황제가 특별히 뽑아준 귀족에 가까웠다.
이에 따라 조선 왕은 형식상 중원의 황제를 받드는 신하였는데, 조선의 특이한 점은 그 밑의 사회지도층이 봉건제의 귀족이 아니라 과거를 통과한 양반들이었고, 양반들은 특권을 누리지만 명목상 백성들과 같은 양민의 신분이었으며, 4대가 지나도록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가문은 일반 백성으로 도로 격하되었다.[주 4] 귀족의 관작은 조선 초에 일찌감치 폐지된 상태였다. 여기에서 왕의 지위에 의문이 생긴 것이다. 왕이 세습 귀족의 일종인데, 조선에는 왕 외에 세습 귀족이 왕족 말고는 없고 사대부 관료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왕은 (형식상 양민인) 사대부와 떨어져있는 신분인가, 아니면 왕은 (사실상의 귀족인) 사대부의 일종인가?
조선 전기에는 왕의 집권 명분이 강했으므로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런데 인조반정 및 삼전도의 굴욕은 왕의 정통성을 크게 해쳤다. 이 상태에서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멀쩡히 살아있는데 둘째 아들인 효종을 세자로 하고 소현세자 일가는 그냥 숙청해버렸고, 이는 종법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효종이 죽자, 왕실의 어른인[주 5] 자의대비가 상복을 차남의 예로 입으면 효종의 왕위계승이 비정상적이라는 뜻이 되니 반역의 소지가 있게 되고, 장남의 예로 입으면 소현세자의 장례를 이미 장남의 예로 치렀으니 사실관계의 왜곡이자 예법 문란인 것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 국조오례의에도 이렇다할 규정이 없었다.
신분제가 거의 사라지고 장례문화가 간소화된 현대인들에게는 별 쓸데없는 논쟁이지만, 그 시대에는 목숨이 걸린 논쟁이었다. 현종은 자신의 정통성에 대한 논쟁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1차 예송(1659, 기해예송)
선왕인 효종이 승하하여 상을 치르게 되었는데, 이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을지가 논쟁거리가 되었다.
- 서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다.
사대부의 예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장례를 치를 때는 장남이든 차남이든 다 기년복을 입도록 하는 경국대전, 대명률이 근거이다. - 남인은 참최복(3년)을 주장하였다.
효종이 장남은 아니지만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므로 의례에 규정된 3년을 똑같이 채우자는 것이다.
그 때까지 조선 왕실에서 아들을 위해 부모가 3년복을 입은 전례가 없었기도 했기에, 서인의 1년설이 채택되었다.
2차 예송(1674, 갑인예송)
선왕 효종의 부인이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사망하였다. 이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언제까지 입을지가 또다시 논쟁거리가 되었다. 경국대전은 이 경우 맏며느리 상에는 기년복(1년), 다른 며느리는 대공복(9개월)을 입도록 규정하였다. 경국대전은 1차 예송에서 채택된 서인의 1년복설의 근거였으므로, 같은 논리로 효종이 장자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서인에게 위기가 닥쳐왔다.
- 서인은 대공복(9개월)을 주장하였다.
- 남인은 기년복(1년)을 주장하였다.
이는 국조오례의에서 왕통을 인정하는 경우의 규정을 따른 것이다.
남인의 1년설이 채택되었으며, 숙종대 경신환국 전까지 남인 우세 정국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