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심은 광복군의 어머니로 불렸던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생애
1910년 3월 15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남만주 흥경현 왕청문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설립한 화흥중학 부설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통화현 반납배에 있는 한족회 소속의 민족주의 초등학교인 배달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고, 1930년에는 조선혁명당에 가입했다.
1931년에는 정의부가 설립한 유하현 삼원포에 있는 동명중학 부설 여자국민학교로 옮겨 근무했으나,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에는 유격대 및 한중연합 항일전에 참여하여 지하연락 공작을 맡았다. 이 무렵 김학규와 결혼하였다.
임시정부와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남경에 왔던 김학규와 오광심은 현 상황을 조선혁명당에 보고하기 위해 200여 쪽짜리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곳곳에 있는 일경 검문소를 피해 책자로 운반하기가 불가능하자 오광심은 이를 모두 외운 뒤 1934년 7월 15일 남경을 출발하여 만주 산곡 본부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혁명당은 오광심이 외운 보고서를 토대로 만주의 조선혁명당, 임시정부의 한국독립당, 윤세주의 조선의열단, 미주 대한인독립단이 합쳐서 1935년 민족혁명당이 탄생되었다. 김학규는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오광심은 부녀부 차장으로 선임되었다.
1939년 2월 고운기를 대장으로 한국광복전선의 청년공작대를 결성했는데 오광심, 지복영, 오희영, 오희옥, 방순희, 김병인, 김효숙, 신순호, 연미당, 조계림, 이국영 등 11명의 여성대원도 가입했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때도 지복영, 조순옥, 김정숙 등과 가입했다.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발간에 참여하여, 대원 확보를 위한 홍보 및 선전에 힘썼다. 1942년 남편 김학규 제3지대장과 함께 안휘성 부양을 거점으로 학도병으로 징집된 병사들이 탈출하면 합류시켰다. 해방이 된 뒤에도 상해에 남아 남편과 함께 3만여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한 귀국을 도왔다.
1948년 4월 남편과 귀국 후 1976년 4월 사망하였다. 서훈으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1][2]
기타
1935년에 200쪽짜리 보고서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싸그리 외워서, 문서를 일제에 들키지 않게 전달했다는 일화가 2021년에 KBS2 옥탑방 문제아들의 문제로 출제된 적 있어, 어마어마한 암기력의 소유자로도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