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프 드 구즈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7일 (화) 23:43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그러니 연단에 나설 권리도 가져야 한다.

여성은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올라갈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 10항

올랭프 드 구즈(프랑스어: Olympe de Gouges, 1748년 5월 7일 ~ 1793년 11월 3일)는 프랑스 최초의 페미니스트이자 여성 문인, 여성참정권 옹호론자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말하는 보편인권에 발맞춰 여성인권을 주창했으나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생애

올랭프 드 구즈는 1748년에 남서부 몽토방(Montauban, Quercy)에서 퐁피냥 후작인 장 자크 르프랑(Jean-Jacques Lefranc)과 세탁부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17세에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일찍 남편이 죽어 아들과 파리로 이주했다. 결혼은 단호히 거부한 대신 재정적 후원자 노릇을 해준 첫 애인과 사이좋게 지내며 세태를 꼬집는 소설과 희곡을 줄줄이 발표했다.

흑인 노예제에 반대하는 희곡이나 여성의 이혼권을 옹호하는 글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몇 희곡으로 파리에서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던 드 구즈는 대혁명기에 여러 플릿을 통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나선다. 파리에 머물며 희곡과 여권옹호 팜플렛을 출판하던 여성문인 올랭프 드 구즈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말하는 보편인권과 국민주권을 지지했으나 혁명이 내거는 평등권이 여성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에 환멸을 느껴 프랑스 대혁명 당시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빗대어 1791년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 (불어: 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 / 영어: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d of the Female Citizen)>을 발표했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격렬하게 활동하며 노예와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공화주의자로서 다소 방법론 적으로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후 로베스 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공포정치에서 자코뱅파의 여성의 참정권 제한에 저항하다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사상적 특성과 방법론

프랑스 혁명 당시 여성들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주요 봉기 때마다 거리를 점령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뒤에도 남성들은 여성을 ‘뜨개질이나 하는 소유물’로 여겼다. 모든 혁명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당대의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도 그 결실을 나눠 갖지 못했다. 여성이 정치적 발언을 하면 거리에서 옷을 벗겨 볼기를 치는 만행이 횡행했다.

1789년 8월, 프랑스 대혁명 와중에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프랑스어: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영어: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은 보편적 인권과 국민 주권을 사회의 기초로 삼음으로써 근대 정치의 장을 열었다. 하지만 이 선언에서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만이 권리의 주체로 상정됐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적었지만,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서양말에서 인간은 곧 남자와 같은 단어이며 남자를 뜻했다. 혁명은 철저하게 "형제들의 계약"이었다. 역사가 린 헌트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은 '남성'권 선언이었고, 3대 모토의 하나였던 박애는 '형제애'였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라는 자유·평등·박애 중 '박애'는 원래 서양말의 '형제애'(brotherhood)를 의역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도 결국 남자들의 자유와 그들 사이의 평등이었다. 여성의 사회 참여는 가정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정도로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계몽주의자들을 포함한 당대 남성들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프랑스 혁명은 여성의 시민권을 특히 결혼의 테두리 내에서만 인정함으로써 여성이 시민이 되기 위해선 남성의 존재에 의존해야 했다.

프랑스 최초의 헌법이 제정되는 1791년에 출간된 올랭프 드 구즈의 <여성과 시민의 권리선언(프랑스어: 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 영어: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d of the Female Citizen)>의 17개항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항들과 대응해 “인간Man”이라는 단어를 “여성과 남성”으로 바꾸어 기술했다. 이러한 작업으로 그녀는 기존의 권리선인이 여성을 배제하고 있으며, “남성” 홀로 인간성을 대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가장 잘 알려진 10항 “여성은 단두대에 올라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올라갈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는 여성이 법적 강제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법의 주체이자 법률제정의 능동적인 참여자도 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명하고 있다. 발언의 자유를 여성의 가장 고귀한 권리라고 말하는 제11조는 여성 시민이 어떠한 침해도 받지 않고, “나는 당신의 아이의 어머니다”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쓴다. 11항에서 “나는 당신의 아이의 어머니”임을 명확하게 선언한 것은 부모 양쪽이 아이에 대한 책임을 나누도록 할 뿐만 아니라, 남성들 또한 성적인 존재임 환기시킴으로써 순수하게 이성적인 존재라는 남성의 이미지를 깨뜨리고 있다.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재생산의 행위자로 드러냄으로써 재생산의 역할 때문에 여성은 수동적 시민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에 기초해 그녀는 새로운 “사회 계약”의 형태로 여성과 남성이 결합해야 한다는 전망을 제시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었다.

구즈는 또한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루소에 빗대 성적 평등에 바탕 둔 결혼을 주장한 <사회계약론>을 썼다. 구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도 마땅히 혁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시대상황에 비하면 확실히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과격파라도 분류되기는 어렵다. 방법면에 있어서 과격성이나 폭력을 거부하고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등의 보수성을 유지했다. 또한 1972년공화주의자로 전향하고 루이 16세의 처형해 반대하는 등 온건한 공화파의 정치성을 따랐다.

사회적 약자와 빈곤층의 보호를 주장하고 자본가를 혐오하며 사치품에 대한 높은 세금을 요구했다. 사형제와 노예제도를 폐지하자는 당시 혁명적 분위기 내에서도 앞서나가는 주장도 펼쳤다.

방법적으로 온건하였으나, 이혼을 허용하고 결혼제도를 폐지하며, 어머니의 성도 자녀에게 물려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 것은 명백히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당시 구즈의 요구는 파격적이다. 참정권을 요구하면서 이혼과 동거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성적 자유를 주장했다. 가부장권을 공격하면서 미혼모와 사생아의 권리도 옹호했다.

이후 혁명의 기조가 로베스 피에르를 중심으로 공포정치로 넘어간 후에도 그러한 소신을 꺾지 않고 로베스 피에르를 공격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지당한 활동이었음이, 당시 혁명은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나, '권리선언' 내에서 여성이 배제된, 즉, 배신당한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참정권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코뱅파의 연살에서 여성은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대중적인 여성 결사도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거론된다.

이에 구즈는 '공화국의 어머니'로서 가정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고 자코뱅파의 포고령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노예제도에 대한 생각

올랭프 드 구즈는 극작가로서 노예제를 직접적으로 고발한 작품인 '흑인 노예제'를 썼다.'흑인 노예제'는 구즈의 작가로서의 삶 전체를 조명하는 작품이다

'흑인 노예제'와 관련 글들에서 나타난 구즈의 정치 사회적 인식의 기저에 놓여있는 것이 계몽주의적 이상인 자유와 평등, 그리고 연대와 같은 당대의 정치적 개혁에 충실한 코드였다면, 더 심층부에 놓여 있는 정신은 소수의 권리에 대한 옹호라고 할 수 있다. 구즈는 자신의 경험을 투사하여 폭력으로 고통받는 소수자의 편에 서려고 했으며, 그 애결 방안도 어디까지나 비폭력적으로 달성해야 할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온건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구즈의 여성 시민의 건리 선언에서 그는 사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여성을 남성과 결합하여 공동체를 형성 가능케 하는 필수적 구성원으로 인식하는 대안적인 사회상을 제언하는데, 그는 이 선언문 후기에서도 노예제와 식민주의자들을 강하게 비난한다. 이러한 두 집단을 연관시켜 바라보는 시야 확대는 계몽과 혁명적 진보의 한 측면으로 인정할 수 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의 저자 브누아트 그루는 그녀를 일컬어 “성차별주의가 인종차별주의의 한 변종임을 이해하고 여성 박해와 흑인 노예제도에 동시에 맞서 일어선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썼다. 여성과 노예뿐이 아니다. 그녀는 노인과 어린이, 사생아, 실업자 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부당한 인식과 처우를 바꾸기 위해 싸웠다.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 1748~1793년)는 최초의 근대적 페미니스트 이자 혁명가이다.


프랑스 혁명기 1791년 9월 14일 올랭프 드 구즈는 남성들의 권위에 도전하여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라고 외쳤으나, 2년 후 단두대의 권리만을 누릴 수 있었다. 혁명의 나라, 세계 최초로 노예제를 철폐한 나라라는 프랑스의 여성들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150여 년이 지난 1944년에야 연단에 오를 권리(참정권)를 얻었다. 대혁명 200년이 지나고 심지어 성 해방을 외친 68혁명 이후로도 여성의 현실은 여전히 혁명을 필요로 한다는 자각과 반성이 일며, 올랭프 드 구즈는 사후 200여 년이 지나 1980년대 무렵부터 선구적 페미니스트로서 주목 받아 재해석되고 있다.

생애

혁명 이전의 삶

올랭프 드 구즈는 공식적으로는 1748년 5월 7일 몽토방(Montauban)의 부르주아로서 푸줏간 주인인 피에르 구즈(Pierre Gouze)와 실크 제조인 가문의 딸인 안 무이세(Anne Mouisset. 1737년 결혼) 사이에서 마리 구즈(Marie Gouze)라는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안 무이세는 극작가 장-자크 르프랑 드 퐁피냥(Jean-Jacques Lefranc de Pompignan)의 대녀(代女)로서 그와 정을 통하는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몽토방 지방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올랭프 드 구즈의 친부가 퐁피냥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올랭프 드 구즈 자신도 퐁피냥을 자신의 친부로 여겼으며, 퐁피냥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정당한 딸로 주장했다. 1765년 구즈는 나이 많고 돈 많은 파리의 요리 배달 업자 루이-이브 오브리(Louis-Yves Aubry)와 결혼해 몇 달 후 아들 피에르를 낳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20세의 나이로 남편을 잃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결혼 생활 경험에 실망한 구즈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에게 가톨릭 교회에서 서약하는 종교 결혼은 “신뢰와 사랑의 무덤”일 뿐이었다. 그녀는 관습을 거슬러 오브리 부인이라 불리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 중 하나인 올랭프를 택했으며 성인 Gouze를 Gouges로 살짝 변형해 덧붙였다. 귀족의 성 앞에 붙는 소사 드(de)를 선택한 것도 특이한 점이다.  

이후 1770년에 파리로 이주한 뒤, 해군 고위관료 출신이며 정부와 계약을 맺어 군 수송 업무를 담당하는 대규모 회사를 운영하던 자크 비에트릭스 로지에르(Jacques Biétrix de Rozières)를 만나 청혼은 거절했으나 프랑스 혁명 전까지 동거관계를 이어갔다. 여자에게 결혼이나 매춘 이외에 다른 선택이 존재하지 않았던 그 시대에 결혼을 거부한 것은 여성에 부과되는 계율의 첫 위반이었으며, 당시 연대기 작가들은 구즈에게 몸 파는 여자라는 평판을 서둘러 들씌웠다. 어쨌든구즈는 애인의 경제적 지원과 몽토방 지방의 넉넉한 부르주아 집안에서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어렵지 않게 파리 고급 사교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살롱을 출입하며 여러 지식인들과 교분을 나누고 세태를 꼬집는 소설과 희곡을 줄줄이 발표했다.

1782년에는 흑인 노예제에 반대하는 희곡 「흑인 노예제」를 발표했으며, 이 희곡은 1785년 6월 30일 「자모르와 미르자, 혹은 행복한 난파」라는 제목으로 코메디 프랑세즈의 레퍼토리에 포함됐다. 그러나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던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들은 이 작품을 주저하며 받아들였으며, 그 해 가을에 자신의 작품이 방치될 것을 염려한 구주는 자신이 차별받고 있다고 코메디 프랑세즈의 배우들에 대해 불평했다. 그 배우들 중 한 명인 플로랑스가 자신이 모욕당했다 느끼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자 브르퇴이 남작과 뒤라스 사령관은 구즈를 바스티유 감옥으로 보내고 작품을 코메디 프랑세즈의 레퍼토리에서 삭제했다. 구즈는 미셸 드 퀴비에르 등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이후로도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하는 『흑인에 대한 성찰』(1788)을 발표하고, 노예무역의 즉각적 폐지와 노예제의 점진적 폐지를 주장하던 정치클럽 "흑인의 벗 협회"에 가입했다. 1788년 발간한 희곡전집 『너그러운 인간』(L'homme généreux)에서는 고리 사채를 갚지 못해 수감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이나 빈민 문제 등을 다뤘다. 같은 해에는 정치 팸플릿 두 권을 발표했다. 첫 번째 『인민에게 보내는 편지』(Lettre au Peuple)는 ‘애국세’(impôt patriotique)의 제안을 담고 있으며, 두 번째 『인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저자의 애국적인 관심』(Remarques patriotiques, par l’auteur de la Lettre au Peuple)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광범위한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 1789년에 발표한 「인간의 원초적인 행복」(Le Bonheur primitif de l’homme)이라는 글에서는 이혼의 제도화, 종교결혼의 철폐와 결혼 당사자가 시민 계약에 서명함으로써 성립하는 결혼 제도의 제안, 혼외 출생한 자녀들의 권리 인정 등을 주장했다.  

혁명기의 삶

올랭프 드 구즈는 부정기적으로 팸플릿을 만들어 혁명 초기 국민의회의 각 정파 대표들과 애국 클럽들, 자신이 특별히 존경했던 미라보(Mirabeau), 라파예트(La Fayette), 네케르(Necker) 등의 인물들에게 보냈다. 구주의 모든 글 속에는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일들을 수행할 능력이 있으며 정치적, 사회적 토론과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있다. 1791년에는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이는 2년 전인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을 본딴 것으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을 담고 있다. 결국 구즈의 주장대로, 1792년 6월 3일 국가 행사의 하나인 ‘법의 축제’, 1792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함락 기념식에 여성들도 참석하게 되었다. 법의 축제는 에탕프(Étampes)에서 종자 부족으로 일어난 소요 때 군중에게 살해당한 시모노를 순직자로서 기린 의식이다. 5월에 국민의회가 시모노의 국장을 결정할 때 구즈는 축제에 여성 행진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으니, 여성의 의회 발언이라는 면에서 의의가 깊다. 구즈는 여성 행진을 빛내기 위해 기부 접수 창구를 열었고, 의식을 후원하는 데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초대했다. 왕비는 자신에게 여성 권리 선언을 헌정한 이 대담한 여성의 개성에 흥미가 동해 초대에 응했으며, 이후 구즈도 궁정을 방문했다. 이 접촉 후 구즈에게 왕실의 대의에 은밀히 묶어둘 수 있을 만한 연금이나 직책을 제공하려는 교섭이 왕비의 밀사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나, 미라보나 당통과 달리 구즈는 늘 이 제안을 물리쳤다.

정치적으로 올랭프 드 구즈는 파리 오퇴이(Auteui)의 한 문학 살롱에 드나들던 사람들의 견해에 정치적으로 공감했다. 그들은 입헌군주제의 원칙을 고수하던 사람들이었다. 1790년 구주는 오퇴이의 뷔 거리로 이사하여 1793년까지 머물면서, 콩도르세(Condorcet) 후작 부부와 가깝게 지냈고 지롱드파에도 가담했다. 또한 혁명적인 성향의 연극인 프랑수아 조세프 탈마(François-Joseph Talma), 정치인 겸 작가인 비예트(Charles de Villette) 후작 부부, 언론인 겸 드라마 작가인 루이-세바스티앙 메르시에(Louis-Sébastien Mercier), 그리고 왕권을 정지시킨 8월 10일 봉기 때 파리코뮌의 책임자가 된 미셸 드 퀴비에르(Michel de Cubières)등과 교류했다. 그들과 함께 구즈는 공화주의자가 되어 1791년 6월 21일 국왕 일가의 도피 사건이 일어났을 때 루이 16세를 배신자라고 하였으나, 오퇴이에 모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루이 16세의 처형에는 반대했다. 구즈는 1792년 12월 16일, 국민공회에 의해 고소된 루이 16세를 옹호하는 법률가 말제르브(Chrétien Guillaume de Lamoignon de Malesherbes)의 변론을 위해 나섰지만 그 요구는 기각되었다.

1793년 봄에 이르러 올랭프 드 구즈는 점점 강력해져 가는 산악파 독재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어 지롱드파의원 전원이 고발당하자, 1793년 6월 9일, 민주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 이 조치에 항의하는 서한을 국민공회 의장 앞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서한은 검열 때문에 전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산악당원들이 그녀를 '교정'하기로 결의하고 흔한 관행대로 대중 앞에서 그녀의 옷을 벗겨 볼기를 치려고 매복하는 것을 가게 뒷방에 피신해 간신히 피하기도 했다. 구즈는 계속해서 산악파와 로베스피에르를 비판하는 정치 책자와 벽보를 썼으나 상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지자 처음으로 정세와 거리를 둘 생각을 했다. 투렌에 작은 집 한 채를 샀으나 떠나기 전에 준비한 새 게시물「세 개의 투표함 또는 조국의 안녕」이 게시할 겨를도 없이 인쇄업자에게 고발되어 구즈는 93년 7월에 체포됐다. 이 글은 민중의 대표들에게 대립을 끝내라고 촉구하고 지방 자치와 연방정부를 주장하며 지롱드파의 지방분권주의에 호응하는 내용이었는데, 이것이 공화주의 원리를 부정하는 글을 단속하는 1793년 3월 29일자 법률(제1조. 국민의 대표를 분열시키고, 왕권의 복권 또는 국민주권에 위배되는 다른 권력의 복권을 획책하는 글을 쓰거나 인쇄한 것으로 입증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을 위반한 죄목으로 걸려 혁명재판소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수감 중이던 구즈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판결에 항의하는 두 개의 호소문을 작성하여 몰래 감옥 밖으로 보내 인쇄하는데 성공한다. 이 두 글 "혁명법정에 선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 au Tribunal révolutionnaire)와 "박해받는 애국자"(Une partriote persécutée)는 널리 배포되었다. 11월 2일 아침 법정에 소환된 구즈는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변호사도 없이 영리하고 능숙한 솜씨로 자신을 변호했으나, "‘유일하고 불가분한’ 국민공회 정부 이외의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그녀는 사형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임신 중이라고 말했다. 검사에 참여한 의사들이 확신을 하지 못하자 책임자 푸키에탱빌(Fouquier-Timville)은 그녀가 임신하지 않았다고 선언해 버렸다.(훗날 공포정치가 붕괴한 뒤, 푸키에탱빌은 임신한 여성들을 사형시킨 죄로 그 자신이 사형에 처해졌다.) 사형 집행이 확실시되자 구즈는 남은 짧은 시간을 이용해 아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썼으나 중간에 압수되고 말았다.   

이렇듯 구즈의 처형은 직접적으로는 정치적 이유이나, 산악파는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잃었다는 여성혐오적 비난 역시 가했다. 구즈의 처형 다음 날, 산악파 내 좌파인 에베르파에 속하며 파리 지역 코뮌의 검사인 피에르 가스파르 쇼메트(Pierre Gaspard Chaumette)는 “정치를 하겠다며 범죄를 저지른 뻔뻔한 여자, 올랭프 드 구주를 상기하십시오. 그녀와 같은 모든 존재들은 법의 복수의 철퇴를 맞고 다 사라졌습니다!”라고 했고, 덧붙여 자파 여성 당원들을 향해 “여러분들도 저런 존재들을 흉내 내고 싶습니까? 아니죠, 여러분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르를 때 비로소 합당한 대우를 받게 될 겁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존중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성 여러분이 스스로를 존중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했다. 같은 날 <공안지>는 "여성들이여, 공화주의자가 되길 원하는가? 그대들의 남편들과 아이들이 제 권리를 행사하도록 환기하는 법률을 사랑하거 따르고 배우라. 그들이 조국을 위해 할 수 있을 눈부신 행동들을 자랑스러워 하라. 소박한 옷차림을 하고, 살림살이에 힘쓰라. 결코 말하려는 욕망을 품고 대중 집회에 끼어들지 말라."라고 썼다. <르 모니퇴르 위니베르셀>은 그 무렵에 처형당한 세 여성 마리 앙투아네트, 올랭프 드 구즈, 롤랑 부인을, 여성이라는 점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데도 한데 묶어 자기 성별의 덕성을 망각했다며 모욕했다.  

올랭프 드 구즈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이어 단두대에 오른 두 번째 여성이며 닷새 후 롤랑 부인이 세 번째로 그 뒤를 이었다. 사형을 참관한 경찰관과 Le Journal de Perlet 신문을 포함한 다양한 증언에 따르면, 사형대에 오른 구즈의 모습은 용감하고 근엄했으며,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 “조국의 아이들이 내 죽음에 대해 복수할 것”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상

당시 구즈의 요구는 파격적이다. 참정권을 요구하면서 이혼과 동거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고 성적 자유를 주장했다. 가부장권을 공격하면서 미혼모와 사생아의 권리도 옹호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의 저자 브누아트 그루는 그녀를 일컬어 “성차별주의가 인종차별주의의 한 변종임을 이해하고 여성 박해와 흑인 노예제도에 동시에 맞서 일어선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썼다. 여성과 노예뿐이 아니다. 그녀는 노인과 어린이, 사생아, 실업자 등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부당한 인식과 처우를 바꾸기 위해 싸웠다.

페미니즘

프랑스 혁명기의 여성혐오

프랑스 혁명 당시 여성들은 혁명의 주요 봉기 때마다 거리를 점령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뒤에도 남성들은 여성을 ‘뜨개질이나 하는 소유물’로 여겼다. 모든 혁명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당대의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도 그 결실을 나눠 갖지 못했다. 여성이 정치적 발언을 하면 거리에서 옷을 벗겨 볼기를 치는 만행이 횡행했다.

1790년에는 영국의 선구적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가 『여성의 권리 옹호』를 출간했으나 프랑스와 미국에까지 확산돼 떠들썩한 반향을 일으킨 동시에 대대적인 지탄에 부딪혔다. 같은 해 독일에서도 테오도르 판 히펠이 『여성의 시민권 향상에 관한 에세이』를 출간했다. 프랑스에서는 역시 같은 해 7월에 프랑스 혁명 지도자 중 유일한 페미니스트 콩도르세가 「여성 시민권 인정에 대하여」라는 역사적 선언문을 발표해 여성 참정권과 종교, 피부색, 성별에 관계없는 모든 개인의 동일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동료들의 적의 앞에 곧 후퇴해야 했고 이후 『대중 교화 계획』에서 더는 여성 문제를 언급하지 못했다. 이런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지롱드파 인사들이 모이는 살롱을 운영하며 혁명에서 유일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이라 할 롤랑 부인(Madame Roland; Jeanne Marie ou Manon Phlipon Roland. 1754~1793)도 "우리는 오직 마음의 제국만을 원하고, 그대들의 마음 속 권좌만을 원합니다."라며 남자들을 안심시키는 편을 택했으나 후일 지롱드파 숙청 과정에서 단두대로 가야 했다.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대혁명 와중에 발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은 보편적 인권과 국민 주권을 사회의 기초로 삼음으로써 근대 정치의 장을 열었다. 하지만 이 선언에서 무산자와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만이 권리의 주체로 상정됐다. 역사가 린 헌트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은 ‘남성’권 선언이었고, 3대 모토의 하나였던 박애는 ‘형제애’였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라는 자유·평등·박애 중 ‘박애’는 원래 서양말의 ‘형제애’(brotherhood)를 의역한 것이다. 자유와 평등도 결국 남자들의 자유와 그들 사이의 평등이었다. 여성의 사회 참여는 가정에서 자녀를 교육하는 정도로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 계몽주의자들을 포함한 당대 남성들의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났다”고 적었지만,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서양말에서 인간은 곧 남자와 같은 단어이며 남자를 뜻했다. 혁명은 철저하게 "형제들의 계약”이었다.

이후 헌법 본문 작성 과정에서 미숙련 노동자의 평균 임금 3일치 이상의 직접세를 납부하는 유산자 남성 시민만이 능동시민(citoyen actif)으로서 참정권을 가졌고, 나머지 무산자 남성과 모든 여성은 시민권은 가지나 공권력에의 참여권을 갖지 못하는 수동시민(citoyen passif)이 됐다. 심지어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왕권이 정지된 후 9월, 공화국 의회를 구성하는 총선에서부터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의 구분이 철폐되어 모든 성인 남성이 참정권을 갖게 됐을 때도 모든 여성은 배제되었다. 클레르 라콩브(Claire Lacombe, 1765~?)와 폴린 레옹(Pauline Leon, 1768~1838)을 중심으로 한 혁명적 공화주의 여성시민 협회 등 파리 상퀼로트 여성들이 지롱드파와 산악파의 투쟁 과정에서 산악파를 적극 지지하여 산악파의 승리에 기여했으나, 산악파 혁명정부는 중앙집권화를 위해 상퀼로트 운동을 탄압했으며 다른 민중클럽들과 함께 혁명적 공화주의 여성시민 협회를 해체시켰고(1793년 10월 20일) 1793년 10월 30일에는 가정과 자녀를 돌보는 여성의 자연적 소명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성클럽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테르미도르 반동(1794년 7월 27일)으로 산악파 정권이 몰락한 후 기근에 시달리고 정치적 반동에 반발한 파리 상퀼로트들이 일으킨 제르미날 봉기(1795년 4월 1일)와 프레리알 봉기(1795년 5월 20일-22일)가 일어났다 곧 진압당했는데, 이 봉기에서 여성들의 선동적 역할에 위협을 느낀 국민공회는 여성의 의회 방청과 모든 정치적 모임에의 참여를 금지하는 법령을 5월 23일에 제정했다. 1791년 헌법은 결혼을 '하나의 시민적 계약'으로 정의하고 1792년 9월 20-25일의 두 법령은 배우자 사이의 균형을 수립하며 시민들의 호적상의 신분과 이혼의 동기 및 방식을 결정하는 등 프랑스 혁명은 여성의 민법적 권리를 일부 신장시켰으나, 혁명 지도자들은 여성을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한정 지으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탄압했다. 혁명이 끝나고 1804년의 민법전은 이 민법적 권리마저 후퇴시켰다.  

올랭프 드 구즈의 페미니즘

올랭프 드 구즈는 “나의 재능은 평범하고 능력은 보잘것없지만 나는 사물의 상태를 멀리서 조망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겪은 불평등에 입각하여 여성의 운명을 개탄하고 여성을 전제적으로 지배하려는 남성들의 여성 차별주의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구즈는 ‘너무도 불행한 여성, 끊임없이 종속된 여성, 고통으로 너무나 불행한 여성’이라는 의식의 토대 위에서 주저 없이 자신의 ‘환상적 확신’을 펼쳐나갔다. “여성은 현실적으로 공부하지 않고도 선천적으로 다 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 아름다운 성은 여성을 권리상으로 또는 통찰력과 정치면에서 남성보다 우월하게 만든다. 여성들은 연구도, 깊은 인식도 없이 이런 장점을 겸비하였다.”  

1789년에 발표한 「인간의 원초적인 행복」(Le Bonheur primitif de l’homme)이라는 글에서 올랭프 드 구즈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고, 아름답고, 존중받을 만한하다”는 루소의 발언을 인용하며, 혁신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사생아인 그녀는 스스로를 ‘자연의 자식’이라 칭했다. 계몽사상과 이성에서 영감을 얻은 구주는 솔직담백하고 혁신적인 사고의 소유자로서 독창적인 사상을 드러냈다. 예컨대, 구즈는 이혼의 제도화를 처음으로 요구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이는 구즈가 깊이 참여한 지롱드당의 주도로 받아들여진다. 또한 종교결혼을 철폐하고 결혼 당사자가 시민 계약에 서명함으로써 성립하는 결혼제도를 제안했으며 ‘특별한 애정관계’로 출생한 자식들도 신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녀는 자유롭게 부권(父權)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혼외 출생한 아이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명적인 요구였다. 그리고 여성들이 일반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는 것에 분노하여 어머니와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랭프 드 구즈의 모든 글 속에는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일들을 수행할 능력이 있으며 정치적․사회적 토론과 활동에도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그 중에서도 구즈의 페미니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은 프랑스 최초의 헌법이 제정된 해인 1791년의 9월 14일에 발표한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a femme et de la citoyenne)일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을 패러디하는 이 선언은 인권선언이 보장하는 것은 남성만의 권리임을 폭로하며 여성의 권리를 높이 외쳤다. 남성에게 부여된 모든 권리와 자유가 여성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혁명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다시 서술하는 방식으로 씌어진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우선 드 구즈는 인간(남성)으로만 한정되어 있는 주체에 여성을 부가함으로써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보충한다. 예를 들어,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제10조는 "누구도 자신의 의견 표명이 법이 규정한 공공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설사 그것이 종교적인 것일지라도 그 의견 때문에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 된다."인데,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 선언〉의 제10조는 “누구도 자신의 기본적 의견에 대해 침묵할 것을 강요받아선 안된다.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를 가졌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이다. 하지만 그녀의 개입은 보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발언의 자유를 여성의 가장 고귀한 권리라고 말하는 제11조는 여성 시민이 어떠한 침해도 받지 않고, “나는 당신의 아이의 어머니다”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발언의 자유는 아이에 대해 부모 모두가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남성(인간)이 순수한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적 존재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 허구적 보편성을 파헤친다. 또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재생산의 행위자로 드러냄으로써 재생산의 역할 때문에 여성은 수동적 시민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에 기초해 그녀는 새로운 “사회 계약”의 형태로 여성과 남성이 결합해야 한다는 전망을 제시하는 데로 나아갈 수 있었다.


구즈는 평등의 권리가 여성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인권선언문’에 빗대 ‘여성권선언문’을 썼고,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루소에 빗대 성적 평등에 바탕 둔 결혼을 주장한 <사회계약론>을 썼다.


구즈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신도 마땅히 혁명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이여, 깨어나라! 인간 이성의 각성이 온 우주를 뒤흔들고 있으니, 네 권리를 깨달으라!”, "여성은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여성은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평등하게 가져야 한다” 등의 말을 남긴 그녀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공격했다는 이유로 왕정복권 선동죄를 뒤집어쓰고 형장에 올라 기요틴으로 처형당했다.

흑인 인권

당시는 루이 14세가 제정해 식민지의 흑인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했던 '흑인법'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궁정 귀족의 가문들이 혁명 전 프랑스 대외 무역의 절반을 차지하던 식민지 산물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던 때였다. 이런 시대에 올랭프 드 구즈는 갖가지 비난과 협박에 시달리면서도 흑인 노예제를 비판하는 희곡과 논설을 발표했다.

올랭프 드 구즈에게 처음으로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식민지 노예제의 끔찍함을 고발하는 「흑인 노예제」였다. 1782년 구즈는 백인 아버지와 옛 흑인 노예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생조르주(Saint-Georges)가 운영하는 연극단체가

위치해 있던 몽테송(Montesson) 후작부인 집에서 이 희곡작품 발표회를 가졌다. 이를 계기로, 이 작품은 계몽주의 사상가이자 극작가이며 오를레앙 공작의 부인인 몽테송 후작부인의 배려로 코메디 프랑세즈의 레퍼토리에 포함됐으며 1785년 6월 30일 「자모르와 미르자, 혹은 행복한 난파」라는 제목으로 등재됐다. 구즈는 이 작품을 통해 살인을 저지른 한 농장의 흑인 관리인 자모르의 처형 문제를 이슈화했다. 이 작품으로 인해 구즈는 바스티유 감옥에 투옥되는 고초까지 겪어야 했다. 4년 후 혁명이 일어나며 구즈의 노예제 고발 작품도 다시 빛을 보았으나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는 강력히 옹호되었으며 구즈는 여전히 비난과 압력, 때로는 협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구즈는 굴하지 않고 비슷한 주제로 새로운 희곡 「흑인노예 시장」(1790)을 썼다.  

1788년에 구즈는 『흑인에 대한 성찰』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흑인 인권을 옹호하던 단채로서 미라보와 라파예트 등 이후 혁명의 지도자가 될 거물들이 활동하던 "흑인의 벗 협회"(Société des amis des Noirs)는 구즈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주교 그레구아르도 자신이 작성한 불행한 흑인들을 옹호한 용기 있는 사람들 명단에서 노예제 폐지론자로서 구즈의 이름을 언급했다. 올랭프 드 구즈는 혁명 전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항상 흑인들의 가엾은 운명에 관심을 가져왔다. 사람들에게 그들에 대해 질문을 해 보아도 내 의문과 고민에 만족스러운 답을 얻지 못했다. 그들은 흑인들을 하늘로부터 저주 받은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그들을 끔찍한 노예 상태로 몰아넣은 것이 강제와 편견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 일에 자연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직 불의와 백인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이런 일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빈곤 문제 및 민생 문제

올랭프 드 구즈는 민중의 빈곤과 고통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노인과 아이들의 보호를 요구했다. 또한 투기업자와 매점자를 혐오하고, 부정한 재산은 민중이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는 조국에 수치이며 불명예라고 주장하고, 사치품에 대

한 관세를 요구하였다. 1788년에 발간한 희곡전집 『너그러운 인간』(L'homme généreux)에서는 고리 사채를 갚지 못해 수감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이나 빈민 문제 등을 다뤘다.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 『수도원 혹은 강제된 소망』이 1791년과 1792년 파리와 지방에서 공연되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인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저자의 애국적인 관심』(1789)에서는 사회 사업, 실업자들을 위한 국영 작업장, 노인들을 위한 수용 시설, 노동자 자녀를 위한 집합소를 제안했으며,  실업자와 노인과 고아를 수용하는 생드니 수용소의 열악한 여건을 고발했고, 병원 소독 문재와 출산시 비참한 위생 문제도 언급했다. 1789년 한 해 동안 구즈는 다양하고 참신란 문제들을 다룬 열두 편 이상의 책자를 게시하거나 출간했다. 이 글들에서 그녀는 거리의 청결, 도시에서 유통되는 육류에 대한 감독, 사제들의 독신 생활, 버림 받은 아이들과 사생아들의 지위를 말했다.  

역사적 재조명

올랭프 드 구주는 생전에는 여성혐오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사후에는 몰이해와 이데올로기적 맹종에 의해 평가 절하됐다. 로베스피에르 연구학회가 여성 특집으로 간행한 『프랑스혁명사 연보』(2006)에 그녀에 대한 심층적이고 진지한 연구결과가 실렸을 뿐이었다. 신빙성 있는 사료의 부재로 인해 구즈는 사후에도 오랜 기간 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심지어 페미니즘적 사상조류에 의해서도 소외되어 왔다.  

단편적인 지식과 이미지로 밖에 알려져 있지 않던 올랭프 드 구주가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다. 이는 68혁명이 기존 질서 타파와 여성해방을 주창했지만, 여전히 여성의 현실은 혁명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자각과 반성에서 기인한다. 주로 미국, 일본, 독일 등지에서 그녀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구즈는 18세기 말 혁명적

페미니즘을 설파한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처음, 프랑스에서 구즈에 대한 연구는 주로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구즈가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 계기는 극작가 겸 언론인 올리비에 블랑(Olivier Blanc)이 그녀가 쓴 원고들을 발굴해, 이를 토대로 쓴 전기가 출판되고(1981년), 최근 프랑스 혁명 200백 주년 기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구주에 관 글들이 출판되면서였다. 학계에서도 그녀에 대한 논문이 활발히 발표되기 시작했다. 가령, 미국의 가브리엘 버디어(Gabrielle Verdier),독일의 지젤라 틸레-크노블로크(Gisela Thiele-Knobloch)는 구주가 생전에 쓴 노예문제(Zamore et Mirza), 이혼문제(Nécessité du divorce), 베일 착용 강요문제(Le Couvent) 등을 다룬 작품들에 주목하였다. 학계의 구즈 재평가작업과 함께, 1989년 10월부터 여성 사학자 카트린 마랑-푸케(Catherine Marand-Fouquet)의 주도로 프랑스 대통령을 상대로 그녀의 묘를 팡테옹으로 옮겨달라는 청원운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은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1993년 11월, 카트린 마랑-푸케는 파리의 팡테옹 앞에서 올랭프 드 구주 사형 200주년을 기념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시위는 또한 남녀평등을 요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물론, 구주에 대한 재평가 작업은 헛되지 않았다. 파리 3구 구청을 비롯한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은 올랭프 드 구주를 기리기 위해 학교나 거리, 광장의 이름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 국토행정관 과정 프로그램(promotion des élèves administrateur sterritoriaux) 11기(2003~2005)의 명칭, 툴루즈 시앙스포(Sciences-Po)의 2006학년도 입학 기수 명칭으로 올랭프 드 구주의 이름이 사용됐다. 내무부 건물과 라몽타뉴의 미디어센터에도 올랭프 드 구주의 이름을 딴 홀이 있다. 투르 대학병원 산부인과, 2006년 10월에는 몽토방 시립 극장, 시내의 한 중학교도 그녀의 이름을 얻게 됐다. 파리 11구, 로케트(Roquette) 여성 감옥 자리에 세워진 공연센터도 올랭프 드 구주라고 명명되었다. 1989년에는 한국의 백남준이 『전자 요정 속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 in La fée électronique) 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다. 파리 시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이 작품을 사들였으며 현재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렌의 시앙스-포 2010년 입학 기수 명칭에도 그녀의 이름이 사용됐고 투르 대학병원의 산부인과 관련 부서가 모두 모여 있는 건물 전체가 그녀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References

이성형, 역사는 왜 보들레르의 연인 잔 뒤발을 지웠나, 한겨레, 2016년 1월 6일.

동정민, [글로벌 북카페]페미니스트 대모가 쓴 최초 페미니스트의 삶. 동아, 2016년 7월 25일.

조한욱, [조한욱의 서양사람(史覽)] 형장에 설 권리. 한겨레, 2011년 4월 13일.

김재희, 형제애, 구주에게 물어봐. 한겨레21, 2005년 8월 12일.

안효상, 프랑스혁명 인권선언서 빠진 여성의 인권 주창한 드 구즈. 한겨레, 2004년 3월 8일.

류은숙, [문헌으로 인권읽기]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 올랭프 드 구즈(Olympe de Gouges).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2005년 3월 28일.

성일권, "올랭프 드 구주의 말과 글, 그리고 혁명적 페미니즘" 프랑스 문화연구  제21집 (2010): 265-289.

이세희, and 현재열, "프랑스혁명과 여성의 역할." 프랑스사 연구  7 (2002): 5-48.

브누아트 그루,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백선희 역(마음산책, 2014).

링크

출처

  • 올랭프 드 구즈의 노예제 인식(Olympe de gouges's recognition of slavery), 2005, 김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