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리 마타이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12:57
왕가리 무타 마타이
Wangari Muta Maathai
왕가리 마타이 (2001년)
국적케냐 케냐
출생1940년 4월 1일
영국령 케냐 니에리
사망2011년 9월 25일 ()
케냐 나이로비
학력마운트 세인트 스콜라스티카
피츠버그 대학교 수의학과
직업정치인, 대학 교수, 환경운동가
경력前 미국 예일 대학교 교수
前 나이로비 대학교 교수
종교로마 가톨릭(천주교)
정당무소속

왕가리 마타이(Wangari Maathai, 1940년 4월 1일 ~ 2011년 9월 25일)는 케냐의 여성운동 및 환경 운동가이다.[1]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해 아프리카의 사회, 경제, 문화적 발전을 촉진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Photo Credit: Martin Rowe[2]

왕가리 마타이는 그린벨트운동을 이끌어가는 인물로서 활동하였으며, 무장해제관련 유엔 사무총장 자문위원회 위원, 제인 구달 연구소, 여성환경개발기구, 케냐 국립여성심의회 등 여러 단체에서 인권과 환경 문제에 몸담고 있다가 2011년에 사망하였다.

그가 평생 심은 나무는 약 4,500만 그루에 달하는데, 그가 죽은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무 심기 운동을 지속하며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생애

유년기

마타이는 1940년 4월 1일 케냐 중부 고원에 위치한 니에리 구역 카누웅구(영어: Kanungu)의 리테 마을에서 여섯 아이들 중 둘째 아이이자 첫 딸로 태어났다. 당시 케냐는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그의 가족은 그 곳에서 여러 세대를 거쳐서 살았다. 그는 케냐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민족인 키쿠유 족의 딸로 태어났다. 1943년경 마타이의 가족은 리테 마을에 있는 백인 소유 농장으로 이주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나쿠루 마을 근처에서 일자리를 마련하였다. 1947년 후반 그의 아버지가 일하던 곳에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만 남겨둔 채 그의 어머니와 함께 다시 리테 마을로 돌아와서 학교에 입학했다. 8세 때 그는 자신의 두 오빠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14세 때 마타이는 니에리에서 마트하리 가톨릭 선교회가 운영하는 세인트 세실리아의 중학교로 입학했으며 이 곳에서 4년을 공부하였다. 이 기간 동안 마타이는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로마 가톨릭신앙을 갖게 되면서 기독교식 이름인 메어리 조세핀으로 불렸다. 이 곳에서 공부를 하는 동안 마타이는 계속된 마우마우 폭동에서 피할 수 있었으나, 그의 어머니는 리테 수용소에 강제로 이주하게 되었다. 1956년에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케냐 리무루에 있던 유일한 여학교이자 가톨릭 여자 고등학교인 로레토 여자 고등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았으며 195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동아프리카 대학교에 진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학문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 지배가 끝이 다가오자 톰 엠보야를 비롯한 케냐의 정치인은 유망한 학생들에게 서구식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미국의 상원 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도 이러한 정책을 지지했고 마타이는 약 300명의 장학생 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택되어 1960년 9월 미국에서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 후 마타이는 1964년 미국 캔자스주 마운트 세인트 스콜라스티카 대학[주 1]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66년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생물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독일 기센과 뮌헨 대학에서 2년간 수학한 뒤, 1971년 나이로비 대학에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76년에 첫 여성 교수가 되었다. 왕가리 마타이의 박사 학위는 동아프리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받은 것이었다.

그는 1971년에 나이로비 대학의 해부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후에 학장으로 임명된다. 그는 2002년 예일 대학교의 지속 가능한 삼림을 위한 국제 학회에 객원 교수(Visiting Fellow) 초청 자격을 받아들였다.

환경운동과 여성운동

1975년 세계여성의 해에 그는 멕시코에서 열린 제1차 세계여성대회에 참석했다. 여러 여성단체의 대표자로서 1976년 국립여성심의회의 회원이 되었고 거기서 환경보호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1977년 나이로비 대학의 교수가 됨으로써 동아프리카 첫 여성 교수라는 기록을 남기고, 그해 수의해부학과의 학과장이 된다.

마타이는 1977년 사막화 방지를 위해 전국에 걸쳐 1,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그린 벨트 운동[주 2]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으로 그는 "나무 여성"이라는 애정 어린 별명을 갖게 됐다. 1977년부터 그린벨트 운동을 시작하였다. 숲을 지킴으로써 사막화를 방지하고 아프리카의 가난에서 벗어나자는 이 운동은 나중에 아프리카 전역에 3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기에 이른다.

왕가리 마타이가 케냐에 번지고 있는 폐해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자고 1977년 처음으로 제안했을 때 여성심의회는 매우 망설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뿌리를 먹을 수 있는 카사바감자 같은 전통적인 식품들 대신 , 커피, 설탕처럼 세계시장에서 팔리는 식품들을 더 많이 경작하고 있었다. 이런 수확물을 판 돈으로 생필품을 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돈은 부족했고 부패한 국가의 잘못된 곡물수매정책으로 전혀 돈을 받지 못하거나 일부만 비정기적으로 받고 있는 상태였다.

나무의 부족이 땔감의 부족으로, 땔감의 부족이 음식을 충분히 익히지 못하여 오는 굶주림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숲을 다시 살리는 일이 여성운동에 적합한 일은 아니라는 의견이 있었다. 환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더구나 숲 살리기 운동은 국가 단위의 삼림관리국보다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여성들과의 협업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어 나무 심기 운동가들과 정부 사이에 긴장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9년 그린벨트 운동의 조정자인 왕가리 마타이가 연구를 위한 미국 체류를 마치고 케냐로 다시 돌아왔을 때 여성심의회는 장소를 옮긴 후였다. 그린벨트 운동의 종묘재배원은 쓰레기장 위에 있었다. 1981년부터 왕가리 마타이는 국립여성심의회의 의장직을 맡았다. 정부는 왕가리가 의장으로 선출된 이래 국립여성심의회의 재정적 지원을 멈추었고, 왕가리가 1987년 정관에 따라 의장직을 그만둔 후에도 정부의 재정적 지원은 돌아오지 않았다.

1992년, 그린벨트 운동은 왕가리 마타이가 나이로비의 우후루 공원에 수백만 유로가 드는 건축 프로젝트를 방해한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사무실을 내놓아야 했다. 수년이 지난 후에야 지원자들이 등장해 킬리마니에 있는 지금의 본부를 구입하였고, 그때가 되기까기 그린벨트 운동은 케냐에 2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있었다.


결혼과 이혼

1967년 므왕기와 결혼했다. 남편 므왕기는 라이베리아에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했고 왕가리처럼 서구에서 대학교육을 받았으며 1974년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와의 사이에서 와웨루, 완지라, 무타라는 세 아이를 낳았다.

1980년대에는 남편이 그가 너무 과단적이고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혼 소송을 냈다. 그가 법정에 제시한 이혼소송의 이유는 왕가리가 그의 의회 동료와 수차례에 걸쳐 관계를 가졌으며, 이로 인해 자신은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병들었다는 것이었다. 왕가리가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는 데 반해 므왕기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므왕기의 정신적 고통의 증거로 채택되었다. 법원은 남편의 이혼 소송을 받아들였다.

1980년 이혼 절차가 끝난 후, 왕가리는 재혼하지 않고 홀로 세 아이들을 키웠다.

정계 활동

그는 1997년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정당은 그의 입후보를 철회하였다. 그는 다니엘 아랍 모이 정권 때 여러 차례의 수감 생활을 보냈으며 공정한 선거의 요구와 부패 종식, 인종 정치 청산을 요구하였다. 그는 모이 대통령과 사업 제휴를 맺은 회사들이 60층 규모의 케냐 타임스 미디어 트러스트 사업 복합 단지 건설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마침내 나이로비의 우후루 공원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한다. 마타이는 음와이 키바키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2002년 총선에서 의원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으며 2003년부터 2011년까지 환경부, 천연 자원부, 야생 동물부 차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2003년에 케냐 마진기라 녹색당을 창당했다.

2002년 케냐에서 독재정권이 물러난 뒤에 왕가리 마타이는 환경, 천연자원, 야생생물부 차관으로 임명되었고 200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상훈

왕가리 마타이는 1983년부터 여성, 인권, 환경과 관련된 30여 개의 상을 수상했다. 1984년 44세로 대안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올바른 생활상을, 1986년 더 나은 세계 상을, 1989년 그해의 세계 여성상을, 1990년 오페라무스 훈장을, 1991년 골드만 환경상과 아프리카상을, 1993년 영국 에든버러메달을, 1994년 네덜란드 왕가에서 환경운동가에게 주는 골든 아크 상을, 2001년 줄리에트 홀리스터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예일대학 등에서 명예박사 학위들을 수여받기도 했다.

출처

부연 설명

  1. 현재의 베네딕트 대학
  2. 민중 환경 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