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최근 편집: 2020년 10월 30일 (금) 02:33

고려 태조(877년 1월 31일(음력 1월 14일) ~ 943년 7월 4일(음력 5월 29일))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국왕 (재위 :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약천(若天),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고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송악의 호족 왕융과 그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그후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들을 점령해 태봉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이후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했는데, 903년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했으며, 906년 상주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들과 나주를 재점령하였다. 나주와 주변 지역들을 점령해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후백제와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이러한 뛰어난 전과들을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 등의 무장들과 호족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이후 후백제의 견훤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이 경주를 유린, 약탈하자 출병했으나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했고, 한동안 수세에 몰렸다가 3년후 고창 병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대파하고 마침내 패권을 잡았다. 이후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왔고, 이후 다시 신라 경순왕의 자발적인 투항이 이어졌으며, 왕건은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 와 공주 왕씨 를 혼인시키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 사심관 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1년후인 936년 9월에 9만에 가까운 대군을 일으켜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정책적인 면에서는 926년부터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 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 융화적인 정책들을 펼쳤다.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