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를 만들자(1993)

최근 편집: 2019년 6월 9일 (일) 01:48

김갑송: 1965년에 태어나 1984년때 미국으로 옴. 현재 워싱턴 디시 「한겨레미주홍보윈」 연구윈이며 지역 동포신문 r코리아 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 일한다.

어느 사회이건 남다르고 특수한 문화를 가진 다. 문화는 한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가 되비쳐 드러나는 것이지만 거꾸로 사회를 이끌어 나자 는 큰 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포사회가 어떻게, 어떤 문화를 가져야 할 지를 생각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오늘 재미동포사회의 문화는 텅 빈 깡통과 같으면서도 갈갈이 찢겨지고 나뉘어져 있다 미 국•일본문화에 찌든 오늘의 조국문화와 엄청난 자본의 힘으로 하루하루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적 시는 미국문화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문화는 갈 길을 몰라 헤매고 있다 또한 1세와 2세의 문화 가 갈라지고, 생활과 문화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따로 노는 둥 우리 문화는 병들어 가고 있다. 이 같이 엉켜있는 문제들을 풀어내는 일과 함께 참 된 동포사회 문화, 올바른 우리문화를 새로이 만 들고 다듬는 일감이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뿌리를 심는 일부터 하자

우리문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는 일부터 해야 한다. 1세들의 무관심과 어려운 생활조건이 빚어낸 2세들의 텅 빈 민족문화의식은 물론이고, 1세들 또한 민족 문 화의 냄새도 제대로 맡아보지 못하고 자라온 탓 에 동포사회는 민족문화의 뿌리가 뽑혀 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조국에서 지난 70년대 초부터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민족문화운동의 싹이 이 곳 미국땅 동포사회에도 전해지고 있다 그 결과• 곳곳에서 문화 운동 패들이 민족교육운동과 어깨를 함께 걸고 적게나마 그 씨앗을 뿌려왔다. 나 성의 ‘한누리’, 시차고의 ‘일과 놀이’, 뉴욕의 ‘비나리’ 둥 민족 문화 때들이 척박한 미국땅에 우리 문화의 맛을 보이는 노력을 펼쳐왔다.

동포사회의 민족문화운동은 이제 풍물을 두 드리고, 민요를 부르는 걸음마 단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민족문화의 뿌리를 교육하는 민족 문 화 교육운동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문화교육을 포함하는 민족교육이 동포사회 문화를 살리는 단 하나의 길임을 알고 민족의 바른 역사와 문 화를 배우고 찾아내는 일을 조국동포들과 힘을 합해 펼쳐야 한다. 잊었던 뿌리를 찾는 일은 결코 ‘누워서 떡 먹기’일 수 없다. 우리 것이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아픈 현실을 바로 알고 이 같은 우리문화의 처지를 되새기며 우리 자식들이 겪을 텅빈 가슴의 쓸쓸함을 참된 민족문화의 알맹이로 채워주리라 다짐하며 힘든 뿌리 찾기의 길로 땀 흘리며 뛰어가야 한다. 민족문화사 교실을 열고, 문화강습회를 통해 우리의 핏속에 녹아 숨 어 있는 민족의 얼과 가락, 숨결과 홍을 깊은 바 닷속 진주를 따듯이 뽑아 올리는 ‘민족문화 뿌 리찾기 운동’의 가닥이 잡힐 때, 그리고 곧 이어 서 우리의 뿌리에 대한 믿음과 자랑스러움이 모 든 동포들 가슴에 알알이 맺힐 때, 우리는 이제 이 터전 위에 ‘동포사회 문화’를 세우고 다듬어 가자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뿌리를 알리는 일은 무척이나 전문적 인 일이다 무턱대고 장고를 두드린다고, 민요를 불러 젖힌다고 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재미동포 민족문화운동은 이제 전문성의 길로 내달려야 한다. 그리고 민족문화에 대한 깊 은 이해와 넓은 인식을 갖춘 전문 문화운동가를 키워내야만 한다 이와 같은 일은 한두 사람의 땀 으로 이룰 수 없다. 민족문화운동에 대한 동포사 회 모두의 많은 도움이 있어야 한다.

올바른 생활문화의 가닥을 잡자

둘째로, 우리문화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생 활 문화의 가닥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 문화는 크게 생활문화와 예술문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한 사회의 문화에 대한 평가는 겉으로 빛나게 드러나는 문화예술 행위에서 보다는 잔잔히 밑 에 깔려 있으면서도 사회생활의 모든 갈래를 감 싸안는 생활문화에 더욱 무게가 가야 한다 결국 문화예술이란 생활문화의 집약된 표현일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생활문화란 오직 생활 속의 세심한 노력과 고민을 통해 의식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생 활 문화의 한 유형으로 우리는 공동체 문화를 이 야기한다. 그러나 오늘날 복잡하기 그지 없는 사 회 구조 속에서 과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공동체 문화를 실현하는 것인지를 정리하지 않 고는 말로만의 공동체 타령이 되기 쉽다. 취미 생 활에서부터 직장생활에까지, 가족관계에서부터 남녀관계에까지, 독신생활에서부터 혼인 생활 에 까지, 말투에서부터 옷차림에까지 생활문화가 건드리지 않는 것은 없다. 이렇게 넓고 깊은 과제는 하루아침에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하루 하루 생활 속에서 정리하고, 뜯어 고치고, 토론 하고, 만들고, 깨버리면서 나가야 한다 올바른 생활문화를 세우는 일은 따라서 언제나 ‘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올바른 생활문화를 만드는 구조적 틀을 우선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가닥잡기를 미룰 수 없 다. 우리는 올바른 생활문화를 만드는 구조적 틀 을 우선 만들어야 한다 일터에서, 단체생활에서, 부부생활에서 올바른 생활문화를 세우기 위한 모범적인 툴이 하나, 둘 갖추어지고 그것이 알려 지면서 생활문화의 가닥은 서서히 잡혀가는 것 이다.

민족문화운동은 생활문화 가닥잡기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모든 생활에서 올바른 모범을 보이 고, 자칫 건조해지기 쉬운 이민생활에 문화적 풍 부함을 제공하는 둥 동포사회 안에서 올바른 생 활 문화 형성의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생활문화를 세우는 일은 결코 민족문 화 운동만의 전문적인 영역이 아니다. 모든 동포들이 생활문화 형성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 지 않으면 올바른 생활문화는 영영 먼 나라 이 야기가 될 것이다.

2세 문화운동을 키우자

재미동포사회는 아직 1세들이 80%를 차지 하 는 1세 중심적인 사회이다 그러나 나머지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나날이 동포사회 안에서 위 상이 높아가는 2세들의 존재를 문화운동에서도 무시할 수 없다. 2세들은 현재 참으로 딱한 처지 에 놓여있다. 많은 2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코리안’이란 존재에서 찾으려 하나, 무엇이 ‘코 리안’ 으로서의 정체성인지 그 내용을 모르겠다 고 하소연한다 단순히 코리안 피를 가졌다고 믿는 데서 정체성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체성의 핵심적인 내용은 표리 안 문화이며 다시 말하면 재미동포사회 문화 이다. 그러나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동포사회 문화를 보면서 2세들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혼돈에 빠진다.

2세 문화운동은 하루가 .시급한 상황이지만 아직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다. 이들에 대한 동포사화 전체의 많은 성원과 지원,격려가 절실하다.

아직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이유조 차 느끼지 못하는 2세들도 많이 있지만 올바르게 정체성 문제에 파고드는 소수 2세들의 아픔 만이라도 모든 동포사회가 함께 느껴야 한다. 그 리고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재미 동포사 회 문화를 일구는 일에 이들 2세들이 동참할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우리의 문화는 1세들만의 것이 아닌 1세와 2세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많은 2 세들은 미국사회에 녹아 들지 않고 그렇다고 나 름 대로의 문화도 가지지 못한 1세들에 대한 심 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거부감은 1세들이 주도하는 민족문화운동에 대한 거부감에 까 지 연결된다. 결국 1세 문화운동과 함께하는 2세 문화운동이 없이는 광범위한 2세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다 2세 문화운동은 하루가 시급 한 상황이지만 아직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다 민 족 문화에 대한 관심은커녕 동포사회에 대해 관 심이 있는 2세단체조차 눈뜨고 찾기 어려운 상 황에서 2세 문화운동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 눈에 크게 띄지는 않지만 곳곳에서 미국 주류사회가 아닌 동포사회 안으로 눈길을 돌리고, 1세들과 손잡고 바른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일하려는 2세들의 모임이 생기고 있다. 이 들에 대한 동포사회 전체의 많은 성원과 지원, 격려가 절실하다.

문화와 생활의 통일을 위해

끝으로 동포사회는 하루 빨리 문화와 생활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많은 동포들이 어려운 경 제 사정 속에서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음 에도 불구하고 동포사회의 이른바 ‘주류문화’는 동포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문화예술인 들은 추상적인 어휘와 내용에 집착하여 자족적 인 작품들을 만들고 있을 뿔이며 국내 연예인들 의 방문 공연과 성악가들의 점잖은 노래의 향연 이 언제나 가장 많은 동포들을 모으는 연례행사 가 되어있다 동포사회 유지들의 행사는 언제나

우리문화를 만들자, 민족문화의 뿌리를 단단히 박고, 올바른 생활문화의 가닥을 잡으며,2세 문화운동을 일으키고, 문화와 생활의 통일을 이루며 우리 문화를 만들자

화려한 식당의 불빛아래 허리 잘록한 양주잔을 들어올리며 진행된다 과연 얼마나 많은 동포들이 이같은 문화적 행태들에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산호세의 전자공장에서, 나성의 봉제 공장에서, 뉴욕의 청과물상에서, 빈민가 구멍 가게에서 일하는 많은 동포들이, 미국 곳곳의 식품점 구석에서 김치를 담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공 감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2세들이, 이민 온 지 얼마 안되어 언어 장애와 일자리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동포들이, 동포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며 이리저리 직장 올 옮겨다니는 찍새(캐시어)와 짐꾼들이 과연 공감 할 수 있올까?

동포사회는 하루빨리 문화와 생활의 통 얼을 이루어야 한다.

뉴욕의 재미동포 시인 최용탁씨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 사이를 걷다가/ 사람에 걸려 넘어진다/ 때 로는 부축을 받고/ 누군가의 어깨에 한쪽 팔을 넣어 보지만/ 여, 지, 없, 이 비틀거린다/ 꽃 향기 진한 곳에선 한동안/ 머물기도 하면서/ 우리가 찾는 것은 숨어있는 것이다/ 어디에 있을까/ 어느 시인은 날고 싶어서 새를 키우고/ 사람들은 새를 구워 배를 채운다/ 많은 사람들이 먹이와 잠자리를 찾아/ 제국으로 오고/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비워두고 온 빵으로/ 휴양을 간다/ 많은 사랍 들이 브로큰 잉글리시로/ 부서진 삶을 힘겹게 맞추고 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은 중시와 유럽의 통합을 이야기한다/ 세기말을 가득 채운 거 대한 뒤죽박죽과/패배한 이성의 하늘 위에/ 질, 서, 정, 연 하게 날아가는 것은/ 폭격기들 뿔이다 / 그 아득함 사이에 숨어있는 것을 찾아서/ 자칫하면 깡패로 풀렸을 나는/ 뉴욕에서/ 시를 쓴 다』

우리문화를 만들자, 민족문화의 뿌리를 단단히 박고, 올바른 생활문화의 가닥을 잡으며,2세 문화운동을 일으키고, 문화와 생활의 통일을 이 루며 우리 문화를 만들자. 그래서 더 이상 뒤죽 박죽과 패배한 이성을 노래하지 않고 밝은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