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리브

최근 편집: 2023년 9월 22일 (금) 00:53

우먼리브(Women’s Liberation)는 1960년대의 정치적 좌익운동, 특히 공민권 운동과 반전운동 속에서 탄생한 페미니즘운동의 일종으로, 1970년 이후 여성해방운동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용어 자체는 미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나, 주로 일본에서 많이 쓰이고 있으며 ‘60년대 후반~70년대의 일본 급진주의 여성운동’을 칭하는 용어로도 쓰이고 있다.

우먼리브의 역사

1960년대 후반 이 후 우먼리브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물결 속에서 출현한 급진주의 여성운동이었다. 근대 자유주의 여성운동은 18세기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아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이상적 존재임을 강조하고 사회구조보다는 법적, 제도적 개선에 중점을 두었으며, 뒤이어 등장한 마르크스주의적 여성운동은 여성문제의 근원이 자본주의체제로부터 발생한다고 보고 여성에 대한 경제적 억압, 성별노동분업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두 운동 모두 여성과 남성이 ‘인간’으로서의 ‘같음’에 기초하여 출현한 운동으로서 여성과 남성이 동일한 인간으로 인정받고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나, 급진주의 여성운동은 지금까지의 여성운동들이 주장했던 ‘같음’의 운동에서 ‘다름’에 기초한 운동으로 페미니즘운동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이념아래 시작된 급진주의 여성운동은 앞의 두 운동과는 달리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인간이긴 하지만, 사회적 측면에서 다른 성향과 역할이 기대되며 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 여성과 남성의 ‘다름’을 부각시켰다. ‘다름’에 의해 유발되는 각종 억압적 현실, 즉 성폭력, 가정폭력, 낙태문제에서 여성의 성적, 재생산적 권리를 확보하는데 집중했다.

우먼리브(Women’s Liberation)의 리브Liberation라는 단어는 급진주의 여성들이 제3세계나 흑인해방을 여성 자신들의 해방과 동일시한 데서 붙여졌다. 1960년대 후반에 해방은 절대적 지지를 받은 개념이었으므로 여성운동에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반의 일본 사회는 고도의 경제성장 이후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분출되고 다양한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일본의 우먼리브운동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동하였다.

일본에서의 우먼리브운동은 1970년 성차별을 고발하는 데모를 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1970년 10월 21일 국제반전의 날, 여러 여성단체가 모여 여성들만의 반전(베트남전)데모를 벌였다. 이 날 ‘그룹 싸우는 여성’의 멤버인 다나카 미츠는 손으로 직접 쓴 <변소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언문을 뿌렸다. 이것이 일본의 우먼리브의 기념비적 효시로 알려져 있다.

우먼리브운동은 이어서 ‘낳고 안 낳고는 여자의 자유’라는 캐치프래이즈 아래 ‘모성 환상’을 깨고 나아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 전개 되었다. 1971년에는 나가노에서 ’우먼리브‘ 세미나가 열렸고, ‘비혼모’를 선언한 여성들이 등장하여 결혼제도를 비판하며 혼외출산을 가치화하는 ‘비혼모’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972년 가을에는 신주쿠에 <우먼리브센터>가 개설되었다. 우먼리브센터에서는 장애 태아의 선별적 중절을 가능케 한 ’우생보호법‘ 개악에 반대해 장애인해방운동과 함께 투쟁을 벌였다. 1973년에는 이혼모, 비혼모를 위한 ‘리브 그룹’이 설립되었으며, 1974년에는 ‘가정과의 남녀 공동 수학을 권장하는 모임’이 결성되어 15년 뒤에 시행되게 되는 초중고 교육학습지도요령을 개정시키는 성과를 거뒀다.[1]

평가

우먼리브운동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감은 엄청났다. 우먼리브운동은 “전국 못생긴 여자들의 연맹”, “인기 없는 여자들의 히스테리”라는 등 온갖 조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여성학자인 우에노 치즈코는 우먼리브운동에 대해 여성운동의 패러다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고 평가했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하여 여성해방을 이루고자 했던 일본 근대 여성운동에서 진일보했다는 것이다. 우먼리브운동은 남성의 기준에 맞춰져 있는 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함을 목표로 하는 것이 산업 사회의 가치에 가담하고, 베트남 전쟁과 아시아 배타주의, 침략주의의 공범자가 되는 것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또한 우먼리브운동 전에는 주부연맹이나 어머니대회 여성들, 노동조합 여성부와 사회주의운동 안의 여성들, 즉 남성들로부터 그 존재를 허락받은 여성이거나 ‘여성역할’을 부여 받은 여성들이 여성운동을 했다면, 우먼리브운동은 그 역할의 페쇄성을 뛰어넘고 장애인을 비롯한 지역 소수 그룹과 다양하고 수평적으로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2]

인용

다나카 미츠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억압을 오른발로 차버리고, “자립한 여성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억압도 왼발로 차버리는 것이 여성해방입니다. 교양이 없이 저급하고, 뭐 대충 대충하고, 농담을 좋아하고, 신랄한, ‘나 자신’으로 살고 싶어서 나는 우먼리브운동을 했습니다.

구리하라 야스시

“싫은 남자가 가슴을 만지면 화를 내지만, 좋아하는 자가 만지고 싶어하는 엉덩이는 갖고 싶어.”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우먼리브운동에 불을 붙인 다나카 미츠가 한 말이다. 미츠는 우먼리브에 대해 이런 식의 말을 자주했다. 싫어하는 남자가 가슴을 만진다면 여자는 어떻게 할까? 지금까지의 페미니스트라면 사회를 향해 그 남자의 잘못에 대해 호소하겠지. 성추행이라고 법정이나 언론에 호소하며 그의 부정을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우먼리브는 다르다.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죽인다, 죽인다, 죽~여라. 때려눕혀라. 설사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때려눕히려고 하는 나를 자랑스러워하라.

주요인물

다나카 미츠 : 일본 우먼리브의 선구자이자 대표자이다.

  1. 명혜영 (2009). 《우먼리브 자장안의 ‘가족’》. 
  2. 조이승미 (2006년 11월 29일). “일 우먼리브 선구자, 다나카 미츠의 삶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