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0월 6일 출생. 대한민국의 남배우. 본명은 엄홍식이다.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 하는 메갈짓 이제 그만[주 1]

1 출연작

  • 베테랑
  • 사도


2 애호박 게이트

많은 여성들을 비롯한 페미니스트들과 싸움으로써 안티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빛아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1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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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8일 한 네티즌이 트윗으로 유아인은 애호박으로도 인생에 대해 말을 할 것 같다고 하자 자신의 이름을 서치해 찾아가 '애호박으로 맞아보겠냐'고 물은 것에서부터 시작한 논란이다. 이에 한 메갈 성향 유저가 유아인에게 한남, 소름돋는다 등의 멘션을 남겨서 유아인이 이에 반박하다가 싸움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유아인의 잘못이 애매하긴 하다. 유아인이 여성이 분명하게 드러난 트위터 유저에게 애호박으로 맞아보겠냐는 멘션을 남겼다면 그것은 분명히 남성이 여성을 위협하는 구도로 보여질 수 있고, 여성혐오라고 규정할 수 있겠지만, 첫 트윗을 남긴 유저의 신상정보가 불명확하였기에 여성혐오라고 단박에 규정하기는 애매한 지점이 있다. 다만 핵심은 이 발단 부분이 아니라, 이후 유아인이 트페미들과 설전을 벌인 부분이다.

2.2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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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유아인은 11월 24일 돌아와 트페미들과 논쟁을 벌이며 여러 퍼블트를 남겼다.

2.3 절정

페미니스트들과의 설전 과정에서 여성혐오적인 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큰 비판을 받았다. 특히 "증오를 포장해서 페미인 척 하는 메갈짓 이제 그만"이라는 문구는,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을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로 논란이 일자 자신을 언급하는 트위터 글들에 굉장히 많은 멘션을 남기기도 하였다. 1548129409432.jpg 위와 같은 트윗은 여성들의 현실에 무지한 유아인의 오만함을 드러내고 있다. 여성들이 주로 익명으로 활동하는 이유는 오프라인과 인터넷 상의 극심한 젠더사이드 때문이다. 여성인 것을 밝히고 활동하는 것만으로 성희롱과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그리고 받고 있는 여성들을 모두 모지리로 몰아버린다. 또한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보라서 그렇게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이 길고 어려움을 알고 숱한 2차 가해자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데, 경찰에 신고하면 되지로 그 피해를 퉁치고 외면하고 있다.

1548129973151.jpg 또한 실체를 드러내라는 유아인의 글에 한 여성이 자신은 여성이고 강간 피해자임을 밝히자 강간 피해자라고 당신의 행동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며 자기 딴에는 일침을 날리고 있다. 여기서 유아인은 "악플을 달고, 남을 비방하고, 인신공격을 하고, 여럿이 몰려다니며 사회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또다른 폭력의 죄가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라고 서술하며 마치 모든 페미니스트들을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회적 반동분자처럼 여기고 있다. 이것은 유아인에게 가해진 정당한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페미니스트들을 악마화하는 행동이다.

2.4 페이스북 글

애호박 게이트와 관련하여 11월 26일 페이스북을 통해 긴 글을 남겼다.[1]


나는 ‘페미니스트’다. 어떠한 권위가 내게 ‘자격증’을 발부할지는 모르겠으나 신념과 사랑과 시대정신을 담아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320자의 트위터나 그림으로 말하는 인스타그램의 부작용으로 집단 난독증을 앓고 있는 신(新) 인류에게는 매우 길고 어려운 글이 될 것이고, 글을 통해 사람을 보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숭고한 일이 될 것이다. 수익과 소득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먹잇감이 되겠지- 아뿔싸!

그들의 가난한 영혼을 차마 다 안을 재간이 없어 비통하다. 자연을 글로 옮기는데 가상세계에서 내 영혼이 다칠까 걱정되어 날선 방패를 먼저 세우는 일이 참으로 비참하다.

그럼에도 쓴다. 경향적 어휘와 자극적 이미지를 총알처럼 남발하며 전쟁을 치르는 세상에서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기에는 내 안의 문학소년이 매우 슬프기 때문이다. 싸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써왔다. 그래서 쓴다. 피눈물로 당신에게 나를 보낸다. 이것이 내 ‘글’이고, ‘나’다. 물리고 뜯기고 찢겨 조각난 채로 이 세계를 부유하는 것들은 글이 아니라 나다. 흥겨워하지 말아라. 익명이 그토록 명예로운가. 기자라는 이름의 명예는 또 어떠한가.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배가 아니라, 영혼을 살찌워야 한다.

내 이름은 ‘엄홍식(嚴弘殖))’이다. 내가 짓지는 않았고, 무엇을 심으라고 지으신 지는 모르겠지만 엄할 엄(嚴)에 클 홍(弘)심을 식(殖)을 덧붙여 할머니가 지어주신 이름이다. 나는 보수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구에서 누나 둘을 가진 막내 아들이자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야 할 장남으로 한 집안에 태어나 ‘차별적 사랑’을 감당하며 살았다. 역할은 있었는데 ‘엄홍식’은 없었다. 누구나 그렇듯 자아 찾기 여행의 고난이 눈앞에 펼쳐졌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체는 노화의 속도를 올리고 있지만 정신은 확장을 멈추지 않았으니 그것이 내 중 2병의 당연한 실체다. 나는 항상 삶이 어렵다. 매 순간이 새것이고, 그 시간에 속한 모든 내가 새로운 나여서.

아버지는 나를 ‘똥개’라고 불렀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고향에 가면 아버지는 나를 어릴 때의 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즐겨 하신다. 귀한 아들은 그렇게 불러야 오래 사는 거라고 한다. ‘귀한 아들’

작은누나의 이름은 한글로 ‘방울’이다. 그때까지는 내 조부모들의 귀한 자식들인 내 부모가 가진 자식들이 딸 둘 밖에는 없어서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할머니가 그렇게 지으셨다고 한다. ‘엄방울’ 불쌍하고 예쁜 이름.

제삿날이면 엄마는 제수(祭需)를 차리느라 허리가 휘고, 아빠는 병풍을 펼치고 지방(紙榜)을 쓰느라 허세를 핀다. 일찍이 속이 뒤틀린 소년이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상하고 불평등한 역할놀이’. 제사가 끝나면 엄마는 음복상을 차리고 작은엄마와 누나들은 설거지 같은 뒷정리를 함께 도왔다. 집안의 남자들이 ‘성’에 취해 허세를 피우는 ‘상’에 여자들이 끼어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과 종교의 역사와, 각종 인간 사상이 합작하여 빚어낸 남존여비의 ‘전통’과 그 전통이 다시 빚어낸 인간 사회의 참상은 내 집안에서도 자랑스러운 골동품으로 전시되었다. 유난하고 폭력적인 그 풍경은 뻔뻔하게 펼쳐졌지만 자랑스럽게 대물림되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엄마’라는 존재의 자궁에 잉태되어 그녀의 고통으로 세상의 빛을 본 인간이다. 그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서 뻔뻔하게 살아갈 재간이 없다. 우리 엄마는 해방되어야 한다. 의문들로 뒤틀린 나는 차마 뻔뻔한 그 풍경들을 뻔뻔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런 구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된 이 시대가 내게 여전히 의문들을 남긴다는 사실이 나를 증명한다. 의문이라는 고통, 두려움으로 빚어진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나는 짐승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고 나는 우리 엄마 아빠의 귀한 아들이다. 나의 귀함이 고작 ‘아들’이라는 ‘성’에 근거한다면, 나는 그 귀함을 기꺼이 벗고 허기진 짐승처럼 이 도시를 어슬렁거려야 하겠지. 아마도 ‘개새끼’로 사는 일을 피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다. ‘개새끼’가 아니려고 살아가는 것이 나의 삶인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귀하다. 아들이어서 귀한 게 아니다. 딸이라고 비천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아들딸들이, 모든 부모의 자식들이 다 귀하고 존엄하다. 누가 아니겠는가.

나는 페미니스트다. 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뭐라고 주장하든, 뭐라고 불리든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이 글은 성가시게 유행하는 가상세계에서의 그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유행을 빌어 하는 ‘인간’과 ‘관계’와 ‘세상’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인간’을 탐구하고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연기’를 업으로 삼은 한 배우가 글로 전하는 ‘인상’이다. 쉽게 닿지 않겠지만 내 식으로 하겠다.

‘차이’는 ‘차별’의 장벽이 되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는 ‘차별’ 없이 모든 다른 존재들과 이 위대한 기술을 통해 연결되고 싶다. ‘사회 관계망 서비스’ 안에서 진정한 ‘관계’를 갖고 싶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배우’의 역할을 이 질서 안에서 삭제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불가능한 이상과 같지만 나는 그래서 ‘배우’로 존재하고 이곳에서 ‘나’로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 다른 유형의 인간들이 전쟁, 종교, 지배의 역사 속에서 가져온 생물학적 기능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가 차별을 만들어 냈다. 차이를 차별로 전환하는 강자의 폭력은 성의 차이뿐 아니라 모든 개개인이 구성하는 사회 안에서 소수자를, 약자를 향한다.

모든 아들딸들;인류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고통이 아니라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로 우리는 교류가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 시대의 전쟁은 더 이상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구시대의 교리, 질서가 아닌 이 시대의 정신과 사상이 필요하다. 우리는 ‘전쟁’을 멈추고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돈의 거래’와 ’경쟁을 통한 성장’이 낳은 기술이 인간성을 삭제하는 참상을 우리가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과 우리의 감정은 현실과 가상이 다차원적으로 교차하는 혼란의 세계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

타인과 나 사이를 연결하는 <소셜 미디어>와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이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소셜 네트워크>는 첨단 기술의 비약적 성장과 함께 <가상 세계>를 펼쳐내며 <현실 세계>와 다차원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이는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각종 최신 디바이스를 사용하는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며 인간 사회와 인간상 그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우리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간다. 현실과 가상이 혼재된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다. 난해한 용어 따위를 다 지워버리고도 여러분은 지금 이 세계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여기는 ‘facebook’이고, 당신은 거기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오프라인과 온라인이라는 두 개의 세계에 동시에 속해있다. 타인과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관계망은 인류 문명의 위대한 성취다. 이곳에서 인간은 더 이상 ‘전쟁’하지 말고 ‘품앗이’하며 평화를 찾아야 한다.

전쟁은 두려움의 상징이다. 비로소 우리를 하나로 연결한 기술의 세계에 매몰되어 모든 개인과 개인이 서열다툼 하듯 경쟁으로 전쟁을 치른다. 어떠한 승자도 행복하지 않은 전쟁. 그것은 ‘최면’이다. 어떠한 승자도 영원하지 않은 이 시대. 대한민국 전 대통령도, 초대기업 재벌 3세도 구치소에서의 시간을 태우고 있는 이 시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타인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고 질서도 아닐지 모르겠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우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인간성을, 우리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가 빚어낸 현재가 우리를 잠식하지 않고 우리를 연료나 부품으로 전락시키지 않고 우리 스스로 더 잘 살 수 있게 할 수 있도록 각성해야 한다.

나는 나다. 당신이 당신인 것 처럼. 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뭐라고 주장하든, 뭐라고 불리든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이겨내기 위해 힘쓰고 싶지 않다. 당신과 연결되고 싶고 잘 지내보고 싶다. 그리고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떠하냐고.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당부한다. 더 이상 ‘기술 혁명’에 끌려가지 않고 당당하게 주도하며 ‘정신 혁명’을 이루자고. 그 방법과 길을 이 편리한 기술 안에서 함께 찾아가자고. 그것이 기술이 아닌 인류 진화의 열쇠가 아니겠는가.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페미니스트들은 이후에 안희정 성폭행 사건, 조재범 성폭행 의혹, 버닝썬 게이트,정준영 사건, 장자연 사건 등 페미니즘 이슈가 터질 때마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칭했던 유아인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만약 정말로 유아인이 페미니스트가 맞고 여성인권을 생각한다면, 이런 일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일에 신경쓰는 것은 여전히 페미니스트들과 소수의 대중뿐인 것으로 보인다.

2.5 여론

트위터에서는 '누가 유아인(좀 말려봐)'와 '라노벨체', '애호박게이트'라는 실시간 트렌드가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언론들은 유아인이 악플러에게 일침을 날렸고 네티즌 반응은 유아인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전에 하연수의 말투로 인한 논란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이다. 한편 이 논란의 원인이 된 처음 애호박으로 맞아보겠냐는 유아인의 발언은 언급조차 잘 되지 않고 있다.

또한 사실 유아인의 발언은 대중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가 기반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성 타자화에 해당하는 개념인 여성혐오의 대응 '남성혐오'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본인의 마음에 드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기준으로 '진짜 페미니즘(유아인식 '사랑'의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메갈짓)'을 나누는 것은 굉장히 오만하고 무례하며 무지한 행위이다.

3 성범죄자 옹호 논란

2018년 3월 9일 <엘리자베스>에서 메리 1세가 구교 환원을 반대한 개신교 주교를 처형하는 장면을 올렸다. 영상은 화형식과 사람들의 모습이 있어 마치 마녀사냥 처럼 보였다. 참고로 이날은 조민기라는 성범죄자가 뒤진죽은 날이기에 위의 사건과 합쳐서 당연히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을 리버럴 페미니스트라 선언함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성범죄자인 조민기가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 죽은 것을 갖고, 대중들의 마녀사냥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다는 뉘앙스로 영상을 올린 것이다.

설령 저게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해도, 오해를 풀기 위하여 최대한 해명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애호박 게이트로 인해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큰 비판을 받고 있던 유아인의 명성은 이 일로 더 땅에 추락하였다.

4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한 발언

도올아인 오방간다에 출연하여 "남녀를 떠나 우리 사회의 강자는 누굴까?" "차별과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 등등 숱한 발언을 남긴 적 있다.

언뜻보면 옮은 말이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실제로 남녀라고 규정되는 이분법적 젠더 구조 하에서 남성이 여성에 비해 더 강한 젠더 권력을 가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남녀를 떠나 재산,나이,직업 등의 더 큰 구조에 집중하자는 것은, 남녀가 만들어내는 구조는 별 달리 중요하지 않거나 젠더권력을 인정하지 말자는 발언이나 다름없다.[주 2]

또한 차별과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말로 마치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차별의 상당수는 사실은 차이이다 라는 주장과 마찬가지인데, 차별과 차이를 자신이 임의로 분별하는 것은 매우 오만한 일이다. 우리가 차별이라고 생각했지만 차이였던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차이라고 생각했지만 차별인 일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주 3]

5 위근우조커 비평 글 댓글

6 설리 사망 후 발언

설리 사망 후 "서로 탓 말고 반성하자"라는 다른 발언들과 비슷한 나이브한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

7 링크

8 출처

9 부연 설명

  1. 유아인은 여기서 메갈짓은 증오를 포장하여 페미인척 하는, 한마디로 페미가 아닌 무언가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질문을 해보자. 증오는 왜 페미가 될 수 없는가? 실제로 페미니스트가 된 이들 대다수가 페미니즘에 유입되게 된 계기는 부당한 남성성, 가부장성에 대한 분노인 경우가 많으며 분노는 증오란 감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증오는 분노와 어떤 점이 다르고 또 왜 그런 분노는 페미니즘이 될 수 없는가? 또한 메갈리아 사이트를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알듯이, 모든 메갈리안이 증오에 가득찬 남성혐오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유약하고 비틀린 가부장성과 남성성을 비웃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결국 유아인의 이 말은, 자신의 기준대로 진짜 페미니스트와 가짜 페미니스트를 구분하고, 한국 21세기 페미니즘의 큰 원동력, 페미니즘 리부트를 낳았던 메갈리안9영영 페미니스트)를 무시하는 언행이라 할 수 있다.
  2. 참고로 이거..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나 자유주의 페미니즘(특히 에쿼티 계열)에 대한 비판점과 매우 흡사하다. 실제로 서유럽권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이 생겨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런 심층적인 차별에 대한 탐구와 해소였다.
  3. 실제로 이를 입증한 초등학교 선생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