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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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六友堂, 본명 : 윤현석(尹賢碩), 1984년 8월 7일 ~ 2003년 4월 26일)은 대한민국의 학생 운동가 출신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 시민운동가이자 시조 시인, 작가, 평론가이다.

주요 이력

아마추어 연극 배우이자 성악가이기도 했던 그는 2003년 4월 26일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동성애자인권을 요구하며 목을 매 자살하였다.[1] 그의 죽음으로 2004년 2월 대한민국청소년 보호법에서 동성애를 유해단어에서 삭제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어, 2004년 4월 20일 대한민국 국무회의에서 동성애청소년 보호법의 유해 단어와 인터넷 금지 단어에서 삭제되고, 4월 29일 동성애음란물 지정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시발점이 되었다. 본명은 윤현석이고[2], 육우당(六友堂)은 그의 아호[3] 이자 가명이고, 필명은 설헌(雪軒)[4], 미동(美童), 동화(童花), 항아(姮娥), Catholic84 등이며, 천주교 교명은 안토니오이다. 인천광역시 출신이다.

중학교 재학 중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자각, 중,고등학교 내내 학생들의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다 2000년 12월 고교를 자퇴하였다. 그는 시조시인이 되기를 원했고, 동성애자에 대한 대한민국사회적 차별에 저항하였다.[5] 학생 시절부터 와 작문을 시작, 2002년 1월에는 정식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한편 2001년 1월부터는 동성애 커뮤니티 및 동성애자 단체를 청소년 유해 매체로 지정해야 한다는 여론에 맞서 동성애 혐오를 비판, 동성애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논객의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2001년 홍석천, 하리수 등의 고백 이후 홍석천, 하리수 등을 격려하며, 이들을 지지하는 카페들을 개설, 운영하였다. 2001년에는 서울의 모 극단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성악연극을 지도받았으나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탈퇴하고, 2002년 5월경기도 부천시의 다른 극단으로 들어가 연습하였다.

2002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동성애자인권연대(약칭 동인련)에 가입하여 학생 운동가로 활동을 시작, 2003년 청소년 보호법 제정 시 서울에서 동성애 혐오단어, 금지단어 지정 반대 운동, 동성애자 차별 철폐 운동, 소수자 차별 철폐 운동 등을 벌였다. 2003년 3월부터는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상근 직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반전 평화운동,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에 동참했다. 그해 4월 5일4월 7일 동성애자에 대해 소돔고모라라는 비난과 인신 공격이 계속되자 이를 비판했고, 4월 26일 그는 "아비규환 같은 세상이 싫다"며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6] 그는 유서에서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나를 받아줄 것이다” 는 구절을 남겼다.[7] 당시 그는 6장의 유서와, 34만원의 현금 그리고 묵주를 유품으로 남겼다. 작품 활동으로는 시조와 평시, 가사 등을 창작했고 시조동호회와 문인단체의 회원이었으며 직접 청소년 시조, 시인 모임인 화랑을 조직하고 카페 매니저로도 활동했다. 사후 2006년 4월 유작 <내 혼은 꽃비 되어>가 출간되었다.

사망 직후 동성애자도 사람이라는 주장과 반대 견해가 팽팽히 대립하였다. 4월 29일 동성애가 음란물에서 지정 해제되고, 사후 1년 뒤 청소년보호위원회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심의기준에서 동성애 조항은 삭제되었다.[5] 그는 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활동하고 싶다 하였으나 사후 한동안 그의 이름은 공개되지 못했다. 2010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금기시가 풀리면서 그의 본명과 활동이 시중에 알려졌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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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영향력

다음을 참고할 것 청소년 성소수자의 자살 그의 죽음을 계기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청소년 동성애자 문제 공론화에 영향을 주었다. 2003년 육우당이 세상을 떠난 후 동성애자인권연대를 비롯해 성소수자단체들은 ‘동성애청소년에게 유해하다’라는 사회적 담론을 깨기 위해, 그리고 청소년보호법 상의 동성애자 차별조항의 삭제를 위해 거리로 나섰다.[8]

대학로에서 욕설도 들어가며 캠페인을 펼쳤고 명동 한복판에서 집회도 개최했다. 그리고 연대의 이름으로 동성애자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일부 인권 단체들과 기독청년들이 동참하였다.[8] 4월 29일에는 그때까지 음란물, 음란 언어로 지정된 동성애동성애 관련 단어들이 음란물에서 삭제되었다. 육우당의 자살을 계기로 동성애자 인권 단체에서도 청소년 동성애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2007년 동성애자인권연대 정욜 활동가는 “동인련을 비롯해서 성소수자 단체들이 청소년 인권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인 시기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동성애자인권운동의 역사 자체가 길지 않았고, 운동 초반에는 나름의 공동체나 자신의 정체성(의 공감)을 목적으로 모였던 것이었다면,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였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9]

정욜 활동가가 말하는 '계기'는 2003년 19살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 고 육우당의 죽음이었다. 그는 “동인련에게도 충격이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것도 나름 걱정이었을 뿐더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육우당이 놓여있던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다”며 “그 사건 이후 청소년들이 당하는 차별과 요구들을 정리해나가게 됐다”고 설명했다.[9] 한국의 기독교 목사 임보라는 “저희의 봄은 (육우당이 세상을 떠난) 2003년 4월에 머무르지 않고, 성소수자를 함부로 혐오하거나 차별해도 된다고 하는 이들에 맞서 분연히 일어서는 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10]

인터넷에서는 사회 통념을 이유로 동성애자들에게 폭력을 가할 권리가 없다, 동성애자가 싫다면 피하거나 안 보면 그만이라며 동성애 차별 및 동성애를 정신질환으로 분류하는 것에 대한 반박이 나타났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일부 이성애자들과 인권 운동가들도 동성애자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다. 동인련의 다른 회원 C씨는 "처음엔 동성애 인권을 지지하는 이성애자가 있다는 게 힘이 될 것이라는 '가벼운 마음'에서 회원이 됐지만 A씨가 죽고나니 내가 동성애자와 연대해야하는 이유가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C씨는 "A씨의 죽음이 너무 무거워 처음에는 피하려 했지만 이제 그러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였다.[11] 2003년 5월 그의 추모식에서 김바울 한국기독청년연합회 회장은 추모사를 하는 내내 자신이 기독인이라는 것을 미안해했다. 김 회장은 "이제서야 왔다는 게 죄송하다"며 "성경의 뜻은 억압없는 인간해방"이라고 강조했다.[11]

청소년 동성애자 문제 사회공론화

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 2004년 초까지도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2004년 2월 8일 KBS 2TV 생방송 <100인 토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에서 “동성애, 청소년에게 유해한가?”라는 주제로 약 90분 동안 토론이 진행되었다.[12] 2000년 10월 KBS 1TV 길종섭의 쟁점토론 이후 3년 5개월만에 동성애를 주제로 공중파 토론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일각에서는 한때의 실수일 수도 있으니 청소년 동성애자들에 대한 과도한 비난은 자제해야 한다는 여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단체와 개인들은 방송이 동성애를 조장한다며 항의, 비판하였다. 이후 동성애자 문제, 청소년 동성애자에 대한 문제를 다룬 프로그램과 토론 프로그램, 동성애 문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등이 대한민국의 TV 방송과 라디오 방송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그의 죽음을 계기로 성적 정체성과 차별, 멸시 등으로 고통받는 동성애자 청소년 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나타났다. 이경화의 《나》, 이은미의 《깊은 밤을 날아서》 등에 영향을 주었다. 작가 이은미의 작품 ‘깊은 밤을 날아서’에는 동성애자인 도련과 소년이 등장한다. 둘은 사회적 차별과 가족 냉대를 참지 못해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나온다. 같은 고시원에 살게 된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교제를 시작한다. 작품은 두 남성의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13] 작가 이은미는 “2005년아우팅을 당한 청소년 성 소수자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당시 대학 문예창작과를 다녔던 이씨는 “성소수자들의 연애를 사람들은 왜 특별하게 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덧붙였다.[13] 2010년 12월 3일에는 성 소수자들의 글을 엮은 모음집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가 출간되었다.[14][15]

성소수자의 적극적 입장표명 활동

육우당의 언론, 잡지, 칼럼 기고활동은 다른 성소수자들의 공개적 입장발표, 의사 표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했다가 따돌림 당하고 졸업 직전 학교를 자퇴하였다.[16] 그러나 육우당은 실명과 필명으로 계속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은 인권유린, 성차별, 편견이라며 반박을 제시했다. 육우당은 자신의 글을 여러 언론에 보냈으나, 한겨레신문 등 일부 일간지에 정식으로 기사로 개제되었다.

한기총 성명을 비판하며 그가 쓴 ‘동성애자도 인권 존중돼야’라는 글이 4월 14일 <한겨레>에 실렸다. 그날 신문을 들고 동인련에 온 육우당은 많이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글재주에 깜짝 놀랐다던 곽이경은 "글 쓴다고 말은 들었는데, 정말 신문에 실려서 다들 깜짝 놀랐어요. 아, 이렇게 우리 얘길 써서 알리면 되겠구나 싶어 신기했죠.[16]"라고 밝혔다.

육우당의 글이 신문에 실리면서 다른 동성애자 인권 운동가들도 성소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싣거나, 실명으로 일간지와 신문,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하였다. 4월 29일 서울특별시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 홀에서 청소년보호위원회 주관으로 개최된 '동성애,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에 관한 토론회에는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인권단체 직원 외에 활동가가 아닌 일반 게이, 트랜스젠더, 레즈비언이 방청객으로 등장하여 자신의 경험담과 입장 등을 털어놓고, 음란함의 기준이 무엇인가 라며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모자이크 처리를 거부하거나 실명을 공개하기도 했다.

연보

저작

사상과 신념

유서에도 썼듯이 그의 소원은 '동성애자 해방'이다.[18] 그는 몇 번이고 동성애 차별이 사라지는 그날 까지 열심히 싸워 줄 것을 거듭 당부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왜 범죄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동성애가 왜 정신병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동성애가 에이즈를 확산시킨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며, 일부 동성애자가 에이즈 환자라 하여 모든 동성애자가 에이즈 환자는 아니다, 에이즈는 이성애자 사이에서도 전염되는 병이라 역설하였다.

인권 운동가 곽이경은 "2003년 청소년보호법 상 동성애자 차별 조항을 없애야 한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차별 시정 권고가 나오자 보수 그리스도교 세력은 ‘동성애가 청소년들에게 전염되고 사회질서를 파괴한다’며 청소년 성소수자를 코너로 몰았고, 그 과정에서 당시 가톨릭 신자였던 육우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9]"고 지적했다.

그는 동성애에이즈와 성병을 전염시킨다는 주장은 악의적인 날조이며, 근거없는 미신이라고 주장하였다. 육우당에 의하면 모든 동성애자가 성욕과 성충동에 중독된 자들은 아니며, 동성애자를 변태성욕자로 매도한 것은 반대 세력의 언론공작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육우당은 그 이유로 이성애자인데도 에이즈와 성병에 걸리는 케이스와, 문란한 남편 또는 부인으로 인해 성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항변하였다. 또한 육우당은 문화와 예술은 문화, 예술 그 자체로 봐야 한다고 역설했다. 육우당에 의하면 한국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간섭과 검열과 탄압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그에 의햐면 과도한 검열과 탄압이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죽여왔다며, 심각한 반사회성이나 폭력성, 범죄를 미화하지 않는 한도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성 소수자 차별에 분개

그는 동성애자 카페를 유해매체, 동성애를 유해 단어로 지정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맞서 인터넷과 칼럼 등을 기고하거나 논쟁하였다. 2003년의 그의 유서에는 온갖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한 동성애자의 애끓는 절규가 담겨 있었다. 윤 씨는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은 동성애자다라구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받지도 않아요"라며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20] 그는 고등학교 3학년 재학 당시 스스로 커밍아웃을 했다가 따돌림을 당하고 자퇴하였다.[16] 육우당은 평소 자신이 왜 자퇴해야 하는지 이해할수 없다 하였고, 청소년 성 소수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넘어선 폭력에 저항하겠다 선언했다. 그는 동성애죄악시하는 일부와 논쟁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어떻게 죄악이냐며 거듭 의문을 제기하였다.

육우당은 성소수자 차별 반대운동과 장애인 차별 반대운동, 성노동자 권익 운동, 반전 평화 운동 등에도 참여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차별은 자신과 다른 자를 희생양, 제물로 희생시킴으로서 내부 단결을 공고히하는 것, 자신들의 불안감과 공포감을 배설하는 것이라 지적했다. 그는 한겨레신문 한토마방과 동아일보 동토방, 중앙일보 디지털국회, 조선일보 독자투고란에서도 논객으로 활동하며 동성애가 정신질환이 아니라는 견해와 청보법 문제와 음란물 허용 문제, 장애인 차별 반대, 성 노동자를 직업으로 인정할 것, 전쟁반대 의견 등의 분야에 대한 의견을 남겨놓았다. 그는 칼럼과 기고문을 통해 동성애를 음란물, 음란 단어 지정에서 철폐할 것을 거듭 요구하였다.

그는 과거 대한민국장애인에게도 대놓고 병신, 등신 등의 모욕과 멸시가 공공연히 가해졌고 장애인에 대한 폭력을 장난 쯤으로 치부했지만, 1990년대 이후 장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적 시선, 편견이 서서히 사라져간 것이야 말로 괄목할만한 변화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제 동성애자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과 편견 역시 깨뜨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라고 지적하였다. 2003년 4월 그가 남긴 유서에서는 온갖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감내해야 했던 한 동성애자의 애끓는 절규가 담겨 있었다. 윤씨는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은 동성애자다라구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받지도 않아요"라며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게 된 사연을 털어놓았다.[21] 그는 일부 기독교 인사들이 말하는 음란성, 음란물의 기준이 무엇이냐며 의문을 제기하였다. 육우당은 또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라며 동성애자를 죄악시하고 소외시켜 결국 죽음의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분노를 토해냈다.[20]

육우당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읽지도, 보지도 않고 악플, 비난이 계속되자, 자신의 일기에 "아마도 내가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나는 좋은 시조시인이라고 평가받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성애주의와 금욕주의도덕주의를 지향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이단자나 일탈자에 불과하니까.[22]"라고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정부와 일부 기독교계가 인간의 과 지나친 도덕주의, 금욕주의로 사회를 통제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부 지식인들과 정치지도자들의 비뚤어진 욕망으로 소수자들에 대한 배척과 폭력, 멸시가 정당한 현상인 것처럼 자리잡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서에서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나를 받아줄 것이다[7]"라고 남겼다. 그에 의하면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것은 일부 기독교인이지 하느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윤 씨는 유서에서 동인련 선배들에게 "형, 누나들의 수고가 다음 세대의 동성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거 잊지 마세요"라며 동성애자 차별 철폐를 위해 계속 힘써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20] 이를 두고 "그는 차별받지 않고 멸시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어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20]"라는 평이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 비판

다음을 참고할 것 기독교 근본주의

육우당은 평소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원리주의적 기독교인들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증오와 차별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평소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폐쇄성과 배타성 역시 문제점'이라 지적하였다. 2003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청소년보호법에 있는 동성애자 차별조항을 삭제하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은 성명을 발표하며 동성애 혐오를 드러냈다. “동성애로 성문화가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으로 망했다. 성경동성애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인권위는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23] 육우당은 자신의 일기에 한기총 성명을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기분 나쁜 건,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가 동성애자들을 마치 죽어서 지옥에나 갈 흉악한 무리인 듯 성명서를 썼다는 점이야. 정말이지 짜증나. 예수님은 분명, 원수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그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들이 고귀한 인권을 유린하고 마치 자기네들이 하느님인양 설쳐대니까 말야[23]”라며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것이 예수의 정신인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시인이 꿈이었던 육우당은 시를 통해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기독교를 비판했다.[23]예수를 믿어야만 천당 간다 하기 전에 목사님 행실이나 올바르게 하시지요. 죽어서 무슨 낯으로 주님 뵈려 하나요”(육우당, 목사님) “소돔고모라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이야기 가식적인 십자가를 쥐고 목사들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우리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있는 힘껏 발악하고 만일 우리가 떨어진다면 예수님이 구해 주시겠지 창녀와 앉은뱅이에게 사랑을 베푸셨듯이 우리에게도 그 사랑을 보여 주시겠지. 푹신한 솜이불처럼 따뜻한 사랑을”(육우당, 현실)[23] 등의 시를 통해서도 기독교를 비판했다. 그는 일부 기독교의 배타성, 증오 운동이 반기독교 현상을 불러왔다고 봤다. 1990년대 이후 각종 안티 기독교와 반기독교 모임, 단체, 그리고 예수 자체를 비판, 불신하는 조직들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 원리주의적 기독교인의 배타성과 폐쇄성 등이 자초한 것이라 봤다. 또한 육우당은 평소 유교사상의 권위주의가 여러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망친다고 비판하였다.

윤씨는 또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라며 동성애자를 죄악시하고 소외시켜 결국 죽음의 벼랑끝으로 내몰고 있는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분노를 토해냈다.[21]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증오와 배척에 앞장서고 있다며 역설적이라고 주장했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윤씨는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하느님의 자녀'로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보수 기독교단체들에 대해 동성애자를 죄악시하는 것이야말로 '반성경적'이라고 말하고 있다.[21] 육우당은 구약성서신약성서 어디에 동성애를 범죄라고 지적한 구절이 있느냐고 지적했다. 또한 현대의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들이 고대 유대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이 몇명이나 되는지 조사해보자고 항변했다. 또한 그는 롯과 유다, 다말의 고사를 지적했다. 육우당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롯과 두 딸의 동침사건, 창세기 38장의 유다와 다말의 동침 사건은 뭐냐고 지적했다. 동성애가 음란한 행동이라면, 역시 음란한 행동을 문서로 기록한 성경은 청소년 보호를 위해, 아예 금서처분을 시켜야 되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육우당은 대한민국 부모들의 병적인 자식애, 자녀에 대한 집착과 과잉보호가 자녀들을 안전하게 지켜낼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육우당은 그런 한국 부모들의 병적인 자식 과잉보호는 자신들의 피해의식, 자기 잘못은 인정못하는 파렴치함이 낳은 결과물일 뿐이며, 그런 병적인 애정을 받고 자란 젊은이들은 미구에 건강한 사회인 역할을 못하고 사회부적응자로 겉돌게 될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과잉보호 속에서 자란 사회부적응자들과 자기 직업 있고 건전하게 생활하는 동성애자 중 누가 더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인지 생각해보자고 주문했다. 육우당은 자신의 시를 통해서도 동성애를 혐오하는 기독교를 비판했다.[23]

금욕주의 강요 비판

그는 "죽으면, 이젠 내가 동성애자라고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서에 마지막 글귀를 남겼다.[24] 육우당은“동성애로 성문화가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으로 망했다. 성경동성애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인권위는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23]”는 일부 기독교계의 시각에 대해 성을 무기 삼아 민중을 통제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했다. 2002년 동성애를 소재로 한 시조를 어느 시조 동호회 게시판에 올렸다.[22] 그가 쓴 시조에 대해 ‘미풍양속을 저해한다’는 평이 나오자 그는 크게 좌절했다.[22] 그는 한국 사회의 미풍양속이 대체 무엇인가 라고 주장하였다.

육우당은 모든 동성애자들이 성관계에만 눈이 뒤집힌 자들이 아닌데도 동성애자는 성행위에만 눈이 먼 자들인 것처럼 이미지를 씌우고 색칠한다고 항변하였다. 그리고 이성애자들도 성행위를 한다며, 생물은 성행위를 통해 종족 번식을 하는데, 왜 성을 억지로 치부로 여기고 터부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금욕주의야 말로 비인간적이고, 반생명적이며, 부자연스러운 사상이라 지적했다. 그는 금욕주의는 인간성과 생명을 부정하는 폭력이라 규정하였다. 성관계가 사악한 것이라면, 그런 사악한 행동의 결과물인 임신출산도 모두 거부, 포기해야 하는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올 수 없는 이유로 도덕, 윤리의 이름으로 작품을 검열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육우당은 작품은 작품 그 자체의 예술성, 창의력, 가슴깊이 울리는 울림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문학, 모든 예술에 도덕과 윤리의 이름으로 잣대로 재단하며 예술성, 창의력을 짓밟는다고 한탄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가 문학, 예술을 문학, 예술, 대중문화로 이해하지 않고 검열하고 자르려고 든다고 지적했다. 육우당은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보아야 하며 예술성이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심각한 반사회성이나 폭력성, 범죄를 미화하지 않는 한도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다소 심하고 격한 표현이 있더라도 내용 전개,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문학을 문학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보지 않는 사회 풍토에서 얼마나 많은 작가들의 참신하고 신선한 창의력과 아이디어들이 무수한 검열로 사라지고, 탄압당하고 죽어갔느냐며 문학, 예술, 대중문화에 대한 검열, 탄압, 통제를 거둘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동성애로 성문화가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으로 망했다.[23]"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어떻게 성 문화 타락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후일 동인련 선배들에게 "형, 누나들의 수고가 다음 세대의 동성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거 잊지 마세요"라며 동성애자 차별 철폐를 위해 계속 힘써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윤씨가 비록 스스로 목숨을 끊기는 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차별받지 않고 멸시당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어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25]

박수진은 그의 사망 관련 인터뷰에서 "동성애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동성애자임이 드러날 경우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전학을 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사례도 허다하"며 "심지어 아웃팅(본인의 동의없이 동성애자임을 폭로하는 행위) 위협을 당해 돈까지 빼앗겨도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25] 육우당은 평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왜 음란한가 라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왜 음란한가?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은 죄가 아닌데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역으로 죄가 되어야 하느냐고 주장했다. 그는 음란의 기준은 무엇인가, 금욕주의와 도덕주의는 정부와 기득권층이 (性)을 무기로 삼아 대중을 통제하려는 잔인하고 비열한 수법이라고 지적했다.

개인주의관

그는 한국 사회의 전체주의, 개인의 일에 쓸데없는 관심과 오지랖에 대해서도 심한 반감과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는 한국 사회가 필요 이상으로 남의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한다며 개인의 권리를 침해, 억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한탄했다. 이성애자 기피, 조울증, 단체생활 혐오 등 우울한 이유는 많았다.[16] 그는 평범함의 기준이 무엇이며, 남들과 같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끊임없이 회의하였다. 단체생활과 조직 문화, 전체주의는 육우당의 우울증의 한 원인이었다.

그가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자각한 것은 중학교 3학년 겨울부터였던 것 같다. "묵주를 가장 좋아할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더 고민스러웠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22] 당시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이 무렵 반 친구들을 기피하고, 단체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던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22] 2003년 초, 육우당은 '남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잘 사는데, 남들 대학 다닐 때 나는 동인련에 있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빈다[16]'고 회상하였다. 그는 평범함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한국 사회에서 강조하는 그 평범함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그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남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는 것이 왜 범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회의하였다. 그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오지랖과 전체주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죽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그는 일기, 그리고 자살 직전 자신의 지인들에게도 이를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일기에는 ‘고통없이 편안하게 죽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봤어.’라고 적었는데, ‘죽음’이란 단어가 일기장에 처음 등장한 건 2003년 4월 19일이었다.[16] 당시 그는 허무감에 빠졌다. 남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잘 사는데, 남들 대학 다닐 때 나는 동인련에 있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빈다고 고백했다.[16]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회식 문화에 대해서 적응하기 어렵고, 어떤 회식은 나가기 싫었다고 밝혔다. 그는 '마음이 맞던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들과의 회식 또는 다른 성 소수자 커뮤니티나 반전 평화운동 모임 등과 달리 직장생활 회식은 피할 수 없는 곤욕이었다'고 했다. 우선 직장 내 인간관계는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난 사람들이며, 회식자리에서 조차도 위계서열을 강조하는 일부 직장 상사들을 불쾌하게 여겼다. 직장 회식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으나, 직장 회식에서 빠지게 되면 그날 회식의 안주꺼리, 험담꺼리가 되는 점이 걱정된다고 밝혔다.

고등학교 3학년 18살의 그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혼란스럽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외부와의 불화가 있었을 뿐이다.[16] 그가 게이라는 점에 대한 편견과 일부 어른들의 수군거림, 철없는 어린이나 또래들의 멸시와 비난 등은 그를 괴롭게 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이반 살이 개집 살이 살 떨린다. 온종일 살얼음 디디듯 불안해서 못살겠다. 부모님은 충격새요. 친구들은 놀림새요. 목사님은 설득새요. 나 혼자만 미운 오리 새끼. 힘겨운 하루하루가 아수라의 귀신 같구나.’(‘이반살이’) ‘세상은 우리들을 흉물인 양 혐오하죠. 그래서 우리들은 여기저기 숨어살죠. 하지만 이런 우리들도 사람인 걸 아나요.’(‘하소연’) 그가 남긴 시 곳곳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편견으로 받은 상처가 묻어났다.[16] 개인의 개성과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전체주의와 단체생활, 조직 문화와 위계서열을 그는 평소 소름돋는 비인간적 시스템이라 강조했다.

신앙 활동

그는 독실한 신자였지만 그는 종교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23] 그는 일부 개신교천주교 신자들의 편견과 외면이 있었지만 신앙을 버리지 않고 천주교 신앙을 지켜나갔다.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던 그는 동성애를 죄악시하고 '하느님의 자녀'로도 받아들여주지 않는 보수 기독교단체들에 대해 동성애자를 죄악시하는 것이야말로 '반성경적'이라고 말하고 있다.[20] 가톨릭 신자였기에 두세 배의 고통을 느껴야 했던 그는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음을 준다면 자신의 죽음은 아깝지 않다"고 그의 유서에 적고 있다.[26] 그는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일부와 자신을 적대시하는 일부에 대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느냐고 항변하였다. 또한 성경의 어디에 성 소수자를 죄인으로 규정했느냐고 항의하였다. 그럼에도 윤 씨는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고 동인련에 기증했던 십자가성모상을 잘 간직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하느님께서 동인련에 축복을 내려주실 거예요"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20] 그는 일부의 편견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포기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임종 직전까지도 십자가와 성모상을 품에 갖고 있었다.

4월 5일4월 7일 동성애사탄, 소돔고모라라는 기독교 단체들의 성명서에 좌절한 그는 4월 11일 천주교 신앙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4월 11일 육우당은 여섯 친구 중 ‘묵주’와 절교를 선언했다.[16]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이틀 뒤 ‘난 가톨릭을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어’라는 고백과 함께 그 선언을 철회했다.[16] 4월 13일 그는 다시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상을 사다 동인련 사무실에 두었다.[16] 그는 한때 잘못된 생각을 할 뻔했다며 성모상과 묵주를 사무실에 가져다 놓았다. 그는 끝내 신앙의 끈을 놓치지 않고 동인련에 기증했던 십자가성모상을 잘 간직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하느님께서 동인련에 축복을 내려주실 거예요"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21]

그가 끝내 일부 개신교, 천주교도들의 편견과 인신 공격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는 누구보다 하느님을 사랑했고, 예수를 닮은 사람이라는 평이 있다. 2013년 4월의 육우당 10주기 추모식에서 "그는 하느님을 누구보다 사랑했었고,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남은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소수자를 사랑하시고 종교적 지도자 세력에게 죄인취급, 이단취급을 받으시다 세상을 위해 죽음을 맞이하셨던 한 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육우당, 그는 진정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다.[27]"는 평이 있다.

논란과 의혹

편견과 차별에 대한 고통

육우당은 생전 겉으로 자신이 당하는 차별에 대해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적소수자였고 자신을 얽매는 차별의 현실을 견뎌내기 어려웠다.[28] '누구보다 활동적이고 유쾌했지만 게시판에 실린 과거 그의 글에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잘 드러나 있다.[22]'는 평도 있다. 동성애자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동료들에 의하면 그는 평소 밝고 명랑한 소년이었다 한다.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정욜은 후일 회상에서 "찰랑거리는 귀걸이화장기어린 얼굴, 곱슬머리에 작은 체구. 그리고 주변 분위기를 유쾌하게 주도하던 그의 밝은 표정이었다. 그는 그렇게 우리와 처음 만났다[4]"고 회고하기도 했다.

정욜은 "그가 지난해 자의로 커밍아웃 한 뒤 많이 힘들어 고등학교를 그만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20] 학교에 자신의 정체성이 알려진 뒤 자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 뒤 자리를 잡기 힘들어 많은 고민을 해왔었다.[29]

여성 동성애자인 박수진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살을 '선택'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면서 "동성애자들 중에 한두 번쯤 자살 시도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주위에 의논할 사람도 하나 없는데다 동성애자임이 알려질 경우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공포에 짓눌리다 결국 자살을 시도하는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성 정체성을 자각한 뒤 자신을 혐오하거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구조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20] 박씨는 또 "동성애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동성애자임이 드러날 경우 따돌림을 견디다 못해 전학을 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사례도 허다하"며 "심지어 아웃팅(본인의 동의없이 동성애자임을 폭로하는 행위) 위협을 당해 돈까지 빼앗겨도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20]

그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왜 범죄취급을 받아야 되느냐며 한탄했다. 또 그는 남들과 좋아하는 대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짐승, 악마 취급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서럽다고 거듭 역설하였다. 육우당은 생전 한 글에서 '솔직히 우리 나라에서 이반[30] 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깨진 유리 조각이 널려 있는 살얼음판을 디디는 꼴이다. 커밍아웃하기 전에 숨 죽이고 다니느라 마음 고생이고, 모든 걸 다 숨겨야 하니까. 커밍아웃하고 나면 사실상 자살 행위에 가까울 정도이다.[22]'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 성 정체성을 사실대로 밝히는 것이 왜 자살 비슷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자결 원인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31] 육우당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 왔다.[32] 경찰에 따르면 H씨는 이 단체 사무실 책상에 남긴 유서를 통해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이 나라가 싫고 이 세상이 싫다”며 “나같은 이들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동성애에 대한 차별 철폐에 애써달라”는 유서를 남겼다.[33] 그러나 그를 비판, 혐오하는 세력을 염려하여 그의 실명과 활동은 2010년대 이후에나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0년 4월 25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에서 ‘고 육우당 10주기 추모 기도회’가 열렸다. 임보라 목사는 “지금 어느 곳에선가 육우당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지 않을까”라는 화두를 제기하기도 했다.[34]

육우당의 죽음에 대해 '동성애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불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역겨운 저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육우당 동지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듯하다.[35]'는 시각도 있다. 그는 유서에서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라며 대한민국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대해 분노했다.[36] 그는 자신이 성소수자가 아니면 아닌 것이지, 그것이 성소수자를 정죄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했다. 그는 유서에서도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는 동성애자다 라구요”라며 스스로 아까운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털어놨다.[36] 이에 대해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가는 고달픔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36]'라는 평도 있다. 인권·사회단체들은 윤씨의 죽음을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가져온 '사회적 타살'로 규정하였다.

자살 사전준비 의혹

그는 일기에서 '남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잘 사는데, 남들 대학 다닐 때 나는 동인련에 있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빈다'고 고백했다.[16] 죽기 전까지 육우당의 곪은 마음을 주위에선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구보다 동인련 활동에 애정을 보였기 때문이었다.[16] 그의 곁에는 4월 24일자로 작성된 여러 장의 유서와 사진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윤 씨가 자살을 차분히 준비해 왔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20] 마음을 굳힌 듯 그는 차근차근 죽음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22] 4월 하순에는 같이 활동하는 회원에게서 디지털 카메라를 빌렸다. 그 안에는 ‘육우당’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22] 그러나 그가 돌려준 디지털 카메라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 이 회원은 “육우당은 실수로 사진이 모두 지워졌다고 말했지만, 마음 정리를 하려 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22] 그가 동인련 카메라에서 사진을 삭제한 것을 두고도 고의인가, 사전에 자살을 준비하기 위한 정리이다 등의 말이 있었다. 그는 4월 24일 날짜로 유서를 작성해두었다.

2003년 4월 28일 그가 다니던 성당 신부님이 집전한 장례 미사가 끝나고, 그는 한 줌 재로 돌아갔다. 동인련 정욜 대표는 “비관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죽음은 동성애를 억압하는 우리 사회가 빚어낸 타살이다”라고 말했다.[22] 2003년 5월 3일 국내 인권단체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밤을 열었다.[22] 그러나 그의 죽음이 계획적인 사고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이미 죽기 며칠 후인 5월 초에 약속을 잡기도 했으며, 각종 행사 일정과 세미나 참여 등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한 점을 들어 사전에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유서에 '한복을 입고 죽고 싶었다'고 남겼다. 왜 이 옷을 입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11] 그는 한복을 옆에 놓아둔 채 목을 맸다.[11]

사회적 타살론

육우당의 죽음은 사회적 폭력에 의한 타살이라는 시각이 있다. 인권연대 측은 “육우당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 희생된 수많은 청소년 성소수자들 가운데 한 명”이라 하였다.[37] 동성애자들은 그의 최후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이해된다”고 입을 모은다.[3] 성 소수자들은 육우당의 죽음을 자신의 이야기로 여겼다.[35] 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모임인 ‘친구사이’의 전명안 대표는 “어려서부터 경험하는 동성애에 대한 혐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끝끝내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이라고 표현했다.[3] 숨막히는 이 사회의 ‘공기’가 동성애자들의 목을 조른다는 것이다.[3]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장병권은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차별 그리고 보수적이고 반인권적인 기독교계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하였다.[8] 동성애자들은 윤씨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주장한다.[3] 일부 기독교의 독선과, 한국사회의 편견과 배타성, 폐쇄성이 그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소돔과 고모라와 관련 유황불 성명서 관련해 육우당이 그야말로 사회적 타살이라고 말할 계기를 기독교에서 제공한 셈이었다는 시각이 있다.[38] 2013년 5월 14일 한국여성민우회가 매월 진행하는 대중강좌‘다다익선’에 연사로 초청된 기독교 목사 임보라도 육우당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적하였다.[39]

동인련 활동가 지혜 역시 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라 하였다. '그는 유언장에서 아비규환 같은 세상이 싫고, 강자도 약자도 없는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 사회에서 동성애자가 자살을 택하는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세상에 지쳐 죽음을 택하는 성적소수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성적지향에 관계없이 사랑할 기본적 권리조차 가지지 못하고, 가정붕괴의 원인, 에이즈의 주범, 더러운 변태로 몰려서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정신병원에 끌려가야만 하는 것이 이 사회 동성애자들의 현실이다. 실제로 동성애자들의 우울증과 자살률은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하지만, 이는 동성애자의 문제가 아니라, 동성애자를 냉대하고 혐오하는 사회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18]' 또, '"죽은 뒤엔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나는 동성애자다’라고요"라는 육우당 동지의 유서는 성소수자들의 사무친 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골방’ 속에 갇혀 있길 강요받는 성소수자들의 자화상이었다.[35]'는 시각도 있다.

또한 일부 기독교 진영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차별금지법 통과되면 청소년들은 동성애로 병들어 자살한다"는 피켓을 들이미는 일부 기독교 단체는 이 폭력과 비극의 책임이 동성애가 아닌 바로 당신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40]"는 시각도 있다. 평론가 김겸은 '그를 죽인 것은 우리 안의 호모포비아이고, 편견이 불러온 폭력과 억압이다.[41]'라고 봤다. '특히 청소년 동성애자들의 존재조차 부정하는 보수언론과 기독교 단체의 폭력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41]'는 것이다. 그는 '죽음으로 그 자신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관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커밍아웃’시킨 셈이다.[22]'는 시각도 있다.

동성애자인권연대의 고승우 사무국장은 "사람을 사랑 하라는 교리를 전파하는 기독교에서 사람을 죽이는 '유황불의 심판'을 언급했을 때 너무나 분노했다"고 밝혔다.[42]

또한 그의 죽음을 두고 "이 사회에서는 신앙의 이름 아래 수많은 폭력들이 저질러지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한국 교회의 적대적 인식과 편견과 차별이 한 신앙인이기도 했던 그의 생애 를 옥죄고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고인의 죽음은 한국 교회에 의한 타살이다.[42]"는 시각도 있다.

학교 교육의 문제점

학교의 교육이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부추긴다는 점과 학교 수업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도덕적, 윤리적 차별을 부추긴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육우당에 의하면 중학교, 고등학교도덕, 윤리, 생물 교과서 혹은 그 과목 시간에 동성애를 비윤리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처럼 왜곡하는 내용을 수업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학교에서 교사들에 의해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주입받은 학생들이 사회로 나오면 당연히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기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유언장에는 ‘동성애자로 태어난 걸 후회하기도 했고, 이나라가 싫고 이 세상이 싫다’는 구절이 쓰여 있다.[41] 영화감독 겸 평론가 김겸은 '육우당의 자살 소식을 듣고 당시 (제도) 학교중심주의, 나이주의, 동성애 혐오증 등에 시달리며 간신히 버텨오던 내 안이 단번에 무너지는 듯했다.[43] 며 학교 교육이 성 소수자들을 차별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언급하였다.

육우당은 학교의 도덕, 윤리, 생물 수업 시간에 동성애를 이상한 것처럼 묘사하는 수업 내용부터 사라져야 한다고 언급했다. 김겸은 동성애를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하는 학교 수업 내용 역시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학교교육은 동성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심어주기는커녕 비정상이라고 가르친다.[41] 이런 교육의 영향으로 청소년동성애자들은 성정체성을 긍정하기 전에 자신이 동성애자임에 괴로워하고 수치스러워한다.[41] 그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학교의 수업 역시 육우당의 자살을 부추긴 것으로 봤다.

한기연의 동성애 문제 참여

육우당의 사건은 한기연이 기독교 안에서 동성애 문제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발점이 되었다.[26] 1992년 출범한 한기연은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청소년보호법시행령 중 동성애 삭제권고결정에 반박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성명이 있은 후 육우당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기독교 내 성적 소수자 활동에 적극 동참하였다.[44] 그가 죽자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약칭 한기연)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약칭 한기총)를 항의방문하였다. 한기연은 육우당의 죽음을 계기로 성 소수자 사안과 관련해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동성애에 대한 내부 논의를 더 적극적으로 진행하게 됐다.[45]

한기연 김바울 대표는 "윤현석씨의 죽음 이후 한기총 대응 활동을 전개해 오면서 동성애자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는 기독교인들이 증가했다"며 "넓어진 인식의 지반을 바탕으로 교계 내에서 동성애자 문제를 더욱 공론화하는 데 힘쓰겠다"고 밝혔다. 김 대표는 또 "우리의 이러한 활동이 지금도 신앙과 자신의 성적 정체성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는 분들께 힘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46] 자신이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동성애자인권연대 정욜 대표 역시 "동성애자들이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다 마지막으로 신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 교회가 이들을 오히려 밀어내고 있는 형국"이라며 교회의 변화를 촉구했다.[46]

기독교 단체의 갈등

2003년 4월부터 6월 무렵 그의 자살을 둘러싸고 기독교계 내에서 일부 단체간 갈등이 일기도 했다.[47] 당사자는 기독교계내 보수적 목소리를 대변해온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대학생들로 구성된 진보성향의 한국기독청년연합회(한기연)이었다.[47] 윤군의 죽음이 한기총의 반박성명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다는 게 한기연의 주장이었다.[47] 2003년 4월국가인권위원회청소년 보호위원회에 ‘동성애 사이트’를 청소년유해매체 심의기준에서 삭제하도록 권고하자 한기총은 반박성명을 냈다. “동성애로 성문화가 타락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진노로 유황 심판으로 망했다. 동성애 삭제 권고 수용을 즉각 철회하라”는 내용. 이때까지는 별다른 갈등의 움직임은 없었다.[47] 그러나 같은달 26일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그가 목을 매 숨진채 발견되면서 상황이 반전했다.[47] 보수단체 측 모 목사는 육우당의 죽음을 두고 자기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우리가 사과할 이유가 없다고 입장표명했고, 분개한 성소수자 운동가들과 인권운동가들은 2003년 7월까지 수시로 항의방문했다. 그러나 모 목사 등은 우리가 살해한 것이 아닌데 왜 사과하느냐고 답했고, 모 목사들 및 일부 보수 기독교 신자들의 발언에 분개한 성소수자 운동가, 인권운동가들은 보수주의 기독교 인사와 갈등, 방송, 공청회 논쟁, 거리 논쟁, 실랑이,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한기연과 동인련 회원 60여명은 2003년 6월 5일 한기총이 입주한 서울 종로 5가 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한기총의 사과를 촉구하며 윤군의 추모예배를 진행했다. 한기연은 한기총이 오는 19일까지 사과하지 않을 경우 ‘2차 행동’에 돌입할 계획이다. 6월 5일 당시 김바울(고려대 3년) 한기연 회장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기총 등이 평소 보여온 동성애 관련 편향적 시각이 한 인간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밝혔다.[47] 이에 대해 한기총은 인권위에 대한 자신들의 반박성명은 특정 동성애 단체나 개인을 직접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47] 한기총 관계자는 “우리의 반박성명이 윤군의 자살로 이어졌다는 것은 한기연측의 억지일 뿐”이라며 “기독교인이라면 인권문제에 앞서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반박했다.[47] 육우당의 죽음을 놓고 한기총 등의 규탄성명이 육우당의 좌절감을 심화시켰다는 주장과 개인의 선택일 뿐이라는 반론이 맞서 한동안 논쟁꺼리가 되었다.

2003년 6월 22일 한기총은 그의 죽음에 사과하라는 다른 기독교단체의 요구를 거절했다. 4월말 자살한 그의 죽음과 관련, 기독청년단체들과 동성애자인권연대로부터 공식 사과를 요구받아온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길자연 목사, 아래 한기총)가 끝내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다.[46] 이들 단체들은 지난 4월초 '동성애는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가정 붕괴와 에이즈 등을 초래한다'는 내용의 한기총 성명서가 가톨릭신자였던 그의 죽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한기총의 사과를 요구해왔다. 5월 23일6월 9일 한기총 관계자와 2차례 만남을 갖고 유감이라도 표명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한기총을 이를 거부했다. 단체들은 또 동성애 관련 공개 토론회를 열어 상호이해를 높이자는 제안도 했지만, 한기총은 이마저도 '공개토론회를 할 만큼 한기총 내에 입장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46] 일부 진보적 기독교단체와 인권단체들의 주장에 대해 익명의 기독교 인사는 자신들이 자살하라고 발언하지는 않았다며 반박했다.

6월 22일 한기연 등 4개 기독청년단체와 동성애자인권연대는 한기총이 자리한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고수하며 유감 표명마저 거절한 한기총의 각성을 촉구했다.[46] 한기연과 동인련의 사과 요구에 한기총 김청 홍보국장은 "한기총이 발표한 성명서는 청소년유해매체 심의기준에서 '동성애'를 삭제토록 권고한 국가인권위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 동성애자를 정죄하려는 뜻은 없었다"면서도 공식 사과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 국장은 또 "향후 동성애에 관한 신학적 정립과 선교대책에 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성명에서 밝힌 원론적 입장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해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입장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밝혔다.[46]

동인련, 한기연의 사과요구 거부

2003년 4월 26일부터 동성애자인권연대한국기독청년학생회총연맹 등은 한기총 일부 인사와 일부 기독교 인사, 단체들의 성명서가 육우당의 심경의 변화, 자살, 좌절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사과를 정식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과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 9일부터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와 동인련은 한기총 입주 건물 입구에서 시위를 벌이며 한기총 등의 육우당 자살 사건에 대한 사과와 애도를 요구하였다.[48]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거부되었고, 이들은 계속 한기총 건물 근처에서 한기총 및 일부 기독교 단체, 인사들의 발언 취소와 사과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기독교 단체 및 인사들도 맞불 방문을 하여 우리가 죽이지 않았으니 사과할 이유가 없다며 맞받아쳤다.

2003년 6월 23일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회장 김바울)과 동성애자인권연대는 오전 11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길자연)을 방문하고 동성애에 대한 한기총의 입장유보를 요청하는 한편, 지난 4월26일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자살한 윤 모군에 대한 애도를 요청했다. 이 방문에서 한기연, 동성애자인권연대와 한기총측과의 공식적인 면담은 아니었으나 이들 단체에서 한기총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앞 시위를 벌이고 게시판을 통해 항의한 것에 대해 특별한 답변이 없었던 한기총측이 관계자를 통해 단체 대표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다.[49] 그러나 한기총 등은 사과를 거부하였다. 한기연동성애자인권연대의 주장은 윤 모군의 죽음이 한기총이 4월 발표한 '동성애 사이트 허용 철회 성명' 때문이라는 것과 한국기독교 대표기관인 한기총이 '동성애'를 정죄하고 있는 데 대한 입장을 철회해달라는 것으로 이에 대해 김청 홍보국장은 "동성애성경에 위배된다는 기본적인 입장을 유보할 수는 없다"고 한기총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한편, "윤 모군에 대한 사과를 이 자리에서 결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49]

6월 23일의 공개 면담에서 그의 죽음문제에 대해 한기연 김 대표는 "4월 발표한 한기총의 성명이 동성애자들을 입지를 축소시켰고 결국 윤 모군의 자살도 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윤 모군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며 유가족들에 대한 애도표현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청 홍보국장은 "문서를 통한 한기총의 공식적인 사과는 어려울 것"이라며 "유가족들에 대한 애도는 고려해 보겠다"고 답했다.[49] 동성애자인권연대 정욜은 "사회에서 소외를 받은 동성애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종교가 기독교인데 한국 기독교 대표기관에서 동성애자를 매도할 경우 이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이에 김 홍보국장은 "틀린 것은 틀리다고 이야기하고 그들을 끌어 안을 수 있는 선교적인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고 답했다.[49] 한기총 성명의 타살여부에 대해서 정욜은 "(당시) 한기총의 성명에 동성애자들을 매도하는 표현이 있으며 이같은 교계의 시각이 동성애자들을 자살로 몰고가고 있다"며 "윤 모군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며 한기총에 이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 홍보국장은 "4월 발표한 성명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소수의 인권에 집착하여 사회적 통념과 국민 대다수의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한 비판이지 동성애자들 전체를 매도하는 성명은 아니었다"며 "윤 모군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한기총의 성명으로 인해 윤 모군이 자살했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답변했다.[49] 협상은 결렬되었고 일부 기독교 단체들은 육우당의 죽음에 대한 사과를 거부했다.

6월 27일한기연 김바울 연합회장과 동인련 정욜 대표는 서울 종로에 있는 한기총 사무실을 방문하여 사과를 요구했다. 한기총 김청 홍보국장은 공개 사과가 어렵다면 고인의 부모에게 구두로라도 유감 표명을 해달라는 요구 역시 거절했다.[50] 김청 홍보국장은 "동성애는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기총의 성명서가 동성애자를 일방적으로 매도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한 육우당의 자살 원인을 한기총의 성명서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인련 정욜 대표는 "한기총 성명서를 보면 동성애자를 AIDS의 원흉이고 가정 파괴의 주범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매도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고 반박했다. 동성애자의 구원에 대해 고민한다고 하면서 그런 문구를 쓸 수 있느냐는 강한 항의도 있었다.[50] 반대로 일부 목사 및 신자들도 회관 근처에서 사과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피켓과 확성기를 소지하고 농성을 벌였다. 면담에서 김청 홍보국장은 "소수 인권도 중요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본 내용을 버리며 이들을 끌어안는 것은 옳지 않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해야 한다"며 한기총의 입장을 고수했다. 김바울 연합회장은 “사람이 죽어도 틀린 것은 틀렸으니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에 맞지 않는다. 예수가 세리나 창녀를 비난해 죽인 일이 있는가?"라며 강한 어조로 반박했다.[50] 한기총 측에서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선택의 자유가 있다. 죽음으로 갈 상황이 주어졌다고 해도 죽음을 택하는 것은 그 사람 책임이지 한기총만의 책임은 아니다.[50]"고 밝혔다. 같은 날 기독교회관의 동성애자인권연대한국기독청년학생회총연맹 항의방문단 맞은편에 와 있던 다른 목사들과 신자들은 우리가 죽이지 않았는데 왜 사과하느냐며 확성기와 피켓을 들고 반대시위를 하기도 했다.

7월 9일의 한기연, 동인련 등의 한기총 방문에서도 한기총 측은 사과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한기연은 6월 23일 한기총의 유감 표명을 촉구한 이후, 7월 9일 오후 4시 한기총 사무실을 다시 방문해, 40분 가량의 면담하였으나 긍정적인 대답을 얻지 못했다.[51] 7월 9일의 면담에서도 한기총 김청 홍보국장은 육우당 씨의 죽음이 한기총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기에 공식적인 사과성명을 낼 수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한기총의 입장을 재확인한 한기연 및 정의평화를위한기독인연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새민족교회 청년회, 동성애자인권연대 등은 유감을 표명하지 않는 것은 한기총이 동성애자의 죽음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무책임한 태도라고 반박했다.[51] 7월 9일에도 사과 반대를 주장하는 일부 목사들과 신도들도 근처에서 사과 불가 집회를 개최했다. 한기총 김청 홍보국장은 "개인적으로는 그 사람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지만, 한기총의 이름으로 공식적인 애도성명을 발표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 이유로 "한기총이 성명서를 내야 할만큼 그 사람의 죽음에 책임 질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51] 또 "성명서를 발표하면 한기총의 성명서(4월 7일자·청소년보호법 '동성애' 삭제반박 관련)로 인해 자살한 것이라는 인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며 간접적인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51] 사과 반대 집회를 개최한 목사들과 신도들은 건물 밖에서 불청객을 쫓아내라, 항의방문단 추방을 외치기도 했다.

7월 22일 한국기독청년학생회총연맹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길자연 목사, 한기총) 사무실이 있는 서울 연지동 소재 한국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그의 죽음에 대해 한기총 규탄 2차 집회를 개최했다.[48] 그러나 한기총 본부의 문은 잠겨있었고, 이들의 출입은 거부되었다. 2차 규탄 집회에는 동성애자인권연대, 새민족교회 청년회, 정의평화를위한기독인연대, 한국기독청년학생연합회 등이 동참,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48] 7월 22일 발표한 공동 성명서에서 "한기총이 발표한 성명이 육우당의 죽음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유감조차 표명할 수 없다는 한기총의 입장은 비정상적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성명에는 "한기총의 성명서가 사회의 아주 통속적인 기준으로 동성애자를 재단하고 편협하게 비난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현실 앞에서도 유감조차 표명할 수 없다는 한기총을 규탄한다"고 주장했다.[48] 7월 22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은 끝내 이들의 요구를 거절했다.[52] 22일 한기연 등 4개 기독청년단체와 동성애자인권연대는 한기총이 자리한 종로5가 기독교연합회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고,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입장을 고수하며 유감 표명마저 거절한 한기총의 각성을 촉구했다.[52] 이후 육우당의 죽음을 놓고 기독교 단체간 갈등, 논쟁이 계속되었다.

차별 금지법 논란

다음을 참고할 것 차별 금지법 육우당 사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학력, 나이, 병역 등 모든 조건에 따른 차별을 방지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 발의 논의가 나타났다.[53] 2007년 10월 성적 지향, 학력 등의 이유로 비합리적인 불이익을 방지하는 차별 금지법이 입법예고됐다. 2010년 10월 경기도에서는 전국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됐다.[16] 그의 자살 이후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 문제가 재 공론화되다가 2013년 4월 17일 한국의 국회의원들에 의해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었다. 4월 17일 국회에서 발의된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종교, 정치적 의견, 학력 및 병력,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에 반대함으로써 성소수자의 인권을 합법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나, 몇몇 의원이 '법안 철회'를 밝히면서 난국에 처했다.[24] 일부 단체들과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차별금지법동성애를 조장하고 부추긴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차별금지법 통과되면 청소년들은 동성애로 병들어 자살한다”는 피켓을 들이밀기도 했다.[54] 이에 따라 육우당 추모위원회를 비롯한 인권단체들은 2013년 4월 22일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청소년 성 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25일에는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기독교계의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추모 기도회를 진행했다.[24] 2013년의 육우당 추모기간을 전후하여 성 소수자 인권 운동가들은 차별금지법안에 환영하였으나,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포기로 논란이 벌어졌다.

동성 결혼 법제화 운동

다음을 참고할 것 행복 추구권 그의 죽음을 계기로 결혼 법제화 여론과, 동성애자에게도 자녀 입양을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가시화되었다.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비관한 10대 동성애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 성적 소수자의 인권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33] 특히 동성간의 결혼을 법제화하는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춰 한국에서도 동성애자에게 결혼과 함께 입양으로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제공, 성적 소수자에 대한 근거없는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다.[33] 이후 동성애자의 결혼을 허용하느냐 여부를 놓고 사회적으로 논쟁,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동성 결혼에 대한 거부 여론이 우세하였다.

2003년 3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동성애를 차별적으로 명시한 것은 헌법 제10조(행복 추구권), 제11조(평등권), 제21조(표현의 자유) 등을 침해한 행위로 판단, 청소년 보호 위원장에게 청소년 보호법 시행령 제7조 ‘개별 심의 기준’ 중 ‘동성애’를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 성적 지향의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33] 2005년 이후 동성애자에 대한 입양 거부는 사라졌지만, 동성 간의 결혼은 각 시청, 구청의 민원계나 주민생활계에서 번번히 거부, 반려되었다.

아호와 필명

육우당(六友堂)·미동(美童)·설헌 등은 그가 인터넷에서 사용하던 필명들이다.[22] 2003년 4월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이 죽고 난 뒤에나 이름을 당당하게 공개할 수 있으리라 말했다. 유서에서도 그는 내가 죽은 뒤에는 당당하게 내 이름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육우당은 그가 거의 매일 사용하다시피 했던 물건 여섯 가지를 말한다(묵주 파우더 녹차 술 담배 수면제).[22] 이를 두고 "짧고 외로운 삶의 곁을 지켜준 친구라곤 그 여섯이 전부였다.[28]"는 평과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나 보다. 그에게는 묵주도 친구였다.[55]'는 평도 있다. '미동'은 남성 동성애자 사이에서 여자 역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설헌'은 그가 좋아했던 '허난설헌'에서 따온 별명이다.[22] 허난설헌은 그가 존경하던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2001년 한때 허난설헌 또는 윤난설헌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다가 줄임말인 설헌으로 바꾸어서 사용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이름을 공개할 수 없었고, 대신 필명과 호를 사용하였다. 그의 초기 추모제에서도 그의 이름은 공개되지 못하였다. 그의 이름은 2010년 이후에나 한국 사회에 공개될 수 있었다.

작품 활동

중학교 무렵부터 그는 시조와 시, 산문, 칼럼 등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 중 일부는 그가 가입한 몇몇 시조동호회와 문학동아리에 발표되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설헌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고, 나중에는 육우당이라는 필명으로도 시, 시조, 산문, 칼럼 등을 발표하였다.

환생

내 혼은 꽃비 되어 당신 곁에 내리는데
당신은 이런 나를 못 느끼고 계시군요.

임이여 내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아요

이반 살이

형님 형님 사촌 형님 이반 살이 어떻소
말도 마라 이반 살이 개집 살이 살 떨린다
온종일 살얼음 디디듯 불안해서 못 살겠다
부모님은 충격새요 친구들은 놀림새요
목사님은 설득새요 나 혼자만 미운 오리 새끼
힘겨운 하루하루가 아수라의 귀신같구나
형님 형님 어쩌겠소 우리 팔자 다 그렇지
종로에서 술이라도 한잔 하십시다

그러자 오랜만에 잔뜩 취해나 보자꾸나.[23]

아카시아

요염한 아카시아 향기가 화사하네.
화사한 이 향기에 내 마음은 설레지네.

당신도 화사한 이 향에 취해보지 않을래요.

태초에 인간이란 존재는 쌍으로 붙어있었대.

머리 둘, 팔은 넷, 다리도 넷.
거만한 인간에게 분노한 제우스
'우르르 쾅!' 번개를 내리쳐서
쌍으로 붙은 인간은 '뚝!' 떨어져나가
머리 하나, 팔 둘, 다리 둘이 되었지.

그때부터 우리의 고난은 시작됐어.
서로 떨어지게 된 인간은 남은 반쪽을 찾아
이리저리 남녀가 만나게 됐고

어떨 때는 남자끼리 여자끼리 만나게 됐지.
그게 바로 우리들. 언제나 그늘처럼 존재해 온 우리들.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그들은 우리들을 멸시하고 우리들은 분노하고.

기가 막혀 기가 막혀.
나머지 반쪽을 찾겠다는데 뭐가 그리 이상해.
우리들은 지극히 정상이야 너희들과 약간 다를 뿐이지.
정 우리들이 역겹다면 제우스에게 따져.

오랜 세월 박해받아 온 우리들
이제는 희망을 찾아
무지개를 휘날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성적소수자.

제우스의 번개로 내 반쪽 찾아다니는 아름다운 방랑자.[56]

이 시조는 영화 <헤드윅>에 나오는 노래 'Origin of Love' 가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11]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생전에 출간하지 못하고, 2006년2013년 성 소수자 모임과 그의 추모회에서 간략하게 발표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2003년 청소년보호법에서 동성애가 청소년 유해 단어라는 주장을 하는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의 논쟁 때 반론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생전 자신은 '이성애주의와 금욕주의와 도덕주의를 지향하는 이런 사회에서는 이단자나 일탈자에 불과할 것'이라며 자신의 작품이 정당한 평가와 작품성으로 승부를 겨룰 날이 오기를 희망하였다.

평가와 비판

평가

동성애자 차별 철폐 문제에 꾸준히 저항했다. '고인은 아무리 두들겨도 꿈쩍 않던 동성애 억압의 문제에 돌팔매질을 했다.[18]'

동료들은 H씨에 대해 “시조를 좋아하고 고전도 많이 알던 청년으로 짧은 머리에 늘 밝은 표정을 짓던 귀여운 동생이었다”고 회고하였다.

가톨릭 교회 신자였던 그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좌절해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고통 받는 청소년 성(性) 소수자 인권의 상징이 됐다.[57] 2000년대 중반까지도 그는 이름을 공개할 수 없었다. 2006년 추모제 때에도 그는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지났지만 본명을 드러내지 못했다.[5] 이를 두고 "보통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며, 이 사회의 모순에 저항했던 이들을 운동진영에서는 열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열사는 고사하고, 죽어서도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동성애자였다.[5]"라는 평도 있다. 2010년 이후 그에 대한 조명 여론이 나타나, 평가 및 추모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인권사회단체들은 또 "윤 씨의 죽음은 차가운 편견과 멸시, 소외와 차별의 빙벽 속에 갇혀있는 이 땅 모든 동성애자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면서 동성애자들을 자살이라는 막다른 선택으로 몰아넣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폭력을 비판했다. 나아가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일부 기독교단체들과 언론에 대해서는 "단지 성적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반인권적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냐"며 되물었다.[58] 인권사회단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윤 씨와 마찬가지로 절망과 외로움 속에 방황하고, 손목을 긋고 줄에 목을 매다는 동성애자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며 "'상식'과 '사회적 통념'을 가장해 동성애자들을 끊임없이 죽음의 낭떠러지로 내모는 부당한 편견과 차별행위는 중단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58]

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니라 사회적 편견차별 그리고 보수적이고 반인권적인 기독교계에 의해 살해당했다.[59]"는 평도 있다. 또 그의 죽음으로 청소년보호법 동성애 차별조항의 문제점을 널리 알렸고 청소년보호법의 개정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도 있다.[60] 또 '육우당 동지의 유서는 성소수자들의 사무친 마음을 보여 준다. 그는 ‘골방’ 속에 갇혀 있길 강요받는 성소수자들의 자화상이었다.[61]'는 시각도 있다. 그밖에 '그는 죽음으로 그 자신뿐 아니라 동성애에 관한 한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커밍아웃’시킨 셈이다[22]'라는 평가도 있다.

비판

틀:부분 토막글 한편 '자살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 자살은 동성애자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현실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 억압 없는 다른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하다.[18]', '동성애 억압에 맞선 투쟁만이 대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18]'이라는 시각도 있다.

기타

그의 사망지는 동대문구 회기동의 E빌딩 3층 구 동인련 사무실이라고도 하고, 휘경제1동의 E빌딩 3층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건 이후 E빌딩 건물주는 동인련에게 나가줄 것을 요구했고, 용산구 후암동 기독교상조회 빌딩 5층(서울역 4호선 11번출구)에 입주했다가 바로 옥탑방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이후 성북구 성북동을 거쳐 2010년 1월 충정로 등으로 계속 이주해야 했다.

영화감독 김겸은 '2003년 4월 26일 장국영의 죽음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닥쳤던 19살 동성애자 육우당의 자살 소식을 듣고 당시 (제도) 학교중심주의, 나이주의, 동성애 혐오증 등에 시달리며 간신히 버텨오던 내 안이 단번에 무너지는 듯했다.[43]'고 평하였다. 이후 청소년 퀴어로서 우리가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실험하기 위한 프로젝트 그룹 ‘앵그리 인치’를 결성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43] 김겸은 "고 육우당 추모의 글을 실으며 청소년 동성애자로서 대사회 커밍아웃을 했다.[62]" 한다.

2007년 10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만든 ‘차별금지법’이 입법예고됐다. 그러나 일부 개신교 측에서 법안에 ‘성적 지향’이 들어 있는 것에 크게 반발해 법안이 수정되었다.[63] 이후 ‘동성애허용차별법안 반대국민연합’이 결성되어 신문에 동성애 혐오 광고를 올리는 등 한때 논란이 되었다.[63]

2003년 4월 작가 이경화는 '육우당'을 기리기 위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한 소년의 갈등과 방황을 통해 10대 동성애자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부각시킨 소설"인 소설 나 를 출간하였다.[1]

2013년 4월 27일 서울에서 개최된 육우당 추모제 기간 중에는 성소수자 인권 보장 문화제가 시작되었다.[64]

참고 문헌

  • 이경화, 《나》 (바람의 아이들, 2005)
  • 한채윤,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연대, 2010)
  • 지승호, 《후천성 인권 결핍 사회를 아웃팅하다:두려움에서 걸어 나온 동성애자 이야기》 (시대의창, 2011)
  • 정욜, 《브라보 게이 라이프》 (나름북스, 2011)
  • 동성애자인권연대, 《작은무지개들의 비밀일기》 (동성애자인권연대, 2011)
  • 육우당, 《내 혼은 꽃비 되어》 (동성애자인권연대, 2013)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우리는 희망을 변론한다》 (도서출판 부키, 2013)
  • 바네사 베어드, 《성적 다양성 두렵거나 혹은 모르거나(10)》 (김고연주 옮김, 도서출판 이후, 2007)

참고 자료

각주

  1. 1.0 1.1 비버족의 표식 연합뉴스 2003.04.13
  2. [특집| 차별금지법 논란]‘차별의 범위’에 무슨 내용 담겼길래? 주간경향 1024호
  3. 3.0 3.1 3.2 3.3 3.4 어느10대 동성애자의 자살 한겨레21 2003.05.08
  4. 4.0 4.1 육우당은 여전히 희망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참세상 2006.04.18
  5. 5.0 5.1 5.2 5.3 “내 혼은 꽃비 되어” 참세상 2006.04.26
  6. 남편 사랑 못 받은 어머니, 동성애자 아들 만든다? 프레시안 2013.04.23
  7. 7.0 7.1 내가 믿는 하느님은 나를 받아줄 것이다. 당당뉴스 2007년 10월 29일자
  8. 8.0 8.1 8.2 그의 바람은 꽃비 되어 저항으로 다시 피어나리니 참세상 2008.01.30
  9. 9.0 9.1 [기획 - 청소년인권운동, 길을 묻다 ⑨-<2>]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운동, 그 시작을 꿈꾸며 인권오름 제46호 (2007년 03월 21일자)
  10. 2003년 4월에서 벗어나 벽장 밖으로 나서다 미디어스 2013.04.28
  11. 11.0 11.1 11.2 11.3 11.4 "슬퍼 맙시다. 다시 떠나보내지 맙시다" 오마이뉴스 2003.05.04
  12. 동성애자 패널 빠진 KBS <100인 토론> 오마이뉴스 2004.02.09
  13. 13.0 13.1 이은미 당선자, “8년 전 쓴 글, 성소수자들에게 읽히길 바란다” 여성신문 2013.05.02
  14. 하느님과 만난 동성애 위키트리 2012.10.18
  15. '하나님과 만난 동성애' 향린교회에서 예배 크리스천투데이 2010.12.02
  16. 16.00 16.01 16.02 16.03 16.04 16.05 16.06 16.07 16.08 16.09 16.10 16.11 16.12 16.13 16.14 16.15 16.16 나의 일곱번째 친구는 누구입니까 한겨레신문 2013.04.26
  17. 청소년유해매체물에 '동성애' 삭제키로 오마이뉴스 2003.04.29
  18. 18.0 18.1 18.2 18.3 18.4 "네가 바라던 '동성애자 해방세상', 우리가 만들겠다.", 문화사회 제36호(2003년 05월호), 문화연대
  19. “동성애자가 교회에서 결혼해도 하늘 안 무너져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1.04
  20. 20.0 20.1 20.2 20.3 20.4 20.5 20.6 20.7 20.8 20.9 한 동성애자의 죽음을 통한 절규 Archived 2014년 1월 5일 - 웨이백 머신 인권하루소식 2003년 04월 29일 (화) 제 2325 호
  21. 21.0 21.1 21.2 21.3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겠죠":20살 삶을 마감한 한 동성애자의 '절규' 오마이뉴스 2003.04.29
  22. 22.00 22.01 22.02 22.03 22.04 22.05 22.06 22.07 22.08 22.09 22.10 22.11 22.12 22.13 22.14 22.15 22.16 죽음으로 마감한 ‘커밍아웃’ Archived 2013년 12월 13일 - 웨이백 머신 시사저널 2003.05.15
  23. 23.0 23.1 23.2 23.3 23.4 23.5 23.6 23.7 23.8 10년전 기독 청소년 ‘육우당’이 왜 목을 맨 지 아십니까? 미디어오늘 2013.04.27
  24. 24.0 24.1 24.2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왜 문제가 되나요?" 오마이뉴스 2013.04.28
  25. 25.0 25.1 "죽은 뒤엔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겠죠"
  26. 26.0 26.1 기독교 안의 동성애, 죄의 형틀 벗는가 오마이뉴스 2004.06.21
  27. 이제 너의 7번째 친구가 되어줄게 에큐메니안 2013.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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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성 소수자를 칭하는 다른 칭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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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10대가뛰어든세상] 청소년 동성애는 비행이라고? 한겨레 200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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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 58.0 58.1 "동성애자 윤모 씨 죽음은 사회적 타살" Archived 2014년 1월 5일 - 웨이백 머신 인권하루소식 (인권운동사랑방) 2003년 04월 30일 제2326호
  59. 그의 바람은 꽃비 되어 저항으로 다시 피어나리니 Archived 2014년 1월 5일 - 웨이백 머신 인권오름 제 89 호
  60. 동성애자인권연대 15주년 기념, 사무실 이전을 위한 후원의 밤에 초대합니다 !! Archived 2014년 1월 5일 - 웨이백 머신 동성애자인권연대의 2012년 08월 29일자 후원회 초대장
  61. 청소년 동성애자 육우당 사망 10주기:숨통을 죄는 억압의 굴레에 맞서 싸우자 레프트21 2013.04.15
  62. 도돌이표 질문1 한겨레21 2004년 7월호 제515호
  63. 63.0 63.1 신앙인의 고뇌 담은 동성애자 이야기 발간 가톨릭뉴스 2010.12.08
  64. 대한문 앞에서 '성소수자 인권 보장' 문화제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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