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의 민족학교 설립

최근 편집: 2019년 7월 17일 (수) 15:39

해외 운동 10년 계획을 세우다

82년 말에 해외운동과 미주운동의 현황과 문제점을 파악한 후 나는 망명 생활이 10년  정도 갈 것으로 예상하고 해외운동 10년 계획을 세웠다. 중요한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 문제가 많은 미국 내 기존 운동권을 정비,강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아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
  • 1세(고교 졸업 후 이민 온 세대) 와 1.5세(중고등학교 재학 중 이민 온 세대)를 중심으로 한 청년운동을 시작하고 그 청년운동 을 토대로 해서 2세(초등학교 재학 중,또는 그 이전에 이민 오거나 미국에서 태어난 세대) 운동을 개척해 나간다.
  • 동포들이 1만 명 이상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청년운동단체를 만든 후 전국적 연합조직으로 묶는다. 서북부 지역은 시애틀,중서부 지역은 샌프란시스코,서남부 지역은 LA, 중북부 지역은 시카고,중남부 지역은 달라스,동북부 지역은 뉴욕, 동중부 지역은 워싱턴 DC,동남부 지역은 애틀란타를 거점으로 한다.
  • 청년운동체는 학습과 훈련을 충실히 하고 개인주의,자유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여 높은 통일성과 규율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시킨다.
  • 전국적 청년운동연합체를 만든 다음에는 장노년 층의 운동체를 만들어 청년운동체와 하나로 묶는다.
  • 미국에 청년운동체를 만든 후에는 유럽,호주,캐나다 등지 에도 청년운동체를 만들어 기존의 일본 청년운동까지 포함한 해외 청년운동연합체를 만든다.
  • 청년운동체가 만들어진 각 지역에는 센터(마당집)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활동,민족문화 보급 활동,동포사회 봉사활동 등을 해간다.
  • 80년대 말쯤으로 예상되는 조국운동 역량의 국제사회 진출에 대비하여 국제연대운동을 집중적으로 개척 발전시킨다.
  • 평화운동과 문화 운동을 적극 개척 육성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세운 계획 몇 가지는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말았다. 1만 명 이상의 동포 거주지마다 청년운동체를 만든다는 것도 조직관리가 예상보다 힘이 많이 들어 애틀란타,휴스턴 등지의 조직 작업은 아예 포기해 버렸다. 마당집 설립도 시애틀,덴버, 달라스에서는 하지 못했고, 해외 청년운동 연합체 건설도 일본의 청년운동체는 포함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2세 운동의 개척도 약간의 성과밖에 올리지 못했다.

‘민족학교’의 설립

그렇게 해외운동 10년 계획을 세운 후,나는 나를 해외운동의 거점으로 삼아 나부터 청년운동체를 만들어 가기로 했다. 방도를 궁리한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서두르자. 시간이 아깝다. 청년운동체가 만들어지면 어차피 만들 마당집을 무리해서라도 먼저 만들어 그 마당집을 활용해 청년들과 접촉하고 대화하고 학습하여 의식화시키자. 그렇게 해서 의식화된 청년들을 모아 운동체를 만들자. 그 마당집 이름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민족학교로 하자.”

민족학교 설립식

12월 초에 기완이를 비롯해 가까운 몇 분에게 민족학교 설립 계획을 밝히며 함께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랬더니 모두 다 찬성해서 곧바로 설립 준비에 들어갔다. 기완이와 함께 민족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거나 도와줄 수 있는 동포들을 찾아 갔다. 나는 동포들에게 망명 신청 서류 사본까지 보여 주며 나의 신분을 밝힌 후,재미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미국 사회에서 긍지를 갖고 살아가게 하고 조국과 만족의 발전에 이 바지할 수 있도록 한다는 설립취지와 민족사 교육,민족문화 보급,동포사회 봉사라는 목적사업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협조를 호소했다.

  동포들은 우리들의 호소를 듣고 처음에는 모두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한 분 두 분 등을 돌리거나 우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못된 통일운동가들이 방해공작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이를 악물고 일을 추진해 나갔다.

꽁초를 주워 피우며 독심으로 안 쓰고 보관해 온 비상금(조국을 떠나 올 때 광주 동지들이 모아 준 비상금)과 기완이가 저축해 둔 돈을 털어 코리아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40평짜리 사무실을 얻었다. 그리고 최소한의 의자 책상 따위만 샀다. 광주수난자돕기회 회원들과 이길주씨,전진호 형,문성철씨 , 정선모씨 등이 여러 가지 비품들을 구해 날랐고 김석만씨(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박무영씨,장사한씨 등이 페인트칠을 했었다.

여러 사람들이 한마음이 되어 땀을 흘린 덕분에 미주 동포사회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자 미주운동권 최초의 마당집이 될 민족 학교 설립식을 83년 2월 5일에 갖게 되었다.

일제하의 만주에서 시작된 민족학교 운동,민족교육 운동이 일본과 서울에 이어 마침내 미국 땅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서울에서 민족학교 운동은 70년대 초에 장준하 선생님,백기완 선생님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오래 가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녹두장군 영정 좌우로 장준하 선생과 김구 선생의 영정이 걸려 있는 제실

우리들은 즉시 민족학교를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주정부와 연방정부로부터 면세 허가를 받아냈다. 그리고 교훈을 정했다.

“바르게 살자,뿌리를 알자,굳세게 살자”

교훈을 정하고 강당의 한쪽 벽 위에 녹두장군 영정을 가운데 모시고 좌우에는 김구 선생님과 장준하 선생님을 모셨다. 나는 민족학교 설립일부터 심부름꾼을 자청해서 맡았다. 그리고 귀국하는 그날까지 그 직분에 충실했다. 민족학교 교훈은 그 뒤로 ‘더불어 살자’가 추가되었다.

사면팔방의 중상모략

  82년 말,LA로 온 후 나는 가끔 김상돈 장로님을 모시고 운동권 모임에 나가 보았다. 그때마다 김상돈 장로의 친척으로 유학 왔다가 학교가 마땅찮아 쉬고 있는,그리고 운동 경력은 없으나 운동하는 친구들을 잘 아는 나 ‘김상원’은 참관인 자격으로 한쪽에 앉아서 운동권 현황 파악 차원에서 열심히 지켜보 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운동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일부 통일운동가들의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내가 그런 모임 자리에서 가끔 비판적 발언을 했고 그 발언 내용 이 그분들을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비판은 주로 잘못된 통일운동의 자세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통일을 위해 일 하는 분들이 헌신적인 자세로 진지하게 하지 않고 우월감을 가지고 즐기듯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했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나의 신분을 알게 된 82년 말부터는 눈에 띄게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러다가 막상 내가 민족학교 설립을 추진해 나가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 대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중상을 해오기 시작했다.

안기부 앞잡이다.”

“미주운동을 파괴 분열시키기 위해 안기부가 보낸 프락치다.”

“운동 경력이 있는 놈인데 고문을 받고 변절한 것 같다’

“배를 타고 왔다는데 타고 내리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대한 권력기관의 뒷받침 없이 태평양을 건너오는 밀항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들은 나의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주도권과 영향력이 약화될까 봐 나를 안기부 앞잡이로 몰아친 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다 그들의 중상에 넘어갔다. 나를 잘 알고 또 호의적으로 대했던 사람들마저도 그 소동을 LA지역 운동권의 세력 싸움으로 보고 그 싸움에서 민족학교 쪽이 질 것으로 판단하여 그들 편에 서거나 중간에서 화해,용서,타협 운운하며 위선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일을 당하게 되자,그것도 안기부 앞잡이로 몰리게 되자 제대로 잠을 못잘 정도로 격분하고 말았다. 그들 때문에 우리들은 민족학교 설립식도 연기해야 했고 설립 후에도 2〜3년 동안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들은 관심 있는 동포들이 나에게나 민족학교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86년까지도 계속해서 나에 대해 수상한 놈이 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내가 운동권 한쪽으로부터 안기부 앞잡이로 몰려 길길이 뛰고 있을 때 나의 신분을 파악한 영사관 쪽에서도 역시 중상을 해오기 시작했다. 조국의 독재정권은 재미 동포사회의 운동에 대해서는 조국에서처럼 협박,체포,고문,투옥 등의 직접적인 정치적 물리적 탄압을 할 수 없으니까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통해 운동가에 대해 조국방문을 금지시키거나 음해를 가하는 등의 간접적 사회적 탄압을 해서 동포사회로부터 운동을 고립 차단시키는 방법을 썼다.

  운동권 쪽의 모함은 일반 동포사회에는 거의 영항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영사관의 동포사회 영향력은 대단해서 한인회, 노인회를 비롯한 각종 동포단체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자행하는 모함은 위력이 놀라울 정도였다.

“민족학교 뒤에는 북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온 놈이 있다.”

“민족학교에는 인공기가 휘날린다.”

“민족학교에는 김일성 사진이 걸려 있다.”

“민족학교에서는 가끔 사람이 증발한다.”

  일반 동포들은 그런 황당무계한 말들을 확인도 안 해보고 그 대로 믿어버렸다. 솔잎 뿌려지듯 동포사회에 그런 소문이 쫙 퍼지자 동포들은 민족학교에 얼씬도 안했다.

   전두환 일당의 음해 때문에 민족학교는 설립 후 6개월이 지날 때까지 찾아오는 동포들이 소수의 후원자들을 제외하고는 한 달에 두세 명 정도밖에 안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전두환,노태우 일당의 중상은 그때부터 시작해서 권력을 내놓은 92년까지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나와 민족학교는 통일운동세력들로부터는 안기부 앞잡이로, 영사관으로부터는 빨갱이로 몰렸다. 운동권이나 동포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고립되어 궁지에 몰려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교화 쪽과 DJ 지지 세력들,그리고 친미반공 성향의 민주화운동 세력들까지도 중상을 해오기 시작했다. 교회 쪽은 내가 상업화한 교회에 대해 비판하고,교회에 나가던 청년들이 하나 둘 교회를 안 나가고 민족학교 활동에 참여하자 나를 무시무시하게도 적그리스도나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DJ 지지 세력들도 내가 이에 대해 비판하자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니 빨갱이니 하며 몰아쳤다.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 또한 내가 친미반공논리에 대해 비판하고 조국의 미군철수와 핵무기철거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주장하고 이산가족들 의 고향방문,혈육상봉을 적극 찬성하고 나서자 대뜸 조국의 운동에 피해를 주는 빨갱이로 몰기 시작했다.

신분을 밝히다

  여기저기서 모함과 중상과 방해공작을 해오자 견디다 못한 나는 주위 분들과 상의한 후 공식적인 기자회견과 강연회를 통해 나의 신분을 밝히기로 했다. 83년 5월 하순에 나는 LA프레스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국 밀입국 배경과 정치 망명 신청 사실을 소상히 밝히고 현지 동아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5.18 민중항쟁의 진상과 밀항 탈출 과정을 밝혔다. 그리고 나는 동포운동권의 방해공작 때문에 애초 계획했던 워싱턴 DC 의 강연회는 못 가고 대신 이에서 5.18 민중항쟁 3주년 기념 강연을 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한 대중강연에서 원고도 없이 단상에 올라가 약 2시간 반 동안 항쟁의 진상을 전하고 오송회 사건의 고문 조작내막을 폭로했다. 그리고 전두환정권의 타도를 위해 재미동포들이 적극 참여해 줄 것을 온몸으로 호소했다. 기자회견과 강연회를 통해 그렇게 나의 신분을 밝혔는데도 안기부 앞잡이,북의 공작원으로 모는 못된 세력들의 중상은 여전히 계속 되었다.

초미니 데모

  2월에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나서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허둥대고 있을 때 83년 3월,조국의 대법원에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주모자들인 김현장과 문부식의 사형이 확정되었다는 급보가 날아왔다. 깜짝 놀란 나는 힘은 없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홍기완,문성철과 함께 전보 문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사라도 한번 나눈 적이 있는 모든 분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해서 백악관의 레이건에게 두 사람의 구명을 탄원하는 전보를 쳐달라고 호소했다. 불과 이틀 만에 미주운동 역사상 가장 많은 143통의 전보를 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런 다음 우리들은 수천 명이 들고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LA시에 있는 연방정부 청사 앞에 가서 시위를 하며 급히 만든 수천 장의 구명호소 전단을 배포했다. 그날 LA의 한국일보는 그 초라하나 당돌한 시위 사진을 싣고 사진 밑에다 ‘자칭 민족주의자들의 초미니 데모’라고 써서 보도해 주었다. 시위를 마친 우리들은 빨리 힘을 키우자고 굳게 다짐했다.

민족학교 초기의 어려움

  민족학교를 설립할 당시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방에서 중상과 방해공작을 받게 되자 함께 시작했던 분들의 자신 감과 의욕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상황이 막막했다. 최진환 이사장마저도 일 년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불안해 할 정도였다.

  우선 나의 숙식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였다. 조국에서처럼 똥가방 하나 메고 동가식서가숙 하려고 해도 미국사회의 조건은 조국과 너무 달라 쉽지가 않았다. 민족학교 설립과 동시에 김상돈 장로님 댁을 떠나온 나는 처음에는 이집 저집 다니며 먹고 잤으나 조국에서와 달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또 대중교통 수단이 형편없는 LA에서 차 없이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서 한두 달 후부터는 민족학교에서 그냥 먹고 자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의 도움을 받아 중고 냉장고와 솥,냄비 등의 취사 도구를 마련하고 쌀과 고추장, 된장,멸치를 사서 직접 해먹기 시작했다. 직장을 때려치운 기완이가 가끔 찌개가 담긴 냄비를 들고 민족학교로 출근했다. 그런 날은 그런대로 잘 먹었다. 하지만 찌개 냄비가 없는 날은 멸치와 고추장으로 때웠다.

  민족학교에는 부엌이 따로 없기 때문에 솥이나 그릇을 씻으려면 양푼에 담아들고 다른 사무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공동화 장실로 뛰어가 세면대에서 씻어야 했다. 그러다가 누가 오는 기척이 있으면 몽땅 양푼에 담아들고 변기에 걸터앉아 그 사람이 나갈 때까지 숨어 있곤 했다.

  우리들에게 누가 식당에서 음식을 사주면 우리들은 먹고 남은 음식뿐만 아니라 남이 먹다 남긴 음식,심지어 자장면 남긴 것까지 싸들고 와 나중에 먹기도 했다.

  식사 문제에 비하면 잠자는 문제는 아주 쉬웠다. 미국에서는 화재와 범죄예방을 위해 사무실에서 잠자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숨어서 잤다. 초기에는 덮을 것이 없어서 수건으로 배만 덮고 자기도 했다. 담배는 주로 건물 주차장에 널려 있는 꽁초로 해결했다. 그런 중에도 이사들과 후원자들이 가끔씩 음식을 가져와 우리들은 힘을 얻었다. 특히 이 길주 이사가 맛있는 걸 자주 가져와 우리들은 그를 천사라고 불렀다.

  옷은 얻어 입거나 수익사업으로 시작한 중고품 판매를 위해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헌옷들 중에서 골라 입었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핏덩이 갈비덩이’(피에르 가르뎅)같은 고급 상표의 옷 을 주워 입기도 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버텨나가자 동포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윤한봉이가 거지가 다 되었다더라.”

“민족학교 청년들이 불쌍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더라.”

  동정심 많은 동포들은 그런 소문을 듣고 하나 둘 음식물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숙식 문제도 그랬지만 재정 문제 역시 어려웠다. 운동권이나 동포사회로부터 고립되니 자연히 재정 문제가 심각해졌다. 사 무실 월세와 전화비를 제때 내기가 힘들었다. 이사장과 이사들 그리고 후원자들이 정기적으로 조금씩 내고 기완이가 주머니를 털어 그때그때 어렵사리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빚이 점차 늘어만 갔다.

  우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서 세 가지 수익사업을 시작 했다. 그중 하나는 미술품 전시였다. 미술 분야에 조예가 있는 진호 형님은 그림을 모으고,목수 일을 잘하는 기완이는 표구 하고 액자에 넣어 약 30점의 작품을 만들어서 전시회를 했다. 이렇다 할 재주가 없는 나는 그때 온갖 잔소리를 들어가며 기완이의 조수 노릇을 했다.

  노래 테이프도 제작해서 판매했다. ‘뿌리 깊은 나무’사에서 만든 판소리 다섯 마당 음반을 구해서 빈 테이프에 옮겨 닮고 김민기,양희은 테이프를 복사해 그럴듯한 플라스틱 상자에 함께 넣어 팔았다. 테이프 길이가 달라 남은 부분은 내가 평생 해본 적이 없는 시낭송을 해서 채워 넣었다. 노래 테이프 제작 판매 는 나중에 저작권 보호니 뭐니 하며 신문에서 떠들기에 86년경에 중단해 버렸다.

  중고품과 빈 깡통을 수집해서 판매하기도 했다. 전자제품, 부엌용품,장난감,가구,의류,신발, 깡통 같은 것들을 수집해서 팔았다. 중고품은 뜻있는 분들이 직접 차로 실어오기도 했고 연락을 받고 우리가 직접 가져오기도 했다. 나는 수집한 깡통들을 쭈그러뜨리기 위해 주차장 바닥에다 쏟아놓고 사정없이 밟아대곤 했다. 전두환, 노태우의 대가리로 생각했던 것이다. 중고품과 깡통 판매는 그 후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의 중요한 수익사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와 같은 수익사업을 통해 재정난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고 있을 때 조국에서 판화 붐이 일어났다. 나는 광주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50여 장의 판화를 입수했다. 기완이의 지휘 아래 우리들은 액자를 제작했다. 그런데 낙관이 없는 판화가 20장이나 나와 고민하다가 진품이 확실하니 도장을 위조해서 찍기로 했다. 그런데 모두들 자신이 없어했다. 그래서 나는 평생 해본 적이 없는 그 짓을 저지르게 되었다. 독일제 조각도구들을 구입해서 2시간 만에 도장을 위조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무도 진품의 낙관과 구분을 못했다. 또 색칠해진 판화가 잘 팔린 다는 걸 알게 되자 붓과 물감을 구해서 모든 판화에 색칠을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들은 액자에 넣은 판화를 1백 불에서 3백 불까지 받고 팔았다. 판화제작 판매 사업은 88년까지 계속했는데 우리가 미국 전역에 판매한 판화는 4백 점이 넘었다. 판화를 선물해 주신 화가들과 싸게 공급해 주신 화가들에게 깊은 감사들 드린다. 판화는 어려웠던 그 시절을 이겨내는 데 둘도 없는 무기였다.

  미국에 와서 겪은 곤란한 일 중 하나는 읽을 만한 책을 구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공짜로 좀 구해보려고 찾아다녀도 볼 만한 책들을 모아놓은 곳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운동가들에게 빌려보곤 했는데 좋은 책이 없을 때는 한번 본 책이라도 다시 읽었다. 책방에 가도 읽을 만한 책이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 가끔 욕심나는 책이 한두 권 있어도 돈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책방에서 욕심나는 책을 발견하면 나중에 돈이 생기면 살 요량으로 그 책들을 다른 사람이 사가지 못하도록 진열된 책들 뒤에 숨겨놓고 나오곤 했다. 나중에 책방에 다시 들러 그 책들이 아직도 그대로 잘 있는가를 확인만 하고 다시 나왔다.

  그런 만큼 민족학교에서 청년들과 학습할 때도 역시 마땅한 도서 자료가 없다는 게 큰 애로였다. 어렵게 구한 학습교재도 한 권뿐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때그때 학습할 부분을 복사해서 나누어 읽곤 했다.

  한번은 나성에서도 쓰고 다른 지역에도 보내기 위해 학습교재로 택한 <분단전후의 현대사>를 90권이나 복사하여 제본하기도 했다. 그때 기완이와 나는 돈이 없어서 500쪽이 넘는 그 징그럽게 두꺼운 책을 직접 복사하여 손으로 제본했다가 손바닥이 물집 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도서 자료를 민족학교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울 각 지역 마당집마다 비치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악착같이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조국에 있을 때 현대문화연구소에 옥바라지용으로 쓸 겸해서 도서 2,000권을 모아 비치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책을 모으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족보와 일기장과 가계부만 빼고 다 내놓으라고 들볶았다. 출판사들을 찾아다니며 사정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훔쳐 나르는 방법을 썼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자신이 만만했다.

민족학교 도서실에는 1천 7백여권에 달하는 한국 관계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다

어쨌든 나는 필요한 도서 목록을 작성해 닥치는 대로 모았고 조국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미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책 선물을 부탁했다. 틈만 나면 사람들에게 지옥에 갈 죄에 대해 이야기 해주면서 은근히 협박했다. 술 억지로 권하는 죄,책을 사유하는 죄,발 닦고 고무신 물 안 털어놓은 죄,소설 책의 재미있는 부분을 찢어 버린 죄 등등. 그렇게 난리를 피우고 돌아다닌 결과,의식 있는 동포들은 가지고 있는 책을 몽땅 내놓기도 했고,학업을 마치고 귀국하는 어떤 유학생들은 전공서적만 빼고 다 내놓고 갔다. 광주 동지들도 수백 권의 책을 보내오고 출판계에 뛰어든 옛 동지들도 자신들이 출판한 책들을 보내 왔다. 민족학교 도서 자료는 순식간에 급속도로 늘어갔다.

  초기에 민족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청년들의 수가 적은 것도 어려움이었다. 사면팔방의 중상과 방해공작을 극복하고 청년들을 모아 의식화 학습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다. 우리들은 청년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민중문화연구회를 이끌고 있던 김석만 씨는 탈춤 강습을 했고 태권도 고단자인 기완이는 태권도 강습을,음악 전공인 김형성씨는 동요, 가곡,운동가요같은 노래를,작가인 전지호 형은 문학 강좌를,최진환 박사와 은호기 선생과 나는 역사 강좌를 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진행했다. 평화운동,코리아타운 개발 방안,동포사회의 노동 문제 등을 주제로 한 교양강좌도 부정기적으로 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애를 써도 찾아오는 청년들은 극소수였다. 한번은 우리 노래 부르기 시간에 아무도 안 와서 민족학교 식구들 넷이서 둘러앉아 알고 있는 모든 동요,민요,가곡,운동가요를 밤늦도록 목놓아 부른 적이 있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다급해진 나는 프로그램이 있는 날은 하루 종일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시작할 시간이 가까워지면 조바심이 나서 건물 앞 인도로 나가 들어오는 차들을 기다리며 서성거리곤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노력은 드디어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참여하는 청년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더디기는 했지만 정년들의 의식도 서서히 변화되어 가기 시작했다. 나와 민족학교는 설립 6개월 만에 온갖 중상과 방해를 극복하고 동포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을 방문 중이던 성래운 교수님이 어느 날 민족학교로 직접 찾아오셔서 격려해 주시고 LA지역 어른들을 만나 나를 많이 도와주라는 부탁도 해주고 가셨다. 미국에 왔다가도 모두들 전화 한번 해주지 않은 채 귀국해 버리던 그 어려웠던 시절에 성래운 교수님은 직접 찾아오셔서 그렇게 우리를 도와주셨다.

평화시위장의 충격

  83년 4월 나는 난생 처음 민족학교 청년들과 함께 LA에서 개최된 수만 명이 참가한 반전 반핵 반개입 평화시위에 참가했다. 미국의 시위와 집회에 처음 참가한 나는 다양한 인종들이 다양한 플래카드,다양한 피켓,다양한 상징물들을 들고 구호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며 한가롭게 행진하는 광경과,그 시위대를 보호하며 질서를 유지시키는 경찰들의 태평한 모습을 보고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 도대체 이것도 시위인가? 애들을 목마 태우고 걷는 사람,웃통을 벗고 걷는 사람,유모차를 앞세우고 걷는 사람,수영복을 입고 걷는 사람..

  시위를 마치고 하는 성토대회도 마찬가지였다. 10여 명의 참가 단체 대표들이 공원 한쪽에 만들어진 연단 위에서 2〜3분 정도씩 짧은 연설을 차례 차례 했고,참가자들은 이곳 저곳에 모여 앉거나 누워서 연설을 듣다가 가끔 환호하거나 박수를 쳤다. 일부 참가자들은 연설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쉴새 없이 먹고 마시며 떠들었다. 그리고 집회장 주변에는 포장마차 같은 다양한 간이매점이 줄지어 있고,또 다른 한쪽에서는 제3세계 운동단체들과 미국내 좌파단체들이자료 진열대를 설치해 놓고 각종 홍보선전용 도서, 잡지,전단,비디오테이프,구호딱지(Sticker), 구호단추(Button) 등을 팔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토대회장 같지 않은 성토대회장,시장 바닥 같은 성토대회장에서 나는 또 한 번 혼란을 겪었다. 그렇지만 그 혼란 속에 서도 나는 분명히 보았다. 수만 명의 시위대 속에,다양한 인종과 민족과 다양한 운동단체와 각계각층의 남녀노소들이 참가한 시위대 속에 우리 동포들은 없었다. 세계 최고의 군사적 긴장 과 세계 최고의 핵무기 밀도를 가진 나라를 조국으로 둔 우리 동포들,일본인과 함께 세계 2대 피폭 민족인 우리 동포들,미 국의 군대와 핵무기가 주둔 배치된 자신들의 조국,작전 지휘권마저 미국에 주어버린 조국을 둔 우리 동포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많은 운동단체들의 진열대 속에서 우리 동포 운동단체들의 진열대는 없었고,그 많은 흥보 선전물 속에서 우리 운동의 홍보선전물은 하나도 없었다.

인종차별 규탄 시위장의 충격

  83년에 디트로이트시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자동차 공장에서 해고당한 백인 노동자 몇 명이 중국계 청년 빈 센트친을 때려죽인 사건이었다. 밀려드는 일본 자동차 때문에 해고당했다고 생각한 백인 노동자들이 일본인에게 분풀이를 한다면서 엉뚱하게도 중국계 청년을 잘못 때려죽인 것이다. 그런데 백인 노동자들은 재판에서 아주 가벼운 형을 선고 받았다. 그러자 인종 차별적인 재판 결과에 항의하는 집회시위가 미국 전역에서 들고 일어났다. 불황의 책임을 소수민족에게 떠넘기려는 미국 정부의 정책과 사회분위기에 분노한 소수민족들,그 중에서도 동양계가 앞장서서 항의했다.

  LA지역에서도 6월에 동양계가 주축이 된 연합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2만 명 정도가 참가한 그 시위에 나도 민족학교청년들과 함께 참가해 열렬히 구호를 외쳤다. 행진을 마친 후 LA시청에서 성토대회를 할 때 우리들은 참가한 동포들을 찾아보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한참 후에 모인 우리들은 맥이 풀렸다. 결론은 ‘우리 13명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동양계만 참가한 것도 아니고 백인,흑인,히스패닉 형제들까지 참가한 연합시위인데 우리 동포들은 아무도 안 나왔던 것이다. 단 한명의 동포운동가나 동포언론인도 나오지 않았다.

DJ의 LA강연

  82년 12월 DJ가 미국으로 나왔다. 동포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몇 군데의 강연회를 마친 DJ는 83년 여름에 LA에서도 강연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박정희 피살에서 5.18까지의 기간에 보여준 DJ의 처신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5.18 이후 겪은 고난을 통해 많이 변화되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열심히 강연회 준비를 도왔다. 강연회 직전에 열린 동포사회 축제 때 강연회 홍보전단을 동포들에게 배포하러 다니고 민족학교 청년들과 함께 강연회장에 걸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강연 당일에는 신변 경호를 위한 강연장 주변의 경계 활 동에 참여하는 등 협조를 했다.

그러나 DJ가 연설 중에 “5. 18은 내가 잡혀가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일으켰다.”고 말하는 걸 듣고 우리들은 분개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강연장을 나와 버렸다. ‘변하지 않았구나. 과대 망상증이 심하구나. 5월 영령들이 자신을 위해,자신의 석방을 위해 그렇게 싸우다 가셨다는 말인가? 5.18의 의의와 정신을 왜곡하고 모독해도 정도가 있어야지 …’

망월 묘역의 흙과 꼬방동네의 흙

광주민중항쟁 영령을 비롯한 민주인사 위패를 모셔두고 있는 민족학교 제단. 이 제단에 망월동에서 파온 흙이 올려져 있다.

83년 가을에 조국으로부터 두 종류의 흙이 왔다. ‘잊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광주 동지들이 망월묘역의 흙을 보내왔고 이철용 형이 서울 꼬방동네의 흙을 보내왔다. 나는 흙을 받은 날 밤 혼자서 조국을 떠나온 이후 처음 대하는 조국 땅을 만져 보고 냄새를 맡으며 ‘그래,잊지 말자’고 다짐을 했다. 나는 그 흙들을 유리그릇에 담아 민족학교 한쪽 선반에 모셔놓은 5월 영령 위패 앞에 나란히 놓아두었다. 그 후에는 한라산의 돌과 백두산의 돌을 구해 그 옆에 나란히 놓아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