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애

최근 편집: 2023년 6월 26일 (월)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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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애(1891년 1월 20일 ~ 1982년 9월 27일)는 국내항일운동가이다. 1963년에 독립장을 받으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별명 자경.

생애

펑북 귀성군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1900년에 9세의 나이로 원산 남촌동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1906년에 졸업하였다. 1907년에 원산공립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0년 4월에 개성의 호수돈 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에 폐결핵 3기를 판정받고 요양 후 1914년에 호수돈 여학교를 졸업하였다.

1914년 4월에 원산의 루씨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8년 말에 원산교회에서 열린 손정도 목사의 부흥설교를 계기로 이승은, 김마리아, 김확신과 함께 결사대원으로 참가하였다. 1919년 2월에 서울로 상경하여, 1919년 3월에 결성된 조선민족대동단]에 입단하였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강우규 의사를 도와주다가 수배를 받아 잠시 신분을 감추고 피신하였다.

이신애는 혈성부인회와 대동단에 입단하여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에 참가하다가 동년 항일여성단체인 혈성부인회의 간부로 임명되어 독립자금을 모으는 데 힘썼다. [2]

대동단에 입단하여 <대동신보> 간행에 참여했고, 의친왕의 상해 망명 추진활동, 대동단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제2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명이다.

1919년 3.1운동의 일환으로 11월 28일에 서울 안국동 광장에서 여학생 박덕혜, 김효순, 이도신, 노순경 등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체포되었다.

경찰서 및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구류일로 보낸 200일을 합산하여 4년간 옥고생활을 하였다. 유방이 파열되는 모진 고문을 받았다. [2] 여성 전용 감방에 수용되어 유관순의 옆방을 썼고, 1920년에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옥중시위 후 고문후유증으로 말을 더듬게 되어, 필담과 수화를 사용하였다.

김마리아와 함께 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였다.

1982년 9월 27일에 충남 부여군 장암면 석동리에서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1. “이신애, 독립운동으로 여성에게 자긍심을 일깨우다”. 《청송의병사이버박물관》. 
  2. 2.0 2.1 여성독립운동가사전. 심옥주. 천지당(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 (2006). 《3.1운동기 여성과 서대문형무소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개관 8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서울 : 서대문구 도시관리공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