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12:47

성폭력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응준이 데이트 도중 강간을 했다고 못박게도 한다.[1] 김경애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강간한 이응준에 대한 처벌 없이 (피해자에 대한) 현재까지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라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이었다는 인식은 지속되고 있다"며 "(피해자가) 데이트강간의 피해자이고 조선사회가 가한 2차적 성폭력에서 생존자로 거듭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했다.[2]

생애

1890년 8월 12일 평남안주에서 태어났다.[3]

16세때 상경하여 이근택의 부관이었던 추정이갑참령집에 머물면서 보성 보통중학 1기생으로 입학했으며 18세 때 무관학교에 들어갔다가 일제가 대한제국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무관학교 학생들을 모두 일본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일본육사 26개로 졸업, 임관했다.[3] 대좌(대령)까지 진급한 이응준은 해방 후인 46년 미 군정청의군사고문으로 초빙돼 지방별로 군인을 모집, 국방 경비대를 창설하는데 공을 세웠다.[3] 48년 정부수립후에는 대령계급으로 초대 육군 잠모총장이 됐으며 취임후 열흘 뒤 한국군 최초의 별을 단 장군이 됐다.[3] 48년 2개대대 월북사건과 관련, 스스로 사임했다가 달포후 3사단장으로 강등발령을 받았고 6.25 때는 5사단장으로 광주에서 전선으로 향했다.[3] 이후 군 상부와의 마찰로 군복을 벗었다가 52년 4월에 복귀, 육군대학총장,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55년 중장으로 예편했다.[3] 체신부장관(55~58년), 반공연맹이사장(67~72년), 국정자문위원실, 재향군인회, 통일원고문등을 역임했다.[3]

1985년 95세로 사망하였다.[3]

출처

  1. 노재현중앙일보플러스?단행본본부장 (2016년 3월 13일). ““조선아, 이 사나운 곳아 … ””. 《중앙선데이》. 
  2. 장슬기 기자 (2017년 1월 31일). “최초 여성 근대 소설가, 문단의 성폭력 피해자였다”. 《미디어오늘》. 
  3. 3.0 3.1 3.2 3.3 3.4 3.5 3.6 3.7 趙炳賢 기자 (1985년 7월 9일). “武人의길 걷다간 "國軍의 代父" 95세로 他界한 李應俊장군의 生涯”.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