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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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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신(任永信, 1899년 11월 20일 ~ 1977년 2월 17일)은 한국의 교육자이자 정치인이다. 호는 승당(承堂). 전라북도 금산 출신이다. 영어 이름은 루이즈 임(Luise Yim)이다. 그는 친일 활동을 했다는 의혹을 받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일본 군부의 눈을 피해 한국사 책을 필사할 정도로 애국심이 깊었다. 학창시절 쓰개치마 거부 운동을 하고 일본 천왕의 초상화들을 훼손하는 등, 항일운동뿐만아니라 대한제국 여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에도 힘썼다.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종사하였으며 이승만의 측근으로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정당인 대한여자국민당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1 생애

충청남도 금산군 출신.

1932년 중앙보육학교를, 1941년에는 경성중앙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8월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됐고 1946년 9월 중앙여자대학(중앙대학교의 전신)을 설립하고 학장이 되었다. 1949년에는 대한국민당 창당에 참가했으며, 제3대, 4대, 5대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49년 경상북도 안동(安東)의 제헌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고, 1950년 제2대 민의원에 재선되었으며, UN 총회 한국대표로도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임영신과 비서 등 18명이 독직사건에 연루돼 배임, 증뢰, 수뢰, 사기, 횡령 등으로 1949년 5월 28일 기소됐다. 이후 친이승만 성향 야당인 대한국민당을 운영하였고, 국민당이 해산된 뒤에는 다시 대한여자국민당으로 개편하여 1961년까지 유지하였다.

이승만의 최측근의 한 사람이며 1960년 이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에는 야당 인사로 활동하다가 군사 정변 이후 군정 지지를 선언했다. 기타 중앙전문학교 학장과 중앙대학장, 시민사회단체 활동 등을 하다가 1963년 이후에는 민주공화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1961년 대한여자청년단장이 되고 1963년 한국부인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정치인 유진산, 이현상 등과는 동향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호는 승당(承堂), 미국식 이름은 루이스 임(Luise Yim)

2 연보

  • 제1대,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초대 상공부 장관이었다.[1]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었다.[1]

2.1 유년 시절

지역 유지이자 대농이었던 그의 아버지 임구환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각지의 사정에 밝았는데, 아들들을 불러 특별히 정치나 시사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딸 중 임영신도 그 틈에 종종 끼어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 임구환은 계집아이가 머슴애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며 어머니에게 가라고 했지만, 임영신은 굴하지 않았다.

8세 때 그는 '활동 사진'(영화)를 보고 신기해했는데, 몰래 영화를 보러 다니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매를 맞기도 했다.

임영신의 집안은 개신교 가정으로, 그는 기독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회 분위기가 개화될 때까지는 절대 가족의 종교를 발설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이따금씩 백인선교사들을 집안으로 데려왔는데, 임영신은 '할머니가 괴상하게 생긴 백인 여성을 보고 놀랐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 백인 여성은 유창한 조선말로 설교를 했고 이해가 빨랐던 어린 임영신은 그것을 들으며 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언니 임선유와 함께 아버지가 동리에 설립한 서당에 다니다가 1909년 금산의 심광소학교(心光小學校)에 입학하였다. 이때 그는 시집을 보내겠다는 집안의 뜻에 의해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비밀리에 담을 넘어가며 학교에 등교했고, 키가 가장 커서 몰래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들켰다. 이에 담을 넘어 학교에 다닌다며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금산 사람들은 내가 길을 지나갈 때면 나를 비웃고 좋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수군거리곤 했다. “저렇게 큰 계집애가 학교엘 다니다니....., 저 계집아이는 예절도 모르고 부모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야.”

이 말에 충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집에 있기도 했었지만 1914년 심광소학교를 졸업했다.

2.2 학창 시절

2.2.1 청소년기

일본에서 강제로 조선의 청년들을 끌고간다는 소문이 파다하자 그가 12세가 되던 1911년에 그의 모부는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려 하였다. 곧 언니 임선유를 시집보내게 되었고, 바로 임영신 역시 시집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는 중매쟁이들이 올 때마다 "결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강제로 혼사를 치르게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그를 설득하려 하였으나 그가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지 가문의 것이 아니라며 자기 주관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상급 학교로 진학하게 해달라고 모부를 졸라 성사시켰다.

소학교 시절 그는 언니 임선유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 시집간다는 말을 듣고 언니에게 매일 굶고 울라고 조언하였다. 그의 조언대로 언니는 매일 울거나 굶어서 수척해졌고 결혼은 파혼되었다. 그 뒤 언니 선유는 최용환과 결혼했는데, 그는 목사인 최학삼의 아들이었다. 신랑의 생김새가 흉하지 않을까 궁금해한 임영신은 신랑의 자매들을 찾아갔다가 그들의 수려한 외모와 달변에 매료되어 그들과 친구가 되었다.

2.2.2 기전여학교 재학 시절

1914년 전주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에 진학하였다. 기전여학교 재학 당시 그는 기독교도 여학생들의 소모임을 주관하고 기도와 신앙 활동을 하였다. 그의 노력에 감동한 기독교도 기전여학교 교사 박현숙은 오히려 그들을 더욱 독려하고 자발적으로 그들의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임영신은 교사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쳐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교사들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가장 친한 친구 세 명을 모아서, 한국사 책을 한권 구해 매일 밤 수 페이지씩 베껴 쓰자고 제안하였다. 제각기 우리나라의 귀중한 역사책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뜻에서였다. 그와 친구들은 학교의 교목인 김 목사의 집으로 가서 한국사 서적을 구해달라고 했다. 목사는 조국을 구하려는 결심이 대단하다며 도와줄 뜻은 있으나 만일 일본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학생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임영신의 고집에 못이겨 목사는 가죽으로 싼 ‘동국역사’라는 책 한 권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 책은 한국 사학가들이 쓴 책이었는데, 목사는 이 책이 대대로 물려받은 한국인의 유산이니 아끼고 잘 간직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였다.

임영신는 목사에게서 받은 동국역사 책을 쓰개치마 속에 감추어 가지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날 밤부터 그는 친구들과 동국역사를 붓으로 베끼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임영신과 친구들의 작업은 몇 달을 두고 계속되었다. 필사가 끝나자 그것을 몰래 학교 밖으로 가지고 나와 목사에게 돌려주었다. 그 책은 비밀 연구회를 조직하여 장차 항일 운동의 중심이 될 애국 청년들과 지도자들에게 전해졌다.

2.2.3 항일 동맹 휴학 활동

1915년 기전여고 2학년 시절 친구인 오자현 등과 함께 항일 자살특공대를 만들고 명칭을 자살대(自殺隊)라고 하였다. 그들은 첫 번째 모임에서 추후의 행동을 결정했는데, 매일 아침 일본 국가를 부르고 일본 황제의 사진 앞에 절하게 하는 학교의 지침을 거부하기로 한 것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행해지는 여학생들의 거부 행위에 일본인 교사들은 분노하고 당황해했다. 그리고 얼마뒤 기전여고 내에 자살대의 소문이 확산되었다.

어느 날 그는 새벽에 친구들과 몇몇이 뾰족한 나무 연필을 가지고 교실 창문으로 비밀리에 각 교실로 들어가 숨어들어가 모든 교실마다 붙어 있는 일본 천황 사진의 눈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그 날 아침 조회에 이를 발견한 일본인 선생들은 분개하여 교장인 미스 골든 선교사에게 찾아가서 항의하였다. 임영신과 자살대 회원들은 스스로 자신이 한 것이라고 했고, 주모자를 찾을 수 없던 미스 골든은 이들을 기숙사로 돌려보냈다.

2.2.4 쓰개치마 거부 운동

이어 교내에서 그는 쓰개치마 안 입기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이를 인습이라 주장하며 조선이 멸망하고도 한국의 여성들은 외출시 쓰개치마를 입고 다녀야 하는 것에 크게 반발했다. 그는 여성을 억압하는 한국의 오랜 풍습을 '적'으로 정의하며, 쓰개치마는 불편할 뿐만 아니라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위치를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하는 물건이라고 여겼다.

쓰개치마를 입은 여자가 자신의 말에 남자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것은 여의치 않은 일이다.

우리들의 적은 일본인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평생 동안 우리를 억압하는 한국의 오랜 풍속하고도 싸워야 했다. 쓰개치마가 그 한 예였다. 쓰개치마는 성장한 여자가 외출할 때 머리에서 부터 몸을 가리기위해 쓰던 치마였다. 그것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여성은 생활 공동체에서 남자와 평등한 위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쓰개치마를 입은 여자가 자신의 말에 남자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것은 여의치 않은 일이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일요일 우리는 이 전통에 반항할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쓰개치마라는 구속물에 싸여서 교회에 가기 위하여 투덜거리며 기숙사를 나왔다. 교회에 도착할 무렵에 우리들은 축축하게 빗물에 젖어 있었다. 많은 학생들은 재채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예배당을 떠날 때 몇몇 학생들이 미스 골든에게 비에 젖은 쓰개치마를 입는 대신 들고 가도 좋으냐고 물었다. 그녀가 놀랐다. “선교사가 온 것은 여러분의 도덕성을 높이려고 온 것이지 풍속을 바꾸려고 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빗물에 흠뻑 젖어 미끄러지듯 진흙길을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온 몸은 물에 빠진 듯 젖어 있었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일요일, 그는 친구 오자현 등과 함께 교장실로 가 교장인 골든에게 쓰개치마를 입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러나 우리들은 학교 밖으로 나갈 때 쓰개치마를 더 이상 입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보처럼 보일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롭습니다.

그러나 교장 골든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들이 일본 국가 부르기를 거절하고 기물을 파손한 사건들이 겹쳐 일어난 뒤였으므로 화가 쌓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장은 임영신과 친우들을 두고 좋은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나쁜 사람들이며 학교를 계속 위기로 몰아넣는다고 비난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 임영신은 그들 회원들 중 몇몇이 퇴학당하리라는 것을 박현숙으로부터 전해들었는데, 그는 아버지가 지역유지라는 이유로 퇴학당하지 않았다. 그는 쓰개치마 입기 거부운동을 함께 벌이다 퇴학당한 학생들의 복학을 위해 1915년 10월 2학기 중 동맹휴학을 주도한다. 그는 동료 학생들에게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고 쓰개치마는 입지 않되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건물과 기숙사에서 나와서' 복학 요구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교목인 김 목사의 사택에 가서 집단 시위를 하였다. 김 목사는 교장을 설득하겠다며 학생들을 돌려보냈고, 이어 학교에서는 비상이 내려져 학부모들이 소환되었다.

학부형들이 소환되는 등의 사태를 겪은 뒤 교장 골든은 아버지들과 상의하였고 쓰개치마를 입지 않아도 된다고 허용하였다. 조선총독부나 일본인 시학관이 강요하지는 않았으나 여자가 외출시 쓰개치마를 입는 것은 조선의 오랜 전통이었고, 일본인이나 미국, 서양인 선교사들도 없애지 못한 풍습이었다. 이후 경성부에도 알려지게 되면서 1916년부터는 소녀나 처녀들이 외출 시에 쓰개치마를 입지 않는 현상이 전국적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2.3 일제 강점기 활동

2.3.1 고교 졸업

1916년 7월 기전여고 3학년 여름방학 때 금산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학교에 다니겠다는 자신의 고집으로 모부가 모욕과 수치스러움을 느낀 데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동리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자신을 '옳지 못한 여자', '정신적으로 잘못된 데가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임영신은 자신이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하게 만드는 말썽꾸러기였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1916년 8월 다시 전주로 올라갔다. 3학년 2학기 무렵 교목 김 목사는 우수한 성적의 여학생들과 국내 명문가의 자제들 사이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임영신은 한국의 딸들을 결혼시키는 전통적 풍습의 야만성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1917년 고향 사람들 중 일부는 일본의 강제이주정책 혹은 생계로 고향을 떠났지만 그의 집은 지역 유지인 덕에 무사하였다. 오히려 그가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딸들을 학교로 보내는 문화가 고향 마을에도 점차 확산되었다. 4학년 2학기 무렵 일본인들이 조선인 청년들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고 한국인 지하활동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접하기도 했다. 1918년 3월 20일 기전여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자살대를 공식 해체하였다.

2.3.2 교육 활동과 독립운동

2.3.2.1 소학교 교사 생활

아버지는 그를 이화학당에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임영신의 공부가 가문에 영광과 수치를 동시에 가져다주었다고 평하며, 이화 대학에서 4년간 공부를 한 뒤에 결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는 유혹을 느꼈으나 '어떤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는 결혼을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아버지는 임영신에게 '계집아이인 임영신의 사명은 좋은 여자가 되는 것'이라고 응수했고 임영신은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느껴 아버지와 헤어져선 전주시내로 갔다.

1918년 전주 기독전문여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기전여학교 시절 교사 중 한 명인 이순길의 주선으로 천안 양대소학교(良垈小學校)의 교사가 되었다. 천안의 한 광산촌 하숙집에서 숙식하고, 대전역에서 천안역으로 열차를 타고 다니며 교사로 생활하였다. 그는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았는데, 마을 어른과 교사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임영신은 이 사람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8세 때 영화를 보기 위해 몰래 홀로 하인을 데리고 외출했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회초리로 맞았지만 영화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이 거짓말마저 들켰고, 뒤늦게 사실을 고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아버지의 매질은 할머니가 와서 말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1개월간 걷지도 못하였다.

그는 이 경험을 설명하며 매질이 과연 학생들을 진심으로 반성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하였고 이때부터 양대소학교에서는 이유없이 수시로 매질하는 악습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2.3.2.2 민족자결주의 운동과 지하 독립운동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민족자결주의을 접하고 이에 고무되었다. 그는 전주 기전여자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 이승만미국에서 지하 조직을 결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같은 해 12월, 그는 어느 사업가를 통해 경성부에 있는 한국인 지하조직 활동가를 만났고, 활동가에게 이승만이란 사람에 대해 물었다. 이 활동가는 행상으로 가장하여 천안으로 내려와 그의 숙소에 드나들며 비밀리에 인쇄한 삐라들을 그에게 전해주면서 1919년 초에 전국적인 소요사태를 일으키는 데에 동참할 것을 부탁했다.

상하이에 있는 한국 지하운동 본부는 프랑스 조계 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박사의 메시지는 한 지하 운동원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는 그것을 남경으로 가지고 갔다. 남경에는 제2의 비밀 본부가 있었다. 그 다음에 한 연락원이 그 메시지를 가지고 두만강까지 와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 연락원에게 전달하였다. 한국으로 메시지를 가지고 들어오기에는 겨울이 가장 안전하였다. 그것은 강이 얼어서 지하 운동원들이 일본군이 순찰하는 다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가 접수된 바로 직후에 유행성 감기가 퍼졌다.

미국에서 이승만이 지하조직을 만들어서 소요사태를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 외에 중국 상하이에 한국인 지하운동 조직이 있고, 난징에는 그 조직의 지부가 있으며 이들이 1919년 초에 전국적인 사태를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동지들을 만나, 비밀리에 사태에 동참할 계획을 세운다.

1919년 2월 중순 경성부에서 온 연락원과 만났다. 그는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며 거사를 결행할 때가 다가왔음을 알렸다. 독립운동가들의 연락책이 오가면서 일본경찰의 순찰이 더 잦아져 낯모르는 방문객들은 검문을 당했다. 이 연락원들은 검문에서 무사히 통과되면 노래를 부르면서 학교 옆을 지나갔는데, 임영신은 이 노랫소리를 듣고 산 밑으로 가 비밀리에 그들을 만났다. 그들이 가지고 온 메시지들은 가장 신나는 뉴스였다고 자서전에 전하고 있다.

3 가족 관계

임영신은 12남매 중 둘째 딸이다. 둘째 오빠는 한국 전쟁 때 납북되었다.

  • 아버지: 임구환(任九桓)
  • 어머니: 김경순(金敬順)
  • 남동생: 임태희(任泰熙)
  • 남편: 한순교(1939년 미국에서 결혼하였으나 1940년 임영신 혼자 한국으로 돌아옴)
  • 조카 : 임철순(任哲淳, 둘째 오빠의 아들로 중앙대학교 제2대 총장이다.)

4 일화

독립협회 활동과 수감, 미국 활동 등으로 아내와 친밀감을 가질 사이가 없었던 이승만은 첫 아들인 이태산(이봉수)이 사망하면서 아내 박씨와 이혼하게 된다. 박씨부인과 이혼 후 오랫동안 혼자 살았으며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1930년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겸 교육자인 임영신에게 청혼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31년 이승만은 자신의 측근이며 임영신의 기전학교 은사인 이순길을 통해 임영신에게 청혼할 뜻을 밝혔으나 거절당하였다. 아내가 될 것인가 동지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던 임영신은 단독으로 이승만을 만나 청혼을 거절하였다.

"아마 이 밤이 박사님을 뵈옵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그날까지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 생각입니다...(이하 생략)...저는 이미 독립운동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선생님 곁을 떠나서나, 선생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든지 동지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이승만은 실망하였으나 임영신을 측근으로서 신뢰하였고, 임영신은 그의 가깝고 충실한 측근이 되었으며 자신의 호를 이승만의 이름에서 따 승당(承堂)이라 짓기도 했다.

5 출처

  1. 1.0 1.1 최보윤 기자 (2009년 9월 9일). “[대한민국 제1호] 여성장관 임영신… 1948년 상공부”. 《조선일보》. 2019년 4월 22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