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지당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15:13

조선 후기 원주 출신 여성 성리학자[1], 본관은 풍천, 호는 윤지당(允摯堂),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오빠 임성주에게 유교 경전과 사서를 배웠다.[2]

낮에는 가사에 전력하고 밤에는 소리를 낮춰 책을 읽었다고 전해진다.[2] 죽은 뒤 유고 40여 편이 수습되었다.[2] 대부분이 경전 연구와 성리설에 관한 논설 및 중국 역대 위인·영웅·학자들에 대한 인물 논평들이다.[2] 특히 여자와 남자의 존재를 음양의 우주 질서와 같이 상호보완적인 존재로 파악, 똑같이 중요한 필수적 존재일 뿐 우열을 가진 존재라고 보지 않았다.[2]

생애

유년시절

임윤지당은 1721년 함흥 판관을 지낸 임적(1685년~1727년)의 딸로 태어났다. 동생인 임정주(任靖周)가 쓴 전기 《임윤지당유고》의 유사에 의하면 임윤지당은 학문에 재능이 있어서, 형제들과 경전, 역사, 인물, 정치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의 재능이 활용되지 못했으므로, 학문적 재능을 발휘하기보다는 어른을 공경하고 정숙하게 행동하는 유교적 윤리를 실천하였다.

하지만 송시열의 친구 임의백(任義伯)이 고조할아버지인 임윤지당의 재능은 숨겨질 수 없었다. 그 근거로 동생 임정주(任靖周)에 의하면 여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둘째오빠 임성주(任聖周,1711년~1788년)는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등을 가르쳤는데, 임윤지당은 낮에는 일상생활을 하고, 밤마다 공부하였다.

결혼

윤지당은 1739년인 19세 되던 해에 한 살 아래의 원주 선비 신광유(申光裕, 1722~1747)에게 시집갔다. 그의 시가 역시 명문 평산신씨로서 영의정을 지낸 신중만, 신중회 형제와 일가였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결혼한 지 8년 만에 부군과 사별하고, 아이마저 어릴적에 죽었다.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시동생 신광우의 집에 살았다.[3]

임윤지당은 두 명의 시어머니[주 1]를 모실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았으며, 두 시동생이 모든 일을 형수님에게 물어서 하고 어머니처럼 섬길 정도로 집안에서 존중받았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모습은 학자였다. 임윤지당은 큰 오빠 임명주(任命周)가 세상을 떠나자 한문으로 제문을 지음으로써 여성은 학문을 할 수 없다는 남성들의 편견을 깨부수었다. 또한 시부모가 세상을 떠나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조선시대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성리학을 여성의 시각으로 연구하여 성리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임윤지당을 가리켜 우주, 사람, 사람과 사물의 이치등의 넓은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요, 고요하고 한가로워 조금도 얽매임이 없는 자유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저서로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가 전해지고 있다.

사망

여성으로서의 삶은 고독했다. 난산 끝에 낳은 아이도 일찍 죽어 슬하에 자식이 없자 신광우의 아들 재준을 입양했으나 이 또한 그보다 앞서 죽었다. 결혼한 뒤에는 학문을 그만두고 가사에 전념했으나, 만년에는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 1793년 원주에서 7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3]

어록과 일화

임윤지당은 성리학자였다. 그의 학문적 내공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말해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4]

나는 어릴적부터 성리학이란 학문이 있음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고기 맛이 입을 즐겁게 하듯이 학문을 좋아하여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이에 감히 아녀자의 분수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경전에 기록된 것과 성현의 교훈을 마음을 다해 탐구하였다.

둘째 형님께서 양근 군수로 계실적에 협과 홉 형제가 별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때 누님께서 원주에서 오셔서 관사에 머물고 계셨는데, 조카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렸다. 하루는 누님께서 "오늘 공부는 어떠하냐?"라고 물으시니 조카는 "날이 더워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부채질을 하느냐?"고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누님께서 "정신을 집중해서 책을 읽으면 가슴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기는데, 부채질할 이유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아직도 헛된 독서를 면치 못했구나."라고 하셨다.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미루어보면 누님의 존심양성(存心養性)하신 수양의 경지를 가히 알 수 있다./동생 임정주의 임윤지당유고 p.336

평가

윤지당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근면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인정이 많아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려서부터 교양과 부덕을 쌓아 예의범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여러 형제들과 함께 한학을 강론할 때는 식견이 탁월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고금의 인물 및 정치의 잘잘못을 논평할 때마다 윤지당이 한마디 말로서 그 시비를 결단하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논리적이고 뛰어나 형제들은 그가 대장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였다고 한다.[3]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의 이러한 학문적 분위기가 윤지당의 학문 수련과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또 부친이 일찍 사망한 것이 오히려 집안에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조선시대 그가 여성으로서 학문을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으로 보인다.[3]

기념

  • 문화관광부는 2005년 5월의 문화인물로 임윤지당을 선정했다.[2]
  • 원주에서는 2007년부터 임윤지당의 헌다례를 매년 열고 있다.[5]
    • 1회 2007년 5월 14일
    • 2회
    • 3회
    • 4회
    • 5회
    • 6회 2012년 5월 14일[6]
    • 7회
    • 8회 2014년 5월 14일[7]
    • 9회
    • 10회 2016년 5월 13일[8]
    • 11회 2017년 5월 11일[9]
    • 12회 2018년 5월 18일[10]
    • 13회 2019년 5월 14일[11]

부연 설명

  1. 한 명은 남편을 낳아준 어머니이고, 한 명은 큰어머니이다.

출처

  1. 이혜원 기자 (2019년 5월 10일). “임윤지당 얼 선양 헌다례”. 《원주신문》. 
  2. 2.0 2.1 2.2 2.3 2.4 2.5 류일형 기자 (2016년 5월 12일). “조선 여성성리학자 1호 '임윤지당'을 아시나요(종합)”. 《연합뉴스》. 
  3. 3.0 3.1 3.2 3.3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임윤지당 [任允摯堂] - 학문의 금기를 깬 여성 성리학자”. 《[네이버 지식백과]》. 
  4. 여인열전》 이덕일 지음, 김영사 p.334,336
  5. 배연호 기자 (2014년 5월 14일). “조선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 헌다례”. 《연합뉴스》. 
  6. https://news.joins.com/article/8147882
  7. https://www.yna.co.kr/view/AKR20140514111300062
  8. https://www.yna.co.kr/view/AKR20160512086151062
  9. https://www.yna.co.kr/view/AKR20170511029800062
  10. http://www.iwj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995
  11. http://www.jeongpil.com/62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