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문화와 더불어 사는 삶(1993)

최근 편집: 2019년 6월 9일 (일) 01:49

은호기: 1939년때 태어나 1970년에 미국에 옴. 1993년 현재 민족학고 이사이며 시사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도전 받는 한인사회

팽창일로만 걸어오던 우리 한인사회가 심각한 시련을 겪고 있다.

동반구에 이민의 문이 열린 이래 한인사회는 근 한 세대에 걸쳐 줄기차게 양적으로 팽창하여 왔다 우선, 수적으로 어림잡아 일백만을 헤아리 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도 급격히 성장하여 곳 곳에 한인타운을 이루기에 이르렀다. 소득수준이 어느 소수민족집단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어, 경 제적인 변에서 본다면 ‘모범’ 소수민족이라고도 할만하다. 이러한 성장은 높은 교육수준과 전투 적인 근면성에 터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팽창이 곧 질적 성장을 뜻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을 성싶다.

지난해의 로스앤젤레스 4.29 사태는 한인사회 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다 흑인사회의 사회•경제적 불만의 화살이 한인사회에로 돌려 진 것도 문제지만 사후 사태수습과정에서 나타난 정치력의 한계가 곧 한인사회의 질적 수준을 말하여준다 하겠다.

게다가 삼 년째 짓누르고 있는 경제불황은 양 적 성장에 모든 것을 걸고 있던 한인사회를 구 조적으로 흔들어대고 있다 경제불황은 비단 한 인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제일 주 의로 살아온 우리 한인사회는 특히 충격이 큰 듯하며, 경제제일주의를 쫓기 위한 편법과 편의 주의가 드디어 삶을 옥죄고 있는 사례를 적지않 게 보아오고 있다.

범죄 또한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범 죄는 우리와는 무관한, 미국의 병적 현상으로만 여겨 왔고, 따라서 우리 한인들은 미국범죄의 희생대상으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한인사회가 급속히 팽창한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범죄 의 대상에서 범죄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특허 청소년들의 각종범죄는 범죄가 비단 타 인종집단 의 것만이 아님을 곧바로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 고 대학입시를 둘러싼 범죄, 즉 성적 변조나 대 리 시험 둥의 청소년 범죄가 한인사회의 그릇된 가치 관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제는 한인사회의 질적 성장문제에 관심을 돌 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옮아온 한국병

지금 한국에선 개혁바람이 한창이다. ‘한국 병’을 고쳐서 ‘새로운 한국’올 만들겠다는 것이 다. 한마디로 새로운 사회가치체계를 정립한다는 말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이제까지의 한국 사회 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체계가 잘못 되었다는 말 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가치체계는 돈으로 시 작 되어 돈으로 끝이 난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 각, 돈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생각. 돈이 모든 가치규정의 기준이 되고 있으며,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고 동 원 된 수단과 방법은 늘 정당화되어 왔다 이러한 가치체계가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판을 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더군다나 미국은 자 본 주의의 본고장일 뿔더러 아직은 편법과 편의주의가 발붙일 소지가 비교적 많아 한국의 그릇 된 가치체계가 쉽게 판 올 칠 수 있었고, 여기에 정통성 없는 정치권력이 부당하게 작용, 부추겨 온 것 또한 부인키 어렵다.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에서와 같이 편법과 편 의주의 가 이곳 한인사회의 경제팽창에도 기여한 바가 없지 않다 그렇긴 하지만, 삶의 질을 외면 한 무작정의 팽창주의가 경기침체라는 벽에 부딪히자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금방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경기만 회복되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리라 보고 있다. 그럴까 설사 미국경기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이 전의 경제제일주의, 무작정의 팽창주의로 되돌아 갈 수는 없을 터이다. 이번의 시련을 계기로 우 리의 삶을 반성해 보고 삶의 방향을 바로잡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회복, 쉽지 않다.

어쨌든, 미국경제는 쉽게 풀리지 않을 전망이 다 천문학적으로 커가고 있는 재정적자 (미국정부 가 가장 큰 채무자이며, 납세자는 정부가 지고 있는 빚의 이자 갚기에도 바쁘다) , 악화되어가는 국제수지적자 둥 구조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는 미국경제여서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게 다가 국내의 모순을 감싸오던 해외 잉여가치 획 득마저 국제경쟁력의 약화로 자꾸만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어서 미국경제력의 한계를 실감케 한다 그간 경제의 숨통을 틔우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써왔던 전쟁이란 방법도, 걸프전쟁 에서 판 가름 났듯이 이제는 효용가치가 없게 되었다.

한편,지금은 산업구조의 개편기에 접어들고 있다.‘산업사회’에서 ‘후기산업사회’로 바뀔때 산업구조가 새롭게 짜였듯이,지금의 후기산업 사회가 다른 단계의 산업사회로 바뀌어 감에 따 라 산업구조가 다시 짜여지고 있는 중이다. 즉, 새로운 산업이 나타나는가 하면 기존의 왕성했던 산업이 사라지고, 산업의 내용과 질도 바뀌어 가고 있는 과정이어서 여러 가지 진통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구조 개편문제는 세계 적인 현상이어서 개편되는 산업구조에 따라 국 제관계도 변화를 가져오게 될 터이며, 이 개편과 정을 누가 주도하느냐의 싸움이 강대국 간에 운 연히 그러나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산업발전단계 변혁에 따른 구조개편 작업은 상 당한 시일이 걸릴 터이며, 세계경제가 안정을 되 찾게 된 후에는 삶의 내용과 질은 어차피 달라 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누구이며,어디서 왔는가

이러한 삶의 질과 더불어 우리는 정체성의 문제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들은 건너온 그 순간부터 적어도 외모에 있어선 차이가 없으며, 당대 에 또는 한 세대가 지나면 미국사회의 주류에 서슴없이 끼게 된다 그러나 태평양을 건너온 우 리들은 떠나온 모국을 숙명적으로 둥에 업고 살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한국계’ 미국인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빗대어 터하고 있는 한 국의 역사는 썩 자랑스럽지 못하다. 식민통치, 분단정치, 군사독재정치 속에서 역사는 갈갈이 찢기고 우리는 내 것에 대한 끝없는 부정과 환멸로 자신을 잃고 있다 이를테면, 이천 년 전의 예수는 마음속에 살아있어 가깝게 느끼고 있는 데도 채 일백 년도 지나지 않은 ‘이조’하면 아득 하고 고루하게만 느껴진다 그리고 미국이나 일 본에 비하여 북한은 아득히 먼 곳, 저주의 땅으로 생각된다. 이 말은 우리의 역사가 종으로, 횡으로 찢기고 끊겼다는 말이다.

그러나 따져보자. 이 지구상에서 한 종족이 한 곳에서 국가를 이루어 오늘날까지 지탱하고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되는가. 아세아와 유럽의 몇몇 나라를 빼고는 남 북 아메리카 대륙은 물론 호주, 아프리카 할 것 없이 모두가 타민족에 의 한 타율의 역사이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를 찾아 야 한다. 그래야만 당당해질 수 있다 오천 년의 역사를 찾아 나서고 거역할 수 없는 우리의 문 화를 보듬어야 한다.

그렇다고 이곳에 한민족의 또 다른 나라를 세우자는 말은 아니다.

타종족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국가 의 자기변명이긴 하지만 미국은 다종족국가이다. 다양한 문화와 특이한 능력들이 조화를 이루 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뚜 렷한 내 것(문화)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 에는 짓밟히고 만다.

다종족국가의 부정적인 특정은 인종주의이다 인종주의는 개인의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다종 족국가에서는 늘 써온 지배수단 (이데올로기) 이 다. 중국이 오랫동안 한족 중심, 한족우월주의가 지배하였듯이 미국은 이른바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지배주의 가 사회 이 데올 로기로 쓰여져 왔다. 따라서 백인 이외의 종족은 백인사회를 떠받치는 생산도구인 동시에 사회 욕 구 분출의 표적이 되어왔다. 그 과녁이 흑인 사회 와 더불어 라티노 사회가 되고 있으며, 언제 우리 동양계사회로 번질지 모른다. 찬찬이 굽어보면, 꽃은 일 힘든 일은 모두 멕시코 사람들에게 의존 하면서도, 즉 멕시코 사람들이 없이는 이 사회 가 돌아가지 않는데도, 모든 사회불만의 표적이 곧잘 그들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자기를 확고히 하자는 것은 당당하게 더불어 살자는 데에 뭇이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라는 강한 역사인식 과 오랫동안의 외침에서 비롯된 타 종족에 대한 배타주의가 몸에 밴 감이 없지 않다 거기다가 지난 일백 년 동안 민족통합의 역사경험을 갖지 못하여 이기주의가 극에 달하고 있다 돈이면 된 다는 생각,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뛰어 넘 어 사회공동체적 가치를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한 다.

집단이든 국가든, 나아가서 국제사회이든 더 불어 살기를 거부하고 지배하려는 데서 늘 문제 가 비롯되었고, 쓰라린 역사경험을 하여야만 한다.

인류의 궁극의 목적은 더불어 사는 데에 있다. 종교도 그 이상을 실현코자 하는 일에 다름 아닐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