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동포의 시민 참여 조직

최근 편집: 2019년 8월 30일 (금) 02:21

공적 삶에 참여하는 재미 한인 동포들의 행동패턴을 분석하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수수께끼에 직면한다. 한편으로, 재미 동포에 대한 전국 조사에 의하면 귀화율(한국의 국적을 버리고 미국의 국적을 획득하는 비율)을 위시하여 공적 삶에 대한 참여 수준을 예측하게 해주는 인구 통계적 요인들이 재미 동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선출직 공직에 진출한 동포의 비율도 다른 아시아계 이민보다 상대적으로 더 낮다. 하지만 이런 인구 통계적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2006년의 ‘이민 행진’을 위시하여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정치적 행사에 대한 동포들의 참여도는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 이전에는 조용했다. 그런데, 왜 2006년 행진에서는 동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을까? 좀 더 폭넓게 문제를 제기하자면, 동포 사회의 특정 집단이 보여준 상대적으로 높은 참여 비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본 장에서는 재미 한인 동포 사회의 특정 집단의 참여를 가능하게 했던, 상호 연관된 세 조직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와 시카고한인교육문화마당집과 민족학교의 역할을 자세하게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이은숙, 한하리의 공동 리포트. 한국어 번역: 합수윤한봉기념사업회

재미 동포들의 시민 활동의 역사적 맥락 파악하기

재미 동포 인구의 정확한 규모 추정은 다양하다. 20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 동포는 약 17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미국 국토 안전부는 2012년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미등록 한국인을 약 23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멕시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필리핀, 인도에 이어 한국은 7대 미등록 이주민 국가이다. 미국 진보 센터 AAPI의 데이터 팀이 제시한 보고에 의하면 “한국계 미국인 수가 2000년에서 2013년 사이에 미국의 평균 (인구 상승률) 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한국계 미국인들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2세대가 아닌) 1세대 이주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라고 보고한다. 그들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74%가 (미국이 아닌) 타지에서 태어났다. 동포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경제적 성공을 이룬 것으로 인지되고 있으나, AAPI 데이터에 의하면 재미 동포 5명 중 1명은 빈곤 속에 살고 있고, 재미 동포의 절반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며, 4명 중 1명은 건강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한다.

재미 동포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영구적 이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이민 사회보다 공적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고 이전의 연구는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한국인의 이민 역사에 있기도 하다. 1965년 이민법이 처음 시행되면서 이민들이 아시아로부터 파도처럼 밀려왔다. 한국인 이민의 수는 1960년대엔 11,200명에 불과했는데, 1990년대엔 5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억압적인 군사 독재와 경찰국가에 시달리는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피난처가 되었다. 그 무렵 다른 이민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더 나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장시간 노동을 했다. 일주일에 7일 노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1세대 부모들은 자식에게 서양 이름을 지어 주고, 영어를 배우게 하고, 미국 문화를 적극 수용하게 함으로써 자식들이 미국에 동화되도록 애를 썼다. 반대로 1세대 부모들은 외국 땅에 머물고 있는 일시적 체류자라는 처지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쇼핑도 한국 가게에서 하고, 교회도 한국 교회에 다녔으며, 동포 사회 내에서만 사회적 접촉을 했다. 따라서 재미 동포들의 대다수는 시민적 활동에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영어 학습 과정에 등록하지 않았고, 학부모-교사 협회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귀화(미국화)하지 않았고, 투표 등록도 하지 않았다.

동포들의 시민적 활동에 대한 세 단체의 역할과 중요성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의 회원들을 대표하여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그들이 전개한 정치 선전을 검토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주요한 정치 선전을 역사적으로 개괄할 것인데, 먼저 단체들의 창립 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창립기

우리가 연구하는 세 단체들은 모두 1990년대 초반 미국 정치를 휩쓴 ‘반 이민법’과 1992년 LA 시민 소요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동포 사회에 등장했던 시민 기반 조직이었다. 세 단체의 초기 지도자들은 이 순간이 동포들에게 중요한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한다. 한청련의 전 의장이자 NAKASEC의 창립 위원이었던 심인보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92년 우리 단체들은 4명의 L.A 경찰관들이 자행한Rodney King 폭행에 항의하는 시위대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평결이 있던 날 밤에, 우리는 약탈자와 가게 주인 간의 격렬한 싸움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다음 날 미국 주류 언론들은 본질적 문제인 도시의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인종 차별은 무시한 채, 소외당하고 있는 두 인종 간의 갈등으로 이 사건을 왜곡해 버렸습니다.

이 무렵, 동포들은 ‘1994년 법률 개정안 187호’로 대표되는, 미국 이민에 대한 한층 거센 공세를 받는다. 이 공격은 같은 해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했을 때 계속 증가했는데, 일련의 가혹한 반이민법이 도입되었다. 이러한 사건들 때문에 동포들, 특히 지도자들은 미국 사회에서 수행하는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L.A의 지도자들은, 동포들이 미국 사회의 모퉁이에서 고립된 하위 집단으로 살아가고 있고, 정치권력에 접근하기 힘든 상태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당연히 동포들은 단절된 정치권력을 거부할 영향력도 없었다. 미국의 정치는 경찰의 야만과 실업, 저소득 동포 사회에 대한 낮은 투자 등 다양한 문제점들을 무시하였다.

동포 활동가들은 회합을 갖고, 정치적 환경을 바꾸고, 동포 사회를 재건하며, 미국 전역을 휩쓰는 반이민법 광풍에 대응하는 여러 논의를 하였다. 모임에 참가한 대부분의 활동가들은 한청련 및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의 회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민족학교의 자원 활동가들과 임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원래 민족학교는 한청련과 한겨레와 상호 협력 하에 활동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고 윤한봉을 비롯한 23명의 민족학교 설립자들은 마당집을 최초로 만들었다. 이곳은 국제적 안목을 갖춘 청년 활동가를 육성하기 위한 훈련장이 되었다. 민족학교 설립자들은 한청련과 함께 활동했다. 한청련은 한,미 양국에서 인권, 민주주의, 정의를 증진할 임무를 수행했던 17세부터 35세까지의 청년들이 모여 결성한 전국 단위의 정치 단체였다. 한겨레도 비슷한 지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회원들은 나이가 더 많았고, 전략 수립, 정세 분석과 전망 수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민족학교는 동포의 의식화를 위한 교육, 봉사 활동,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 반면, 한청련은 정치 선전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에 회원들을 조직하기 위해 회원들의 정체성 확립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한청련은 미국, 캐나다, 유럽, 호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고 전 세계의 한국인 거주지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 지원하는 매우 인상적인 국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동포 지도자들은 한청련의 활동과 주장을 환영하지 않았는데, 한청련이 매우 급진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은 가족과 친구들의 반대와 비난에 직면해도 그들은 꿋꿋히 열심히 활동했다. 한청련이 성공하고 가시적 영향력이 커지자, 한청련은 다양한 정치적 당파들의 감시를 받았고 침투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중에는 남한과 북한의 정권과 긴밀한 연관된 조직들도 있었다.

그러나 1994년 무렵, 이 단체의 지도자들이 동포 사회의 재건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을 때 조직적 지형은 변해 있었다. 1992년에 한청련은 자신들의 주요한 목표 중의 하나인 남한의 군사독재 종식을 목격했다. 이 중요한 정치적 변화와 미국에서의 정치적 환경 변화가 맞물리면서, 한청련 지도부는 한국의 이슈만이 아니라 동포들의 이슈를 다루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목표가 바뀌게 되자 단체 회원들의 구성도 바뀌었다. 더 많은 1.5세와 2세대 동포 활동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한청련과 한겨레 그리고 민족학교와 같은 협력 단체들은 풀뿌리 조직화, 정치권력, 의미 있는 연대 형성에 치중하는 동포 사회의 단체들을 모아내기 위해 전국 단위의 단체가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NAKASEC 결성식

그리하여 지도부는 1994년에 NAKASEC을 만들었고, 1995년엔 시카고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을 설립했다. 1994년 9월 창립총회에서 NAKASEC과 협력 단체들은 시민권 관련 쟁점들에 대한 진보적인 동포들의 목소리를 전국적 차원에서 강화하는 데 치중하는 과감한 사업 계획을 인준하였다. 당시 근거지를 확보하여 풀뿌리들의 조직적 실천과 세력화를 추구하고 정책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활동하는 헌신적인 단체가 동포 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세 단체들을 선구자라고 부를 수 있다. 시카고에서는 한인교육문화마당집가 사회 정의를 위한 의제를 선도하고, 조직 구성을 강화함으로써 빈 공백을 메꾸었다.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설립자들은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었으며, 일부 성인들은 20대였다. 그들은 주로 최근에 이민한 1.5세대들로서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저소득층이었다. 일부는 미등록 이민이었고, 일부는 입양아였으며, 극소수만이 대학 학위를 가지고 전문직에 종사했다. 여성들이 지도부의 중심이었고 의사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치적 연줄, 부유한 후원자, 정부 기금이 부족하여 젊은이들은 처음에는 1세대 남성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일부 예외가 있긴 했지만, 시카고의 동포 지도자들은 대다수 함께 일하자는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한 단체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심지어 북한 추종, 연계 세력이라고 젊은 활동가들을 고발까지 했다. 따라서 젊은 활동가들은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설립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모든 회원들이 신발 판매, 복사기 수리, 꽃 배달, 식당이나 카페 아르바이트로 번 주급을 기부함으로써, 시카고의 Californea Peterson가에 침실 2개 아파트에 보증금을 내고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레이저 프린터를 구입하기 위해 자원 봉사자들이 시카고 북부의 주요 교차로에서 지나가는 차량 운전자들에게 꽃을 팔기도 했다. 사무실 운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나이트클럽에서 나오는 빈 병과 캔을 수집하기도 했고, 가구를 옮기고 약간의 돈을 받기도 했다. 요약하면,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을 설립한 지도자들은 이주자로 자라면서 직접 경험을 쌓은 젊은 사람들이었다.

한청련은 단독으로 동포들의 자존감을 고취하고, 능력을 키우는 노력을 선도하는 대신, 상당한 자원(회원들의 기금 마련 활동에서 나온 회비)을 민족학교(민족학교)의 발전뿐만 아니라 NAKASEC과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설립 지원에 투입했다. 한청련은 이처럼 한인교육문화마당집가 뛰어난 조직이 될 수 있도록 지도부를 지원했다.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동포 개개인의 삶과 동포 사회를 향상시키기 위한 총체적 접근 방식에 집중하여 사회봉사, 교육, 문화를 조직화와 정치 선전의 장으로 연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1992년에 동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결여되었던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한청련은 한인교육문화마당집에 지도력을 계발하는 데 소요되는 많은 훈련 자원을 지원했다.

"운동의 생활화"가 기본 건립 이념의 하나였다. 때문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자원 봉사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조직(방법)론, 사회 정치사상과 철학, 한국사와 국제사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 등에 관한 종합적 교육 및 학습을 진행하면서 한인교육문화마당집 지도자들에게 운동의 생활화를 전파했다. 이러한 협력 체계를 통해서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지도부는 재미 동포들에게 개인적,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활동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 단체는 상호 존중의 강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한청련은 한국 관련 이슈에 집중하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미국 내 이슈에 치중하기로 결정했다.

복지 개혁과 이민권의 조직화

1994년 선거에서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일련의 반이민법을 제출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1995년 여름에 ‘이민을 위한 정의’ 운동을 공동 기획했다. 이 운동의 목적은, 실업에서부터 범죄, 미국의 문화적 가치의 퇴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은 이민이라는 공공연한 주장의 출현에 맞서는 것이었다. ‘이민을 위한 정의’는 워싱턴 포스트에 2페이지 전면 광고를 게재하여 반이민법 논쟁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의회와 대통령에게 반이민법 법안을 반대하도록 촉구했다.

조직가들이 이끄는 운동 기간 동안 조직적 성공은 기금 목표액의 두 배를 초과하는 55,000달러의 모금으로 이어졌다. 이는 보스턴, 시카고, 달라스, 인디아나폴리스, L.A, 매디슨, 뉴욕, 필라델피아, 포닉스, 워싱턴 등 미국의 다양한 도시에서 300개 이상의 단체와 수천 명의 개인들이 광고를 지원하기 위해 보내준 것이었다. 이 운동을 통해 NAKASEC과 하부 조직들은 복지와 이주 개혁 정책의 영향에 대해 동포 사회를 교육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 수 있었다. 동포 사회가 총동원되어 선출직 공무원들에게 수천 통의 편지를 보냈으며, 풀뿌리 실천 운동에 동참했다. 이런 방식으로 운동에 참여한 동포들은 정책 결정 과정을 알게 되었고, 풀뿌리 활동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차이점에 대해서도 학습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운동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NAKASEC과 협력 조직들은 ‘이민을 위한 정의’가 조직의 인지도를 높이고 능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이 운동은 신생의 한 동포 단체가 미국 전역에 걸쳐서 다양한 공동체와 다양한 부문에 소속된 수만 명을 참가시킨 최초의 운동이었다.

주류 이민 운동 지지자들은 처음에 무명의 신생 조직이 이끄는 이 같은 정치 운동에 회의적이었지만, NAKASEC 지도부는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이민 단체들이 새로운 운동 방식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으며, 이민들이 자신들을 대리하는 단체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전략에 감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역 단체 소속의 조직가들은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이용가능한 모든 자원을 활용했다.

시카고에서만 수천 명의 동포들이 교회와 슈퍼에 설치된 모금함에 1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Latino 지역에서 활동하는 봉사활동 단체인 Erie Neighborhood House에서 영어를 제2언어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저녁 수업 시간에 기부금을 모았다. The Polish Daily News는 독자들에게 우편환 보내기를 독려했는데, 폴란드계 미국인들이 보낸 5~10달러 우편환 봉투가 한인교육문화마당집로 쇄도했다. 후원의 근거지가 다양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지도부는 기자회견을 영어, 한국어, 스페인어, 중국어, 폴란드어로 동시에 진행했으며, 여성, 노동자, 아프리카계 대표자들도 포함시켰다.

NAKASEC과 협력 단체들은 새로 확인된 힘을 바탕으로 복지 개혁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들은 2년 넘게 연대활동을 지속하였고, 몇 가지 복지 개혁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매 시기 NAKASEC과 협력 단체들은 청원, 팩스 보내기, 집회, 행진, 그리고 L.A에서의 5일 단식 투쟁과 같은 실천으로 대응했다.

1996년 7월, 클린턴 대통령이 의회가 통과시켰던 세 번째 버전의 복지 개혁안에 서명했다고 발표했다. 두 차례에 걸쳐서 복지 개혁안 거부권 요구를 성공시켰던 동포 활동가들은 이 뉴스를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 여러 도시의 동맹 조직 지도부와 영향력 있는 지역 활동가들이 회합을 갖고 동포 사회는 최후까지 결사 투쟁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 NAKASEC과 협력 조직들은 지난 2년 동안 구축한 지도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미국 전역에서 대량 편지 보내기 운동에 착수했다. 단 2주 만에 아주 멀리 떨어진 알래스카로부터 17,000여 통의 편지가 워싱턴 D.C로 운송되어 민주당 전국위원회 지도부에 직접 전달되었다. 민족학교는 공화당 전국위를 겨냥한 항의 시위를 조직했으며,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시카고에 있는 공화당 전국위 사무실에 조직 서한을 전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세 단체들은 후원자와 인지도를 확대했다.

선거 운동과 시민운동을 통합하는 지도력을 구축하다

복지 개혁 관련 조직화를 진행하는 동안, NAKASEC과 소속 단체들은 1996년에 유권자 교육 운동도 야심차게 전개하려고 노력했다. ‘참여 프로젝트’라는 별칭이 붙은 이 운동은 이민 권리 투쟁을 통해 활동가가 된 동포들을 1996년 대선 기간 동안 최초의 선거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집중했다.

이 운동은 투표자 등록, 전화 선거운동, ‘어떻게 투표할 것인가’ 세미나, 주요 여론조사 장소에서의 통역, 아시아 태평양 출구 조사와 같은 광범위한 활동을 망라했다. NAKASEC은 ‘1996 선거 가이드’라는 비당파적 한국어 책자도 발행하여, 연방 선거 과정을 설명하고 주요 선거 쟁점을 강조했으며, 시민 권리 운동을 통해 쟁취한 투표권이라는 맥락 속에서 동포들의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NAKASEC은 한국어 최대 일간지 코리아 타임즈와 협력하여 전국적으로 안내 책자 5만 부를 배포했다.

NAKASEC과 산하 조직들은 영어가 유창한 젊은 층과 유창하지 못한 1세대 노령자층 모두에게 손을 내밀어 유권자 교육과 선거 운동을 조직함으로서 유권자 교육과 선거 운동의 영역과 범위를 확장하고 자신들의 역량도 향상시켰다. 자신들이 조직화하려는 지역 유권자들 대부분은 생애 첫 투표자들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들은 문화적으로 민감한 이중 언어 유권자 등록, 지속적 접촉, 봉사 지원 등 포괄적인 활동을 관리했다.

단체의 지도부들은 주목할만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주요 조직화 대상 지역 중 하나인 남부 캘리포니아 동포들의 유권자 등록 비율이 2000년 35%에서 2011년 73%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비당파적 선거 활동을, 연중 내내 지속되는 힘찬 시민 참여와 통합하여, 이 단체들은 더욱 강력하면서도 인지된 동포들의 목소리를 조직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정책 결정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동포 사회의 조직화에 초점을 맞춘 다른 시민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NAKASEC, 한인교육문화마당집, 민족학교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독자적인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동포 사회의 지도자를 육성했다. 이전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지도자를 발굴, 육성하고, 그 지도자들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그 공동체를 발판으로 삼아 공적 영역에서 그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공동체 조직화는 이루어진다. NAKASEC, 한인교육문화마당집, 민족학교는 바로 그것을 해냈다. 복지 개혁, 이주자 권리, 선거 등의 활동에 동포들을 참여시킬 때, 그들은 동포들에게 장기적인 동기 부여, 정체성, 능력을 꾸준히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단체들은 정치적 경험이 풍부하여 다양한 형태의 정치 활동을 전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간부 집단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 전략적 능력들은 이어지는 다양한 활동들에서 명백히 드러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SSI 복지 제도의 복원

1996년 11월 대선에서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하자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오직 사회 정책 투쟁에 집중한다. 클린턴은 1996년에 자신이 입법 서명했던 복지 개혁 법안의 차별적이고 불공정한 조항들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이 조항들은 동포 사회의 노인들에게 특히 커다란 영향을 주는 것이었다.

1996년의 ‘현재 인구 조사’는 65세 이상 동포 20%는 빈곤한 삶을 살며, 절반 가까이는 공적 지원, 특히 ‘보충 보장 수입(Suppplemental Security income)에 의존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1996년의 복지 개혁법은 많은 합법적 영주권자들에게 이 지원금 제공을 거부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 항의로, NAKASEC과 소속 단체들은 1996년 12월에 ’이주자 수혜 부활을 위한 전국 전보 운동‘ 기구를 출범시켰다. 지역적, 전국적 동맹을 형성하여, 1997년 1월 19일 클린턴 취임식 날 “이주자에 대한 약속을 지켜라!”라는 2,600통의 개별적 전보 발송에 발맞추어 서명지와 기금을 모급했다. 몇 달이 지난 5월, 클린턴 대통령은 특정 이주자 집단에 대한 SSI 수혜를 부활하는 예산안을 의회와 협상했다.

복지 개혁 투쟁 이후의 이민 권리 조직화 운동

새롭게 결합한 노년 활동가들은 투쟁의 성공에 힘입어서 복지 개혁의 다른 투쟁에 계속 참여하기를 원했다. 1998년에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복지 개혁법에 의해 거부되었던) 저소득 합법 이주자들에게 제공되는 식품 구입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 미국 전체를 아우르는 이주자 권리 조직에 가입했다. 이 단체들은 “우리들의 접시는 텅 비었다.”라는 주제를 담은 다양한 수기(手記) 메시지가 적힌 5,000개 이상의 종이 접시를 모았다. 매일 노년 활동가들은 성인 돌봄 센터, 의료 센터, 버스 정류장 등 다양한 장소에서 모은 서명된 종이 접시를 가지고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에 모여들었다.

6개월 후인 6월 24일, 클린턴이 저소득 합법 이주자들에게 지급되는 식품 구입권을 부활시키는 ‘농업 연구 법률안’에 서명할 때, 백악관은 서명식에 NAKASEC을 초대했다. 식품 구입권의 부활은 이주자 공동체의 중요한 승리이자 동포 사회의 정치적 성숙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였다. SSI와 달리, 동포들은 식품 구입권에는 덜 의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포들, 특히 노인들은,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자신들의 잠재력을 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자신들에게 중요한 쟁점과 다른 저소득 이주자들에게 중요한 쟁점 조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왜 집회에 참가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노령 지도자 황진선은 “우리 모두는 소수자다. 우리는 서로 연대해야만 한다.”라고 답했다.

SSI와 식품 구입권 부활 투쟁의 승리는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의 지도부가 동포들의 정치적 각성과 교육의 일환이라고 여겼던 것을 더욱 심화했다. 이러한 각성의 결과는 그 후 몇 년 동안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기간 동안 이주자들을 위한 운동의 흐름은 바뀌고 있었다. 다음 2년 동안 2000년 대선에 이르러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운동 방식을 지속적인 이주자 권리의 방어와 보호에서 보다 담대한 이주자 권리 의제를 추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예를 들어, '96년 법률의 수정을 위한 로비의 날' 집회에 미국 전역에서 모인 130여 명의 노인들이 의원들을 만나 1996년 이주자 복지 개혁 법안의 '잘못된 점 바로 잡기'를 증언했다. 2000년에, 미등록 이주자의 합법화, 법률 245조 36항의 부활, 고용주에 의한 자의적 제재 폐지 등의 일련의 활동들에 조응하여 '이주자 총궐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해 여름, 이 운동을 통해 이러한 정책들의 반영을 요구하는 3만여 통의 편지가 미국의 거대 양당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발송되었다. 이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엘 고어는 선거 운동 과정에서 합법화 정책 지지를 공약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계속해서 새로운 전략, 전술 실험을 진행했다. 그동안 쌓은 전술 능력을 바탕으로 더 폭넓은 의식화와 활동 영역의 확장을 위한 사업을 확정했다. 2005년 반이민 정서의 물결 속에서 보수당이 지배하는 의회는 HR4437 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률은 미등록 이주자들과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을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2006년 전반기 내내 미국 전역의 주요 도시에서 항의 시위, 행진, 집회가 쏟아졌다. NAKASEC과 하부 조직들은 많은 연대 조직들과 함께 지역 주민들을 조직하여 행진을 했다. LA에서는 NAKASEC과 민족학교가 노동절 행진을 비롯한 지역 행사들의 조직 근거지였으며, 이 단체들 소속의 풍물패는 다양한 행진에서 떠들서관 소리의 공연과 복장의 특이한 시각적 효과로 동포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게다가 NAKASEC과 협력 조직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영향을 받은 동포들을 시카고나 뉴욕을 비롯한 자신들 근거지의 대변인으로 조직했다. 이러한 역사적 행진을 통해 이 단체들은 수백만 서류 미비 미등록 이민들이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법률안의 도입과 같은 다양한 정책 반응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이 단체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런 활동을 통해 미등록 이주자를 비롯한 새 세대 이민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했다는 점이었다. 미등록 이민들은 어두운 음지 생활에서 빠져 나와 자신들의 권리와 미국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공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Dreams Across America

역사적인 2006년의 이민 행진 이후, 이민 개혁 쟁점이 최우선적 국가적 의제가 됨에 따라 이민 논쟁을 인도적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뚜렷해졌다. 2007년 6월 초, NAKASEC은 서비스업 국제노조(SEIU),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노조연맹, Courage Campaign, 로스앤젤레스 대교구와 함께 ‘이민개혁 전국철도횡단(Dreams Across America)’을 출범시켰다.

100명 이상의 드리머들이 미국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워싱턴 D.C로 기차를 타고 모여들었다. 새로운 이민과 이민의 자녀들, 원주민들과 일하는 어머니들, 백인 기업가들과 아시아계 미국인들, 라틴계 미국인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왔다. 아시아계 미국인 중에는 부모가 추방된 후 이웃에 의해 양육된 톨레도 출신의 젊은 한국계 앤드류 정도 있었고, 가족과 헤어지는 추방 가능성에 맞서 싸우고 있는 캄보디아계 Many Uch도 있었으며, 한국에서 독립운동 하다 투옥된 부모님을 목격한 이후,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싸우겠다고 결심한, 김 할머니로 알려진, 김희복 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언론들은 이 운동에 참여한 개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함으로써 나라와 대륙을 건너온 그들 모두가 더 나은 삶을 갈구하는 ‘드리머들’이라는 생각을 널리 알려지도록했다.

이 여행 참가자들은 이민들에 대한 공적 이야기(공공 영역에서의 인식과 태도)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드리머들’의 이야기는 미국 이민법 개정의 절박함을 전달해 주었다. 게다가 이 ‘드리머’들은 중요한 입법 모임을 개최하고 집회와 기자 회견에서 연설했는데, 500회 이상 언론에 보도되었다.

2008년 여름에 NAKASEC과 북서부 지역 사회단체 연합(지금은 ‘정의 사회를 위한 동맹’)과 동포 사회의 변화를 위한 센터(Center for Community Change)는 ‘주(州) 아동 건강보험 프로그램‘에 이민 아동을 포함시켜 재승인하는 야심찬 계획에 착수했다.

‘미국의 미래는 건강한 아동들과 함께 시작한다.’ 캠페인은 수많은 언론 행사를 개최했으며,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는 등 조직 동원 활동을 수행했다. 워싱턴 D.C에서 열린, 홍보가 잘 된 ‘전 미 어린이 미술 전시회’가 때마침 대통령 취임식과 상원 법안 심의 기간과 겹치면서 이 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전체적으로 23개 주의 공립 학교 미술 수업, 방과 후 프로그램, 마을 조직 등에서 4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 전시회는 두 교통 요충지인 Union 역과 Rayburn House Office Building에 접수된 그림들 중 62개 작품을 진열하여 모든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보편적 의료 혜택의 중요성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독특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들은 온라인을 통한 감상도 가능했으며, 상원 다수당 원내총무 Harry Reid가 주최한 특별 기자 회견을 통해 언론에서도 관람이 가능했다.

2009년 2월 4일, 오바마 대통령은 확장된(이민 아동을 포함한) ‘주 아동 건강보험 프로그램’ 재승인 법률안에 서명했다. NAKASEC도 서명식에 참가한 몇 개의 동포 단체 중 하나였다.

캠페인 홍보 영상

남부 캘리포니아의 민족학교 역시 로스앤젤레스 County에서 영어에 능통하지 않는 의료 수혜자들에게 이중 언어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을 수행했다. 다른 운동과 마찬가지로, 이 캠페인을 통해 민족학교는 노인 조직화와 권한 부여의 목표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 당시까지 모든 유형의 기본적인 서신에도 번역이 필요한 노인들이 너무 많았다. 일부는 마감일까지 기본적인 정보 요청에 답을 줄 수 없어서 복지 수혜를 상실하기도 했다. 민족학교가 설립한 노인 조직 ‘가주보건리더(CHP)’은 조직 동원을 이끌고 봉사 활동을 벌였다. 영어가 능통하지 않은 250명의 한국어 사용 노인들이 모인 town hall 미팅, 수 천 건의 청원, 수없이 많은 입법 방문을 포함한 3년간의 활동 끝에, L.A 카운티 공공 서비스국은 영어를 하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한국어와 영어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동의했다.

다른 모든 활동에 있어서,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그들이 (활동을 통해)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는지, 혹은 지역 주민들을 위한 구체적 혜택을 쟁취했는지에 따라 운동의 성공 여부를 판단했다. 뿐만 아니라, 정책 변화를 위해 투쟁하고 입법화하는 과정에서 동포들의 개인적, 집단적 역량을 어느 정도 강화했는지에 따라 성공 여부를 판단했다. 가시적 변화를 쟁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체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전략은 이 단체들이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모든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노령자들을 위한 저렴한 가격 주택 공급

캘리포니아 지역에서의 적정 가격 주택의 부족은 동포들의 빈곤, 건강 악화, 홈리스 증가의 결과를 낳았다. 동포 사회의 많은 노인들은 저렴한 노년층 아파트로 이사하기 위해 7~10년 동안 기다렸다고 증언한다. 예를 들어, L.A의 코리아 타운에서는 약 60%의 동포들이 세입자이며, 노년 세입자의 절반 이상이 수입의 65%이상을 주거비용으로 지불한다. 지금은 대기자들이 너무 많이 밀려 있어서 ‘폐쇄된’ 대기자 목록이 있을 뿐이다.

저소득 노령자들을 위한 저가 주택 공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족학교는 2006년에 ‘리틀 도쿄 서비스센터 지역개발공사’에 손을 내밀어 그들의 구역에 노령자들을 위한 저렴한 아파트를 건설해달라고 요청했다. 협력 약정서가이 체결되자, 인근의 주택 소유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반대하며 '윌셔 공원 협회(WPA)'를 결성했다. 이에 대응하여, 민족학교는 심도 깊은 조사 작업을 진행하였다. 회원 활동가와 노인들이 인근 지역 거주자들을 가정 방문하기도 하고, '윌셔 공원 협회 회원들과 모임을 갖고 프리젠테이션도 진행하였다.

지속적으로 진행된 '윌셔 공원 협회‘ 소속 거주자들과의 직접적 접촉은 민족학교 지도부들의 초반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보여주었다. 민족학교가 저렴한 고령자 아파트 건립 승인을 검토하는 ‘L.A 도시 계획 위원회’ 앞에 모였을 때, '윌셔 공원 협회의 대표는 지지의사를 뚜렷하게 밝힌 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적정 가격 아파트 건설 프로젝트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동포 타운에 저렴한 고령자 주택 단지 2개를 건설하는 기공식이 2015년에 열렸고 201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이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저소득 노령 층에게 양질의 주택을 공급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학교는 주민들에게 시민적 활동의 기회 제공을 포함하여 서비스와 교육 프로그램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2016년 초 두 달 동안의 공개 신청 기간 동안, 민족학교는 67개 단위에 4,000장의 신청서를 접수받았다. 이 수치는 도시에서 적정 가격 주택의 지속적인 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적정 가격 주택 공급을 위한 기금 확보 책임을 맡고 있는 노년 활동가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저소득 노년 활동가들은 대기자 리스트를 기다리던 소극적 지원자에서 주택 공급 정책과 과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동료 노인들을 적극적으로 교육하고 조직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최근에 노령자 회원들은 적정 가격 주택 공급을 위한 영구적 공공 기금 도입을 요구하는 5,000장의 청원서를 모아냈다. 이와 같이 이 단체들은 직접 혜택을 입은 사람들이 이러한 운동을 주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지역 사회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현재의 이민자 권익 활동

2008년의 선거를 거쳐 백악관과 의회에 새로운 지도자들이 등장했을 때, 개혁 운동가들은 이때가 총체적 이민 개혁을 위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민 권리 옹호 단체들이 활동 강도를 높임에 따라, 의회는 2010년 공화당 지배로 전환된 이후 특히 양극화되었다. 2014년 무렵, 2016년 대선 이전에는 정책 변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 뚜렷해지자, 이민 권리 공동체 내에서의 압력이 거세졌다. NAKASEC은 ‘가족들을 위한 단식’투쟁을 통해 이민권 문제를 전국적 이슈로 부각시키려는 동맹 조직에 가입했다.

캠페인 홍보 영상

NAKASEC의 사무국장 윤대중은 SEIU 소속의 Elisa Medina, ‘Mi Familia Vota’ 소속의 Christian Avila, ‘일시 체류자들(Sojourners)’ 소속의 Lisa Sharon Harper 등과 함께 단식 투쟁에 참가한 핵심 참가자였다. 워싱턴 D.C의 National Mall 앞의 텐트에서 22일 간의 단식 투쟁을 진행하면서, 비인도적인 이민 정책 때문에 이별하게 된 수백만 가족들의 고통을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다. 미국 전역에서 500개 이상의 단체들이 ‘24시간 연대 단식’에 동참했으며 이주 개혁에 관한 토론을 개최했다.

‘가족들을 위한 단식’ 동안에 50여 명의 상,하원 의원, 오바마 대통령, 영부인 미셀 오바마, 바이든 부통령, 5명의 장관들이 단식 현장을 방문했다. 이러한 모임들에서 지도부는 선출직 공직자들에게 현행의 망가진 이주 정책으로 인한 추방, 가족의 이별, 다른 부정적 영향들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NAKASEC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고전적인 시위 방식을 채택하여 현대 시대에 적절하고 영향력있게 만들었다. 이민 개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가족들을 위한 단식’은 이민 개혁 이슈를 국가적 무대로 다시 투하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민 개혁 토론을 진행하면서,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그들이 수 년 동안 구축해놓은 지도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도자들 중에는 이주 개혁을 진전시키지 못하는 것에 항의하여 오바마 앞에 섰던 것으로 잘 알려진 청년 지도자 홍 주, ‘가족들을 위한 단식’에 참여하기 위해 워싱턴 D.C로 왔던 서류 미비 체류자 아버지 정상혁, 이중 언어 권리, 건강 돌봄, 적정 가격 주택 공급을 위해 수년 간 투쟁해온 노령자들의 단체 CHP 등이 포함되어 있다.

‘불법 체류 청년 추방 유예 제도의 이행에 가장 기여한 것은 바로 운동의 당사자들이[주 1] 지도력과 신뢰를 구축하도록 하는 일관된 조직화 모델이라고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은 믿고 있다. 2012년 DACA가 시행된 이래로, 2014년 말까지 세 단체는 13,000통의 전화와 방문을 받았고, 4,300건의 일대일 상담을 진행했으며,1,500건의 DACA 신청서를 처리했다. 특히 민족학교는 미국에 있는 모든 집단의 아시아계 DAKA 신청서를 처리하는 중심 허브가 되었다. 2014년 6월 기준, 남한은 DACA 신청자의 5대 출신국가이다.

결론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우리는 동포들의 적극적인 풀뿌리 사회 정의 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몇 가지 요인들을 살펴봤다. 동포 사회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1994년 L.A 시민 소요 사태였다. L.A 사태를 겪으면서 일부 동포들은 환상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지역 사회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명심은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4월 29일 최초로 군중이 집결했던 플로렌스와 노르망디의 모퉁이에서 1 마일도 안 되는 Sloauson Avenue에서 옷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사업이 망하고 집이 저당 잡혀 처분되었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녀는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 받았던 엄청난 도움을 기억한다.

그녀는 사태 이후에 마을 모임에 참여해서 자신이 흑인 커뮤니티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달았다. 그녀가 다른 동포 가게 주인들과 함께 처음으로 지역 사회에 기여한 된 이유, 그녀의 딸이 Watts에서 공립학교 선생님이 된 이유, 그녀가 지금 노년 활동가가 된 이유가 바로 이 깨달음의 경험이다.

L.A 사태의 종합적인 결과는 이주자들을 비방하고 그들이 미국에서 누리고 있는 권리와 수혜에 반대하는 거대한 반이민 정책의 물결이었다. 더욱이 1992년 남한 대선에서 첫 문민정부의 출현은 많은 동포 활동가들을 미국 내 이슈에 더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독자적인 정치적 목소리의 개발 필요성이 분명해짐에 따라, 이러한 요인들은 동포 사회에서 독자적인 정치적 목소리에 대한 긴박함과 필요성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긴급함 때문에 동포 유권자들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사회 기반 조직들이 설립되었다. 기존의 한청련이나 L.A의 민족학교 같은 동포 사회 조직들이 초기의 여러 단체들이 독자적 활동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도 역량과 자원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1990년대의 정치적 환경은 동포 사회가 기존의 사회 기반 조직을 확대하여 시민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미국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했다. NAKASEC과 한인교육문화마당집와 같은 단체들이 설립되고 민족학교같은 단체들이 활동 목표를 재정립한 것이 바로 이 때였다. 이런 방식으로 동포 사회는 함께 모여 전국적 차원에서 진보적인 동포들의 목소리를 조직할 수 있었다.

현재 동포들의 시민적 참여는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여 노령층, 서류 미비 고등학생과 대학생, 그리고 최근엔 입양자들에 대한 가시적 조직화와 지도력 구축이 이루어졌다. 청소년, 청년, 장년, 노년 등 여러 세대에 걸친 동포들의 활동은 아시아계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 - 수동적이고 보수적이며 자신에게만 몰두하는(self-absorbed)-를 바꿔놓고 있다. NAKASEC, 민족학교, 한인교육문화마당집 세 단체는 이주자 권리 운동을 넘어서 보다 광범위한 시민권 관련 쟁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유권자 등록 운동이나 투표 안내서 발송과 같은 단기적 선거활동을 넘어서 선거 운동의 깊이와 규모를 넓힘으로써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진화해왔다. 그들 앞에 놓인 긴급한 과제는, 자원 봉사와 사무용품 등의 기증에 의존하지 않는 모든 단체들처럼, 어떻게 활동 범위와 능력을 키워서 지역 사회에 안착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현재 세 단체에서는 운동을 통해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동포 사회 운동과 시민적 활동의 지속적인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동포 사회의 지도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부연 설명

  1. 때로는 지역에서 소외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