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공주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15:30
정의공주
공주
신상정보
출생일 1415년
사망일 1477년 2월 11일
사망지 조선
능묘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3-1
왕조 조선 왕조
부친 세종
모친 소헌왕후 청송 심씨
배우자 연창군 안맹담(延昌君 安孟聃)
자녀 4남 2녀
안여달(安如獺), 안온천(安溫泉),
안상계(安桑鷄),
지중추 안빈세(知中樞 安貧世),
정광조(鄭光祖)의 처,
한치례(韓致禮)의 처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년 ~ 1477년 2월 11일)는 이씨조선의 공주로, 세종대왕소헌왕후 심씨의 차녀이며,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세조의 누나이다. 아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양모는 경창부윤(慶昌府尹) 유한(柳漢)의 처 박씨(朴氏)이다.[1]

생애

1415년 8월 16일(음력 7월 12일)에 태어나 1428년(세종 10) 정의공주로 책봉되어 관찰사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연창위(延昌尉) 죽성군(竹城君) 안맹담(安孟聃)에게 하가(下嫁)하였다.[2]

1469년(예종 1)에 정의공주는 남편인 안맹담이 죽자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상·중·하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대한민국 보물 966호로 지정되었다.

아버지인 세종이 15살 때 얻은 첫 딸 정소공주가 겨우 13살의 나이로 병사한 바람에, 정의공주가 실질적인 세종의 장녀이자, 유일한 적녀(嫡女)였다.

한글 창제

흔히 집현전 학자들과 세종이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이 문자형 28개를 혼자 고안해낸후 그28자를 집현전 학자들에게만 보여주었다. 세종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사람은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와 그 외 세종의 아들들(대군들) 중 주로 문종수양대군, 안평대군이라고 역사에 남아 있다. 정의공주는 대군들도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3] 정의공주는 수학과 천문학에 능해 대를 이을 왕자가 아님에도 세종에게 상당한 총애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정의공주 졸기>에는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책력과 산술에 관한 학문)을 해득(뜻을 깨쳐 앎)하여서 세종이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4] 정의공주죽산 안씨인 안맹담에게 시집을 갔으며 죽산안씨대동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고 한다.[3] 그런데 죽산안씨대동보는 1976년에 작성된 족보로 날조된 문서라는 논란이 있다.[5][6]페미위키 이용자들은 가부장제도의 파편인 족보에 경계심을 갖고 사료를 판단하도록 하자.

世宗憫(세종민)方言不能以文子相通(방언불능이문자상통)始製訓民正音(시제훈민정음)

而變音吐着猶未畢究(이변음토착요미필구)使諸大君(사제대군)解之皆未能(해지개미능)

遂下于公主(송하우공주)卽解究以(즉해구이)進世宗大加稱(진세종대가칭)賞特賜奴婢數百口(상특사노비수백구)
세종께서 소리(방언)가 문자(한글기호)와 서로 잘 통하지 않아 근심이 많으셨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었다.

소리의 변화원리(변음)와 소리의 토하는 소리(토착)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였다. 모든 대군들에게 시켜보았으나 모두 풀지를 못하였다.

공주에게 시키니 즉시 연구하여 풀어 내었다. 이에 세종대왕께서 크게 칭찬을 하시면서 특별히 노비 수백명을 상으로 주셨다.

요약하면 세종과 수양대군, 그리고 안평대군을 비롯한 왕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정의공주가 해결하여 한글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를 토대로 한글 기호(가름토)는 본래부터 있던 것이며 이 한글 원리의 핵심을 정의공주가 풀어 세종이 훈민정음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정사가 아닌 야사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으나, 세종나신곳성역화국민위원회 사무총장인 김슬옹 교수는 보학의 엄격함을 따져보았을 때 상의 내용(노비 수백)에서 과장이 있었을지언정 상을 받은 구체적인 이유까지 허구라 보기는 어렵다고 반박하였다.[7]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이 신하에게 하사한 고기한근, 비단한필도 정확히 기록하는데, 단지 노비 '수백'구라고 작성할리가 없다. 또 당대에는 개국 공신에게도 노비를 최대 30구를 하사했는데 수백구이면 당시 인구와 경제상황을 고려했을 때 비현실적이며 사실이라도 유생들이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역사 교과서나 드라마, 소설따위와는 다르게 처움에는 다른 신하들 몰래 창제하여 28자를 만든후 집현전학자들에게만 알렸다. [8]정의공주가 정말 노비 수백구를 받았다면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려 한다고 알리가 없는 유생들은 갑작스러운 재정지출에 반대시위를 열고 상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이것과 관련된 내용이 허나도 기술되어있지 않다. 이 사실은 죽산안씨대동보를 작성한 사람이 조선시대에 대한 상식이 만무한 사람이고 정말 사료로써 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떡 한조각도 기록하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의공주는 한글창제당시 노비나 다른것을 왕으로 부터 받은 내용은 없고 계유정난후 죽은 댜신들의 노비를 정의공주가 30구, 후궁이던 혜빈양씨가 100구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단종실록에 적혀있다.

책 <정의공주>의 저자인 한소진은 역사적 진실 대신 알려진 '암클'이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사실을 유추해내었는데, "'큰 글'이라는 뜻을 지닌 한글이 긴 세월 동안 암클이라 폄하된 것은 한글 창제에 여자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정의공주가 한글 창제에 큰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한다고 말하였다.[9] 즉 사실상의 대부분의 한글 창제에 정의공주가 주도적인 역할을 발휘했으며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종대왕의 역할이 과장되었을 가능성 또한 크다는 것이다.

출처

  1. 《조선왕조실록》, 세종 101권, 세종25(1443), 9월 23일 2번째 기사
  2. 《조선왕조실록》, 세종 39권, 세종10(1428), 2월 12일 3번째 기사
  3. 3.0 3.1 신민수 (2013년 5월 29일). “훈민정음창제의 1등공신은 세종의 딸 '정의공주'. 
  4. “세종대왕과 정의 공주”. 《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 - 쉼표, 마침표.》. 2017년 11월 24일에 확인함. 
  5. http://www.goeul.kr/detail.php?number=10005&thread=26
  6. http://m.egloos.zum.com/atskown/v/5313926
  7. “세종대왕과 정의 공주”. 《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 - 쉼표, 마침표.》. 2017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족보를 다루는 학문을 ‘보학’이라고 하는데, 사실 보학도 정사 못지않은 엄격함이 있습니다. 집안의 ‘혈통’을 다루는 데 결코 허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단순 야사라 치부하기에는 (정의 공주) 기록이 대단히 구체적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비 수백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상이 얼마나 컸는지 그 규모에 대해서는 가문을 자랑하기 위해 살을 조금 붙일 수는 있을지언정, ‘변음과 토착의 문제를 풀어’ 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점은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므로 사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8. https://www.google.co.kr/amp/www.civicnews.com/news/articleViewAmp.html%3fidxno=18179 5째 문단 참조
  9. http://blog.aladin.co.kr/ceo71ceo/469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