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기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9일 (목) 15:21

정채기(1962년 - 2013년 6월)는 한국의 남성운동가, 대학교수로 건국대학교, 명지대학교 등에서 심리학, 보육학 교수로 활동했다. 1992년 일본에 갔다가 일본 남성협회의 존재를 접하고 거기에 가입, 1992년 귀국 후 한국에 최초로 남성운동 매스큘리즘을 소개했다.

흔히 성재기매스큘리즘의 시작으로 알고 있지만 남성운동을 처음 소개한 것은 정채기였다.

이력

본업은 대학교수로 목포대학교와 건국대학교, 건국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모교인 건국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다가 건국대학교, 명지대학교, 경기대학교의 보육학, 심리학 교수로 출강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강원관광대학 전문대의 교수로 있었다. 전남 광양군 진상면 출신이다.

1992년 일본에 갔다가 일본 남성협회의 존재를 접하고 거기에 가입, 1992년 귀국 후 한국에 최초로 남성운동 매스큘리즘을 소개했다. 1920년대에 나혜석, 김일엽, 허정숙, 김명순, 정칠성 등이 한국에 페미니즘을 소개한 것에 비하면 늦은 편이긴 하다.

1997년에는 한국남성연구회를 조직했지만 이후 흐지부지되었다.

가부장제에 반대했고 남성에 대한 성역할을 반대했다. 그래서 의외로 페미니스트와 비슷한 주장을 할 때가 많았다.

1999년에는 성재기, 한지환 등과 함께 군가산점 폐지 반대 운동에 앞장섰다. 그 이후에도 정채기와 한지환은 군가산점 부활을 주장했고 여성의 병역 이행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성재기는 여성단체 폐지, 여성부 폐지, 관련자 처벌 등 극렬 방향으로 나감으로써 안티페미니즘 성향 운동가로 흑화했다.

이혼에 대한 관점에서도 정채기는 이혼은 잘못이며 자녀들의 상처, 가족의 상처, 신중한 선택을 주문했지만 성재기는 군가산점 폐지와 호주제 폐지 이후 결혼도 이혼도 떡먹듯 쉬워야 된다, 이혼도 자연스럽게 선택해야 한다며 상반된 관점을 보였다. (이걸 보면 성재기도 초기엔 어느정도 페미니즘과 유사한 관점을 가진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페미니스트도 이런 주장을 할 때가 많다!)

가부장제의 단점 외에 친구같은 아버지 되기, 권위 내려놓기 등의 운동과 홍보를 했다. 그래서 아침마당 등의 프로그램에서 가부장제와 남성에 대한 성역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다가, 일부의 비판을 받고 방송에서 강제하차당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성재기 등 강경 성향 남성주의자가 남성우월주의자,안티페미니스트로 흑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공교롭게도 이건 나중에 201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 단체들이 계승하게 되었다. 이들도 성역할 고착화 탈피 등 정채기와 의외로 유사한 캠페인을 펼쳤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부장적인 남성과 이에 찬동하는 여성도 적잖이 있었고 [근거 기사],성역할 고착화 등 정채기가 주장한 문제점들은 아직도 잔존해 있다. 그나마 10대 여성~20대 여성들 중에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경우엔 탈코르셋 등으로 탈피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생애 후반에는 경기도 하남으로 이사해서 생활하였다. 2013년에 사고로 사망하였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