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한 개인이 특정한 젠더 역할을 수행하였을 때 그에 대한 다양한 보상이 제공되는 사회적 체계.
설명
불평등한 젠더관계는 아무리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뒷받침이 있더라도 이러한 체계가 없이는 유지, 재생산될 수 없다. 여성들은 지배적 젠더이데올로기에 따라 행위함으로써, 비록 그것이 구조적으로는 성불평등을 재생산한다 할지라도, 개인적 수준에서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받게 된다. 이 경우 주어지는 보상에는 사회적, 경제적, 상징적 차원이 모두 존재한다.
예를 들어 과거의 여성들이 어머니가 되고 나서는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의 틀 안에서 아내, 어머니로서의 삶에만 몰두하는 선택을 하였던 것은 기존의 젠더보상체계가 다른 사회적 역할의 수행에 비해 아내, 어머니로서의 역할 수행에 훨씬 안정적인 정체성과 사회적 인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이래 현대사회의 젠더보상체계를 가장 근본적으로 틀 지운 것은 결혼을 ‘남성 1인 생계 부양자-여성 보살핌노동 전담자’의 결합으로 이해하는 근대적 성별분업 모델이다. 근대적 성별분업에 따른 젠더보상체계는 여성들 에게 ‘개인’ 혹은 ‘노동자’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기보다는 그러한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는 쪽에 높이 보상했었다. 이러한 체계가 유지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가족 안에서 아내-어머니로서의 성역할에 충실할 때,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노동시장 안에서 생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미래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좋은 남자와의 결혼을 통해 이후의 생계를 보장받고자 하는 전략은 이 같은 젠더보상체계 안에서 대다수 여성들이 택한 선택이었다. 가족임금을 실제로 받을 수 있는 집단이 중산층 이상으로 제한되는 사회에서 기혼여성의 전업주부화를 장려하는 문화가 지속될 때, 실질적으로는 중산층 이상 여성에게만 가능한 생애전망인 ‘전업주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모든 여성들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생애전망이 되었다.
그러나 가족임금 이데올로기가 깨어지고 실질적으로 인구의 대다수가 1인 생계부양자 모델을 포기하는 상황이 되면, 이같은 근대적 성별분업의 젠더보상체계도 와해된다. 여성들은 가족 내 보살핌전담자로서의 성역할 수행을 위해 여타의 것들을 유보하는 선택이 어려워진다. 여성들은 예컨대 노동자로서의 개인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성역할을 거부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가족 내 권력관계가 허용하는 한에서 가족 내 성별분업의 양상을 변화시키고자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젠더보상체계는 전업주부가 중산층 현상이 되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계급적인 성격을 띠기도 하고 계급적 변화에 맞물리기도 한다.
한국
한국사회에서 ‘남성 1인 생계부양자-여성 전업주부’라는 근대적 성별분업에 근거한 젠더보상체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러한 젠더보상체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졸 여성 증가, 성평등 의식 확산, 여성운동 진전, 다양한 차별금지 법제 마련 등의 복합적 영향으로 대졸 이상의 고학력 여성들에게도 공적 노동 참여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IMF 위기는 근대적 젠더보상체계에 변화를 야기했다. 여성은 정규직에서 가장 먼저 해고되고, 고용될 때에는 비정규직으로 흡수되었다. 근대적 젠더보상체계는 이 과정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미혼 여성들은 자기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기혼 여성들은 자기를 부양해 줄 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우선 해고가 가능했다.
여성 생애전망의 다변화
공적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이냐 전문직이냐
IMF 이후 한국사회는 1인 생계부양자 모델의 급격한 붕괴를 목도했다. 여성들이 이전의 근대적 젠더보상체계 안에서 보상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더 적어졌고, ‘전업주부’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하게 중산층 이상의 계급적 현상이 되어갔다. 최근의 젊은 한국 남녀는 맞벌이를 필수로 여기며, 여성이 전업주부 노릇을 하는 것보다는 부부의 소득을 결합하여 더 나은 생활조건을 확보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공적 노동 참여는 꾸준히 증대했다. 현재 한국 여성이 공적 노동시장에서 찾을 수 있는 생애전망은 비정규직화와 전문직 진입이라는 두 가지 노선으로 갈린다.
여성의 부담
사회의 양극화와 정치경제 질서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전사회적으로 일어난 2000년대 내내 한국 여성들은 근대적 젠더보상체계가 완전히 변화되지도 않고 새로운 보상체계가 등장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오롯이 자기 개인의 선택으로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파도 속을 헤쳐나가야 했다.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의 지위와 가족 내에서의 지위 모두를 추구하는 생애전망과 삶의 양식을 개발할 것을 요구받지만, 모든 면에서 경쟁이 격화되기만 하는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사회에서 성공의 기회는 제한되어 있다. 계급적 지위, 부모의 지원, 본인의 능력 중 어느 하나라도 갖추지 못한 젊은 여성들은 그야말로 맨몸으로 이 모든 선택지들 앞에서 자신의 생애전망을 발전시켜야 한다. ‘스펙’을 쌓아 취업도 해야 하고 다이어트로 날씬한 몸을 만들어 연애에서도 성공해야 한다. 그러다 서른 즈음이 되면 결혼을 하지만, 그러고 나면 과거의 전통적인 전업주부 어머니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어머니노릇에서도 성공해야 한다는 또 다른 요구에 직면한다. 운 좋게도 중산층 이상 계급의 지원적인 부모를 가진 젊은 여성들은 전문직 등 ‘좋은 일자리’를 향한 지위추구적 행위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연애, 결혼, 출산 등 중요한 생애사건들을 준비하고 경험하기에 시간이 모자란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진 여성들은 어머니의 ‘성역할’에 의해 이루어지던 보살핌노동의 대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으며, 반면 화폐나 친족의 도움 등을 통해 보살핌노동을 해결할 정도의 자원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은 아예 결혼이나 출산을 지연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으로 노동시장에서의 삶의 전망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성애적 결합이나 결혼제도 바깥에서 친밀성과 섹슈얼리티의 영역을 탐구하는 여성들도 점점 더 많이 가시화되고 있다. 한국 젠더관계의 재편에서 중요한 점은 ‘한국여성’이라는 단일한 집합점이 해체되고 있으며 이것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에 대한 예측이 매우 복합적이라는 사실이다. 근대적 젠더보상체계에 균열이 생기면서,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생물학적 재생산과 보살핌노동에 관련된 ‘여성 공통의’ 문제들이 더 이상 보편적 여성의 문제로 간주되기 어렵게 되었다. 특히 비혼 기간이 길어지면서, 젊은 여성들 가운데 보살핌노동이나 결혼제도와 관련된 문제들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 의해 기피된 결혼제도 안에서의 ‘여성’의 성역할이 아시아 각국에서 이주해 온 결혼이주 여성에게 기대되고 떠맡겨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앞으로 한국의 젠더 정치에서 ‘여성들 간의 차이’ 문제는 더욱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젠더갈등
남녀간 젠더갈등이 새로운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근대적 젠더보상체계를 벗어난 선택을 하고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로서, 개인으로서 경쟁력을 갖춘 주체로서의 자기 삶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점점 더 늘어갈수록, 남성들은 여성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의식하게 된다. 과거의 가부장적 젠더보상체계 안에서 작동하던 여성들에 대한 온정적인 태도가 약화되고, 실제로 여성들이 짊어지고 있는 젠더적 불리함에 대한 고려 없이 기계적 평등을 요구하는 태도가 사회 전반적으로 강화될 가능성이 많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젊은 남성들은 자신들이 단독으로 벌어서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부양하는 ‘가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을 그다지 기대하지 않으며, 맞벌이 부부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남성들 스스로가 사적 노동 혹은 보살핌노동을 기꺼이 떠맡고자 하는 움직임은 적다. 육아, 자녀교육, 노인수발 등 보살핌노동에서부터 의식주를 해결하는 기초적인 가사노동까지 여전히 여성들의 성역할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적 노동에 참여한 여성들은 이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중노동의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노동시장에서 열등한 노동력으로 간주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개별 여성들이 개인적으로 젠더 전략을 다변화하는 방식으로 이 같은 상황을 봉합하고 있는 상태다.
출처
배은경(2009), "'경제위기'와 한국 여성: 여성의 생애전망과 젠더/계급의 교차", <페미니즘연구> 제 9권 2호: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