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선조

최근 편집: 2023년 6월 14일 (수) 10:35
묘호 선종(宣宗)→선조(宣祖).
생몰년도 음력 서력 1552년 11월 11일~서력 1608년 2월 1일
양력 서력 1552년 11월 26일~서력 1608년 3월 16일
재위기간 음력 서력 1567년 6월 28일~서력 1608년 2월 1일
양력 서력 1567년 6월 28일~서력 1608년 3월 16일
부모 어머니 하동 부부인 정씨(河東府夫人鄭氏)
아버지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
배우자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후임 왕 광해군(光海君)
시호 선조 소경 정륜 입극 성덕 홍렬 지성 대의 격천 희운 현문 의무 성예 달효 대왕
(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균(鈞)→연(昖)
생몰장소 탄생장소 인달방(仁達坊) 사제(私第)
사망장소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 정전(正殿)

소개

조선의 열네 번째 임금이다. 이(李), 는 연(昖), 본관전주 이씨(全州 李氏)이며, 첫 작위는 하성군(河城君)이었고, 사후 시호는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며 이후 광해군 때 묘호를 선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 올려서 최종시호는 선조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으로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1567년 8월부터 1608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567년 8월부터 이듬해 1568년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심씨섭정을 하였고, 1568년부터 1608년까지 친정하였으며, 이 선조 임금의 재위 25년차인 1592년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608년 3월 붕어할 때까지 둘째 서자 광해군 이혼왕세자 신분으로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다.

생애

즉위 전

잠저 시절

선조의 서예 유묵

선조는 1552년 음력 11월 11일 중종의 서자 덕흥대원군 초(岹)와 하동부대부인의 셋째 아들로 한성 인달방 도정궁(都正宮)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이균이었으나 이연으로 바꾸었다.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순회세자 요절 후 명종의 총애를 받았고, 곧 후사로 낙점된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명종이 1565년(명종 20년)에 병석에서 밝힌 바에 따라 16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여기에 따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하성군이 왕이 된 이유가 담겨있다. 어느날, 명종이 덕흥대원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하였다. 두 형(하원군, 하릉군)들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하성군은 현직 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하여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전해진다. 선조의 즉위는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자 출신이 즉위한 첫 사례이였다. 그러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일종의 콤플렉스로 작용하게 된다.

선조는 이후에도 여러 번 생부 덕흥대원군을 다시 왕으로 추존하려고 시도하나 성리학자 사림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취소하고 만다.

즉위 과정

명종 22년 6월 28일에 병이 위독하여 대신들이 입시하였으나 명종이 말을 할 수 없었고, 2년 전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이균(李鈞)을 후사로 삼은 일이 있어 그를 따르게 되었다.[1]

즉위 초반

수렴청정과 친정

1567년(선조 즉위년) 음력 6월에 즉위하였지만 명나라에서는 바로 책봉 고명을 내려주지 않았으며 그의 지위는 조선국 권서 국사(朝鮮國權署國事)였다. 그해 11월에 명나라에서 책봉고명이 내려저 정식 국왕이 되었다.[2]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宋)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으로 추존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반 그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다시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중국 송나라복안의왕안희수왕, 중국 전한정도공왕에 대한 고사를 들어 반대에 부딪쳐 성사시키지 못했다.

즉위 직후부터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있었으나, 그는 사림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고 그들을 통해 친정을 유도하게 했고, 인순왕후는 곧 일선에서 물러난다. 인순왕후의 퇴진 직후 이이 등이 부패한 재상 심통원[3]을 탄핵하자 바로 숙청했다. 이는 심통원이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데 대한 감정도 작용했다. 이어 김효원 일파가 심의겸을 공격하자 심의겸을 외직으로 축출해버린다. 대비의 친정 일족을 제거한 소년왕의 면모에, 즉위 초 어린 왕이라고 무시하던 신하들은 경악한다.

사림정치의 확립

선조가 즉위할 무렵 조선 사회는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이 정계를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선조는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을 널리 등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講筵)에서 이황·이이·성혼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을 신원하고 을사사화로 귀양가 있던 노수신(盧守愼)·유희춘(柳希春) 등을 석방하여 기용하는 한편, 훈신세력인 남곤(南袞)·윤원형(尹元衡)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거나 삭훈(削勳)했다. 또한 현량과(賢良科)를 다시 설치하고, 유일(遺逸)을 천거하도록 하여 조식(曺植)·성운(成運) 등을 등용했다. 이황에 대한 신뢰와 함께 그가 죽자 이이를 신임하였는데, 이이에 대한 신임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또한 잠저시절부터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그는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의 간행에 힘써 1575년 〈주자대전〉의 교정본을 간행하고 1585년에는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해 경서의 훈해(訓解)를 교정하게 했다. 1588년 사서삼경의 음석언해(音釋諺解)를 완성하고 〈소학언해〉를 간행했다.

한편 조선초부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가 되고 있던, 즉 명나라의 〈태조실록〉·〈대명회전 大明會典〉 등에 이성계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과 함께 4명의 왕을 살해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고치기 위해 주청사를 거듭 파견했다. 그리하여 1584년 황정욱(黃廷彧)이 중찬된 〈대명회전〉의 수정된 조선관계 기록의 등본을 가져옴으로써 종계변무(宗系辨誣)의 목적을 달성했고, 1589년 성절사 윤근수(尹根壽)가 〈대명회전〉 전질을 받아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동서분당과 붕당정치의 성립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척신정치하에서 성장한 구세력의 제거를 둘러싸고 전배(前輩)와 후배(後輩)가 대립하게 되었다. 전배는 소윤(小尹)세력이 우세하던 상황에서 심의겸(沈義謙)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심의겸을 척신이지만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인 데 반해, 소윤세력의 몰락 이후에 정계에 진출한 후배들은 심의겸을 포함한 구세력의 제거를 주장했다.

1575년 전배는 심의겸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이, 후배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되었다. 서인의 주요인물은 박순(朴淳)·정철(鄭澈)·윤두수(尹斗壽) 등이고 동인의 주요인물은 류성룡(柳成龍)·이산해(李山海) 등이었으며, 각각 이이이황의 학문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므로 학풍·학연을 배경으로 한 대립의 양상도 띠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1591년에는 건저 문제정철이 파면되면서 동인이 집권하게 되었으나, 정철의 처벌을 둘러싸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으로 다시 나뉘었다.

이발, 정인홍 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의심과 불신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동인의 분당에는 우성전의 기생에 대한 파격적인 총애 역시 작용했다.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4] 그는 학문적 소양도 폭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평소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한 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한 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4]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4] 선조는 우성전의 상중에 기생이 출입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환국의 시초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4] 이발은 장령으로 있던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고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4]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4]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4]

동인의 내분이 강화되자 선조는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그 뒤 선조 집권 후반의 정국은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남인세력이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이항복(李恒福) 등의 중도적인 서인세력을 포섭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인계열에서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장들이 쏟아져나옴으로서 전란 직후 북인에게 정권을 넘긴다. 선조대에는 집권당이 서인-동인-남인-서인-북인으로 집권세력을 교체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꾀했는데, 이는 후일 환국정치의 모범이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임진왜란 초기

대내적으로 붕당간의 권력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 때 대외적으로는 여진족일본의 외침이 있었다. 1583년 니탕개(尼蕩介)를 중심으로 회령지방에 살던 여진족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경기감사 정언신(鄭彦信)을 도순찰사로 하여 군대를 출동시켜 이를 진압했다. 또한 1587년에도 니응개(尼應介)가 이끄는 여진족이 대거 침입하자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과 경흥부사 이경록(李景祿)이 이를 격퇴했으며, 이듬해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을 시켜 두만강 건너에 있는 여진족 근거지를 소탕했다.

한편 선조는 1590년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허성(許筬) 등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도록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 시대(戰國時代)를 통일하고 자신의 천하 야욕을 이루기 위해 대륙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멀지 않아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대신들은 김성일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통신사와 함께 온 일본사신이 "1년 후에 조선의 길을 빌려서 명나라를 칠 것(假道入明)"이라고 통고하자 조선 정부는 크게 놀라 뒤늦게 경상도·전라도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고 각 진영(鎭營)의 무기를 정비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어가 몽진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이곳에서 선조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光海君)으로 하여금 분조(分朝)를 설치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 사이 이순신·권율(權慄) 등이 이끄는 관군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때 선조는 공사천무과(公私賤武科)와 참급무과(斬級武科)를 실시하여 천인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국민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힘썼다. 일본군이 1593년 4월 남쪽으로 퇴각하자 그해 10월 선조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관점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유성룡과 왜란의 진행 상황을 논의하던 중,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이 "이때까지 지탱한 것도 이순신의 공이고, 수륙의 모든 장수들 중 가장 우수합니다"라고 대답했다.[5] 그러나 선조유성룡이 이순신과 개인적으로 친하지 않느냐며 그의 답변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은 선조가 이후 이순신을 크게 의심하면서 원균을 특출한 용장으로 보기 시작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5] 실제로 선조는 두 사람의 체직(遞職)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 "군율을 범한 것은 이순신도 (역시) 같고, 오히려 그 죄가 원균보다 심하다.[5]"라고 언급한 바 있다.[5]

개전 초기에 이순신은 기근과 전염병 등으로 병력이 고갈되자 그 대책으로 둔전 경영과 병력 징발 등에 주의를 기울여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5]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원균의 지원군 요청을 거절하다가 그와 갈등하게 된다.

하지만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총지휘자인데도 동료인[5] 원균과의 갈등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선조의 의심을 샀다.[6] 선조가 원균보다 이순신의 죄가 더 크다고 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6] 동인이 집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이순신은 여러 면에서 원균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실제로 우의정 이원익체찰사로 있으면서 이순신과 수시로 만나 대책을 의논했다. 선조가 이원익이 이순신을 아주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도 원균을 더 신임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6] 한편 선조는 원균이 동인 강경파 일부와 서인 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도 인식했다.

원균 총애와 이순신에 대한 불신

선조는 이순신과 원균 간 갈등에 관한 보고를 받고 곧 이순신을 수군통제사에 유임시킨 채 원균을 전라병사로 교체해 임명할 뜻을 밝혔다.[6] 이는 그간 이순신이 세운 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신료들 중에는 원균을 더 뛰어난 용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탁(鄭琢)이 원균을 적극 옹호하면서 수사의 자리에서 체직시키지 말 것을 청했다. 결국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임되었다.[6]

그러나 충청병사로 부임한 원균은 1595년(선조 28년) 8월 사헌부에서 탐욕스럽고 포악하다는 등의 죄목으로 탄핵을 받았다.[6] 이때 원균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이 선조였다.[6] 선조는 "원균은 분수를 알아 넘치지 않는다. 이런 때 명장을 이처럼 해서는 안 된다."라며 반박했다. 심지어 선조는 사헌부가 계속 원균의 파직을 건의하고 나서자 크게 노해 "오늘날 장수로 원균이 으뜸이다. 설사 정도에 지나친 일이 있더라도 어찌 가벼이 탄핵해 그의 마음을 헤이하게 만들수 있겠는가?"라고 했다.[6] 신하들의 계속된 원균 탄핵을 두고 선조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갈수록 선조는 원균을 더욱 높이 평가했다.[6] 이는 동인이 원균을 배척하며 이순신만을 높이 평가하는 데 따른 반발로 볼 수 있다.[6] 동인 중에서는 이산해 등 소수만이 원균의 편을 들었다. 반면 선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명령을 거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이순신은 광해군이 무군사(撫軍司)에서 이순신을 불렀을 때 응하지 않았다. 이는 곧 선조의 명령에 대한 불복을 의미한다.[6] 이순신을 불신한 선조는 "이순신은 처음에는 힘껏 싸웠으나 이후 성실하지 않았다.[7]"라고 평가했다.

원균과 이순신이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은 이순신의 보고 때문이었다.[8] 그는 원균의 측실 소생인 원사웅이 12살 밖에 되지 않는데, 전쟁에 공이 있는 것처럼 장계를 올렸다고 조정에 보고했던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문제는 적을 앞둔 마당에 장수끼리 자중지란이 일어날 위기로 조정에 비쳐진 선조는 "수군 여러 장수들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다고 하니 그런 습관을 모두 버리라"는 교시까지 내리게 된다.[8]

그러나 이 사건은 진상을 조사하러 간 이덕형에 의해 그 내용이 완전히 밝혀진다. 원균의 외동아들 원사웅은 원균의 측실 소생이 아니라 정실 소생으로 당시 18세였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적을 여러 명 베기도 하는 등 공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순신이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원균을 모함한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이순신이 하옥될 때 거론되기도 하며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원균을 제함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8] 이후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인간적 불신을 키우게 된다.

그러나 위에 적힌 원균의 10살 아들의 모함에 관한 내용은 사실관계가 완전히 틀린 잘못된 내용이다. 먼저 이덕형이 이순신과 원균에 대해 조사한 1차 보고내용이다.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이 당초 원균을 모함하면서 말하기를 ‘원균은 조정을 속였다. 열두 살짜리 아이를 멋대로 군공(軍功)에올렸다.’라고 했는데, 원균은 말하기를 ‘나의 자식은 나이가 이미 18세로 활쏘고 말타는 재주가 있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서로 대질했는데, 원균은 바르고 이순신의 이야기는 군색하였습니다.”

[9]

하지만 3년 전의 김수의 사료를 보면 이순신이 원균이 10살 된 첩의 아들의 공을 올린 거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덕형의 말에 나온원균의 아들은 정실부인의 아들인 원사웅이다. 즉, 이순신은 서자를 문제 삼았는데 적자를 내세우며 되려 이순신을 몰아붙인 것이다. 또한 이 증언은 이덕형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번 부정된다.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元均)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才幹)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로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유 제독(劉提督)이 힘껏 싸우는 데 뜻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大事)를 전적으로 수병에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 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捷報)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이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그리고 양향(糧餉)을 조치하는 등 모든일에 있어서 요리해야 할 일들이 매우 광범위한데 하루 아침에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면 필시 죄다 산실될 것입니다. 특별히 새 통제사를 임명하시어 마음을 다해 요리하고 장병들을 위무하여 뿔뿔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소서.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시행하소서.”

-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10]

위의 언급과 달리 자신은 이순신과 대질한 적이 없으며 오로지 원균의 말만 들었는데 나중에 다시한번 조사해보니 원균의 말이 틀리고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료이다.

이를 입증하는 사료가 하나 더 존재하는데 백호전서를 쓴 남인 윤휴에 의하면 이 보고를 접한 이원익(李元翼)이 체찰사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11]

이몽학의 난

임진왜란 직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잠시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이 때를 노리고 왕족 서얼인 이몽학은 의병을 모집한다는 핑계로 장정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김덕령 등이 하옥되는 등 전라도 지역이 불안해지자, 선조는 이를 빨리 수습하기 위해 원균을 다시 전라병사로 임명했다.[7] 이 반란은 결국 홍주 목사 홍가신에 의해 진압되긴 했으나 선조는 이몽학의 난으로 인하여 자신의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

정유재란

선조는 전쟁의 와중에도 동인서인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을 개탄했고, 동인이 다시 정철의 처벌 문제로 동료끼리 헐뜯고 규탄하자 동인을 불신하고 서인 정철 등을 등용한다. 명나라에 뇌물을 바쳐 지원군을 더 파견하자는 조정 중신들의 의견과 달리, 정직과 성실로서 상대해야 된다며 뇌물 제공 거부의사를 명백히 밝힌 역관 홍순언을 신뢰, 총애하기도 하였으나, 홍순언은 중인 출신의 역관이라는 이유로 조신들의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후 1594년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총과 탄환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도록 했다. 1597년 일본은 명과 진행되던 강화회담이 깨지자 다시 침입하였다(정유재란).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고, 때마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군이 총퇴각함으로써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치세 후반

임진왜란 후의 사회변동과 전후 수습책

임진왜란 때 사용된 비격진천뢰

임진왜란 직후 조총과 화승총 기술이 발달했고, 선조는 왜군과 명나라가 남기고 간 군사 무기를 수집을 명하여, 병장기를 개선시켰다. 그러나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작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를 회복하고 전쟁으로 소실된 토지대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1601년1603년에 어사를 파견해 전국적으로 양전(量田)을 실시했다.

또한 전쟁중에 명군의 식량 조달을 위해 실시했던 납속(納粟)을 더욱 확대했다. 납속책의 실시는 부유한 상민·천민의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해 조선 후기 신분제 변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각 궁방(宮房)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주기 위해 임시변통으로 왕자·옹주 23명에게 예빈시(禮賓寺)에 소속되었던 어전(漁箭)·염분(鹽盆)·시전(柴田)을 획급했는데, 이후 궁방전의 시초가 되었다.

1604년 호성(扈聖)·선무(宣武)·정난(靖難) 공신 등을 녹훈함으로써 전쟁중에 공을 세운 사람들을 표창했다. 그리고 유정(惟政)을 일본에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강화를 맺었으며, 왜관(倭館)을 열어 개시(開市)하는 것을 허락하고 포로로 잡혀가 있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게 했다.

생애 후반

서자의 후손으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서자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라는 두 가지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선조는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아들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소북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옳다하며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인목왕후의 섭정을 계획하였으나, 5세부터 18세까지 13년간 섭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선조는 임진왜란 때에도 분조를 경영한 적이 있던 광해군을 세자로 승인한다. 그러나 1608년 상궁 김개시가 수라상에 올린 떡을 먹다 체하여 갑자기 사망한다. 이후 선조의 독살설이 의혹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덕흥군의 추존 여부

선조는 생부 덕흥대원군을 끝내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추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선조는 이후 생부 덕흥대원군을의 묘를 덕릉이라 불렀는데, 선조는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대원군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또 하나의 악습의 시작 궁방전

선조는 전쟁후 전란을 수습하면서 많은 대군(왕자),옹주(공주)들이 넉넉하게 살기를 원했고 그래서 선조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토지 궁방전 정책을 시작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은 조선 후기에 농민 봉기의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궁방전을 관리하는 관리의 만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국가의 권력을 지고 대대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온 토지에 가서 멋대로 장부에 기록하면서 땅을 빼앗았고 산을 개척하여 토지를 만든 농민의 땅을 국가의 땅이었다는 이유로 빼앗았고 이에 거절하면 관아에 가서 국가의 재산을 뺏은 자 라는 명목으로 처벌을 하고 토지를 뺏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 번째로는 백성의 생필품에 대한 비리를 저지른것인데 이들은 토지를 빼앗는 것도 모자라서 백성들의 필수품목인 땔깜을 패러갈때마다 지금 이산은 왕가의 토지이니 입산료와 땔깜비를 내라고 협박하는 만행을 저지른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동원하여 강제 공사를 시키고는 품삯도 안주는 행위마저 하자 불만이 하늘에 찌르게 된다.

세 번째로는 이렇게 빼앗은 토지 혹은 강제동원하여 개척된 토지를 소유하게된 왕실의 자손들은 왕가의 특혜로 인해 세금을 내지 않고 비리를 많이 저질렀으며 언관들이 이에 대해 아무리 상소를 하여도 왕은 이걸 묵인시키는 관행이 생겨나면서 결국 조선 국고의 낭비가 이어지게 되었고 이로인해 후반기에들어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된 원인중에 하나로 속하게 되는 잘못된 정책으로 평가된다.

사후

바로 소경대왕으로 시호를 정하고, 묘호는 선종(宣宗)이라 했다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극복한 공로가 있다는 점과 새 왕통을 시작하는 군주라는 점이 감안되어 선종에서 선조(宣祖)로 묘호가 개정되었다.

능묘

선조는 1608년 3월 16일(음력 2월 1일)에 승하 하였으며,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소경(昭敬)이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목릉(穆陵)이며, 전(殿)은 영모전(永慕殿)이다. 목릉은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 있다. 동구릉 중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의 목릉에는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이 위치하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새로 능을 건설할 여력이 없었던 탓으로 정자각을 선조의 능침 쪽으로 옮겨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평가

역사에서 선조처럼 이중적으로 평가되는 사람이 드물다. 선조는 실상 자질이 훌륭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임란을 당해 한 것이 없다.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하고 평양으로 달아났고, 평양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하고 의주로 달아났다. 의주로 달아나서는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라면서 한음 이덕형을 요동도사에게 보내 내부를 받아 줄 것을 간청했다. 이덕형은 요동안무사 학걸(郝杰)에게 애걸해 원병 5천과 선조의 내부를 허락받아 왔다. 그러나 서애 유성룡과 송강 정철 등의 반대로 내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편 선조는 조선군의 무능을 탓하며 믿을 것은 명군 뿐이라 했다. 명군이 아니었으면 조선은 망했을 것이고 선조는 왕위에서 쫓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르고 닳도록 명군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명군의 원병(援兵)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산해(李山海) 같은 사람은 명이 조선이 왜를 끌어들여 요동 땅을 회복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일본군의 침입을 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성룡(柳成龍) 등의 주장으로 사실대로 알렸다. 과연 명은 조선의 의리를 신뢰하게 되었다. 이미 류구(琉球)가 왜의 침략 사실을 통보했기 때문이다.

영의정 유성룡은 만약 빨리 명군을 보내 도와주지 않으면 조선군이 몽땅 일본군으로 바뀌어 요동으로 쳐들어갈 것이라 했다. 이는 협박인 동시에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조선이 왜에 정복되면 조선군이 일본군으로 바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명도 일본군을 조선에 나아가 막을 것인가, 조선군과 일본군을 요동으로 끌어들여 막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판이었다. 명의 병부상서 석성(石星)은 전쟁터를 조선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여송(李如松)에게 4만 5천군을 주어 평양에서 일본군을 격파한 것이다.

그러니 선조를 비롯한 조선의 군신들이 재조번방지은(再造藩邦之恩)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정묘·병자호란 때 청나라명나라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했다. 그리고 적자도 장자도 아닌 광해군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임해군·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에 서인들은 광해군이 존명사대(尊明事大)를 어기고 지친에게 패륜행위를 저질렀다고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권을 차지했다.

이 때문에 인조정부는 존명사대를 극대화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선조의 사대와 청병(請兵)을 올려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선조가 무기력한 왕이고 이순신을 죽이려 했는데도 현창하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명의 사헌(司憲)이 조선을 직할한다고 해도 자기의 왕위만 보장해 주면 좋다고 하고, 입장이 따가우면 명군에게 20 번이나 사표를 냈는데도 말이다. 그리하여 1616년(광해 8)에 선종(宣宗)이란 묘호를 선조(宣祖)로 바꾸고, ‘계통광헌응도융작(啓統光憲凝道隆作)이라는 가상존호(加上尊號)까지 올렸다. 더구나 쿠데타로 즉위한 인조는 선조의 대통을 이어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래서 할아버지뻘인데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고까지 했다. 인조가 선조의 옛 별당(別堂)에서 즉위한 것도 선조계승의식 때문이다. 인조가 선조를 위해 다음으로 한 일은 선조(宣祖)를 세실(世室)로 모시고 이를 위해 특별히 악장(樂章)을 만든 일이었다. 그 이유는 선조가 임란을 극복한 중흥(中興)의 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선조는 인조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선조는 인조반정으로 정국을 주도한 서인의 명분을 살려주는 모범적인 군주로 둔갑한 것이다. 신흠(申欽)은 “만일 선조대왕께서 대국(大國)을 섬기는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명의 대군이 대거 출격한 일을 이루지 못했다면 나라가 무엇을 힘입어 보존되었겠는가?”라고 칭송했다. 이는 서인 세력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송준길(宋浚吉)은 선조가 전쟁 중에도 경연을 자주 열었다고 칭송했고, 송시열(宋時烈)은 효종을 세실로 모시고, 태조의 위화도회군의 공적을 들어 ‘정의광덕’(征衣光德)이라는 가상존호를 올렸다. 그리고 “선조대왕은 위로 황제의 위덕(威德)을 힘입고, 아래로 이순신(李舜臣)의 충의에 의지해 그 중흥의 위업이 고금에 빛났으니, 진 원제와 송 고종도 말할 것이 못된다”고 극찬했다. 이는 그의 중화계승의식과도 무관하지 않다. 김상헌(金尙憲)도 태조의 위화도 회군과 선조의 지극한 사대를 동시에 거론함으로써 선조의 위상을 높여놓았다.

이를 종합해 보면 선조는 패전의 책임을 져야 마땅할 것인데도 임란 후에 친명파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도리어 크게 현창되는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 사안을 과거 노론의 존주대의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결국 존주대의와 그것을 이은 위정척사(衛正斥邪)가 나라를 그르친 결과를 초래한 점은 어떻게 인식해야 하나. 반면에 조선의 문화가 중화문화의 중심이라는 중화계승의식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에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할까도 아울러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12]

  1. 명종 34권, 22년(1567 정묘 / 명 가정(嘉靖) 46년) 6월 28일(신해) 1번째기사
  2. 선조실록 163권, 선조 36년(1603 계묘년, 명 만력(萬曆) 31년) 6월 19일(갑진) "명나라 예부의 자문"
  3. 인순왕후의 할아버지 심통원의 동생이다.
  4. 4.0 4.1 4.2 4.3 4.4 4.5 4.6 이덕일,《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7) 68페이지
  5. 5.0 5.1 5.2 5.3 5.4 5.5 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38페이지
  6. 6.00 6.01 6.02 6.03 6.04 6.05 6.06 6.07 6.08 6.09 6.10 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39페이지
  7. 7.0 7.1 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340페이지
  8. 8.0 8.1 8.2 이종호, 《과학으로 파헤친 세기의 거짓말》 (새로운사람들, 2003) 204페이지
  9. 1596년 2월 4일 선조실록
  10. 조선왕조실록 선조 107권 1598년 12월 7일 5번째 기사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포장을 요청하다》
  11. 《백호전서》(白湖全書), 윤휴(尹鑴).
  12. http://egloos.zum.com/dk7117/v/243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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