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최근 편집: 2021년 6월 19일 (토) 21:49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시작으로 16세기부터 일어난 서방교회 개혁 운동이다.

배경

교황청의 권위 추락

14세기 유럽은 흑사병을 겪으면서 수많은 인구를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들은 그 해결책을 교회에서 찾았지만, 교황청과 성직자들은 이에 대처할 수 없었다. 또한 성직자의 수 역시 줄어들어 겸직이 늘고 성직자들의 수준도 낮아졌다.

게다가 아나니 사건, 아비뇽 유수, 서방교회 대분열 등의 사건들까지 거치면서 교황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면벌부 판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증축하기 위해 면벌부를 발행했다. 연옥에서 받아야 하는 벌을 면제해주는 면벌부는 2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그리스도교적 실천사항이었으나 레오 10세가 면벌부 수령 조건에 헌금을 추가하면서 문제가 되었다.[1]

전개

95개조 반박문

신학을 강의하는 교수이자 성직자였던 마르틴 루터1517년에 레오 10세의 면벌부 판매 행태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라틴어로 작성하여 자신이 근무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 문 위에 붙였다. 이는 다음해 봄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전역에 퍼졌으며, 면벌부 판매에 큰 차질을 빚게 했다.[1]

다만 루터는 당시에만 해도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해 나올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1] 이후 공개토론회 등을 거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고 점점 더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루터의 각성

그는 은퇴한 후 연구에 몰두했는데, 어느 날 로마서를 읽다가 자신의 새로운 구원관을 찾아 각성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인간의 죄는 너무나 깊어 어차피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신학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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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교황은 1520년 6월 24일 교서 『Exurge Domine』를 발표해 뉘우칠 수 있는 60일간의 말미를 주고 이 기간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동료들을 모두 파문할 것이라 위협하면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울 것을 명령했다. 이에 루터는 12월 10일 오히려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까지 불태워 버렸다.

그는 1520년 3개의 팸플릿을 발간해 자신의 의견을 공표하고 이를 계기로 가톨릭 교회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는 세 번째 팸플릿 「그리스도 교인의 자유」에서 새로운 신학을 제시했고, 교리의 실천 내용에 대해 일반인들에게 평범하게 설명했다.[1]

교황청은 루터를 파문했으며, 1521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그를 보름스 회의에 소환했으나 루터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1]

루터파 조직

루터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신하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이 작업은 1532년에 완료된다.[1] 독일의 제후들은 루터를 통해 정신적 결속력을 얻고자 했으며 루터와 연대하면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해 그를 지지했다.

독일에서 루터의 명성은 날로 드높아졌다. 루터는 1522년 비텐베르크로 돌아가 교회를 재건하고 루터파를 조직했다. 루터파는 중앙 독일과 독일 북부에서 제후들과 농민들의 호응을 얻었다.[1] 그러나 1525년 토마스 뮌처의 주도로 봉건제의 폐습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며 일어난 독일농민전쟁을 루터가 강렬히 비난하면서 농민의 지지를 잃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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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파의 세력 확장

출처

  1. 1.0 1.1 1.2 1.3 1.4 1.5 1.6 차하순 (2017). 《새로쓴 서양사 총론 1》. 탐구당. ISBN 9788987314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