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주의

최근 편집: 2023년 1월 6일 (금) 20:20

주의주의(主意主義, 영어: Voluntarism)는 의지가 어떠한 기계적 또는 의식적 수반이 없이 선행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 사상이다.

주의주의에서 말하는 ‘의지’란 현대에서 말하는 자유의지(free will)와 같다. 이들은 의지가 사물을 관통하는 관조에서도, 또한, 어떠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산물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발현된다고 주장한다.[1]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와 맥이 깊다. 주의주의는 지성에 의한 관조가 완료된 시점에 해당하는 사물에 한해 자유의지가 발생한다는 주지주의(主知主義)와 모든 것은 인과율의 원리를 따른다는 결정론(決定論)의 대립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역사

주의주의적 사고관은 동서양 양쪽에서 모두 등장하였다. 그러나, 주의주의적 사고관이 자리 잡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기에, 그 역사는 서양에서는 중세 봉건제 형성 이후, 동북아에서는 송나라(宋朝) 중기 이후(중세로 분류되는 시기)부터 시작된다.

중세

동양의 주의주의적 사고관은 남송(南宋)의 유가 이론가인 육구연(陸九淵, 1139 - 1192)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백록동서원에서 행한 강의를 엮은 『백록동서원강의』에 따르면, 육구연은 송나라에서 당시 막 쌓을 트던 성리학 골격의 일물일리(一物一理)[2]를 비판하고 개물(個物)에는 리(理)가 없으며, 오직 리는 인간과 인간의 사이의 의지(心) 대면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동시에, 감각과 지성, 그리고 현상계와 본질계을 확고히 나누는 성리학의 체용론(體用論)과 미발이발론(未發已發論)을 비판하였다. 이에 따라 심즉리(心卽理)에 기반하여 성을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동북아 주의주의의 시초적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3]

주의주의는 주희(朱熹, 1130 - 1200)가 기초로 하는 리학(理學)[4]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주돈이(周敦頤) 이후부터 발전되어 온 리학의 기본은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기초에 기반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 →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이는 즉,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모든 개물은 다 같은 성(性)이 존재하며, 이 원리를 이루는 리(理)는 기(氣)의 형태로 현상화되기에 사물의 이치를 바로 잡으면 곧 성을 얻어 군자가 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는 리학의 최고 명제인 이일분수(理一分殊)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논리에 따르면, 의지란 것은 결국 사물 이치를 명백히 파악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학문 정진과 대상 사물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요구된다.

반면, 육구연의 심학(心學) 논리는 물(物)에 그 어떠한 성도 없음을 다시 강조하고, 환경에 초월함을 상시적으로 갖고 있는 인간의 순수한 의지(자유의지)로부터 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주지론을 배격하고 주의론을 확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육구연의 학설은 왕수인(王守仁, 1472 - 1528)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5]

서양의 주의주의적 사고관은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 - 1308)이 그 시초이며, 이를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Occam, 1280 - 1349)이 계승하였다. 서구의 주의주의는 기존 가톨릭 목적론 사고관에 대한 반(反)교조의 입장으로부터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반교조의 입장은 상당히 경험론적인 도식에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동북아의 심학파와는 달리, 서구의 주의주의는 "기계적 운동 속에서 존재하는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의지"라는 성격이 훨씬 강하다.

『제일원리론』에 따르면, 둔스 스코투스는 기존의 목적론관에 반대하여 새로운 목적론관을 수립하였다. 그것은 참된 신앙의 성립이 명증적인 사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개성을 강화해주는 '의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했고, 그 자유의지는 결국 각 개성을 강화해주는 총화 가운데서 결국 신을 택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둔스 스코투스의 주의주의는 과정적으로는 자유의지론이나, 결과적으로는 목적론적 신관에 해당했다. 그리고 그는 이 목적론관에서 가능태의 성격을 정적 사유가 아닌, 순수하게 자유의지를 향유하는, '예측 불가의 인간성'을 터득한 개체로 설정하였다.[6]

이 입장을 계승한 오컴의 윌리엄은 보편 논쟁에서, 보편 개념을 비판하고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을 주장하여 더욱 회의론적인 형태의 주의주의를 주장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목적론적 신관을 버리고, 기계론적 경험주의로 갈아타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생명체는 아톰의 무작위적 배열이고, 따라서 무작위적 배열인 만큼, 추상성, 기타 사유 체계가 고정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간이 갖는 사고, 행동은 모두 아톰의 배열에 따른 변화에 불과한데, 이를 체험하는 주체인 각 개체는 그것 자체가 스스로가 가진 '의지'라고 생각할 것이며, 현실 논리에서 이것은 결국 '의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의 주의주의 논지를 전개하였다.[7]

근대

자유의지의 전면성과 본성성을 전제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와, 오컴의 윌리엄 논리를 계승하여 귀납주의와 결합한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 - 1776), 이 두 명이 근대 주의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전자는 '형이상학적 주의주의'로 자유의지론 측면에서는 가장 극단적인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훗날 이 주의주의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 - 1900)가 계승한다. 니체는 기존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제거하였고, 순수한 형태의 주의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인 것이다.

후자는 회의주의와 귀납주의, 논리주의 등을 적절히 배합한 주의주의로 형식적 논리와 비형식적 논리를 엄격히 구분하고, 현실 논리에 따라 주의주의 입장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증한다.

현재

신경과학과 인지과학의 발달로 인해 환경을 뛰어넘는 자유의지란 것이 성립하기 힘들다는 과학적 근거가 많이 나왔다. 따라서, 현재 과학의 성과에 기초한다면 주의주의는 틀린 논리라고 할 수 있다.[8] 결과적으로, 주의주의는 과학성을 상실하여 현재 인지과학이나 심리철학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개념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주로 보수적이며, 경쟁 사회를 옹호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주의주의적 사고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사회 구조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의지 탓이라는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9]

그러나, 자유의지론이나 이에 의존하는 주의주의는 과학성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사상에는 일정 기여한 부분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마냥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각주

  1. Peter Janich, Protophysics of Time: Constructive Foundation and History of Time Measurement, Springer, 2012.
  2. 자연 상태에 존재하는 개물도 보편법칙인 성(性)을 갖고 있기에 일물을 포착하면, 성에로 다가가는 단계로서의 일리를 알 수 있다는 성리학의 기본 개념이다.
  3. 육구연 저, 『육구연집 V』(학고방, 2018년) pp. 99 - 103, 177 - 179
  4. 당시 남송에서는 성리학을 '리학'(理學)이라고 하였다.
  5. 육구연 저, 『육구연집 V』(학고방, 2018년) pp. 52 - 54
  6. 둔스 스코투스 저, 박우석 역(2010), 『제일원리론』(누멘, 2010년) pp. 119 - 121, 125 - 126
  7. Stanley J. Grenz. The Named God and the Question of Being: A Trinitarian Theo-Ontology.
  8. 최종현 저(2010), 『신경과학에 대한 윤리척 고찰』(동아대학교 대학원) p. 52
  9. Libertarianism Against the Welfare State: A Refres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