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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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을 실효지배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국가이다. 통상 대만(臺灣), 타이완 등으로 불리지만, 공식 국호는 중화민국(中華民國, Republic of China)이다.

인문

대만성과 복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목상 수도는 난징이며, 실제 수도는 타이페이(臺北)이다. 행정수반은 '총통'이라고 지칭한다. 현재 국가원수는 차이잉원 총통이다.

  • 면적: 3만 5980km2
  • 인구: 2346만 4787명
  • 1인당 GDP: 약 2만 달러(2012년)
  • 공용어: 표준 중국어, 민남어
  • 행정구역: 5개 직할시, 14개 현, 3개 시

역사

중화민국의 역사

20세기에 접어들어 청나라는 각종 이권을 서양에 빼앗기고 연이은 패전과 경제 파탄으로 말기적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1910년 10월 10일[주 1], 쑨원의 주도로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을 세우기 위해 신해혁명이 발발하였다. 청 조정은 북양대신 위안스카이에게 진압을 명했는데, 위안스카이는 쑨원과 협상하여 혁명을 진압하지 않는 대신 북경 점령 후 정부 수반을 위안스카이로 하는 조건으로 창끝을 청나라에 돌렸다. 1912년 2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하고 북양군벌이 위안스카이가 2대 임시 대총통에 오르며 청조가 끝나고 중화민국이 설립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민주공화정을 세운다는 쑨원과의 합의를 깨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수용하고 1916년 홍헌제제를 선포하여 새로운 제국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 시점까지도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지지율이 높으며 국민들이 제정을 원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제정을 선포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자신이 보던 신문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신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홍헌제제를 취소, 얼마 후 사망하였다. 중국은 공백 상태에 빠졌고, 지방 유력자들이 사병을 모아 유사 정부를 각자 구성하여 중화민국의 무슨 장관, 총사령관 등을 자칭하며 각자 세력권을 마음대로 통치하는 전근대 삼국지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1926년, 쑨원의 근거지였던 광동성에서 국민당이 일어나 장제스가 1925년 사망한 쑨원의 유지를 이을 것을 천명하며 북벌을 감행, 장제스를 지지한 몇몇 군벌들과 함께 1928년 북벌을 마무리하여 중국을 다시 통일하고 난징을 국민정부의 수도로 삼았다.[주 2] 북벌 직후 장제스는 "편견회의"를 통해 군벌들의 군대를 감축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군벌들은 이를 거부하고 "반장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이 마무리되자 중국 공산당이 등장해 새로운 군벌을 형성하였다.

국민정부는 공산당을 진압하려 했지만 끝내 진압하지 못한 채로 중일전쟁을 맞이하여 국공합작으로 공산당과 연합하고 전쟁을 치루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1945년 끝나자 국민정부는 바로 공산당 진압을 재개하여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긴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나고 부패가 만연했던 반면 공산당은 항일전쟁에 소극적으로 임하여 전투력을 보전하고 농촌의 민심을 얻었다. 공산군의 역공에 국민정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1949년 12월 대만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옮겼다. 이를 "국부천대(國府遷臺)"라고 한다.

대만의 역사

명말청초 시기에 남명의 장수인 정성공명나라 부흥을 위해 싸웠으나 끝내 청나라를 이겨내지 못하고 대만 섬에 건너와 "동녕국"을 세운 것이 대만이 오스트로네시아 문화권에서 중화권으로 편입된 계기이다. 동녕국은 20여년을 더 버티다 결국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부 영토를 일본에 할양하였는데 대만이 그 중 하나였다. 일본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대만을 통치하였으며, 한국의 일제강점기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편이었다고 한다. 다만 중일전쟁이 개전으로 전시체제에 진입하면서는 강제동원과 공출 등으로 상황이 나빠졌다.

해방 후 대만의 행정 관료들은 대륙에서 온 외성인들로 채워졌고 일본과의 교역망이 폐쇄되어 물가와 실업률이 폭등하였다. 징병·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대만으로 귀국하자 국민정부는 이들을 일본에 협력한 매국노로 몰아 탄압하였다. 1947년에는 가혹한 노점 단속에 항의하는 학생을 경찰이 총살한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자 대만 행정장관은 중앙정부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하였고, 장제스는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시위가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진압군을 타이완으로 파견, 대만 섬 전역에 대대적인 학살이 벌어졌고 이를 2·28 사건이라 한다.

1949년 12월,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대만 섬으로 옮겨왔다.

국부천대 이후

국부천대 직전, 국민정부는 반공주의를 강화하고 민주화를 저지할 목적으로 1949년 5월 20일계엄령을 내렸다. 대만 계엄령은 대만 섬에서는 1987년, 복건성에서는 1992년에 이르러서야 해제되었다.

1994년까지 대선을 간선제로 하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임명제로 하였으나, 리덩후이 총통이 집권 이후 전격적으로 민주화를 이행하여 총통 및 지자체장의 직선제 선출을 이루었다. 또한 장제스 시대의 멸공통일 정책을 폐기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되 그 표현은 양안 각자의 편의대로 한다'는 내용의 "92 공식"에 합의하였다.

정체성 문제

중화인민공화국과 양안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하나의 중국'을 내세우기 때문에 외교상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단, 하나의 중국이라는 개념 자체는 중화민국에서도 낯선 개념은 아니다. 중화민국의 경우 민진당으로 대표되는 대만 독립 지지파와 국민당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중국' 지지자가 양립하고 있다. 대만에서 말하는 '하나의 중국'은 중국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 정권이 정통성을 갖는 형태의 통일 중국이다.

뉴스

  • 2017년 5월 대만 법원은 동성혼을 금지하는 법안이 헌법에 어긋나고, 국민의 평등을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입법원은 2019년 5월 17일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 합법화안을 가결했다.
  • 2023년 5월 16일에는 동성 부부가 공동으로 아이를 입양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률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으로써 대만에서 동성 부부의 입양 절차는 기존 법률에 따른 다른 부부와 동일하게 되었다.[1]

부연설명

  1. 이 날을 중화권에서는 "쌍십절"이라 하여 기념한다.
  2. 이로부터 중일전쟁이 발발하기까지의 10년간을 "난징 10년"이라 하여 대륙 시기 중화민국의 전성기로 본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