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 공습

최근 편집: 2023년 1월 6일 (금) 19:14

진주만 공격(일본어: 真珠湾攻撃, 영어: Attack on Pearl Harbor)은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 섬의 미국 해군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한 공격이다. 세계 전쟁 역사상 가장 무모한 도박으로 평가된다.

개요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해군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하와이주 오아후 섬에 위치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은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되었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일본 제국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시작으로 폭격을 계획하였고,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지휘를 맡았다.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64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진주만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항공모함 3척과 유류 보관소와 병기창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은 이와 같은 자원을 이용해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피해를 원상복구했다. 함선은 3척을 제외하고 수리되어 다시 출전할 수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진주만 공격을 배신행위로 보고,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훗날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진주만 공격은 진주만 폭격, 진주만 전투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진주만 공격 또는 단순히 진주만이라고 더 자주 불린다.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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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일본의 준비

일본의 지도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 유류 부족이 군사력 약화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 충돌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 획득을 시도하는 것.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 세 가지 중에 마지막을 선택하였다.

진주만 공격의 목표는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해군력을 무력화하여 전면전이나 동시 다발적인 준비된 공격을 잠시나마 막는 것이었다.

11월 26일은 일본의 연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한 날이다. 일본은 미국이 제시한 헐 통지문 내용과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었다. 그 근거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주일 미국 대사관의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대사가 본국에 송신하였으나, 유럽 내 전쟁 문제에 몰두하던 미국 정부는 그것을 묵살하였다.[1]

틀:출처

일본군의 공격 임박설에 대한 사전 정보들은 많았으나, 아무도 이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1년 1월 주일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했다. 공격개시 수시간 전에 진주만 외곽에서 한 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고 다른 한 대는 원인 불명인 채 침몰되었으며, 오아우 북쪽 해안 레이다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많은 관리들은 일본군의 공격임박설을 알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일본으로부터 5,000 마일 떨어진 진주만이 아닌 필리핀이라고 생각했다. 1941년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일과가 진행되었지만, 진주만 북쪽 200마일에서는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항진하는 항모 위에서 항공기들이 발진하고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의 라디오에는 하와이 방송국에서 흘러 나오는 달콤한 음악이 들려 오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어서 공격 목표물을 훤히 볼 수가 있었다고 그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제국 해군 소좌 미쯔오 후지다(Mitsuo Fuchida)는 회고했다.
심지어, 레이다에 일본군 전투기와 폭격기가 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당일 아침녘에 오기로 한 B-17 폭격편대로 오인하게 된다.[2] 다만 당시 일본군 함재기는 항공모함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해 진주만의 북동쪽 방향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오인의 여지가 있었으며, 실제로 이후 군사재판에서도 당시 근무자들에 대한 태만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2권-미국의 역사》, 이원복 글, 그림, 김영사.
  2. 전쟁영화로 마스터하는 제 2차 세계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