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리사

최근 편집: 2022년 12월 30일 (금) 08:42
차미리사
출생1878년 8월 21일
사망1955년 6월 1일
직업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교사
종교개신교천주교
정보 수정

차미리사는 대한민국 일제강점기 동안 여성·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덕성학원 시초 근화여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면서 현재는 덕성여자중학교, 덕성여자고등학교, 덕성여자대학교가 있다.

생애

미국 유학 권유를 받고, 교육·여성·계몽·국권회복운동으로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대동교육회를 설립하여 선교활동으로 구직을 돕고 교육을 하였다. 1908년 한국부인회를 창립하여 고아원 설립에 기여하였다. 그러면서 평안남도에 대동고아원을 세울수 있었다. <대동공보> 간행에 참여하여 글을 기고하였다. 추가적으로 1920년 4월 19일 부인야학강습소를 개최하였다. 점점 회원들은 새 학교를 짓기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근화학원이 설립되고,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1930년 학교가 재정난에 휩싸였고, 극복하기 위한 정책들은 비판 대상이 됐다. 정책은 학생·교사 인원 감축이 대표적인 예시였다. 그러면서 딱장대라는 비난을 들어야 하였다. 하지만 극복하면서 근화여학교 법인으로 승격시켜 만들수 있었다. 차미리사는 "조선 딸들과 같이 울다가 세상을 떠나겠다" 고 눈물을 흘렸다. 상징 무궁화로 일제 탄압·간섭에 시달렸지만, 의지를 꺾지 않았다. 하지만 1940년 8월 교장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 일제 말기 통치 방식 <황국신민 서사 암송 강요> 체제로 학교가 퇴보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 이유는 송금선 교장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파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송금선은 덕성여자대학교 초대 총장도 지냈다. 1997년 학내분규가 발생하여 2000년에 차미리사가 덕성여자대학교 창립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남북협상을 지지·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6.25 전쟁에 "내게는 한 가지 한이 있다. 온전한 독립을 못 보고 죽어 유한이로다." 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 서훈으로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여성주의

미국 귀국후에는 배화학원에서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여성·민족교육에 신경써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하였다. 동네 여성들을 불러모아 조그마한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쳤다. 3.1 운동으로 압력으로 배화학원 교사를 그만두고 열성적으로 여성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면서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면서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전국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완전히 여성들 주도로 이루어진 최초 교육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성차별 철폐·여성해방을 주장하였다. 언론·선진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는데, 잡지《여자시론(女子時論)》을 인수하여 여성잡지 선두에 섰다. 순한글로 이루어진 잡지로 시민들이 접하기 용이하였다. 그러면서 여성 시민들 응원·기부금이 쇄도하였다.

나혜석여성 자유로운 영혼 분위기였다면, 안타깝게도 차미리사는 중매를 도왔다. 생활력이 이유였다.

같이 보기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