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09:40
주의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사고에 대해 담고 있습니다. 비하적인 표현, 유머성 서술, 과도한 피해자 신상 노출을 금해주시고 명예훼손죄, 모욕죄 등에 해당하는 위법한 내용이 담기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개요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4분경 소련의 체르노빌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

이 사고로 발전소에서 누출된 방사성 강하물이 우크라이나 SSR벨라루스 SSR, 러시아 SFSR 등에 떨어져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초래했다. 사고 후 소련 정부의 대응 지연에 따라 피해가 광범위화되어 최악의 원자력 사고가 되었다.[1]


개요

이 사고는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4분에, 체르노빌 발전소의 원자로 4호기의 비정상적인 핵 반응으로 발생한 열이 냉각수를 열분해시키고, 그에 의해 발생한 수소가 원자로 내부에서 폭발함으로써 생긴 사고이다. 폭발은 원자로 4호기의 천장을 파괴하였으며, 파괴된 천장을 통해 핵 반응으로 생성된 다량의 방사성 물질들이 누출되었다. 누출된 물질에 의한 방사능의 총량은 약 5.3엑사베크렐로 추정되며,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INES)에 의해 분류된 사고 등급 중 가장 심각한 사고를 의미하는 7등급에 올라 있다.[2]

사고 이전

사고 당시 체르노빌 발전소는 총 4기의 원자로를 운용 중이었고, 2기의 원자로를 추가로 짓고 있었다. 그 중 사고가 일어난 4호 원자로는 완공된 지 3년 된 새 시설이었으며 모두 RBMK-1000형 원자로를 운용하고 있었다. 각각의 원자로의 전력 출력은 1기가와트(GW)이었고, 이는 출력으로 3.2GW의 출력에 해당한다.[3][주 1]

4월 25일, 사고 전날의 실험 준비

1986년 4월 25일 오전 1시에 원자로 4호기가 검사를 위해 작동이 중지될 예정이었다.[4] 원자로 4호기에는 이전부터 원자로의 가동 중단에 대비해 냉각 펌프와 다른 제어 장치들을 가동할 수 있는 3기의 비상용 디젤 발전기가 있었다.[5] 이 검사는 비상시에 예비 디젤 발전기 투입 전까지 발전소가 작동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6][7]

원자력 발전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원자로를 식히는 냉각수가 꼭 필요한데, 냉각수 펌프는 원자로에 의해 돌아가는 터빈의 에너지로 작동했다. 따라서 원자로가 모종의 이유로 작동 중지되었을 때 원자로가 폭발하지 않게 냉각수 펌프가 작동하려면 터빈이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상술했듯 터빈은 원자로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에, 예비 발전기가 투입되기 전까지 발전소가 이를 버틸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4호기에는 예비 디젤 발전기가 3대 있었지만[5], 이 발전기는 발전소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출력에 다다르기까지 1분이나 걸렸다.

따라서 이날 실험의 요지는 원자로 작동중지 직전까지 공급된 에너지로 돌아가는 터빈의 관성이, 예비 발전기 작동 전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전력을 공급해줄 수 있을 것인가?였다. 실험은 4월 26일 새벽 1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 예정되어 있었고, 원자로의 열 출력을 정격 열 출력의 20~30%인 700MW(메가와트)로 낮추어 실시될 것이었다.

이 실험은 이전에 작동 정지가 있을 때에도 행해진 적이 있었지만, 터빈으로부터 공급되는 에너지가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감소하여[8] 결과가 도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전소에서는 결과 도출을 위해 재실험을 하기로 하였다.[4]

기술자들은 실험 준비를 위해 4월 25일 오전 1시부터 4호기의 출력을 강하하기 시작했다.

오전 3시 47분, 정상 출력의 50%인 1,600MW까지 출력이 낮추어져 이 상태가 오후 2시까지 유지되었고 4호기에 연결된 터빈 발전기 중 7호와 8호가 분리되었다. 오후 2시, 기술자들은 실험 도중 원자로의 정지를 막기 위해 ECCS(비상 노심 냉각 장치)[주 2]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이때 키예프의 전력 담당자가 이날 오후 11시 10분까지 전력을 공급해줄 것을 발전소에 요청하였기 때문에, 출력 강하가 정지되고 실험은 중지되었다. 원자로의 낮은 출력 상태가 지속되자 노심의 중성자 수는 감소하였고, 정상 상태에서 중성자를 흡수하여 안정해지는 제논-135(135Xe)가 안정하지 못한 상태로 축적되기 시작했다.[9]

키예프로의 전력 공급이 끝난 이후 원래 목표했던 출력인 700~1,000MW로 강하가 시작되어 자정 직후에 목표 수준인 720MW까지 출력이 내려갔다.[9][10]

4월 26일, 사고 당일

유리 카르네프와 냉각수 펌프 관리자인 보리스 스톨리아추크를 비롯한 이날의 야간 근무자들은 평소와 달리 안전 검사를 시행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사실 검사는 숙련된 엔지니어들이 상주하는 낮에 실시해야 했지만, 그렇게 되면 원자로 가동이 중지되어 원전 인근 키예프[주 3]로의 전력 공급에 차질이 생기기에 검사는 발전소 전력 공급량이 최소인 밤까지 연기되었고, 주임 과학자들이 모두 퇴근했으므로 하급팀이 4호기의 검사를 맡게 된 것이다.

유리 카르네프는 터빈실에서 터빈을 살피고 수치를 읽은 뒤 검사 개시를 기다렸다. 보리스 스톨리아추크는 원자로에서 300m 떨어진 통제실에 있었고, 레오니드 토프투노프는 원자로 통제를 맡았다.

4월 26일 오전 12시 5분, 레오니드는 제어봉[주 4]을 이용해 서서히 출력을 줄여갔다[주 5]. 그러나 12시 28분, 알 수 없는 이유로 출력이 떨어지기 시작해 30MW가 되었다.[9][10] 이에 안전요원들은 제어봉을 빼서 출력을 증가시켰다. 1시, 레오니드는 원자로가 안정됐다고 판단해 검사 준비 작업을 진행한다. 사실 이때의 전력 상승은 200MW 정도에서 멈추었고, 이는 제어봉을 제거한 상태에서 추가로 발생한 중성자가 전날 잠시 중단된 원자로에 쌓여있던 제논-135에 의해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1시 3분, 원자로 고의 정전 중에 냉각수를 공급하는 주 펌프를 멈출 것이기 때문에 펌프 관리자 보리스는 검사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원자로 노심 주변의 물 흐름을 바꾸었다. 그는 평소에는 작동시키지 않던 2개의 보조 펌프를 작동시켜 다른 곳의 물을 4호기로 돌리려 했고, 이 과정에서 물이 원자로에 너무 빨리 주입되어,[주 6] 물을 더 공급한 뒤 15분이 경과하자 터빈을 돌릴 만큼의 수증기가 충분히 생성되지 않았다.

1시 19분, 작업팀은 원자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치를 취했다. 보리스는 증기 드럼[주 7]에 물을 공급했다. 그러나 증기 드럼에 찬물을 너무 많이 주입하는 바람에 초과된 물이 노심으로 들어갔고, 또 증기가 거의 생기지 않았다. 증기량이 감소하면 원자로가 자동 정지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발전소는 또 인위적으로 ECCS가 작동하지 않게 조작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자로의 출력이 목표치보다 여전히 낮았기에 제논-135의 축적은 계속되었고, 출력은 높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증기가 더더욱 발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86년 4월 26일 오전 1시 22분 30초(사고 2분 전), 컴퓨터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 반응로에서의 제어봉 위치. 숫자는 반응로 안으로 삽입된 깊이를 나타낸 것이며, 센티미터 단위이다. 녹색: 제어봉 (167개) 파란색: 중성자 감지기 (12개) 노란색: 반응로 중심으로부터 나온 짧아진 흡수재 봉 (32개) 회색: 압력관 (1,661개) 붉은색: 자동 제어봉 (12개)

1시 20분, 레오니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료봉을 더 빼 원자로 노심의 출력을 늘렸고, 뜨거워진 원자로는 터빈을 돌릴 수증기를 더 생성했다. 체르노빌 운전 수칙은 제어봉의 수를 최소 26개로 규정[11]하지만, 레오니드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 제어봉을 단 6개만 남겼다.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은 레오니드와 보리스는 검사 준비 작업을 계속했으나, 노심이 과열되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내 통제실은 터빈실의 유리에게 준비가 끝나 검사를 시작한다고 전달했다.

700MW 이하의 낮은 출력 상태에서 장시간 원자로를 가동하는 것 역시 안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시 23분, 운전원은 계획대로 터빈의 전원을 껐고 1시 24분 4초, 발전용 터빈에 도달하는 증기는 차단되었다. 냉각 펌프에 전달되는 에너지는 감소하였고, 그에 따라 냉각수의 양이 감소하기 시작하여 35초 후에는 실험을 시작할 때의 10~15%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다. 이에 냉각수는 기화하여 노심의 수증기가 되었으며, RBMK 원전보이드 효과에 의해 핵반응 속도까지 증가하였다.

레오니드는 원자로의 노심 온도가 치솟는 것을 목격했다. 노심 헤드의 압력이 급속히 상승해 통제실에 경고음이 울렸다. 원자로를 담당한 레오니드는 24분 40초 경에 원자로 긴급 정지 시스템(A3-5)을 작동시켰다.[12] 시스템은 제어봉을 다시 삽입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빠져 있던 제어봉이 삽입되기까지 걸리는 18초는 너무 길었다. 심지어 제어봉이 삽입되는 동안, 축적된 제논-135가 다량 발생한 중성자를 흡수하였고, 또다른 중성자 흡수원인 냉각수를 제어봉이 밀어내 버렸다.

그러자 원자로 열 출력이 보통 수치의 100배(300,000MW)[10] 이상 올라갔고 엄청난 열은 노심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사고 발생

1시 24분이 끝나가는 시점, 4호기가 폭발했다. 2,000톤의 원자로 강철 뚜껑이 날아가버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고방사성 연료 8톤이 하늘로 솟구쳤고[주 8], 이 어마어마한 방사성 물질은 대기 중에 퍼졌으며 터빈실의 지붕은 무너졌다. 4호기 인근 운하에서 낚시를 하다가 폭발을 목격한 낚시꾼 표트르 톨스티아코프는 훗날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폭발이라는 말은 부정확하다. 꼭 화산폭발 같았다"고 회상했다.

사고 대처

사고 대처: 직후

폭발 4분만인 1시 28분에 우선 알렉산드르 아키모프가 지휘하는 소방관 14명이 현장에 도착했다. 4호기의 화재를 막는 데에 14명은 역부족이었고, 이후 지원요청을 받고 오전 4시 경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휘하의 체르노빌 소방대원 250명이 더 도착했다.[13] 전 세계적으로 회자될 핵 재앙 한 가운데에 자신들이 내던져졌다는 것을 아는 소방관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당연히 피폭을 막을 만한 장비는 전무했다. 결국 소방관들은 속속 이상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도착한 키예프 소방여단 역시 사력을 다해 화재를 진압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오전 2시 10분에는 기계동 천장의 가장 큰 불이 진압되었고, 2시 30분에는 폭발한 반응로 건물 천장의 화재 또한 진압되었다.[13] 오전 5시에는 반응로 주변에 일어난 대부분의 화재가 모두 진압되었다.[14] 그러나 이때 사용된 물은 4호기에서 기화되었고 화학반응을 일으켜 가연성 물질을 대량으로 발생시켰다. 이에 4월 26일 오후 9시 41분, 다시금 폭발이 일어났다.

박살이 난 원자로가 계속 방사성 물질을 내뿜는 동안, 소련 당국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당시는 소련과 서방세계가 대치하는 냉전 시기의 끝을 향해 가는 시기였기에[주 9] 고르바초프 총리는 재난을 숨겼다.

한편 소련 당국은 폭발 직후 자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소집했지만 사고 원인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다. 융해되고 있는 노심 속으로 들어가는 위험한 행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사고 현장에서 104km 떨어진 키예프의 주민들은 이 사실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과학자들은 노심이 식수원이 있는 지하수면에 도달할까 봐 우려했다.

노심이 녹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베냐민 프라이나슈니코프가 폭 80cm 터널을 기어 통과했다. 이후 고백했지만, 심지어 그는 자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심이 지하수면에 녹아들지 않았다고 베냐민이 확인해주지만 당국은 원자로 밑에 거대한 콘크리트 판을 깔기로 하였다. 이후 접속 터널을 짓기 위해 400명의 광부가 낮밤으로 땅을 파서 15일 만에 168m 길이의 터널을 완성하였고 콘크리트 판도 설치할 수 있었다.

사고 대처: 대피

발전소 직원 가족의 많은 수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리피야트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5만 명에 육박하는 프리피야트 주민들을 비밀리에 대피시키기 위해 군을 소집하고 1,200대의 버스 수송대를 구성했다. 사고 발생 36시간 뒤, 프리피야트 주민들에게 안내 방송을 통해 첫 공식 정보가 전달된다.

동무들은 들으십시오
부적절한 방사능 문제가 체르노빌 발전소에서 일어나 임시 예방 차원에서 프리피야트 주민들을 대피시킬 것입니다

주민들은 짐과 식량, 신분증과 현금을 챙겨 버스를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는다. 원전 직원인 가족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어도 예외는 없었다. 오후 2시, 대피가 시작되고 3시간 후 프리피야트는 텅 빈 유령도시가 되었다. 이때의 버스와 트럭의 행렬이 15km나 되었다고 한다.

사고 대처: 대피 이후

프리피야트 주민들의 대피 이후 6일간 헬기 1,800대가 동원되어 5,000톤의 약품[주 10]을 4호기 상공에 뿌려 방사능을 흡수하려 노력했지만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았으므로 헬기를 원자로 위에서 정지비행시킬 수가 없었다. 따라서 헬기들은 4호기 상공을 지나가며 약품을 뿌려야만 했고, 헬리콥터에 의한 화재 진압 시도는 5월 7일까지 지속되었으나 폭발로 인해 건물의 구조가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고 흙이 4호기 주변에 뿌려져 열에너지를 지켜주는 바람에 추가 폭발 또는 노심 용해 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어 5월 10일까지 중단되었다.[15] 헬리콥터에 의한 시도가 중단된 이후에는 원자로 3호기에 있던 액체 질소를 노심에 주입해 5월 9일 반응로의 화재가 마침내 진압되었다.[16]

광부를 갈아넣어 만든 터널로 깔아놓은 콘크리트 판이, 노심이 지하수면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긴 했지만, 방사성 용암 200톤이 콘크리트 판 위 원자로 잔해 내에 남아 있어서 그곳의 방사능이 피해를 끼칠 것을 염려한 당국은 원자로 전체를 콘크리트로 둘러싸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폭발 때 나온 방사능 파편이 치사량의 방사선을 발산했고, 당국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사능 파편을 치우는 일을 군대에게 맡겼다. 소련 전역에서 차출된 수많은 ‘청산인’들을 니콜라이 타라카노프 장군이 통솔하게 되었다.

정치국 회의에서 절 소집해 제가 가장 능력 있고 용기 있는 장군이니 병사들의 핵연료 제거 작업을 지휘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미쳤냐고, 병사들이 로봇이냐고 했죠.[17]

병사들은 방사능 파편을 파괴된 노심에 퍼넣었다. 부족한 방호복 때문에 우의 등에 납을 부착해 급하게 만든 납옷[주 11]을 입고 한 사람당 돌아가며 3분씩 일하게 하였다. 이중 다수가 이로 인한 피폭으로 몇 년 후 사망하였다.[출처 필요]

당국은 군이 청소 작업을 하는 동안 콘크리트 엄호를 건설했는데, 206일만에 완공되었다. 치명적인 우라늄 200톤과 그보다 더한 플루토늄 1톤이 엄호 안에 남아 있는 상태로.

대외적 상황

취임 1년째였던 소련의 총리 고르바초프는 이 사실을 미국에게만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미국이 이 정보를 통해 소련 핵 기술을 약점을 노출시킬 수 있으며 국제적 망신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기 중으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을 숨길 수는 없었고, 폭발 규모 역시 매우 컸다. 당연히 소련은 이 사고를 은폐하지 못했다.

사고 발생 28초 후 미국 위성이 포착한 체르노빌
사진의 붉은 색이 원자력 발전소이다.

냉전 시기의 미국 인공위성은 소련을 감시 중이었는데, 이 위성이 마침 폭발 28초 후 체르노빌 위를 지나가며 사진을 찍었다. 미 정보부는 처음 사진을 보고 소련이 핵미사일을 쏘았다고 생각했으나, 강한 열을 뜻하는 붉은색이 체르노빌 원전을 물들인 것을 보고 이내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편 방사능 낙진은 이웃의 유럽 국가까지 이미 도달해 있었다.
사건발생 후 이틀이 지난 4월 28일 월요일, 스웨덴의 원자력 공학자 클리프 로빈슨은 체르노빌로부터 1,600km 떨어져 있는 스웨덴 포스막 원자력 발전소에 출근했다. 원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방사능 모니터를 통과해야 했는데, 모니터는 그가 방사능에 오염되었다고 말해주었다. 통제구역에 발도 디디지 않았던 그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뒤이어 출근한 다른 직원들도 기계에 의해 출입을 통제받기 시작했다. 기계 안내에 따라 신발이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클리프는 검출기에 자신의 신발을 넣고 방사능 수치를 측정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신발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심각하게 오염되었던 것이다. 직원들은 방사능 낙진의 발원지가 포스막 원전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오염원을 추적하던 스웨덴 과학자들은 그날 오후, 소련을 지목했다. 스웨덴은 소련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압박에 못이긴 소련은 사고를 시인했다.

사고는 다음 날부터 전세계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사건발생 이후 3일이 지난 시각이었다. [주 12] 곧이어 유럽 전역에 출현하기 시작한 낙진은 10일 뒤, 북미 대륙과 일본에까지 도달한다.

피해

인명 피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폭발 직후 방호복도 없이 화재를 진압한 소방관들이었다. 소방관들은 자신들이 진화하고 있는 시설이 원자로라는 것을 알지 못했는데, 이때 출동했던 표트르 크멜 서장은 "그것이 원자로라는 것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결국 소방관들은 90여분 간 화재를 진압하려 노력하다가 하나둘씩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는다.
새벽 5시, 겨우 불이 진압되고 소방관들은 긴급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69명의 소방관 중 31명이 피폭으로 사망하였고, 나머지는 목숨을 부지한 대신 급성 방사선 증후군[주 13]에 시달린다.
체르노빌 소방대를 지휘하여 3호기를 지켜낸 공로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받은 텔랴트니코프는 2004년, 53세라는 젊은 나이에 으로 사망한다. 그가 당시 살아남은 38명의 소방관 중 한 명임을 감안하면, 결국 피폭으로 인한 병으로 사망한 사람은 31명보다 훨씬 많음을 알 수 있다.

프리피야트

빈 문단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주변 지역

빈 문단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자연계에 대한 영향

제1회 체르노빌 사고의 생물학적, 방사선 의학적 관점에 대한 국제 회의(1990년 9월)에 참석한 소련 과학자의 보고에 따르면 해당 발전소로부터 10킬로미터 구역에서의 방사성 강하물의 레벨은 4.81GBq/㎡라고 한다. 대량의 방사성 강하물로 말미암아 고사한 '붉은 숲'이 10킬로미터 구역 내의 장소의 바로 배후 지대에 퍼지고 있다. 이 숲은 사고 후 지극히 대량의 방사성 강하물로 말미암아 고사해 적갈색으로 보이는 나무들을 가리켜 그렇게 이름 붙었다. 사고 후 청소 작업 중에서 4킬로미터 제곱인 숲의 대부분을 매립할 수 있었다. 붉은 숲이 있었던 장소는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지역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야생 생물

인간이 사고 주변 지역으로부터 대피한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큰 부담이 되었지만, 반대로 야생 동물에 대해서는 광대하고, 인간이 없는 피난 장소가 만들어졌다. 이 지역의 동식물에게 방사성 강하물이 악영향을 가져왔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동식물은 인간에 비해 방사성 내성이 크게 다르고, 폭넓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강하된 주변에서의 생물의 다양성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 일부의 식물이 돌연변이로 변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고 그 때문에 기괴한 모습으로 된 식물이 있다고 하는 '이상한 숲'이나 '기괴한 숲'에 대해 소문이 발생하고 있다. 다른 보고에서는 이 구역은 침묵에 싸여 있고 아직껏 새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아직은 방사능 오염으로 돌연변이화된 동물들{개(블라인드 독), 돼지(플래시), 멧돼지, 들쥐, 늑대(시우도독) 등}이 발견된 바 없다.

사고 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지역에서 발견된 제비 (학명: Hirundo rustica) 에서 확연한(15%이상) 알비노 변이가 보였다. 이 변이는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스페인, 덴마크에의 통제 집단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18]

사고 후 오랜 기간 관찰한 결과, 심각하게 오염된 지역에 있는 야생 동물과 실험 동물들에서, 종양 발생율의 증가, 면역 결여, 수명 단축, 조기 노화, 혈구 생성의 변화, 기형, 그리고 다른 건강상의 장애가 관찰되었다.[19]

피폭에 의한 건강 문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크다. 이 사고로 인해 생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은 무수히 많아서, 3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고 때문에 이주할 수밖에 없었으며, 약 60만 명이 사고 처리에 종사하게 되었다. 지금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방사능 오염 구역에 살고 있다. 한편, 이러한 영향을 받은 사람 대부분은 비교적 적은 양의 방사능 노출밖에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들 사이에 사망자 수와 , 선천성 이상이 증가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게다가 그러한 증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방사능 오염과의 관련성은 확실하지 않다.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체르노빌 사고로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아이들 사이에서 갑상선 암의 발생 증가는 스캐닝 계획의 결과로서 분명히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학적 조사는 아직도 분석 단계 중이다.

예산 부족, 불충분한 시계열적 역학 조사, 빈약한 통신설비 등으로 인해 긴급 공중 위생 문제는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적절한 과학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민간인에 대한 연구는 국제적 공동연구로 진행되고 있다.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환경 회복과 방사능 오염이 되지 않은 식료품 개발과 식료품 유통 경로 개발, 공중 위생 대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이는 예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 기구와 국제 사회는 광범위하게 물류 지원과 인도 지원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유럽 위원회와 세계보건기구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서의 역학 조사를 강화해, 모든 종류의 가능성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다.

당시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은 현재에도 적어도 반년에 한 번 정도 정기적 건강 진단을 받으며 건강에 대해 불안을 가지고 살고 있다. 일부 남성은 머리카락이 빠지고, 여성은 수염이 진해지는 등의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 P. Zoriy, H. Dederichs, J. Pillath, B. Heuel-Fabianek, P. Hill, R. Lennartz Long-Term Measurements of the Radiation Exposure of the Inhabitants of Radioactively Contaminated Regions of Belarus – The Korma Report II (1998 – 2015). Verlag Forschungszentrum Jülich, ISBN 978-3-95806-181-1, 2016 The Korma Report II

사고 후 지속되어 온 보건 연구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고에 의해 피폭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 보건 건강에 몇 가지 심각한 영향이 있는 것이 보인다.[20]

세계적인 피해

빈 문단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사고 이후

소련 붕괴

소련의 피해는 엄청났다. 사람을 헐값에 갈아넣었다고는 하지만, 아톰그라드[주 14] 중에서 가장 성공한 편이었던 프리피야트를 포기했어야 함은 물론, 사고를 수습하느라 심각하게 오염된 장비들까지도 현장에 그대로 방치하거나 폐기해야만 했다. 이때 버려진 헬기가 Mi-6. 다음 버전인 세계 최대 헬리콥터 Mi-26도 함께 투입되었다가 이후 수리를 통해 복구했다. 또한 사고 지역 인근에는 단 2대밖에 없는 초대형 핵미사일 감지 레이다 DUGA-3가 위치한 비밀 기지가 있었고, 이 역시 방사능 오염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피야트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에 든 비용도 만만찮았다. 치밀한 눈치 싸움, 군사력이 중요했던 냉전 시기에 막대한 국가 이미지 손상과 더불어 실제 경제적, 군사적인 타격까지 입고 말았던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총리 겸 공산당 서기장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사고 수습을 위해 투입된 비용이 거의 국가 예산 전체에 맞먹었을 정도라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가 구소련의 붕괴를 부른 결정적 요인이라고 단언했다.


관광 산업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문서 참고.

수습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빈 문단 이 문단은 비어 있습니다. 내용을 추가해 주세요.

부연 설명

  1. 원자로는 연료가 물을 데우면 그때 나온 수증기가 터빈을 돌려 전력이 생산되는 화석연료와 같은 원리를 취한다. 화석연료 대신 핵연료를 사용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참고로 우라늄 1kg은 석탄 3,000톤에 버금가는 에너지를 낸다.
  2. Emergency Core Cooling System
  3.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4. 체르노빌 원전 4호기의 제어봉은 211개였다.
  5. 긴 우라늄 봉을 이용해 원자로 노심에서 열을 일으키면, 노심에 삽입된 제어봉이 우라늄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의 양을 제어한다. 제어봉을 위로 올리면(빼면) 원자로의 출력 속도가 증가하고, 제어봉을 아래로 내리면(넣으면) 원자로의 출력 속도가 감소한다.
  6. 원자로 연료봉 위의 물의 흐름이 너무 빨라지면 물이 터빈을 돌릴 만큼 충분한 양의 수증기로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균형이 어긋난다.
  7. 물과 수증기량을 조절하는 중앙 격실. 증기 드럼의 물 부피를 늘리면 증기압은 정상치까지 상승한다.
  8. 조사관들은 이 연료가 지상 1km까지 솟구쳤다고 추정한다.
  9.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소련의 해체에 큰 역할을 했고 냉전 시기는 얼마 못 가 끝이 난다
  10. 붕소, 돌로마이트, 납, 진흙, 모래 등
  11. 그 무게가 30kg에 육박했다고 한다.
  12. 전세계 신문의 1면을 체르노빌 원전이 장식했지만, 정작 소련 내부에서는 사건이 축소 보도된다.
  13. 화학 화상, 심장병, 폐와 면역계 손상 등
  14. 원자력 발전소를 가진 기술 도시

출처

  1. 국제원자력기구의 방사능 사고 분류 기준 [1] 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고는 가장 심각한 수준인 레벨 7에 속해 있다.
  2. 국제 원자력 기구. “The international nuclear and radiological event scale” (pdf). 
  3. Элемаш (2004). “RBMK-1000 and RBMK-1500 nuclear fuel” (영어). 2009년 12월 31일에 확인함. 
  4. 4.0 4.1 Nuclear Energy Agency, OECD (2002). “CHERNOBYL:Assessment of Radiological and Health Impacts” (PDF). 27쪽. 2009년 12월 31일에 확인함. 
  5. 5.0 5.1 현원복 (1986).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진상”. 과학동아. 44-47쪽. 
  6. Swiss Agency for Development and Cooperation. “The explosion of the reactor” (영어). 2008년 10월 4일에 확인함. 
  7. World Nuclear Association (2008). “Chernobyl Accident” (영어). 2008년 10월 3일에 확인함. 
  8. World Nuclear Association. “Chernobyl Accident Appendix 1:Sequence of Events” (영어). 2009년 12월 31일에 확인함. 
  9. 9.0 9.1 9.2 Josh Baxter (2006년 12월 5일). “Accidents Chernobyl#A Chernobyl type event could happen at any nuclear power station” (영어). 2008년 10월 4일에 확인함. 
  10. 10.0 10.1 10.2 이재기 (1996년 5월 6일). “체르노빌 원전 사고 10년의 회고” (HWP). 2009년 6월 14일에 확인함. 
  11.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상 최악의 사고 체르노빌 원전 편
  12. A.A. Abagyan; E.O. Adamov; L.A. Bol'shov; Eh.I. Chukardin; V.A. Petrov; E.P, Velikhov (1991). “Causes and Circumstances of the Accident at Unit 4 of the Chernobyl Nuclear Power Plant and Measures to Improve the Safety of Plants with RBMK Reactors (ANNEX II)” (PDF). 114쪽. 2010년 1월 9일에 확인함. 
  13. 13.0 13.1 CHERNOBYL:Assessment of Radiological and Health Impacts, 29쪽
  14. Chernobyl — Catastrophe and Consequences, 4쪽
  15. 유엔방사선영향과학위원회(UNCSEAR) (2000). “Exposures and effects of the Chernobyl accident” (PDF). 455쪽. 2010년 3월 9일에 확인함. 
  16. CHERNOBYL:Assessment of Radiological and Health Impacts, 30쪽
  17. 내셔널 지오그래픽 사상 최악의 참사 체르노빌 원전사고편 인터뷰
  18. 《Consequences of the Catastrophe for People and the Environment》 (PDF). 267쪽. 
  19. “Consequences of the Catastrophe for People and the Environment” (PDF). 273쪽. 
  20. Alexey V. YABLOKOV; Vassily B. NESTERENKO, Alexey V. NESTERENKO. 《Chernobyl Consequences of the Catastrophe for People and the Environment》 (PDF).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219쪽. 
(이 문서는 위키백과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문서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