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 대학교

최근 편집: 2023년 1월 2일 (월) 08:29

자유주의의 성지

1848년 자유주의 혁명의 실패 뒤 반동의 세월을 삭여야 했던 일부 독일 학자들이 취리히에서 교수로 자리를 잡으면서 그곳 대학은 ‘자유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취리히 대학은 학문과 교육에서 자유와 개방의 정신을 실현하고 민주화를 선도하며 진보적 개혁의 거점이 되었다.[1]

역사

여성에 대한 입학 허가

1864년 취리히대학이 여성에게 입학의 문을 열었다. 유럽 전체로 보면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이어 두 번째고, 독일어권 유럽에서는 최초였다. 취리히를 본받아 1870년대 후반까지 베른과 로잔과 제네바를 비롯한 스위스 주요 도시의 대학들이 여성에게 정규 수학의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1]

취리히대학이 가장 먼저 그렇게 나선 데에는 자유주의적 시 당국과 대학 교수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9세기 후반 정치적 자유주의가 유럽을 휘감고 있었지만, 대학이 낡은 국가권력과 보수적 가부장주의 사회를 뛰어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스위스 대학이 여성에게 학업 기회를 제공하자 유럽은 모두 스위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인접한 강대국의 대학과 달리 절대주의 정치권력이나 전통적 교회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취리히 대학은 개방과 자유의 정신을 더 밀어보고자 했던 것이다.[1]

그러나 대학 입학의 문이 열렸다고 해도 당시 유럽의 여성들은 대학 입학 자격의 실제 조건을 충족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성들은 고등학교 졸업증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중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해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신원 증서를 비롯한 행정 서류 확보에도 난관을 겪었다. 그리하여 스위스 대학들은 이 모든 절차를 간소하게 만들어 약식 신원 증서 하나만으로도 여학생을 받아들이기로 조치했다. 당시 파리미국의 일부 여자 대학도 여성에게 대학 입학을 보장하는 조치를 도입했지만, 스위스의 대학이 여성의 입학에 더 융통성을 발휘했고 곧 더 큰 흡인력을 가지게 되었다.[1]

취리히대학은 애초 스위스나 독일 교양 시민층의 들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들은 결혼가정 외의 삶을 상상해보지 못한 탓에 대학 공부의 필요를 절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세계와 혁명적 삶의 변화를 갈망했음에도 대학에서 청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도 박탈당한 러시아의 여성들이 배움의 기회를 찾아 먼 길을 나섰다. 제네바 대학에 가장 먼저 학생으로 등록한 여성들도 러시아인들이었으며 베른 대학도 곧 러시아 여성들로 가득찼다. 특히 의과대학에 많이 몰렸다.[1]

1867년부터 1876년까지 스위스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 26명 중 19명이 러시아 출신이었다. 그 외에는 영국 여성이 3명, 독일 여성이 2명이었다. 정작 스위스 출신은 단 1명에 불과했다. 1873년 당시 취리히 대학의 전체 학생 수가 439명이었는데, 여학생 114명 중 100명이 러시아인이었다.[주 1][1]


동문

  • 나데즈다 수슬로바(1843년 ~ 1918년): 러시아인. 1867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스위스 남편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가 병원을 열었다.
  •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계 독일인.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출처

  1. 1.0 1.1 1.2 1.3 1.4 1.5 이동기 (2015년 8월 26일). “이동기의 현대사 스틸컷 - ‘진짜’ 대학이 필요하다”. 《한겨레21》. 2019년 12월 17일에 확인함. 

부연 설명

  1. 그해 러시아 출신 남자 졸업생은 45명에 불과했으며, 1873년 취리히대학의 외국인 학생 비율은 52%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