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에서 칠레의 위치
남미에서 칠레의 위치

칠레남미 최남단에 위치한 국가이다. 공식 국가명은 칠레 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동쪽으로는 안데스 산맥을 두고 북쪽 페루 국경부터 남극해까지 약 4,000km 에 달하는 긴 길이에 동서로는 150km를 넘지 않는 짧은 너비의 특이한 형태의 국토를 가졌다.

수도는 산티아고, 화폐는 페소이며 인구는 1,700만명이다. 남미에서 전통적으로 멕시코, 브라질, 아르젠티나와 함께 경제가 활성화 된 축에 속하고, 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안정 되어있으며 부정부패가 적은 나라 중 하나이다. 그러나 독재자 피노체트 시절부터 소위 "시카고 보이즈"로 불리는 시카고 신자유주의 학파를 적극 수용하여 국민의료보험 제도를 비롯한 각종 산업의 민영화가 진행되었다.

수도 산티아고 시내 일부 전경

거의 3,000명의 한인이 칠레에 살고 있으며 상당수가 의류 도매, 소매업에 종사한다. (의류업 이야기는 1990년대 정보) 절반이 넘는 수가 수도 산티아고에 거주하고 있으며, 산티아고의 Comuna Recoleta 내에 위치한 Patronato 동네에 가면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 식당들과 교회, 성당 등이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 지리 및 기후

아타카마 사막에 위치한 자연염전
북부 코킴보 시 전경
칠레 중남부
남부의 빙하

남북으로 4,000km 가 이어져있기 때문에 하나의 국토 안에 다양한 기후가 공존한다. 북쪽 아리카 일대는 건조한 사막 기후, 수도 산티아고를 포함한 중부 계곡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 남부는 춥고 비가 많이 오며, 최남단은 빙하의 한랭 등의 기후를 볼 수 있다. 정글 기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북반구와 비교해 남쪽에 위치한 땅이 많지 않은 남반구 땅 중에서 최남단에 위치했기 때문에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지도를 볼 때 특히 그 길다란 형상이 부각된다. 일각에서는 반쯤 부심으로 "칠레는 아메리카 대륙, 오세아니아(이스터 섬), 남극 (남극 칠레령) 이렇게 3개 대륙에 영토가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이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서쪽부터 해안 지역, 해발 0-800m의 해안 산맥, 중간 계곡, 그리고 안데스 산맥의 네가지 주요 요소를 구분하며, 북쪽부터 남쪽까지 이 네가지 지리적 요소가 어떻게 혼합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기후가 형성된다. 전반적으로 태평양 쪽에서 불어오는 습한 구름 바람 때문에 해안 지역과 중간 계곡은 비가 풍부한 편이고, 안데스 서편의 아르헨티나 지역은 구름이 안데스 산맥을 넘어오지 못해 건조한 기후가 유지된다.

칠레 해안 전체가 남극에서 올라와 동쪽으로 회전하는 훔볼트 해류의 영향을 받아 바다가 매우 차며, 더운 지방도 해안은 기후가 선선한 편이다. 차가운 해류 속에 평소에는 훨씬 더 남쪽에서나 볼 수 있는 어패류가 칠레 해안에서만 발견된다.

2 인종/민족

일반 가정
전통 복장을 갖춰 입고 정부의 토지 반환 행사에 참석한 마푸체인

백인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가 주류이며, 그 외에 원주민 인구와 사회 상류층을 구성하는 백인층이 있다. "원주민 인구"와 "백인층"이라고 썼지만 사실 수백년 동안 식민지 지배와 이후 교류가 진행되어 온 아메리카 대륙 치고 혼혈이 아닌 이는 보기 힘들며, "백인"이라 하면 백인 비율이 높아 피부가 더 하얗게 보이고, "원주민"이라고 하면 원주민 비율이 더 높은 상황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원주민은 북부의 일부 원주민 공동체, 그리고 남부의 마푸체 족이 있다. 마푸체는 스페인 식민 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칠레 군대와 아르헨 군대에 정복되었지만 아직도 남부 농촌에서 사회를 형성하고 있으며, 계속 활발하게 정부를 대상으로 토지 반환 등의 정치적 요구를 하는 중이다.

백인은 스페인 백인이 대다수이며, 남부에는 19세기 후반과 2차대전을 전후해서 독일을 떠나 칠레에 정착하도록 정부 차원에서 장려한 독일인들이 섞여있으며 독일인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마을도 존재한다.

북부를 중심으로 20세기 초에 이주해온 중국인 이민자들이 있으며, 한인 인구가 3,000여명 정도 된다. 흑인은 유독 잘 안 보이지 않는 편에 속한다. 어디까지가 어두운 피부의 원주민 혼혈이고 어디까지가 흑인/원주민 혼혈인지도.. 칠레 경제가 40년 넘게 안정적으로 성장함으로써 주변국 (특히 페루)등에서 이민과 일일노동자가 정착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차별이 사회적 이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3 언어

이 부분의 본문은 칠레식 스페인어 방언입니다.

대부분 스페인어를 쓴다. 일반적으로 한 언어를 쓰는 인구가 지리적 거리, 산맥, 바다 등의 자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왕래가 뜸해지면 지역별로 방언이 발달하게 된다. 수많은 스페인어 방언 중 칠레 방언은 특출한 편에 속한다.

보편적 특징으로는 말이 매우 빠른 것과 - 숨쉬는 속도의 한계까지 기관총처럼 단어를 난사하며 말하며, 단어 하나 하나에 강약을 주지 않은채 숨을 최대한 보존하는 형태로 말하기 때문에 더욱 더 빨리 말할 수 있다 - 특정 상황에서 s 발음과 -d 발음을 생략하는 버릇이 있다. 그 외에 won, cachai, que onda 등 수 많은 칠레만의 표현과 유행어들이 존재한다.

4 문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호르헤 에드워즈, 곤살로 로하스, 니카노르 파르라가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다.

타 남미 사회와는 다르게 락 음악이 인기가 많다. 락 음악 그룹인 Los Tres 가 칠레가 배출한 최대 흥행 그룹 중 하나이다. 이에 대해 레딧에는 한 칠레인이 "글쎄.. 왜 우리가 락을 좋아할까.. 기후가 춥기도 하고 평소에 화를 삭여두다가 막 폭발해서 그런거 아닌가?" 라는 글을 남겼다.

아옌대 사회주의 정권과 피노체트 군부독재 기간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누에바 칸시온 운동의 많은 음악인 및 그룹들이 배출되었다: Inti-Illimani, Violeta Parra, Los Jaivas, Margot Loyola, Ángel Parra 등. 쿠데타 이후 Víctor Jara 가 군부 병사들에 의해 축구경기장으로 끌려가 거기서 손이 잘리는 등의 고문을 당하다가 총살당한 일화가 있다. 누에바 칸시온 운동이 남긴 것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시위 구호로 자주 쓰이는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가 있다.

전반적으로 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좌파적인 사상을 설파한 문화 및 예술인들이 많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공산당원으로써 상원의원과 대사직을 지냈으며, 공산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이후 아옌데를 지지하며 단일화에 합의한다. 물론 정치에 관심없는 예술인도 있다. 미국에서 시위 현장에서 가끔 구호로 외치는 "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칠레식 빵 Hallulla 와 Marraqueta

음식은 빵, 쌀, 고기, 콩과 옥수수를 필두로 한 채소들을 기본 베이스로 다양한 요리가 존재한다. 북부로 갈수록 페루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남부로 갈수록 뜨거운 국류의 음식이 많다. 독립기념주간에는 전통 음식이라며 EmpanadaHumita 등의 음식을 많이 먹는다.

5 역사

칠레의 역사는 크게 스페인 조우 이전, 식민지 시대, 독립, 공화국, 피노체트 독재, 민주화 이후로 구분 할 수 있다.

5.1 식민지

아타카메뇨 문화 원주민의 정착촌
Toqui Lautaro

스페인 침략자들과 조우하기 전까지는 지역별로 다양한 원주민 사회가 정착 해 살고 있었다. 1500년대에 스페인의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발견 후 페드로 데 발디비아가 현 산티아고의 위치에 처음 정착촌을 세운다. 이후 칠레 전역을 정복하고 통치체제를 설립하지만, 황금 노다지인 북쪽 페루 부왕국령과 비교해 금, 은이 많지 않은 편이었기에 정복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편이었다. 칠레 남부 일대에 살고 있던 마푸체족은 북쪽 부족들보다 더 강경하게 항전했으며, 기습적인 스페인 촌락 습격 및 방화 등의 전술로 300년 넘게 스페인을 괴롭혔다. 칠레 남부의 콘셉시온, 치쟌 등의 도시는 수 차례 마푸체의 기습 공격에 당해 방화 된 후 다시 재건되는 일을 반복했으며, 스페인은 칠레가 독립 할 때까지 콘셉시온 이남을 지배하지 못했다. 마푸체는 지휘 체계가 분산되어 있어 잉카제국을 정복 할 때 처럼 황제를 잡는다고 국가 전체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고, 스페인인들이 들여온 말이나 철기 등의 무기를 빠르게 습득해서 전투에 활용했다. 마푸체의 항전을 이끈 리더 중 Caupolicán, Lautaro, Colo-Colo 가 유명했다. (Colo-Colo 는 오늘날 칠레 국내 축구 리그에서 1위를 다투는 팀의 이름이 되었고, Caupolicán 은 상당 수 도시에서 큰 도로의 이름이 되었다.)

300년이 넘는 식민 시대를 거치며 이 지역에는 타 남미 지역과 마찬가지로 몇가지의 인종-계급적 계층이 자리잡게 된다. 스페인 출신 백인들은 독립이 무르익은 시점에서는 스페인 본토 출생 Peninsulares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생했다는.. 약간 비하적 뉘앙스도 포함), 칠레 출생 Criollos 으로 나뉘고, 그리고 백인-원주민 혼혈인 Mestizo, 원주민으로 구성되게 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흑인 비율은 낮은 편이라 흑인과 나머지 혼혈 그룹인 Mulato (흑인-원주민 혼혈), Zambo (흑인-백인 혼혈)에 대한 인식은 많지 않다.

이 시기 확립된 인종·계급적 구분은 독립 초기의 노예 해방 외에는 큰 전환점 없이 현대까지 이어져 왔으며, 아직도 칠레의 정치·경제·예술계 상류층은 백인, 또는 백인 비율이 높은 메스티조가 주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사회적 계층과 피부의 톤이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현실에 칠레가 여느 남미 사회보다 더 백인이 섞인 비율이 높다는 점에 기인한 것인지, 아직 볼리비아나 베네수엘라처럼 원주민에 대한 제도적 차별 철폐를 찾는 제도권 정치 세력은 찾아 볼 수 없다.

5.2 독립

Bernardo O'Higgins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정복하고 자신의 형을 스페인 왕으로 세우자 아직 프랑스의 군사력이 닿지 않던 식민지들은 일대에 시끄러워졌다. 독립 정국에서 다양한 계파와 영향력들이 서로 상호작용을 했는데, 이 중에는 criollos 를 낮춰보는 peninsulares 들의 차별적 행보, 유럽 발 계몽주의의 영향, 프랑스 혁명의 경험을 통한 공화국에 대한 갈망, 미국 독립의 선례(그리고 미국과 영국 양국 스페인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남미의 독립운동을 물밑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세운 왕을 거부하며 망명중이던 왕족을 다시 왕정에 복귀하고자 하는 등 일부 서로 모순되는 세력들이 포함된다. (왕족 복귀를 표면적으로 내세우며 내부적으로는 독립을 꾀하던 일부 끄리오요들은 마지막까지 왕족 복귀를 표방하며 나폴레옹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스페인 본국과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스페인 재점령군이 마지막으로 패배한 차카부코 전투

칠레를 비롯하여 스페인 식민지 각지에서는 이런 다양한 성향의 끄리오요 백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선언을 하고, 이후 나폴레옹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스페인 본국에 식민지로의 복귀를 거부한다. 그후 스페인이 군대를 보내 칠레와 페루 등은 재정복당해 3년의 기간 동안 다시 식민지로 기능하게 된다. 칠레의 독립파는 스페인의 군대를 물리치고 독립을 유지한 아르헨티나로 망명하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군대와 함께 다시 안데스 산맥을 넘어와 칠레, 페루, 볼리비아를 해방한다. 이후 독립파의 수장격인 베르다르도 오히긴스가 칠레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칠레는 1810년의 첫 독립과 재정복 이후 1818년의 두번째 독립이 있는 셈인데, 독립 기념 행사는 1818년의 독립일인 9월 18일에 열고 있다.

5.3 공화국 초기

칠레 정부는 이후 백인 끄리오요들이 지도층이 되어 여러 정당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개혁을 거듭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의 이키케 해전

19세기 말엽 페루 남부 및 볼리비아 해안 일대의 해변과 섬들에 수백년간 쌓인 새 똥(구아노)이 고효율의 비료로 쓰일 수 있으며 아울러 인근에서 화약 제작에 쓰이는 초석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자, 이를 둘러싸고 페루·볼리비아 연합과 칠레 사이의 영토 분쟁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 당사국들은 이 전쟁을 태평양 전쟁이라고 부른다. 침략 전쟁을 시작하고 승리한 칠레는 현재의 제1주, 제2주, 제3주에 해당하는 영토를 페루와 볼리비아에게서 빼앗았다. 이 전쟁을 통해 볼리비아는 유일한 해안 지역을 잃고 내륙국이 되었으며, 칠레는 구아노와 초석의 수출로 엄청난 부를 쌓았다. 이후 독일에서 대체제인 암모니아를 화학적으로 제조하기 시작하면서 구아노의 인기는 시들해졌으나, 이 일대에서 다시 대규모의 구리가 발견 되 당시 태동하던 전기의 도입과 맞물려, 전선의 재료인 구리 수출을 기반으로 다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칠레의 경제는 이후 구리 수출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구리 관련 산업이 국가 경제의 80%에 달했던 때도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악감정은 아직도 남아있으며, 전쟁 이후 빈국으로 전락하고 해안마저 박탈당한 볼리비아는 현재까지 바다에 맞닿는 영토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전쟁의 막바지에 접어들던 칠레를 대상으로 당시 아직 영유권 주장이 모호하고 마푸체가 실질 지배중이던 남단 지역 - 파타고니아 - 에 대해 협약을 맺을 것을 요구한다. 페루 침공 때문에 군사력이 남지 않고 파타고니아가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보던 칠레 정부는 마젤란 해협만 남기고 안데스 산맥 동쪽을 아르헨티나의 영토로 인정하는 협약을 맺는다. 수십년 후 이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어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창출하자 칠레에서는 "당시에 칠레가 이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기에는 힘이 딸렸지만 좀 아깝다"라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

5.4 살바도르 아옌데

아옌데 후보를 지지하는 노조 시위

1970년대 들어 칠레는 가장 큰 정치적 실험과 바로 이어 칠레 국민을 완전히 갈라놓은 20년에 걸친 비극을 시작하게 된다.

피노체트

민주화

6 정부

La Moneda 대통령궁
발파라이소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칠레의 현행 헌법은 1980년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 된 후 피노체트를 쓰러트린 1988년 국민투표 후 미래 헌법 개정 조항을 추가할 수 있도록 수정되었다. 2005년에 라고스 대통령이 의회에서 통과된 몇가지 헌법 수정안을 승인했다. 이들 수정안에는 임명직 상원의원과 상원의원 평생직 제도를 없애고, 대통령이 각 군의 총사령관을 해임 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대통령 임기를 기존 6년에서 4년으로 줄이는 안이 포함되었다.

칠레의 국회는 상원 38석 및 하원 120석으로 구성되어있다. 상원의원의 임기는 8년이며 4년마다 절반을 선출한다. 하원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마지막 국회 선거는 2013년 11월 17일에 열렸다. 2018년 현재 상원의 집권 연립 여당은 21석을 얻고 있으며, 연립 야당이 15석, 무소속이 2석이다. 하원의 경우 집권 연립 여당이 67석, 연립 야당이 48석, 군소정당 및 무소속이 5석이다. 국회의사당은 대통령궁이 위치한 수도 산티아고에서 140km 떨어진 발파라이소 시에 위치 해 있다.

7 칠레 한국대사관 참사관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

칠레 주재 한국대사관 박 모 참사관이 2016년에 칠레의 미성년자들에게 성추행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칠레의 시사 고발 TV 프로그램에서 함정 취재를 진행했는데 거기서 성추행 모습이 찍혀 칠레에서 이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