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맥키넌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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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A. 맥키넌(Catharine Alice MacKinnon, 1946년 10월 7일~)은 미국페미니스트로, 포르노그래피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희롱의 법적 개념을 정립한 법학자이기도 하다.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관점[1]

여성의 객체화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젠더 불평등의 상황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은 남성이 포르노그래피를 소비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본다. 맥키넌은 포르노그래피를 "여성을 성적 객체, 사물, 상품으로 비인간화하는 것을 포함하여, 여성의 노골적인 성적 복종을 사진이나 말을 통해 표현하는 시각물"이라고 정의한다.

맥키넌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서 포르노그래피는 여성의 역할을 남성이 소비할 수 있는 성적 객체로 정의한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가 남성과 여성 모두로 하여금 여성을 남성이 소비할 수 있는 객체로 생각하게 하는 원인이다.


평등과 표현에 관한 의견

캐서린 맥키넌은 미국 사회에서 평등과 표현의 문제를 서로 양보하고 빼앗아와야하는 문제로 사유하고 있음에 문제를 제기했다. 즉, 혐오표현(hate speech)이 발언되고, 이것이 자유로서 인정되어야 하는가 혹은 어떤 이의 평등을 앗아가고 상처를 주는 가를 판단해야 할 때, "표현의 자유권에 대한 침해가 수용 가능한 정도인지 아닌지(자유라고 일컬어지는 것을 강요된 평등에 양보할 것인지 말 것인지)" 문제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실상 평등-표현의 접전에서 올바른 접근은 "한쪽 권리가 없을 때 다른 쪽 권리에의 실질적인 접근이 가능한가의 문제"로 여겨져야 한다고 맥키넌은 생각한다. 책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수정헌법 제1조에 들어가 있는 평등의 개념은 소극적이며, 형식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알맹이 없이 너무 두루뭉술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정헌법 제1조는 (.....) 좁은 의미의 평등 개념으로써 천박한 표현을 지탱해 주는 것일 뿐이다. (.....) 아무리 수정헌법 제1조가 표현의 형식을 띤 불평등의 표현을 보호한다 하더라도 평등은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평등 개념이 발전해 왔고, 표현에 누구나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 문제가 모든 평등 의제에 중심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미국이 최악의 경우이긴 하지만, 세계 어느 나라의 표현법도 표현 수단이 사회적 평등에 끼치는 피해에 대해, 또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표현 수단을 소유한다는 사실에 대해 적절히 대처할 법체제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2]

기타

비판

  • 성노동 혐오 : 주홍빛연대 차차, 섹스-노동을 신성화하고 성노동자 혐오를 확산하는 맥키넌 교수의 발언을 규탄한다 [1]

"맥키넌 교수 역시 40년 전부터 이어오던 차별적 인식을 이번 강연 및 기자 간담회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매키넌 교수는 “성노동이라는 용어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매매는 “친밀성과 상호성이 없기 때문에” 섹스가 아니고, “생산성과 존엄성이 없기 때문에” 노동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섹스의 신성화’, ‘노동의 신성화’라는 근대적 규범에 입각하여 그녀는 “성매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탈성매매가 이뤄져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섹스의 신성화’ 관념은 매키넌 교수뿐만 아니라 반성매매론자들의 입장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진정한 섹스’라면 상대를 알아가려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한데, 그러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 상업적 성거래는 섹스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저 상대의 몸을 구매하고 통제하기 위한 권력 행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캐주얼한 섹스를 즐기는 원나잇 스탠더, 서로의 성향에 맞추어 섹슈얼한 만남을 제안하는 논모노가미스트나 BDSMer, 로맨틱한 끌림 없이 섹슈얼한 끌림만을 느끼는 에이로맨티스트의 섹스 역시 문제적이다. 낭만적 사랑 이데올로기와 섹스에 대한 근대적 규범화가 다양한 섹슈얼리티 사이의 위계를 생산하고 성소수자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야기해왔음을 비판해온 페미니즘의 역사를 떠올린다면, 저 주장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며 성소수자 배제적인지 더 상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상업적 성거래가 규범적 섹스의 이미지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판받아야 한다면, 그 잣대에서 벗어난 여타의 성적 실천 역시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생산성과 존엄성을 노동의 성립 근거로 삼는 생각의 이면에는 노동은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신성화된 노동’ 관념이 깔려있다. 맥키넌 교수에게 성매매가 노동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좋은 노동의 상상적 이미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성매매는 노고와 고통, 저주와 처벌에 가까운 착취이므로 노동이 아니라는 반성매매론의 입장, 그리고 성매매는 보람과 성취, 자기표현과 자아실현의 장이므로 노동이라는 반비판적 입장 모두 ‘노동은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관념에서 다르지 않으며, 노동이 근본적으로 이중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성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은 상황에 따라 노고와 고통, 보람과 성취를 복합적으로 느끼는 입체적 존재이다. 맥키넌 교수는 규범적 노동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층적 서사를 지닌 성노동자를 끊임없이 피해자로 위치시킴으로써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고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자꾸만 입증하도록 만든다.(•••)"

연관 인물

출처

  1. 스탠퍼드 철학백과의 항목들- 객체화에 대한 페미니즘의 관점들, 에반젤리아 파파다키 씀, 전기가오리 출판, 10p
  2. 캐서린 매키넌 씀, 신은철 옮김, p.108 포르노에도전한다(only words), 개마고원, 1997
  3. 조혜승 기자 (2019년 12월 9일). “캐서린 맥키넌 교수 "디지털 성범죄, 포르노그래피와 무관하지 않다". 《여성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