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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도, 여성도 전부 약자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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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까치 (토론기여)

어째서 저속하고 저열한 표현을 쓴다는 식의 평가가 들어있죠? 약자가 약자를 함부로 평가해도 되나요? 우리 모두 약자인데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건 정말 터프에게 혐오낙인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속하고 저열한 표현을 쓴다는 말은 빼거나, 각주에 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열심 (토론기여)

글쎄요, 캡쳐를 보시면 저속하고 저열한 표현을 분명히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사실인데 왜 그런 표현을 빼야 하나요? 잘못을 했는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봐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여성우월주의적 주장 아닐까요?

TERF라는 용어는 낙인이자 혐오발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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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da (토론기여)

토론의 시점을 좀 바꾸고 싶습니다. 문서를 GCF와 TERF 두 개로 나누는 방식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렇게 해서 문제를 회피할 순 있을지언정, TERF라는 용어가 발화되는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윤지영 (2018.4). [발표] 페미니즘 지각변동. 『한국여성철학회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45-81. http://m.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436171

해당 논문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터프라는 용어가 단순한 멸칭이 아닌, 낙인이자 혐오발화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자세히 분석해놨습니다.

Dada (토론기여)

윤김지영 교수마저 무작정 TERF로 몰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해당 논문을 찬찬히 다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윤김지영 교수가 편향된 서술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중재자로서 역할을 다하려 한다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거기서부터 다시 논쟁이 시작되었으면 합니다.

Dada (토론기여)

다음 두 논문도 함께 참고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미국에서 벌어진 비슷한 양상의 논쟁을 다룬 논문입니다. http://m.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436114 윤김지영 교수가 작금의 논쟁을 중재하기 위해 급진퀴어페미니즘을 제안한 논문입니다. http://m.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7248211

열심 (토론기여)

근거를 토론창에 써주실 수 있을까요? 다 읽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네요.

열심 (토론기여)

들어가봤는데 유료논문을 근거로 읽으라고 던져주신 건가요? 이게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네요. 근거를 논문에서 발췌해 직접 써주시기 바랍니다.

Dada (토론기여)

왜 존재하지도 않는 제 의도부터 캐묻는지, 저야말로 그 의도를 당췌 모르겠네요. 제가 설마 논문을 팔아줘서 윤김지영 교수에게 돈 몇 푼 벌어다주자는 의도로 여기에 링크를 올린 걸까요?

Dada (토론기여)

저도 가용시간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근거를 직접 발췌해서 직접 써달라고 하시니 그렇게 해드리죠.

Pleasesica (토론기여)

낙인이라고는 생각하지만 혐오발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트랜스페미니즘 (토론기여)
사회적 혐오는 주류의 관점에서 비주류의 배제와 타자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Terf란 용어는 페미니즘 안의 주류인 '시스여성중심'에 대한 외부의 비판이자 동시에 저 주류에서 배제된 이들의 항의의 의미이기도 하며 이 이유로 Terf는 조롱의 언어이지만 혐오의 언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안자분께서는 윤김지영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 분의 관점들은 중재자의 관점이 아닙니다.
그나마 열려있는 주류 페미니즘 관점을 가진 분일 수는 있지만요 (주류의 관점을 가졌다가 그 분이 페미니즘 운동 내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아닙니다.)
Garam (토론기여)

@Dada: 논문이야 무료가 아닌 건 어찌보면 당연한 거긴 한데, 그 이전에 신뢰할 수 있는 근거로 논문을 제시하려면 논문 내 몇 쪽의 어떠한 문단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야지, 이렇게 논문을 통째로 제시하는 것은 그닥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Dada (토론기여)

저는 이미 이 싸움이 진영싸움이나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음을 알고 있으며, 그 과정은 페미위키 내에서 TERF와 GCF 문서가 분리되었고 그 사실이 대표적인 여성혐오 사이트인 나무위키에까지 기재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만 봐도 명백한 것입니다.(TERF 문서의 GCF 문서를 향한 신경질적인 어조는 딱히 감출 생각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이런 뜨거운 논쟁판 위에서 특정 논문을 일부 인용할 경우 필히 발생할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부득 논문 전체를 읽어주십사 부탁드린 것입니다. 토론하고 논쟁해서 누군가를 "발라버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일종의 스터디를 진행하듯 하나의 주장을 찬찬히 곱씹어보는 것만이 페미위키 내부에서조차 심각하게 진행된 이 분열을 중재할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때문에 저에게 먼저 효율을 따지기 보다는, 다짜고짜 저의 불순한 의도부터 따지고 든 열심 님에게 토론자로서의 기본 자세에 대한 질문을 먼저 하셨으면 합니다. 효율보다 중요한 건 열린 태도 아닐까요?

Garam (토론기여)

언행의 문제는 이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야기가 나온 것처럼 접근성의 문제도 있을 터인데 그것을 고려치 않고 자신의 요지가 명료하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단순히 근거로 논문 링크를 제시하여 읽을 것을 권한다면 그 누구도 쉽사리 요지를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명료하게 정리하여 보여주는 것도 능력이며, 이는 토론을 하고자 한다면 필히 갖추어야 할 자세가 아닐까 싶네요. 그리고 중재가 필요하다면 링크를 걸 것이 아니라 다른 사용자들에게 중재를 요청할 수 있을 것이며,오히려 이러한 식으로 링크를 걸어버린다면 논의는 의도한 바와 달리 중구난방식으로 흘러갈 테지요. 그리고 이러한 식의 편 가르기야 말로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Garam (토론기여)

더욱이 해당 문서가 "신경질적인 어조"를 지니고 있다면 어떠한 부분이 어떠하기 때문에 어떠한 식으로 바꿔나갔으면 한다라고 풀어 설명해야지, 단편의 논문 중 일부를 그대로 붙여넣고는 다 읽기를 바라는 것은 개인적으로 다소 지나친 게 아닐까 싶군요. 정확히는 인용한 부분이 문단 구분도 없고 인용한 부분 내에 또 인용 근거가 섞여져 있는 탓에 읽기가 너무 힘듭니다. 논의를 하고자 한다면 논문을 던져놓고 읽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좀 더 "해당 문서에 관한" 자신의 의도를 밝히는 편이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Dada (토론기여)

제 의도와 주장하는 바는 제목에 적혀있고, 그 근거를 적어드렸더니 제 의도를 의심하셨고, 그래서 근거를 직접 옮겨드렸더니 이젠 또 논문을 요약해서 설명해달라고 하시네요.

Dada (토론기여)

제 토론 능력과 의도를 문제삼기 전에 먼저 제가 말한 메세지와 근거에 집중해주셨으면 합니다.

Dada (토론기여)

페미위키 TERF 문서 자체가 지금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을 향한 낙인이자 혐오발화로 기능하고 있다는 게 제 주장입니다. 근거는 제가 댓글로 옮겨드렸고, 때문에 여기에 공감하신다면 이 문서 전반에 대한 (단지 신경질적인 문구 몇 개-터프 논리 펼치는 자들은 GCF 문서에서 터프 논리를 펼치고 있다 운운하는-수정하는 게 아니라) 재고가 필요하다는 게 주장의 요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논문을 읽어달라고 요청드린 것입니다. 이게 무리한 요구인가요? 백분토론처럼 시간이 정해진 토론도 아니잖습니까? 여기가 제가 토론자로서 말솜씨를 뽐내야만 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믿기에 투박한 방식이지만 마치 스터디처럼 함께 고민해보자는 의미로 전달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요. 제 방식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한 번만이라도 읽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열심 (토론기여)

래디컬 페미니즘은 TERF와 동치가 아닙니다. 래디컬 페미니즘 문서를 다시 읽으셔야 겠네요.

낙엽1124 (토론기여)

따옴표를 붙였기에 동치가 아니라는 뜻을 담은 것 같기도 합니다. 토론 의도에 벗어날 가능성이 있어 이 아래로 더 관련된 답이 없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Dada (토론기여)

에버노트 링크 삭제

Dada (토론기여)

에버노트에 옮겨도 엔터키가 안 먹히네요. 어디에 올리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Dada (토론기여)

https://imshi92678458.wordpress.com/2018/08/07/terf%eb%9d%bc%eb%8a%94-%ec%9a%a9%ec%96%b4%eb%8a%94-%eb%82%99%ec%9d%b8%ec%9d%b4%ec%9e%90-%ed%98%90%ec%98%a4%eb%b0%9c%ed%99%94%eb%8b%a4-%ed%86%a0%eb%a1%a0-%ea%b4%80%eb%a0%a8/

이번엔 워드프레스에 올렸습니다.

Garam (토론기여)

제가 의도를 의심하였다고 판단한다면 제 글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한 것인지 말씀을 해주시고 그에 대한 반박을 하셔야지 하지도 않은 의도에 관한 의심을 하였다고 하면서 논의 주제에서 벗어나 사용자에 대한 힐난을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해보입니다. 또한 어떠한 논의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지를 어떻게 잘 전달하느냐에 달려있는데 현재 제시하고 계시는 부분들은 전혀 전달력이 좋지 못합니다. 이에 권유를 해드린 것인데 이를 악의적으로 해석하시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유감입니다.

그리고 미디어위키의 사용법이 익숙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페미위키를 비롯한 미디어위키에서의 띄어쓰기는 두 칸을 띄었을 경우에 한 칸을 띄우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위키 밖으로 논의를 전개해나갈 경우에 차후에 논의를 참고할 경우에 문맥이 이해가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논의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일 문법과 관련하여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물어보실 경우에 응답해드리겠으니 좀 더 여유를 갖고 차분히 논의에 참여하시면 좋겠네요.

Dada (토론기여)

알겠습니다. 제가 올린 자료 읽어주세요.

Dada (토론기여)

1. 들어가기 페미니즘은 질문의 소실점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계쟁의 도입부일 뿐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최종적 선고의 장소가 아니며 다층적 논쟁의 터로서 가장 치열한 쟁점들을 공론장에 올리는 행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미니즘은 섣부른 화해와 평화의 수사, 고고한 윤리적 우월성의 현시가 아니라 존재론적 폭력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터를 열어젖히는 각축의 장인 것이다. 여기서 “존재론적 폭력”2)이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형이상학 입문』(Introduction to metaphysics)에서 도입하는 개념으로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말해지지도, 생각되지도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고 전개해나가는 쟁투”이자 “창조자들과 시인들, 사유하는 자들, 위대한 정치가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3)이다.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론적 폭력을 구사하는 이들은 사유(思惟)의 시작점을 여는 이며, 여기에는 페미니스트들이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들은 새로운 세계의 문법을 발명하고자 하는 이들이자 기존의 남성 중심적 문법을 뒤틀어버리는 시인들이자 사유의 대전제와 공리들의 임계점을 드러내며 끝 간 데 없는 질문의 역량을 퍼 올려 철저히 사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가 지금껏 남성에 의한 공적/사적 영역, 합법/불법의 구분에 의존해왔음을 드러내고 이를 재정의하는 자이자 새롭게 정초된 정치적인 것의 도래를 촉진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래디컬 페미니즘(radical feminism)과 퀴어 페미니즘(queer feminism)4)이라는 페미니즘 진영 간의 대립각이 펼쳐내는 뜨거운 쟁투의 현장들은 단지 눈앞에 있는 것을 포위 공격하는 전술이 아닌, 지금까지 제대로 논쟁의 장에 올려놓아지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초연(初演)이자 페미니즘의 세기가 열어젖힌 다른 세계에 대한 초안(草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 대립각들이 끓어 올린 갈등의 비등점(沸騰點)들이 새로운 사유의 도전을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미 다 끝난 것’, ‘이미 다 말해진 것’으로 마침표부터 찍으려는 손쉬운 단정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자 페미 니즘이라는 가장 철학적인 사유가 수반하는 균열점들을 황급히 봉합하고자 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정행위는 주로 영미권 페미니즘의 논의구조에 대한 무비판적 참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영미권 페미니즘 논쟁사에서 이것은 이미 승패가 명확히 났다.’, ‘영미권 페미니즘 유행에서 이것은 이미 한물갔다.’라는 식의 사대주의적 관점의 반복을 통해, 지금, 여기의 한국 페미니즘이 쟁점화하고 있는 논의 구조의 맥락성과 문화적 차이의 세밀한 층위들이 모두 간과되고 만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촉각적 시간성”(haptic temporality)5)-과거, 현재, 미래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닿아있는 새로운 시간성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의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 끝난 것이 아닌 현재의 사상적, 실천적 계보학의 이음점이자 절연선일 수 있으며 미래를 향한 상상의 토대이자 상상의 전회를 요청하는 지점이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단지 끝마쳐진 것으로 서둘러 선언하는 손쉬운 결론을 향한 태도야말로 페미니즘의 촉각적 시간성을 부인하는 것이자 새로운 이론적 진전을 위한 논쟁의 성실성은 물론 사상적 불화의 용기조차 결여되어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존재론적 폭력이란, “그들(창조자들, 시인들, 사유하는 자들)이 위압적 지배 앞에서 이에 대항하는 견제의 창6)을 내던지는 것이자 이렇게 열어젖혀진 한 세계를 그들의 작업 안에서 움켜잡고자 하는 것”7)이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 폭력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는 점에서 비범한 혼란이며 에토스(Ethos)라는 개인적 습속과 집단적 관습에 대한 격렬한 요동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올바름과 평화, 선함, 배려와 조화 등이라는 에토스의 안온함과 입증 가능한 익숙함들을 사유의 참조점으로 소환하는 것은 “전수받은 자신들 현존재의 품위와 수준을 오직 지키기 위해서만 노력하는”8) 체제유지적 관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성은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토양의 생성 자체를 막고자 하는 지적 나태함의 산물이자 그토록 유지해보고자 하는 “그 수준의 침몰”9)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공동체의 토대를 짓기 위한 몸짓은 안전하고 우월한 것, 도덕적으로 입증된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언캐니(uncanny)라는 괴물적인 이질성의 불유쾌함과 반도덕(anti moral)으로서의 불온성에 수맥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들을 가청 범위와 가시화의 장, 사유의 지평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단순한 감각장의 확장과 사유대상의 전환이 아니라, 기존의 기반을 뒤집어엎는 발본적 제스츄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캐니의 낯섦과 반도덕의 이탈성이 새로운 공동체의 기반을 짓는 질료인 것은 창조적 초극이라는 넘어섬을 통해서만 새로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축적된 것에 대한 보존이라는 퇴화된 에토스로서의 도덕론-착함을 올바름과 등치시키고 논쟁적 차이를 악이라는 피안의 것으로 실체화하고 이론과 실천의 간극에 대한 비판을 반지성주의로 치부해 공론장에서 몰아내고 정치적 올바름을 이미 결정되어진 공리로 전제해 강령화해 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적 맥락에서, 이 논문은 세 가지 층위에서 존재론적 폭력을 구사하는 방식이자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를 열기 위한 쟁투의 언어가 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첫 번째 존재론적 폭력이 거하는 지점은 페미니즘의 축이 개편되고 있음에 대한 논의이자 페미니즘 제 4물결 안에 한국 페미니즘이 어떻게 거하고 있는가에 대해 분석을 다룰 것이다. 극소수의 활동가들과 연구자 그룹에 의해 독점되던 전문가주의적 페미니즘에서 벗어나, 페미니스트 다중의 탄생이 어떻게 연구자-활동가-다중이라는 세 축으로 개편되고 있으며 이 세 요소들 간의 경합의 지점과 연계성, 상호 의존성의 측면이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 존재론적 폭력은 페미니즘들의 대립각들을 페미니즘 판의 사적 분쟁이 아닌, 뜨거운 이론적 쟁점들로 치밀하게 접근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과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라는 두 명제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드러낼 것이다. 또한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페미니즘 판에서 어떻게 낙인이자 혐오발화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낱낱이 분석함과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의 축이 여전히 남성중심적으로 개편되어있는 현실을 비판할 것이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을 너무도 손쉽게 착함과 조화, 배려 등으로 등치시켜온 단선적 이해방식에 서 벗어나, 보다 심층적이고 입체적 방식으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개념의 재구성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세 번째 존재론적 폭력은 서로가 처한 가장 취약한 현실을 서로에 대한 공포의 먹잇감으로 키우고 있는 공포정치와 죽음 공포 레토릭이 어떻게 두 페미니즘 진영에서 발발, 강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즉 필자는 이를 페미니즘 레퀴엠(feminism requiem)이라 명명하며 이러한 메커니즘의 작동방식과 원인에 대해 상세히 분석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페미니즘 레퀴엠이 어떻게 남성폭력(male violence)의 구조를 은폐하고 사회적 소수자들 간의 가해자성만을 상호적으로 강화함으로써 남성특권구조의 존속에 기여하게 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트랜스 여성과 비트랜스 여성간의 상호적 환대의 정치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비트랜스 여성의 일방적 희생과 양보, 포용의 방식이 아닌 이 두 그룹 간에 존재하는 상호 혐오적 요소들, 상호 적대적 요소들이 어떻게 적확하게 비판, 개선되어야하는가-을 철저히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페미니즘 레퀴엄을 대체하는 페미니즘 스펙큘라시옹의 장을 펼쳐볼 것이다. 왜냐하면 불어로 spéculation(스펙큘라시옹)은 "심사숙고하는 생각, 사색"의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도박, 내기"라는 정반대의 의미 또한 갖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깊이 사유함은 기존의주류적 의미망의 고고한 표면을 찢는 행위이자 남근적 의미경제에 대한 난입 자체이기에 가장 모험적 행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이 논문은 페미니즘 스펙큘라시옹이라는 과감성과 깊이라는 다면체를 지금, 여기의 쟁점들을 통해 정치하게 펼쳐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이 논문은 건국대 KU연구전임프로그램과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을 밝힙니다. (NRF-2017S1A5B8057457) 2)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폭력(ontological violence) 개념은 슬라보예 지젝의 Violence, six sideways of reflections 에서 재인용되어 설명된다. “『형이상학 입문』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전개하 는데, 이것은 시인들과 사색하는 이들, 정치가들에 의해 실현되는 새로운 공동체적 세계의 토대를 짓는 모든 몸짓에 관한 것이다.” (Slavoj Zizek, Violence, six sideways of reflections, NewYork, Picador, 2008, p. 68.) 3)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0, p. 65. 4) 2015년 이후 급속도로 대중화된 페미니즘의 세기는 페미니즘의 두 갈래를 발생시키기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 페미니즘 진영은 래디컬 페미니즘-여성해방운동이자 여성의제의 시급성과 중요성에 대한 부각과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론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하는 쪽과 퀴어 페미니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즉 모든 차별들에 대항하는 총체적 해방론이자 포괄적 인권운동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하는 쪽으로 크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5) Chamberlain, Prudence(2016), "Affective temporality: towards a fourth wave", Gender and Education , 28(3), p. 460. “페미니즘은 촉각적 시간성-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맞닿는 시간성을 창조한다.” 6) counterweight는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한 평형추라는 의미와 견제장치라는 의미도 가진다. 필자는 이것을 위압적 지배에 대항하는 견제장치임과 동시에, 술부에서 쓰인 throw(던지다)라는 동사적 맥락과의 대응구조를 강조하기 위해, ‘견제의 창’이라는 표현을 의역해서 썼다. 7)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 p. 65. 8)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 p. 67. 9)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 p. 67.

머릿말을 먼저 옮깁니다.

Dada (토론기여)

2) TERF라는 호명의 공포정치 페미니즘이 대중 추수적 프로파간다가 되기 위해서는 선동적 결정문들과 연민 호소에 의지하는 간결한 경로인 판결문들을 채택하는 경향이 크다. 지금, 여기의 페미니즘은 서로에 대한 판결문부터 적어내리기에 바쁜 양상을 띠는데 이것이 호명의 정치학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부터 들여다보자. 퀴어 페미니즘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규정하고 호명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낙인이라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영미권의 논쟁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트랜스 우먼을 여성 전용 공간들과 여성들의 정치적 운동들 또는 여성이라는 정의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2008년부터 트랜스 액티비스트들에 의해 신조어로 개발, 사용되었다45). 그런데 이 용어에서 지칭되는 트랜스 피플은 주로 트랜스 여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트랜스 피플의 대표성이 MTF(Male to female)에게 집중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즘 내에서 FTM(Female to male)인 트랜스 남성과 여성 젠더퀴어46)와의 연대를 모색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TERF로 단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이 입증된다.47) 또한 여성이라는 범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 여성이라는 기표와 관계 맺는 방식이 트랜스 여성과 비트랜스 여성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에 대한 논의 가능성, 트랜스 여성 전용공간이 운용되는 것에 대한 존중만큼 비트랜스 여성 전용공간의 운영이 트랜스 여성에 대한 배제가 목적인 아닌, 비트랜스 여성들의 경험 공유의 장으로 마련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인정, 비트랜스 여성과 트랜스 여성들 간의 공동 공간 운영을 기획해나가는 과정에 대한 다양한 모색 등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터프 몰이라는 또 다른 방식의 마녀사냥이기 때문이다. 터프(TERF)로 구성되는 전제조건들 중 하나는 여성 전용 공간에 대한 일방적 개방성에 대한 요구를 수용하느냐, 마느냐로 결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트랜스 피플들 간에도 강제적으로 적용되는 바가 없다. 왜냐하면 트랜스 그룹들 간에도 성별 재지정 수술을 받았느냐에 따라 수술 트랜스 섹슈얼, 미수술 트랜스 섹슈얼, 비수술 트랜스 젠더로 나누어지며,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라 트랜스 남성과 트랜스 여성으로 구분48)되어 각각의 그룹들을 형성하고 각각의 그룹들에 맞는 독자적 전용공간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트랜스 그룹 안에서도 ‘무엇이 진짜 트랜스의 삶인가?’부터 트랜스란 용어의 오용이나 확장에 대한 경계, 트랜스 여성과 트랜스 남성이 경험한 젠더 디스포리아의 차이들로 인해 두 그룹 간의 즉각적 연대를 강요하는 것에 대한 거부 등이 숱한 논쟁과 갈등의 부침을 통해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유독 비트랜스 여성들에게만 여성에 대한 정의 방식, 여성 범주의 확장에 대한 여러 견해들의 논쟁 가능성, 비트랜스 여성들의 공간을 독자적으로 운용할 그 어떠한 가능성도 트랜스 혐오로 축소해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이 사회의 권력의 정점을 정작 비트랜스 남성들이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랜스 여성을 강자화하여 그 강자적 특권성을 내려놓길 강제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트랜스여성은 비트랜스 여성과 상상적 동일시의 관계를 맺는다고 분석될 수 있는데, 여기서 상상적 동일시란 유사성에 입각한 모방과 경쟁의 관계를 의미한다.49) 이러한 여성들 간의 모방과 경쟁 관계는 남근질서라는 대타자의 승인과 공준에 의해 위계화된다. 트랜스 여성의 여성됨은 비트랜스 여성에 의해서 인준되는 것이 아니라, 남근질서가 부여한 승인의 자리인 여성이라는 기표와의 상징적 동일시-유사성을 벗어난 이상적인 것이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상들과의 동일시-의 관계50)를 맺음으로써 인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트랜스 여성에게 있어, 여성이라는 기표는 상징적 동일시(symbolic identification)라는 이상화된 기표이자 자신을 규정하는 궁극적 질서의 위치점과의 합치의 감각이자 재복원의 자리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트랜스 여성에게 있어, 지정성별 남성이라는 1차적 사회적 현실, 즉 강제 부과된 사회적 현실은 자신을 여성으로 여기는 심리적 현실과 불일치된 상태이며 이러한 간극을 제거하는 것이 일련의 의학적 외과 수술, 호르몬 투여, 주민등록번호 정정 등을 통한 성별 재지정권 획득을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심리적 현실을 2차적 사회적 현실, 즉 재조율된 사회적 현실이라는 남근질서 내의 위치점과 다시 합치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때의 여성이라는 사회적 현실은 반드시 가닿아야 할 이상적 자리임과 동시에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하는 자기인식의 통합점-자신이 느끼는 심리적 현실로서의 여성과 남근질서가 인정, 부과하는 사회적 현실로서의 여성의 자리가 통일된 상태-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트랜스여성은 사회적 현실의 2중 층위-강제적으로 부과된 1차적 사회적 현실과 심리적 현실의 간극 속에서 젠더 디스포리아를 경험한 후, 재조율된 2차적 사회적 현실을 통해 이를 해소해나가는 것이다. 이를 아래의 도식으로 형상화해볼 수 있다.

1차적 사회적 현실: 강제부과된 성별로서의 남성 - - - < 분 리 > - - - 심리적 현실:여성 - - - < 통 합 > - - - 2차적 사회적 현실: 재조율된 사회적 현실로서의 여성 성별 획득 <도식 1> 트랜스 여성의 경우

그러나 비트랜스 여성이 여성이라는 기표와 맺는 관계양식은 이상화된 자리와의 일치와 합치의 양식이 결코 아니다. 비트랜스 여성에게 여성이라는 사회적 현실은 물적 억압조건에 처한 취약성의 자리이자 억압의 원인, 열등성의 응축소로 여겨져 왔기에,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즉 자신의 부조리와 차별의 원인인 물적 억압현실로서의 여성과 성별 위계 사회에 대한 저항의 지점으로서의 여성, 이 기표적 양가성 속에서 애증의 지점으로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비트랜스 여성들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를 저주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는 자기혐오의 국면을 겪음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닌 구조적, 제도적 폭력으로서의 남성중심사회에서 기인함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여성이라는 기표를 열등성의 자리가 아닌, 저항과 대항의 지점으로 재구성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비트랜스 여성에게 있어, 여성이라는 기표는 거부와 부정, 체념이라는 지난한 자기혐오로부터의 해방과정을 관통해야만, 이에 대한 재수용, 재긍정이라는 재의미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트랜스 여성에게 여성이라는 자리는 끝없는 분열과 양가적 가치값의 충돌지점-애착과 증오, 부인과 재수용-이라는 점에서 트랜스 여성이 여성 기표와 관계 맺는 상징적 동일시의 감정과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51) 왜냐하면 트랜스 여성은 사회적 현실의 2중 층위에 의해 디스포리아를 가진다면, 비트랜스 여성은 심리적 현실의 2중 층위를 통해 디스포리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를 도식 화해보면 아래와 같다.

<도식2> 비트랜스 여성의 경우 사회적 현실로서의 여성성별 거부, 부정, 체념 인정, 수용, 긍정적 가치화 1차적 심리적 현실: 억압의 원인이자 물적 조건으로서의 여성 2차적 심리적 현실: 저항과 대항의 지점으로서의 여성

자신의 사회적 현실인 여성성별을 거부, 부정하거나 체념적으로 순응하게 되는 심리적 현실의 단계에서는 자기혐오로서의 여성혐오에 갇혀 사회적 현실로서의 여성이라는 자리의 억압성에 매몰될 수 있다. 이에 반해, 사회적 현실로서의 여성성별을 저항과 대항의 지점으로 재구성하여 이에 대한 심리적 수용도를 높이고 긍정적 가치화를 하는 심리적 현실의 단계에서는 페미니스트가 되어 여성이 겪는 제도적 불평등에 맞서게 된다. 이처럼 자신의 몸은 물론 여성이라는 기표를 어떻게 수용하고 재구성해내는가에 의해 비트랜스 여성들 역시 디스포리아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로써 비트랜스 여성은 시스젠더52)라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치를 누리는 자가 아님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시스젠더라는 의미값은 트랜스 젠더에 대비되는 형식적 개념으로서만 있지 정작 비트랜스 여성들의 디스포리아적 경험과 유동적 재구성의 지점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허구적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데 비트랜스 여성이 여성이라는 기표와 맺는 관계와 트랜스 여성이 여성이라는 기표와 맺는 관계양상의 차이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터프로 내모는 행위는 여성 범주의 다각성을 구성해내도록 하는 논의 지점 자체에 대한 무산일 뿐만 아니라, 차이의 정치학으로서의 페미니즘의 구성요건을 탈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트랜스 페미니즘에서 정의내리는 여성성, 여성 기표의 위상이 어떻게 남근의미경제 내부에 있는 것이자 이탈의 효과를 낳을 수 있는가의 문제부터 트랜스 페미니즘에서 가장 주요한 의제의 구성방식이 기존의 페미니즘 의제와 어떻게 다르며 조우 가능한가에 대한 세밀한 인식경로를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차이의 인식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터프는 누구의 입을 막는 이름인가?” 현재 한국 페미니즘 판에서 터프라는 용어는 “낙인의 이름이자 혐오 발화”53)의 일환으로 기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적 용어에 대한 학술적 비판의 자리는 아직도 전무하다.54) 트랜스 배제적 여성 페미니스트를 지칭하는 낙인으로서의 터프라는 용어의 한계는 정작 트랜스 피플을 살해, 강간하고 사회적 고립 등이라는 실질적 제재를 가하고 있는 남성들을 비판하는 용어의 부재와 연동되어 있다. 터프라는 용어가 정말로 트랜스 피플에 대한 가시성과 인권을 보장하는데 있어 큰 걸림돌이 되는 이들에 대한 정당한 인식지점을 드러내는 개념적 효용을 가지려면, 이 사회의 남성특권구조 속 기득권을 누리는 비트랜스 남성들-여기에는 이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남성도 포함된다.-의 트랜스 혐오적 국면들을 날카로이 가격하고 이를 견제하는 용어부터 존재해야하며 이것의 사회적 파급력도 보장되어 있어야 할것이다. 먼저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퀴어 혐오자로 보는 관점이 거하는 지점인 똥꼬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맥락과 이것의 유래부터 분석해보자. 똥꼬충이라는 용어는 2015년 말 메갈리아 싸이트에서 퀴어 커뮤니티 내 남성 성소수자들의 여성혐오와 레즈비언 차별, 게이 남성의 위장결혼 등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55)이다. 이 용어는 가위충, 보지충, 뽈록이, 오목이, 뒷보지, 끼순이, 보갈 등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쓰이는 여성혐오적 용어에 대한 대항언어로 사용된 맥락이 있다. 다시 말해, 가위충, 보지충 등에 대한 미러링이 똥꼬충이었다는 점에서 이것이 반격이자 대항언어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이 용어가 그러한 대항언어로서의 용례를 가졌었다는 지점이 너무도 쉽게 탈각되는데 반해, 게이 커뮤니티 내의 뒷보지, 가위충 등의 여성혐오적 용어들은 하위문화의 전복적 코드로 비판의 대상조차 되지 않고 용인되는 경향이 퀴어 페미니즘 그룹 내에서 존재하고 있다. 혐오와 폭력은 사회문화적 맥락성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성 퀴어들의 여성혐오를 문화적 특수성으로 용인하는 반면, 여성 페미니스트들과 여성 퀴어들의 반격의 언어를 너무도 쉽게 혐오의 언어로만 단순화하여 낙인찍으며 그 맥락을 간과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소수자 정치학의 그룹 내에서도 동일시와 감정이입의 대상을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표준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즉 동일시의 감정 내러티브마저 남성중심형으로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남성 퀴어들의 소수자성을 더 극적이며 안타까운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성이 퀴어일 때에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에 의한 차별과 성 지향성에 따른 차별이 양적으로 증가한 상태, 즉 소수자성의 양적 중첩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즉 이는 특권적 입장의 박탈이라는 다수자에서 소수자로의 질적 전환이 아닌 것, 그리하여 원래 잃을 것도 없는 이기에 권력낙차로 인한 박탈의 지점도 무엇인가가 명확히 가시화되지 않음으로써 연민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이 퀴어인 경우는 남성이라는 특권성에 대한 포기로 성지향성에 의한 차별이나 성정체성에 대한 전환을 읽어냄으로써 마땅히 누려할 특권의 상실이자 다수자에서 소수자로의 질적 전환이 극대화된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즉 이들이 무엇을 잃었는가가 확실하게 인식됨으로써 그 박탈과 권력 낙차로 인한 안타까움의 감정과 연민의 감정 투여 역시 더욱 손쉽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남성 퀴어가 저지르는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 ‘그럴 만한 맥락이 있겠지’, ‘여성혐오는 먼지와 같은 것이라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여성혐오의 저항 불능성을 선고하면서까지 남성 퀴어들을 비판해서는 안되는 영역으로 성역화해버린다. 이를 통해, 퀴어 정치학의 헤게모니적 주체인 게이에 대한 용인의 폭이 퀴어 페미니즘 내에서 훨씬 크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용인과 방관의 폭은 젠더 권력에 따라서 상이하게 배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지향성에서는 소수자이지만 성 정체성에서는 다수자인 남성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용인과 방관의 폭이 넓은 반면, 여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여자가 그럴 수가 있나’를 통해 한 치의 헛발질도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곧 퀴어 정치학 내에서도 남성중심성이 실재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똥꼬충이라는 용어에는 대항언어로서의 맥락이 내포되어 있음과 동시에 이 용어가 성소수자 남성을 혐오하기 위해 이성애자 남성들이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개념이었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차용해왔다는 점에서는 비판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 용어에는 이성애중심주의적 관점과 성소수자 혐오의 층위가 겹겹이 응축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소수자 남성의 여성혐오를 풍자하고 미러링하기 위한 대항의 목적이었다면, 다른 용어를 제시하는 것이 그 전략의 목적 상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위충, 뽈록이, 보지충 등에 저항하는 대항 언어의 맥락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혐오의 언어가 침습해 있는 국면을 제거해야만 하며, 이러한 전략상의 미흡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현재 이 용어의 지속적 사용보다는 다른 용어의 발명이 촉구된다. 그러나 게이 커뮤니티 내의 여성혐오에 대해서는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냉철한 비판이 지속되어야만 한다. 성소수자 남성 커뮤니티 내의 여성혐오문화에는 진짜 남성이 아닌 존재들로 열외, 배제된 것에 대한 자조와 수치심의 구조가 깃들어있다. 이는 주류적, 규범적 남성성의 구조를 독점하고 있는 이성애자 남성들이 성소수자 남성들을 열등화된 상태이자 여성화된 상태로 등치하는 범주화에 다시 포박되는 방식이라 할수 있다.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수치심의 지점을 여성화된 상태로 오인함으로써 이러한 여성적 상태에 대한 자기 연민을 여성혐오를 통해 자조하고 놀이화하는 것이 게이 커뮤니티 내 여성혐오문화의 맥락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성혐오문화는 여전히 주류적 남성성의 구조를 강화하고 이에 복무하는 방식일 뿐이다. 왜냐하면 진짜 남성과 가짜 남성으로 이분화하여 성소수자 남성들을 후자의 항으로 내모는 배제의 구조를 가격하는 법은 가짜 남성의 자리를 여성화된 상태로 등치하여 이를 열등성의 상태로 자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형태의 남성성만을 이상화하는 그 구조 자체를 비틀고 패러디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여성혐오적 용어들을 여성들에게 붙이거나 자신에게 되돌려 붙이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의 구조를 조소하고 풍자하고 균열내는 것만이 남성성의 구조에 대한 전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트랜스 혐오주의자로 보는 지점 중의 하나는 ‘젠신병자’라는 용어의 사용에 있다. 젠신병자라는 용어는 ‘트랜스젠더+정신병자’의 합성어로서 트랜스혐오와 정신질환자에 대한 혐오가 중층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이 용어는 게이 커뮤니티에서 먼저 사용되었지만, 퀴어 정치학 내에서 크게 문제시 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성소수자 남성들을 지칭하는 특화된 낙인의 이름 또한 아직 존재하고 있지 않다. 퀴어 정치학 내의 헤게모니적 주체이자 남성이라는 젠더 위계의 다수자성을 누리는 게이 커뮤니티의 혐오용어를 페미니스트들이 그대로 차용해온 것은 혐오의 국면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 가능하다. 남성과 여성 간의 불평등 구조는 젠더가 두 개여서가 아니라, 이 젠더 체제가 비대칭적이고 위계적이기 때문이며, 그러하기에 n개의 젠더들로 숱하게 젠더를 방사해내는 전술이 젠더 체제의 부조리를 해결하는 데에 효과적이지 못하며 오히려 젠더 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한다고 보는 비판적 관점이 젠신병자라는 용어에서는 전혀 논증되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용어는 전술적 방법론에서나 그것의 목적론에서도 효용성을 갖지못한다. 뿐만 아니라, 트랜스 여성이 겪는 젠더 디스포리아-사회적 현실의 이중적 층위로 인한-를 정신질환이나 망상으로 치부하는 관점은 비트랜스 여성이 겪는 디스포리아-여성이라는 기표에 대한 심리적 현실의 이중적 층위에 의한 불일치성-에 대한 이해 가능성마저 축소하는 것이자 자신의 인식경험만을 유일한 판단기준으로 규준화한다는 점에서 혐오적 측면을갖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성 페미니스트가 이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터프라는 낙인의 정당성이 충분히 입증되고 마는 비대칭적 정황은, 여전히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누가 말했는가?’를 더 중요시하는 젠더 위계의 측면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떻게 여자가 그런 무시무시하고 혐오적 단어를 입에 담다니!”라는 여성에 대한 일방적 의미기입-여성은 평화와 조화, 비폭력적 존재라는 통념이 여성의 본질로 전제되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에게 도덕적 완전무결성을 강령화하고 있음이 바로 여기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56) 정말로 젠신병자라는 용어 자체가 문제라면 이 용어가 시작되었고 사용되고 있는 성소수자 남성 커뮤니티, 그들을 특화해서 일컫는 낙인의 이름은 왜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해서도 심도 깊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터프라는 용어의 사용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되고 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제 터프라는 이름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페미니즘이라는 여성해방운동 판에서 몰아내고 입을 막게 하기 위한 용도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 페미니즘 내의 남성 퀴어들-성소수자 남성, 지정성별이 남성인 트랜스젠더퀴어들이 저지르는 여성혐오나 성폭력57) 등을 폭로하는 것, 남성퀴어 중심으로 개편된 퀴어 정치학의 위계성을 비판하는 레즈비언이나 지정성별 여성 젠더퀴어들에게 터프라는 이름이 빈번히 붙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래디컬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하는 여성 젠더퀴어들과 트랜스 남성들에게도 붙여지는 마녀사냥의 라벨링으로 터프라는 낙인이 소환되고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 판에서조차 남성 페미니스트가 발화권력의 독점을 누리고 숭배의 대상이 되는 기이한 현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만 제시하여도 터프로 내몰리고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와 논쟁을 벌인 여성 페미니스트의 논박 글에 동의를 표하는 것-페이스북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터프로 몰려 터프블랙 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기도 한다.58) 페미니즘이라는 여성해방운동에서 남성페미니스트가 갖는 한계와 지나친 발화권력의 집중을 비판하며 여아 성감별 낙태의 생존자라고 스스로를 표현한 여성 퀴어에게도 터프라는 낙인의 부과와 동시에 사이버 불링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아 성감별 낙태의 생존자라는 젠더사이드의 엄연한 현실59)을 드러내는 용어의 사용만으로도 트랜스 배제를 한다는 오인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인과 억측은 이 용어가 남성중심적 사회에 대한 비판이자 남아만을 살 만한 생명으로 인정해온 부조리한 현실 폭로의 목적을 지닌다는 것을 은폐해버리고 만다. 또한 남성폭력과 여성착취에 반대하는 트위터 계정의 글들을 자주 리트윗한다는 것만으로도 터프로 몰려 온갖 음해-자신이 적은 책이 표절이라는 논란에 휩싸이거나 단독 집필이 아닌 공동 집필이라는 의혹을 받는 것-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 뿐만 아니라, 낙태죄 폐지 운동에서 여성을 운동주체로 상정하고 이 사안을 가장 중요한 여성의제로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트랜스젠더퀴어들에 대한 배제로 낙인찍어 이 운동을 여성의제가 아닌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운동으로 명명해야할 뿐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임신중절권 획득의 문제를 더 이상 여성의 문제가 아닌 ‘자궁 소지자의 문제’60)로 명명할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 사회가 여성들을 ‘걸어 다니는 인큐베이터’ 취급하며 자궁이라는 기관성을 여성의 본질적 기능으로 특화해왔기에, 여성들은 임신중절시술의 권리마저 박탈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다시 여성을 자궁 소지자로 불러야한다는 관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 번째로 여성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생식기로 축소하는 성기 환원주의적 네이밍을 트랜스젠더퀴어 진영이 강화함으로써 여성의 인격권을 침해한 것임과 동시에 여성을 기관으로 분절하여 통치 관리하는 가부장제에 여전히 복무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두 번째로 여성을 자궁 소지자라는 말로 대체해야한다는 관점은 여성이라는 자리를 열등성의 원인으로 규정하여 부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남성중심적 인식질서의 재생산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트랜스젠더퀴어 진영이 내세우는 남성/비남성이라는 새로운 이원론은 여전히 남성을 존재의 표준형으로 여기는 인식 한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여성이라는 기표 자체를 제거해버린다는 점에서 이것이 남성중심주의의 변주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특권구조를 독점하고 있는 남성항을 해체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여성항-억압적 물적 조건이자 저항의 의미소-을 적출해내는 것은 어떠 한 경우에도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대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측면에서 자궁소지자라는 명명의 오류가 입증됨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를 비판하며 사용하길 거부하는 이들을 터프로 몰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제 터프란 용어는 남성 페미니스트 기분을 감히 거스르는 이들, 여성의제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들, 지정성별 남성 퀴어들의 여성혐오나 성폭력 등을 비판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터프는 이제 누구나가 될 수 있으며 페미니즘 판에 남성 중심성을 재각인시키기 위한 전술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터프라는 용어가 혐오 발화로 사용되고 있음이 입증된 다. 여기서 터프가 혐오발화인 이유는 첫 번째로 터프라는 용어를 통해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 자기 단속의 의지를 각인시키고 남성 페미니스트가 승인한 말의 범주에 머무르도록 강요함으로서 여성의 발화 권리를 탈취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소수자들 간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위계와 권력 불평등의 문제를 첨예하게 개진하도록 하는 비판 자체를 이 용어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말의 자리의 박탈과 소수자의 정치학 내에 실재하고 있는 헤게모니 구조와 권력 비대칭을 은폐하여 여성들의 중층적 억압현실을 더욱 강화하고 부조리를 재생산하게 한다는 점에서 터프라는 용어는 낙인을 넘어 혐오발화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용어는 비판적 기제로서의 개념적 효용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물론, 이것이 야기하는 부정적 효과-오직 증오만 을 강화하고 적대의 전선을 가르기 위한 용도로 한정되어있다는 측면에서도 폐기되어야 한다.

45) Vasquez, Tina, "It's Time to End the Long History of Feminism Failing Transgender Women". Bitch Media, February 17, 2014. “2008년에는 트랜스 여성과 트랜스 옹호자들은 이 그룹을 "트랜스 배제주의적 페미니스트" 또는 TERF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https://www.bitchmedia.org/post/the-long-history-of-transgender-exclusion-from-feminism Web. April, 2, 2018. TIGTOG (2008-08-17). "Carnivalia, transgenderism and the gender binary". Hoyden About Tow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5-11-05. https://hoydenabouttown.com/2008/08/17/carnivalia-transgenderism-and-the-gender-binary/Web. April, 2, 2018. 이 블로그에서 최초로 TERF란 용어가 사용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46) 젠더 퀴어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 이분법을 넘어선 다른 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뜻한다. MtF는 Male to Female로 사회적 부과성별은 남성이지만 스스로를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이라면, FtM은 Female to male로 사회적 부과성별은 여성이지만 스스로를 남성으로 정체화하는 이를 말한다. 47) 한국의 래디컬 페미니즘 내에서 여성 젠더퀴어와 트랜스 남성과의 연대와 포용, 운동주체로의 수용이 2017년 12월 초부터 트위터를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래디컬이 TIRF(Transinclusive radical feminism)와 TERF로 양분화되어 래디컬 내에서도 터프 몰이를 하고 있는 현상과는 동일하지 않다. TIRF에 대한 논의는 Cristan Williams(2016), "Radical Inclusion: Recounting the Trans Inclusive History of Radical Feminism", TSQ , 3 (1-2), pp. 254-258. 을 참조하라.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 논문의 저자 Cristan Williams는 터프라는 용어 사용과 터프 몰이를 하는 이 들이 트랜스 피플이 아니라, 트랜스 수용적 래디컬 페미니스트 측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래디컬 페미니즘과 트랜스페미니즘의 구분점을 매우 흐리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저자는 트랜스 역사가이자 트랜스 활동가, TransAdvocate의 편집자이며, HIV / AIDS 예방을 위한 도시 연합 (United Urban Coalition)의 전국 운영기구에 소속되어 있으며 미국 내 트랜스젠더 재단(Transgender Foundation of America)의 전무이사 직책을 맡는 이로서 트랜스 페미니스트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트랜스 혐오자 선동행위를 트랜스 페미니스트가 아닌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로 다시 돌리는 방식에서 트랜스 포비아 몰이의 책임 전가론이 엿보인다. 또한 터프 감별 행위를 래디컬 페미니즘 내의 내부 갈등과 구분 짓기 행위로 축소하는 의도에는 이미 안티 래디컬적 관점이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48) 케이트 본스타인은 『젠더 무법자』에서 “수술 후 트랜스 섹슈얼, 미수술 트랜스 섹슈얼, 비수술 트랜스 젠더 등”(케이트 본스타인,『젠더 무법자』, 조은혜 옮김, 바다 출판사, 2015년, 117쪽.)으로 트랜스 젠더 그룹을 세분화하고 이들 간의 무시와 조롱의 구도가 존재함을 밝히고 있다. “젠더 무법주의의 모든 스펙트럼을 포용하는 집단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슬프게도 MTF 젠더 무법자와 FTM 젠더 무법자로 나뉘어 있다.” (케이트 본스타인,『젠더 무법자』, 118쪽.) 49)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게 있어 상상적 관계는 환영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상적 관계란 소타자들이라는 다른 자아들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 간의 유사성에 입각한 모방과 경쟁관계를 뜻한다. 대표적 예로 형제, 자매 간, 또래 친구 간의 경쟁심이 이에 해당한다. 이에 반해, 상징적 관계란 대타자와의 관계로서 자신이 쉽게 가닿을 수 없는 이상적 질서와 그 위치점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승인을 부여받는 관계를 의미한다. 대표적 예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사회적 제도와 개인과의 관계 등이 여기에 속한다. 50) 슬라보예 지젝,『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년, 182쪽. “상상적 동일시 속에서 우리는 유사성 수준에서 타인을 모방한다. 반면 상징적 동일시에서 우리는 정확히 우리가 타인을 모방할 수 없는 지점에서, 유사성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그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한다.” 51) 예를 든다면, 최근 모유수유에 성공한 트랜스 여성(이가영, “트랜스젠더 여성, 아기에게 모유 수유 첫 성공, 중앙일보, 2018년 2월 16일.)에게 있어, 모유수유란 자신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사회적 현실로서의 여성이라는 기표가 일치되는 합일의 경험으로 이상화될 수 있다. 그러나 비트랜스 여성들에게 모유수유의 경험은 강요된 모성의 의무이자 피딱지와 젖몸살의 고통조차 제대로 발화될 수 없는 고립의 경험이자 자기부정의 경험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모유수유라는 경험을 둘러싸고 트랜스 여성과 비트랜스 여성이 전혀 다른 인식 경험을 구성하는 것을 통해서도 여성이라는 상징적 기표와의 관계방식에 차이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http://news.joins.com/article/22374284 검색일: 2018.4.4. 52) 생물학적 성별성에 기반하여 사회적으로 부과된 성별과 자신이 스스로 정체화하는 성별이 일치하는 자를 시스젠더라고 한다. 53) 메건 머피는 터프라는 용어를 단순한 오점을 남기는 용어만이 아니라, 혐오발화로 보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다음 기사-“'TERF'는 단순한 욕설이 아니라 증오심 표현이다. ”'터프 (TERF)'라는 용어는 더럽히고 조롱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선동하는 데 사용된다”를 참조하라. Meghan Murphy, ‘TERF’ isn’t just a slur, it’s hate speech, The term “TERF” is not just used to smear and deride, but to incite violence. September 21, 2017, Feminist current. http://www.feministcurrent.com/2017/09/21/terf-isnt-slur-hate-speech/ Web. April, 3. 2018. 54) 터프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는 관점들은 2017년 12월부터 석사논문, 문학잡지, 연구논문, 단행본 등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으나, 터프라는 용어의 한계나 이 용어의 혐오발화적 기능에 대한 접근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55) 김리나,“메갈리안들의 여성 범주 기획과 연대: 중요한 건 ‘누가’ 아닌 우리의 ‘계획’이다”,『한국여성학』 제 33권 3호, 2017년, 112쪽, 각주 2. “2015년 말 메갈리아에서는 게이 남성의 위장결혼으로 인한 이성애 여성의 피해 사례와 게이 남성 사회의 여성혐오 문화 및 레즈비언 차별 등에 대한 논의가 촉발되었다. 이때 기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되어온 게이 남성에 대한 혐오단어가 등장하였고, 해당 용어 사용의 맥락과 불/가를 두고 논쟁이 벌여졌다.” 56) 페미니스트 여성이 남성 퀴어들에 대한 혐오를 하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조차 없다고 단정하며 페미니즘 판에서 적출대상으로 규정되지만, 남성 퀴어 운동가가 페미니스트 선언만 하여도 페미니스트가 됨과 동시에 아무리 여성혐오를 해도 그가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운동가임이 부정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는 이미 여성 페미니스트에 대한 판단 잣대가 엄청나게 높으며 성별에 따른 이중적 도덕 잣대가 페미니즘 판에서도 적용되고 있음을 뜻한다. 57) 무성애자 남성이 다른 무성애자 여성에게 성기 삽입 섹스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에서 성적 쾌락을 누리지 않았으며 무성애자라서 성적인 것으로 이를 느끼지 않았다고 하여 그가 저지른 성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제재가 퀴어 커뮤니티 내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몇 달 후(2018년 3월 7일)에야 일어나고 제재와 후속 조치 요구가 수용되었다. 이에 대한 입장문은 다음 링크를 참조하라. https://docs.google.com/forms/d/e/1FAIpQLSczInPrR_6ZDdO4PF1usENd-McAHYzsdYC3ZuRu_-0aIA F6KQ/viewform?usp=send_form 검색일-2018.3.8. 또한 비수술 트랜스젠더 여성이 8명의 여성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도 제대로 된 공론화의 장에서 논의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트랜스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이 이 성폭력 사건에서 전면화되지 않게 하기 위해, 피해자 여성들과 이를 공론화하는 이들이 더욱 주의를 기울인 데에 반해, 이들은 즉각적으로 터프로 몰려 제대로 된 공론화를 할 수조차 없었다. 이 사안을 자신의 성 정체성 문제로 전면화하여 이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입막음한 것은 성폭력 가해자 측이었으며 피해자들에 대한 협박을 멈추지 않았다. 성폭력 가해자는 트위터 내에서 새롭게 계정을 파서 또 다시 어린 여성 퀴어들을 대상으로 성희롱과 만남 요구 등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2018년 3월 29일에 트위터에서 다시 일어났다. 58) 자신의 글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의 글을 논박한 여성 페미니스트 글에 좋아요를 누른 선배 여성학자들을 터프 블랙 리스트에 올리고 이들을 학회에서 만나면 fuck you를 날려주겠다는 여성혐오적 언사를 하는 남성페미니스트도 페미니즘 판에서 용인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터프라는 용어는 오직 여성 페미니스트들을 특화해서 겨냥하는 낙인과 혐오표현이기 때문이다. 59) 1990년에 태어난 남녀 성비는 116.9대 100으로 그 해의 여아 성감별 낙태의 심각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나라 출생 시 성비는 1980년에 104.3이었으나 1990년에는 116.9를 기록하였고 1991-1993년 기간 중에는 112.9에서 115.6으로 계속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이는 출생성비인 106을 훨씬 상회하는것이다.” 전효숙, 서홍관,“해방 이후 우리나라 낙태의 실태와 과제”,『의사학』 제 12권 제 2호, 대한의사학회, 2003년, 139쪽. 60)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하지 않는 지정성별여성 젠더퀴어들을 위해 낙태죄폐지 운동주체를 자궁소지자로 불러야한다는 주장은 여성이라는 기표에 대한 거부감을 갖는 심리적현실을 반영한다. 그런데 자신이 여성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디스포리아를 가진 이가 자신의 신체 중 일부인 자궁이라는 기관과 디스포리아적 경험을 갖지 않는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관점에서는 자궁소지자라는 용어 역시 트랜스남성(FtM)에게는 디스포리아의 트리거가 될 수 있으며 비트랜스 여성들에게는 억압적 현실의 재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음이 철저히 간과되고 있다. 여기서 낙태죄 폐지를 여성의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여성 젠더퀴어의 관점만이 투영된 것이 아니라 트랜스 여성에 대한 배제로 보는 관점도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대목만 옮깁니다.

ㅎㅂㅎ (토론기여)

사용자:Dada 님의 터프는 혐오 발언이라는 데에 동의하고, 분리된 GCF 문서와 TERF 문서를 병합하여 GCF(=TERF)의 논리와 이에 대한 비판을 모두 서술할 것을 제안합니다.

낙엽1124 (토론기여)

Dada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이 같은 분리를 만들게 된 페미위키 내 편집자들과의 학술적 교류 및 이해 독려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Dada님과 의견이 같은 ㅎㅂㅎ님께서 바로 동의를 밝히고 편집을 추진하는 것은 성급한 일로 보입니다.

Dada (토론기여)

김지원이라는 닉네임을 단 분이 제 트위터 계정에 찾아와 "님의 무식에 어이가...뭐, 중재???"라는 쪽지를 보내셨더군요. 에버노트나 워드프레스도 일부러 다른 이메일로 새로 가입해 썼는데, 구태여 다른 이메일로 만든 트위터 계정에 찾아와 대뜸 저런 쪽지를 보낸 이유는 뭔가요? 제가 비록 무식할진 모르지만 무례하진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여기에 공식적으로 남겨주세요.

Dada (토론기여)

해당 계정은 이것입니다. https://mobile.twitter.com/R8gzfRFgkLgCnLl

Garam (토론기여)

위키에서는 때로는 무관심이 답일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넓은 마음으로 생각을 하시는 것이 스트레스도 덜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