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위량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5일 (일) 12:08

판위량(潘玉良, 1895년 ~ 1977년)은 중국서양화가이자 수묵화가이다. 어릴 때 이름은 천수칭(陳秀淸).

생애

1895년에 중국 양저우에서 세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천수칭이 1살이 되기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2살 때 동생을 잃고, 8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외삼촌의 도박빚을 갚기위해 14살 때 기생집에 팔렸다.

기생의 몸종으로 일하다가, 기녀가 되면서 장위량(張玉良)으로 개명한다. 판짠화(潘 贊化)를 만나, 17살에 판짠화의 두번째 부인이 되어 판위량(潘玉良)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녀 생활을 청산하였다.

판짠화의 지원으로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공부하였고, 시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상하이미술전문대학에 들어가기위해 입학시험을 치뤘으나 기녀 출신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어 시험에서 떨어졌다. 판짠화를 통해 판위량의 재능을 확인한 대학교수가 판위량을 적극 추천한 끝에야 25살에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생활 중에 누드화에 관심을 가지고 누드모델을 구하지 못하자,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대학에서 추진하는 전시회에〈나녀(裸女)〉란 이름으로 누드화를 제출하여, 화제가 된 동시에 판짠화와 처음으로 갈등을 빚었다.

판위량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판짠화의 첫 번째 부인과 정식으로 만남을 가졌다. 판위량이 임신을 하지못하자,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판짠화를 위해 첫 번째 부인을 불러들여 셋이서 동거하였다.

판위량은 유학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국비 유학생 시험을 준비하여, 1921년에 프랑스 리용에서 판짠화의 지원을 받으며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리용국립대학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배우며 리용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23년에 프랑스국립미술학원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하였다.

판위량은 귀국하는 대신 로마국립미술학원에서 유학생활을 계속하였다. 판짠화의 지원이 점점 줄어들면서 파리국립미술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졸업하였다. 다시 이탈리아 국립미술학원에 진학하였다가 1927년에 〈나녀(裸女)〉를 이탈리아 국제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중국인으로서는 최초로 3등에 당선되고, 1928년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9년 개최된 제1회 전국 미전에 참가하여, 중국 서양화가 부문에서 최고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상하이미술전문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다가, 교수가 되었다. 난징의 중앙대학 미술과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난징에서 개인전시회를 네차례 가졌다. 세번째 전시회 첫날에 그림이 찢기며 기녀출신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하다가 1936년에 네번째 전시회를 마치고 1937년에 프랑스로 떠났다.

1938년에 프랑스 영주권을 획득하고 작품활동을 하다가, 1977년에 프랑스에서 78세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