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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3년 1월 6일 (금) 20:55

1. 개요

에밀리 뒤 브르퇴유 (1706~1749, Émilie Le Tonnelier de Breteuil, marquise du Châtelet)는 최초의 근대 과학의 여성과학자이다.


샤틀레 후작부인 가블리엘레 에밀리 르 토넬리에 드 브르퇴유(프랑스어: Gabrielle Émilie Le Tonnelier de Breteuil, marquise du Châtelet)는 에밀리 뒤 샤틀레(영어: Emilie du Chatelet, 1706년 12월 17일 ~ 1749년 9월 10일)로 알려진 프랑스의 과학자이다.


그녀가 살아간 시대는 '여성은 남성보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팽배하던 시기여서 여성의 중등교육을 허락하지 않았다.

에밀리는 여성이 무지한 것은 타고난 천성이 아닌 교육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에밀리의 가문은 높은 계급에 속했고 상당한 자산을 소유했기 때문에 과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속에서 학문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라틴어로 쓰여진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명료한 이해를 돕는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 그만큼 프린키피아를 뿌리 깊게 이해하고 있었다. 또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머물렀던 라이프니츠의 활력(라틴어: vis viva) 개념을 과학에 도입했다. 언어학에도 뛰어났던 그녀는 라틴어, 이태리어, 그리스어, 독일어에 능했고 과학연구 뿐 아니라 번역에도 힘썼다. 문법 연구와 성서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으며, 라틴어와 그리스 고전들을 번역했다. 《오이디푸스》를 번역하기도 하였으며 《행복론》을 쓰기도 했다.


2. 생애

2.1. 성장 과정

1706년 10월 17일 파리에서 네 자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루이 니콜라스(프랑스어: Luis Nicolas le Tonnelier de Breteuil)는 교육열이 매우 높은 사람이었다. 일찍이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그녀는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당대 여자들은 받을 수 없었던 수학, 문학, 과학 교육을 받았다. 또한 스페인어, 영어, 이태리어,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를 배웠다. 그녀는 곧 가정교사들이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베르사유에서 그녀와 지적인 대화를 나눌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의 어머니 가브리엘 안느는 딸이 상류층 여성이 지녀야 할 태도를 갖추길 원했지만, 그러기에 에밀리는 과학, 철학, 신학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루이 니콜라는 딸에게 펜싱과 승마를 가르쳤다. 펜싱 실력이 좋아 궁정에서 유명한 왕실 근위대장인 자크 드 브룅이라는 사람에게 결투를 신청했고, 모두가 보는 광장에서 벌인 결투는 어머니를 당혹케했다.

2.2. 결혼 및 연애

1725년 18살의 나이에 당시 머스킷 총병이었던 샤틀레 후작이자 로몽 백작인 플로랑 클로드(프랑스어: Florent-Claude)과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았다. 플로랑 클로드는 부르고뉴 지방의 세뮈르의 통치자였다. 남편은 주둔 병사를 감독하느라 바빴으며, 아내가 공부하는 것을 존중해주었다.

결혼과 출산 이후 과학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었기에 그녀는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남자였다면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테고,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루이 14세의 대자이자 대단한 바람둥이로 이름 높았던 리슐리외 공작과 연애하게 된다. 이후에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피에르루이 모페르튀를 만났다.

그는 한때 근위대원이었지만 하던 일을 그만두고 물리학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고등수학을 함께 공부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모페르튀는 당시 프랑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뉴턴의 학설을 지지했고, 뉴턴이 예측했던 사항을 확인하러 북극 탐사를 떠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에밀리는 이 모페르튀에게 수학적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모페르튀는 에밀리의 저서인 《물리학 입문》을 수학적 측면에서 비판한다. 후에 에밀리는 독일의 수학자 자무엘 쾨니히(독일어: Samuel König)에게 수학을 배우면서 더욱 심도 있게 공부하게 된다.

2.3. 볼테르와의 관계

1733년, 스물여덟 살 때 볼테르(프랑수아 마리 아루에)<button data-placement="auto bottom" data-content="%ED%94%84%EB%9E%91%EC%8A%A4%20%EA%B3%84%EB%AA%BD%EC%A3%BC%EC%9D%98%20%EC%9E%91%EA%B0%80" data-container=".wiki-fnote">1</button> 를 처음 알게 된 후 약 10여 년간 볼테르와 연인 관계였으며, 죽을 때까지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볼테르가 정부와 성직자 계급을 주로 비판했기에 위험에 처할 때 그녀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볼테르를 루이15세와 화해시키기도 하였으며, 볼테르가 <<철학 서간(프랑스어: Lettres philosophiques)>> 때문에 도피하였을 때 자신의 성을 빌려주거나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볼테르 역시 샤틀레를 도왔다. 그는 샤틀레를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지식인 모임에 들어가게 해주었다. 귀족인 에밀리와 미천한 가문 출신인 볼테르와의 관계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부정적이었다. 볼테르와 그녀의 남편과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는데 볼테르가 적지 않은 재정자원을 들여 시레이 성을 꾸미는데 도왔기 때문이다. 또한 귀부인들의 연애가 자유로웠던 당시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볼테르는 영국으로 망명했던 시절, 새로운 뉴턴의 사상에 감명을 받았고, 볼테르가 뉴턴의 명저를 읽게 된 데에는 에밀리 뒤 샤틀레의 영향도 있었다. 1737년까지 에밀리는 볼테르와 같이 왕립 과학아카데미 안에서 데카르트 학파와 대립하던 국내 뉴턴 학파를 지지하였다. 후에 볼테르는 프랑스로 귀국해 명작 깡디드를 남기게 되는데 에밀리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의 관계는 몇 년 후 시들어지는데, 뉴턴을 최고로 생각하던 볼테르는 에밀리의 관심사가 뉴턴에서 라이프니치로 관심이 이동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또한 에밀리는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대왕과 친분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1736년에 볼테르와 공동으로 《뉴턴 철학원론(프랑스어: Élemens de la philosophie de Neuton)》을 완성했다.
1738년에 볼테르와 공동으로 《뉴턴 철학의 기본 요소들(프랑스어: Eléments de la philosophie de Newton)》을 썼다. 볼테르는 데카르트에 너무나 심취한 과학원을 겨냥하여 뉴턴에 대한 책을 냈다.


 2.4. 시레이 성

에밀리의 남편은 시레이에 오래된 성을 소유하고 있었다. 에밀리와 볼테르는 이 곳을 두 사람의 연구실 및 주거공간으로 개조했다. 2년여의 공사를 거친 끝에 탄생한 시레이 성은 파리의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견줄 만한 도서관과 런던에서 수입해온 최신 실험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방문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객실용 방들과 세미나실도 있었다. 공동 서재를 두었고 서로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개인 서재에는 학문 연구를 위해 항상 커튼을 내려 동트기 전후의 조명 상태를 유지하였다. 점차 시레이 성에는 유럽의 최고 과학자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에밀리와 볼테르는 10년 이상 시레이의 성에서 함께 살았다. 오래된 성을 개조해서 공동 서재와 개인 작업실, 여러 개의 객실을 두었다. 볼테르는 종종 에밀리의 작업실에 방문해서 뉴턴의 라틴 원문을 네덜란드어 주석과 비교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외국의 많은 신진 학자들이 이곳에 머물다 갔다. 쾨니그나 베르누이 같은 과학자들은 이곳에서 장기간 묵기도 하였다. 에밀리 뒤 샤틀레와 볼테르는 유럽 과학자들과의 협력으로 뉴턴 연구의 기초가 확립되는 것에 만족했다. 운동하는 물체가 갖는 힘에 관한 연구로 시레이는 몇 안되는 진정한 독립 연구소로 인정받게 된다. 연구소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시레이 성에서 그들이 독자적으로 개척한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둘은 파리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세간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에밀리는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철학을 공부했으며 뉴턴 학문에 대해 공부하였다. 이 시기에 그녀는 여러 저작을 남겼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2.5. 사망

볼테르와 관계가 소원해진 시기, 에밀리 역시 젊은 시인과 만남을 갖다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짐작하고 출산 예정일인 9월에 맞추어 일생의 연구를 마감해야 했다. 매일 3~4시간씩만 수면을 취하고 모든 시간을 뉴턴의 프린키피아 연구에 바쳤다. 1749년 9월 1일 샤틀레는 왕립 도서관 감독에게 뉴턴에 대해 연구해온 주요 해석들의 원고를 동봉한 서류 꾸러미를 보냈다. 3일 뒤 진통이 시작되었고, 아이를 출산하고 감염으로 인해 일주일 뒤 사망했다.

3. 일화들

  • 아버지가 재정적으로 충분히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되자, 책을 사들이기 위해 도박으로 많은 돈을 땄다. 그녀가 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해석기하학에 능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 그녀는 여가 시간에 미적분 실력을 다듬곤 했기에 덕분에 어렵고 긴 계산을 쉽게 해내는 능력이 있었다.
  • 자신의 글에서 "내가 왕이라면, 여자에게 인간이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갖게 해줄 텐데. 특히 이성에 관련된 모든 권리를."이라 밝히며 당대의 여성의 교육 부족을 지적했다.
  • 베르누이, 프리드리히 대왕, 볼링브룩(영어: Viscount Bolingbroke, 영국 작가이자 정치인), 조너선 스위프트 같은 사람들과 편지 왕래를 하며 서로의 생각을 주고 받았다.
  • 보수적인 모국의 프랑스 아카데미의 정회원은 되지 못했으나 이탈리아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 저서 《물리학 입문》은 그녀의 아들 루이마리(프랑스어: Louis-Marie)에게 뉴턴의 물리학을 가르치기 위해 썼다. 이 책은 라이프니츠와 클라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뉴턴의 물리학과 독일 형이상학의 통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미리 보게 된 한 때 그녀의 수학선생이었던 자무엘 쾨니히(독일어: Samuel Koenig 1712년 ~ 1757년)가 에밀리의 책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일로 에밀리는 쾨니히 선생과 결별했고, 자신이 직접 마무리하여 1740년 말에 익명으로 책을 출간했다.
  • 그녀는 네덜란드 작가 만데빌레가 지은 《꿀벌의 우화》(영어: Fable of the Bees)의 서문에 "신체에서 증거를 찾는 일은 박물학자들에게 일임할 것이며 뚜렷한 증거를 찾기 전까지는 여성도 교육에 대해 불평할 권리가 있다."라고 썼다. 그녀는 여성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 볼테르는 독일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밀리는 위대한 사람이지만 그의 유일한 단점은 여성이었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 볼테르는 그녀의 죽음을 알고 벽에 머리를 찧으며 슬퍼했으며, "나의 반쪽을 잃었노라!" 라고 외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 대화할 때 말이 엄청나게 빠르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연구 이론에 관해서라면 훨씬 여유를 갖고 조리 있게 말했다.
  • 순전히 즐거움을 위해 각본을 쓰고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오페라에 직접 출연하여 하프시코드를 연주하기도 하고, 대본 없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한 카페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당시 파리 카페들은 여성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주일 후 남장을 하고 카페에 나타나 과학에 대한 토론을 했다. 나중에야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의 배짱과 열정에 놀랐다고 한다.


추가중. 추가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