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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원로원과 로마 인민" (senatus populusque Romanus, SPQR)

기원전 509년부터 27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던 로마인들의 국가.

로마의 공화정은 민주정이 아니었고, 원로원이 집단 지도권을 행사하는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했다. 개인이 전제 권력을 소유할 수 없었으며, 다수의 대중이 국가를 휘두를 수도 없었다.  

역사

수립

기원전 510년, 로마에는 아직 왕정이 존재했다. 일곱번째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일명 '오만왕' 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격이 포악했고 원로원을 무시한 채 독재 정치를 펼쳤다.

부전자전이라 타르퀴니우스 왕에게는 역시 망나니인 막내 아들 섹스투스가 있었다. 이 섹스투스는 막장짓을 계속하다 어느 날 귀족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성폭행했다. 루크레티아는 친정 아버지와 남편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복수를 부탁하며 자살했다. 그녀의 남편 콜라티누스와 동료 귀족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는 이 사실에 분노하여 로마 인민들을 불러모았고 왕을 몰아냈다.

기존의 왕정은 집정관 두 명이 선출되어 국가를 이끄는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초대 집정관은 콜라티누스와 브루투스였다.


이는 기원전 6세기 말 에트루리아인의 영향력과 로마 시민들의 갈등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에트루리아어 이름이며, 에트루리아인들의 영향으로 로마 시가 건설되었고 에트루리아인이 로마 시를 통치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신전 역시 타르퀴니우스 왕이 세운 것이다. 종교 관례 역시 로마는 에트루리아에게서 물려받았으며, 로마의 상급 행정관들이 입던 '토가 프라이텍스타(자주색 단을 댄 토가)' 도 에트루리아 전통에서 유래되었고, '파스케스(도끼를 묶은 막대기 다발)' 역시 에트루리아 왕을 모시던 수행원들이 들고 다니던 것에서 나왔다.

로마 공화정을 세움으로서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에게서 벗어나 진정으로 그들의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기 로마 공화정

왕정이 무너지자, 로마 주변의 라틴 도시들은 로마에 맞서 동맹을 이루었다. 기원전 5세기 초 라틴 동맹과 로마는 군사적 격돌을 벌였고 이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했다. 로마는 라틴 동맹과 다시 동맹을 맺어 로마-라틴 동맹을 형성했다. 그리고 주변 민족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얻어냈고 라티움 지역을 통일하는 포석을 닦았다.

기원전 387년, 로마는 갈리아인의 침공을 맞았다. 갈리아인들은 로마 시 안으로 들어와 약탈하고 원로원 의원들을 학살했다. 로마는 이후 다시 세력을 회복했고 침략에 대비하여 세르비우스 성벽을 축조했다.

기원전 4세기 말 로마의 팽창 활동은 남부로 나아갔다. 로마는 삼니움인들과 맞닥뜨려 전쟁을 벌였다. 제1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43-341)은 전초전으로 끝났고, 제2차 삼니움 전쟁(기원전 327-304)에서 로마는 굴욕적인 패배를 겪었다. 로마는 이 패배에서 와신상담하여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의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는 데 있어 마지막으로 마주쳐야 했던 적은 바로 '마그나 그라이키아' 라고 불렸던 이탈리아 남서부 해안가의 그리스인 도시들이었다. 코리아타운 같은 거 이 중 타렌툼이라는 도시는 로마를 격퇴하기 위해 동방 국가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요청에 답하여 온 자는 바로 에페이소스의 왕 피로스였다.

기원전 280년의 헤라클레아 전투와 기원전 279년의 아스쿨룸 전투에서 피로스는 승리했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군대의 대부분을 잃었다.  그는 결국 시칠리아로 후퇴했다가, 기원전 275년 다시 로마와 맞섰으나 베네벤툼에서 패배해 물러났다. 타렌툼은 로마에 항복했고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손에 넣었다.

1차 삼니움 전쟁 이후 로마는 라틴 도시들에 이어, 카푸아를 비롯한 다른 도시국가들과도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더 많은 규제가 가해졌으며, 그로 인해 공화정 말기에 이것이 갈등을 빚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기원전 146)

기원전 275년경 로마 공화정의 구조는 확고해지고 안정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공화국은 이탈리아 반도의 지역 세력에 불과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로마는 카르타고라는 거대한 적을 만나 싸워 승리하면서 거대한 지중해 세력으로 거듭났다.

제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64~기원전 241)

로마와 카르타고 양국은 초기에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288년, 마메르쿠니라는 이탈리아 용병대가 시칠리아 도시 메시나를 장악해서 카르타고와 시라쿠사를 약탈했다. 기원전 265년, 메시나에서는 로마와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고, 카르타고와 로마는 각각 군대를 보냈다. 그리고 둘이 싸우기 시작했다. (...)

언뜻 보면 황당한 일이지만 로마는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지배하면 로마의 이탈리아 지배권을 위협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때문에 로마는 '이탈리아인' 마메르티니를 도왔고(구원을 요청한 메시나가 아니라 그 메시나를 약탈하던 이탈리아인 마메르티니를 도왔다) 때문에 메시나를 돕던 카르타고와 충돌했다.

기원전 264년, 그로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초반에는 카르타고가 유리했고 로마는 교착 상태를 겪었다. 카르타고는 정예 해군을 갖추어 서지중해를 지배하던 세력이었다. 로마는 이에 맞서 처음으로 해군을 창설했다. 그런데 이 햇병아리 해군은 기원전 260년 밀라이에서 정예 부대 카르타고 해군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먼치킨이야 뭐야

로마군은 이 기세에 힘입어 기원전 256-255년에 카르타고 본토를 위협하기 위해 함대를 아프리카로 보냈다. 그러나 로마군은 카르타고 용병대에 격파되었고 구조 함대도 폭풍에 휘말렸다. 두번째 출전한 함대 역시 폭풍에 휘말렸다.

기원전 240년대 양측은 30년이 넘는 전쟁으로 지쳐갔다. 그러나 로마는 더욱 있는 힘껏 마지막 힘까지 짜내고 있었다. 내 이름은 로마, 포기를 모르는 국가지 기원전 241년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에게서 승리를 거두었고 카르타고는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로마는 사르디니아와 시칠리아를 속주로 얻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기원전 202)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을 전쟁"  - 리비우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카르타고인들이 빡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시칠리아와 사르디니아를 잃은 카르타고는 마지막 남은 해외 영토인 이베리아 반도에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이곳에 파견된 장군 하밀카르 바르카에게는 한니발이라는 9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그 한니발 맞다.


한니발은 어렸을 때부터 로마에 대한 증오심을 뼈에 새기며 자라났다. 그는 성인이 되어 여전히 이베리아 반도에 파견된 장군으로 복무했고, 카르타고의 세력을 점차 넓혀나가며 로마의 경계심을 샀다. 그러다 로마가 우호동맹을 맺은 도시인 사군툼을 공격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한니발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카르타고는 이를 거절했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 218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리는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역시 한니발 마성의 남자

로마가 군사력을 모으는 동안 한니발은 귀신같은 기동력으로 알프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쏘쿨하게 산맥을 넘어간 그는 절반 이상의 군사력을 잃었으나 여전히 2만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으며, 그를 저지하려는 로마군을 하나하나 무찌르고 진격했다. 비상사태가 내려진 로마는 독재관으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임명했다. 파비우스는 본인의 별명인 "지연시키는 자" 답게 시간을 질질 끌어대면서 한니발을 지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한니발이 남부 이탈리아로 이동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로마인들은 기원전 216년 새로운 집정관을 선출했다.


새로운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군대를 이끌고 칸나이 평원에서 한니발과 대적했다. 기원전 216년 8월, 칸나이 전투에 나선 로마군 숫자는 7만 명이었다.  당시 한니발의 병력은 보병 4만 명, 기병 1만 명이었다. 수적으로는 한니발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전선의 한가운데에 돌출부를 만들어놓는 전선을 형성해 로마군을 끌어들였고 로마의 주력 부대를 포위해 섬멸했다. 이 칸나이 전투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훌륭하게 활용한 예로 꼽힌다. 로마군은 칸나이에서 거의 학살에 가깝게 섬멸당했고, 7만의 병력 중 겨우 1만 명이 살아나올 수 있었다. 한니발은 이 전투의 승리로 '군사의 천재' 라는 별명을 얻었고 로마 시 근처에까지 진격해 나갔다.


로마는 이제 다시 "지연시키는 자" 파비우스를 데려왔다. 파비우스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한 짝을 이루었고, 이 둘은 '로마의 방패와 칼' 로 불리며 다시 한니발을 짜증나게 만들기 시작했다. 파비우스는 절대 한니발을 정면으로  건드리지 않았고 대신 한니발의 이동을 제한하면서 그를 돕는 세력을 공격했다. 이는 한니발에게 가하는 타격도 컸지만 로마인 자신들이 져야 하는 부담도 컸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내 이름은 로마, 포기를 모르는 국가지 222


기원전 211년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공성전에 승리했다. 같은 해 로마의 장군들이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나이우스 푸블리우스 스키피오 형제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전사했다. 전사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아들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2세가 24세의 나이로 지휘관이 되었는데,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르타고를 몰아냈다.

기원전 205년, 로마로 귀환한 그는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북아프리카 공격의 지휘권을 얻어 카르타고 본토에 상륙했다. 한니발은 조국의 본토가 위험에 처하자 본토로 소환되었고,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했다. 스키피오는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아프리카누스' 라는 칭호를 얻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로마 공화정의 '군사 지도자' 라는 캐릭터의 시초를 연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이제까지 로마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관직의 사다리' 라고 불리는 엘리트 출세 코스를 차근차근 밟아 중장년의 나이에서야 한 위대한 인물로 완성되고는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겨우 24살의 나이에 지휘관이 되었고, 30대 초반에 집정관이 되었다. 자신의 재능과 영광과 인기만으로 화려하게 출세하여, 전통적인 원로원 의원들과 맞먹은 것이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등장은 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가 나타나는 시초가 되기도 한 것이다.

제3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149~기원전 146)

기원전 202년 이후 한니발은 카르타고를 부분적으로 회복하고 있었다. 이 사람도 포기를 모르기는 마찬가지 그러자 기원전 195년 로마는 카르타고에 한니발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로마: 안 되겠어, 이 자식. 어떻게 하지 않으면...... 한니발은 이를 피해 외국으로 망명했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종전 협상을 하면서 카르타고의 군사적 행동을 금지했다. 그러자 카르타고의 이웃나라인 누미디아는 카르타고를 공격해 들어왔고 누미디아: 야 신난다! 기원전 151년, 죽을 맛이 된 카르타고는 결국 누미디아에 반격했다. 로마인들은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 사절단의 우두머리는 바로 대 카토였다. 그리고 사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카르타고가 로마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원로원의 연설 말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카르타고를 파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후 연설할 때마다 이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고 한다. (...)


기원전 149년, 로마는 다시 카르타고를 공격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인들에게 본국을 떠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카르타고인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카르타고인들은 결사적으로 3년 동안 항전했다. 그러자 로마가 등판시킨 신인 선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입양한 손자,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였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끝내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카르타고의 도시는 불태워지고 그 자리에 소금이 뿌려져 풀도 자라지 못하도록 파괴되었다. 강대국 카르타고는 사라졌고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만이 그 자리에 존재하게 되었다.

지중해의 패자

앞서 말했듯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벼락출세는 후에 있을 일들의 시초였다. 로마는 이미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마자 역시 30대의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그는 스키피오처럼 재능 넘쳤고, 교양 있었고, 젊었으며  '관직의 사다리' 를 충실히 밟아온 자가 아니었다.

플라미니우스는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에 능통했다. 기원전 197년, 그는 그리스로 진군해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필리포스 왕을 물리쳤다. 그리고 다음 해인 기원전 196년, 이스트미아 경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다음의 국가들과 도시들로 하여금 자유롭고, 주둔군이 배치되지 않으며, 전혀 세공에 종속되지 않고, 선조들의 법을 완전히 향유하게 한다. 코린토스인, 포키스인, 로크리인, 에우보이아인, 프티아 지역의 아카이아인, 페레비아인.


그가 말한 '자유' 의 개념은 그리스 세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로마는 다른 속주에 비해 그리스에 대해 상당히 좋은 대우를 보장했다. 스페인에서는 약탈을 벌였던 것과는 달리, 로마는 자신보다 나은 그리스 문명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강약약강

하지만 로마가 그리스의 보호자를 자처하자, 시리아의 안티코오스 3세는 이것을 언짢게 여겼다. 그는 기원전 191년 그리스로 쳐들어갔고, 열세로 계속 밀리다 기원전 189년 결국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났다.

그 이후 로마는 그리스를 지배했으며, 그리스는 로마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전달했다. 호라티우스의 말대로, "정복된 그리스는 야만적인 정복자를 정복했다."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와 코린토스까지 손에 넣었으며 명실상부하게 지중해의 패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 승리에 도취된 로마인들은 그 뒤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데이비드 M 귄이 "제국의 비용" 이라고 말했으며, 시오노 나나미가 "승자의 혼미" 라고 불렀던 혼란기가 그 뒤에 찾아왔다.


제국의 이면

전쟁에 승리하며 로마에는 엄청난 부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농업이 부의 기반이 되는 사회였으므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새로 얻은 부를 토지에 투자했고, 노예를 엄청나게 끌어와 농장 노동에 투입했다. 부유한 사람들은 더욱 부유해졌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물가가 상승했고, 노예 노동이 늘어났다.


이 와중에 원로원 계급은 아니지만 재산을 축적하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기원전 129년, '기사 계급' 으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원로원 계급이 종사하지 않은 상업과 공업에 종사하여 재산을 모았다. 그 재산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었고, 행정관 직에 선출되면 원로원 계층에 편입될 수도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플라미니우스의 성공 후 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부와 '영광' 에 대한 경쟁은 점점 고조되었다. 기원전 180년 빌리우스 법에 의해 '관직의 사다리' 가 공식 절차가 되었고, 행정관직에 오를 수 있는 법적 연령이 설정되었다. 기원전 151년에는 누구도 집정관직을 한 번 이상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예외적인 개인' 들의 출현은 어쩔 수 없었다.

'예외적인 개인' 의 선두주자였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손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제3차 포에니 전쟁 중 불법적으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 코르넬리아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를 낳았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정통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그러한 엘리트들에게 요구되는 '관직의 사다리' 를 거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북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지역이 황폐화되고 노예들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목격했다. 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티베리우스는 호민관이 되어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

그는 기원전 133년 호민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일자리를 잃은 소농들에게 토지를 주기 위하여, 공유지를 재분배하려고 했다. 공유지는 이탈리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얻은 국가 소유의 토지였는데, 귀족들은 이를 임대하여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법적으로는 일정 이상을 임대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 규정은 무시되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이 규정을 넘어선 공유지를 몰수해서 땅을 잃은 빈곤한 소농들에게 분배하고자 했다. 또한 분배한 토지에는 양도 금지를 걸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법안은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셈프로니우스 토지법' 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되었다. 그러나 토지의 경계선을 뚜렷하게 그을 수 없었다는 점, 티베리우스에게 쏟아진 정적들의 방해 등으로 법안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133년 중반, 페르가뭄의 왕 아탈로스 3세가 죽으며 자신의 유산을 로마에 남겼다. 티베리우스는 이것을 토지 분배를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려 했고, 새로 생긴 아시아 속주의 조직을 민중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가 권력을 탐하고 더 나아가 로마의 왕이 되려는 속셈을 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여기에 티베리우스는 개혁을 지속하기 위해서 호민관 재선에 도전했다.

공화정의 원칙은 행정관 직을 1년만 수행하게 하는 일이었고, 이것은 원칙을 거부한 일이었다.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원로원이 보낸 폭도들에게 폭행당해 죽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이것을 보고도 형과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