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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1년 3월 11일 (목) 22:46

여성은 아름답지 않을 권리가 있다.

탈코르셋은 여성들이 수행해와야만 했던 여성성에 대한 최초의 문제 제기이자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실천적인 움직임이다.


1 정의

여성 자신이 하는 행동과 선택은, 사실은 온전한 본인의 의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주입된 무의식적 <a href="/dok/코르셋">코르셋</a>일 수도 있다. 탈코르셋은 사고를 옥죄는 사회의 시각을 벗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선택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말하자면, 탈코르셋은 사회가 여성에게만 강요한 외모 강박에서 자유로워지자는 운동이다.

1.1 

현재 한국 언론에서는 탈코르셋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보정 속옷을 뜻하는 코르셋을 벗어난다는 의미로, 남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꾸미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사회적 운동을 말한다." 이 정의의 출처는 다름아닌 네이버 오픈사전에 2018년 5월 21일 네이버아이디 Ju yeon d*(dhkd**) 가 작성한 내용이다. 이후 이 정의가 언론에 전반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 정의는 탈코르셋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아니며, 특히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부분은 잘못된 설명이다. 자기만족을 위해 자신을 꾸미는 것이라며 코르셋을 주워 입는다 한들 그것이 코르셋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2 의의

탈코르셋은 스스로 인간임을 자각한 여성들이 가부장제 남성사회가 규정한 사회적 여성성을 전면으로 거부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변혁이다. 누가 더 아름다운지, 누가 더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강제로 겨루고 비교당해야만 했던 억압과 폭력의 장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되찾고 코르셋의 연쇄적 고리를 끊는 사회적 운동이기도 하다. 인간의 기본값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디폴트'가 되었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탈코르셋의 정의와 의의는 다양한 측면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각 측면을 크게 나누어보자면 아래와 같다.

2.1 인간성과 대치되는 여성성에 대한 문제 제기

남성사회는 여성에게 코르셋을 강요함으로써 시각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이등시민 표식을 부여하고 남성과의 구분점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분리통치는 사회적 남성성을 더 우월하고 넘볼 수 없는 것, 감히 이등시민(노예)으로서 얻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수록 효과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가부장제는 최저가부장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며 사회적 남성성이라고 해봤자 외적으로 여남 사이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남자가 더 노력하여 차이를 벌리는 것이 아니라 여자를 더 압박해 극단적으로 코르셋을 착용하도록 조장하였다. 때문에 여성들이 더 작은 신체를 갖고자 노력하며 강아지 옷처럼 작고 디폴트 옷과 차이가 심하게 나는 옷을 입어 실루엣 차가 나도록 하는 방향으로 코르셋이 발달했다. 불편해 보이고 빨래도 안 될 것 같지만 아무튼 '예쁜' 블라우스, 구두소리, 실루엣에 큰 영향을 주는 긴 머리카락. 이처럼 코르셋은 여성과 남성을 아주 단적으로 구분하는 데에 기여한다. 대상이 이등시민인지 아닌지를 단숨에 판별하기 위해 이용된다는 얘기다.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는 남자들을 같은 남자가 비웃거나 조롱하는 이유는 남자가 이등시민의 표식을 자처하는 꼴이니 남성집단의 일원으로서 페널티를 주고 남자 망신을 시키지 말라 얘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디폴트가 되어 남자와 외적으로 구분하기가 어려워질 때, 그남들은 자신들이 볼거리를 잃어서 느끼는 분노와 더불어 본능적인 위협감도 함께 느낀다. 인위적으로 조작되어 겨우 유지되어 온 인간과 이등시민의 구분이 사라진다면 결국 그남들이 얻어온 부당이득 역시 힘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여성은 인간이므로 탈코르셋은 시각적으로도 여성이 인간임을 표출하는 효과적인 행위이다.

2.2 편의와 자유로서의 탈코르셋

디폴트가 되면 실생활에서 다방면으로 편의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이 '편의'는 '자유'로 바꿔 써도 상통한다. 정말 사소하게는 여름에 화장하고 나갔다가 땀 한 번 못 닦아도 쉽게 지워지니 그 답답한 피부에 수정화장까지 얹어야 하는 불편이 사라진다든지. 머리를 감고 말리고 고데기까지 하며 옷을 고른 뒤 화장하는 데에 드는 매일매일의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가 온전히 절약되어 자신의 자유로운 시간이 된다든지. 조금이라도 남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하며 스스로를 단속하느라 생긴 정신적 긴장과 일상적 스트레스가 사라진다든지. 이전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어떤 자유가 생기는지도 달라지는 셈이지만, 탈코르셋이 준 자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들의 생생한 증언이 넘쳐나니 경험자의 얘기를 한 번쯤 들어보자. 그리고 코르셋을 위해 감수한 그 모든 유무형의 에너지는 가부장제 남성사회가 앗아간 다양한 모습의 자유와 자산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2.3 생존과 탈코르셋

코르셋은 생존에 불리한 방향으로 발달해왔다. 대표적인 외적 코르셋들을 떠올려보자. 작고 마른 체형, 스틸레토힐, 한때 여성 해방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코르셋에 지나지 않는 미니스커트. 건강을 해치고 신체를 훼손하며 신체의 활동성도 제약해 생존에 불리한 상태로 만들지 않는가. 여성혐오가 심한 사회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성적으로 심하게 대상화하고 여성이 자기 신체를 남들에게 보이는 행위를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조장하는데, 일본의 경우 자연재해나 화재 사고 따위가 일어났을 때에 화장하느라고 늦게 탈출할 것 같다든지, 목욕탕에서 사고가 나면 몸을 가리느라고 늦게 나갈 것 같다며 우려하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한국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언제 쓰러질 지 모르니 언제든 부끄럽지 않게 실려가기 위해 예쁜 속옷을 입어야 한다 말하는 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극단적인 다이어트 또한 생존과 건강에 온전히 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가. 또한 젤네일은 99퍼센트 여성이 전유하는 문화인데 젤네일을 바르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가거나 수술을 해야 할 경우 젤네일을 지우느라고 당장 필요한 조치가 미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알려진 지는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고, 아직 이러한 정보를 전혀 모르는 젤네일 애용자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생존과 건강보다, '예뻐야 한다' '여자는 언제 어디서나 여자다워야 한다'라는 강박이 더 지배적인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이다. 활동성을 떨어뜨리는 코르셋이 많다는 점 역시 상징적인데, 코르셋은 제 발로 남자-남성사회-를 떠나지 못하도록 가능성과 인생의 기동성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바꿔 말하자면 탈코르셋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장하여 제 발로 자신의 인생을 딛고 서며 스스로의 신체를 해치지 않고 인간으로서 재정의하는 행위이다.

2.4 권력 지향과 탈코르셋

사회적 여성성과 대치되는 사회적 남성성은 상당부분 권력자의 특성과 겹친다. 예를 들어 여성은 길을 가다 다른 통행인과 마주치면 먼저 길을 비켜주도록 교육을 받는 경우가 남성에 비해 훨씬 많으며,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길 암묵적으로 요구받는 상황에 자주 처해진다. 여자가 자신의 영역을 더 쉽게 양보해야 하고 내줘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하다는 것은 반대로 남성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은 물론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더라도 이해받기 쉬운 사회적 분위기 또한 존재함을 의미한다. 스피치를 하는 상황에서도 동작이 크고 몸의 자세가 열려 있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자 상대적 우위에 있는 이들이다. 우리는 사회적 남성성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남들은 남성사회에서 기득권이며, 강자다. 그들이 가진다고 여겨졌으며 실제로 가지기도 해왔던 특성 중 권력자의 특성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디폴트 정장을 입고 파워포즈만 취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 권력자의 발성만 따라해도 인간은 상대를 권력자로 인식한다. 디폴트가 되는 것은 권력을 지향하는 우리의 자세를 내포하기도 한다.

3 코르셋에 대한 문제 제기

3.1 제1물결 여성주의

3.2 제2물결 여성주의

  • 셀16이 1969년 11월 뉴욕에서 대표 록산 던바의 긴 머리를 자르는 퍼포먼스를 하자, 청중석에서 “남자들은 내 가슴도 좋아해요. 그럼 내가 가슴도 잘라내야 하나요?” 라고 외치는 일이 있었다.
  • 안티미스아메리카 대회

3.3 신여성의 단발운동

꾸밈이라는 여성억압을 벗기 위한 ‘단발’은 신여성이 일으켰던 일종의 탈코르셋 운동이었다. 이상을 위해, 목적을 위해, 그리고 긴 머리카락이 주는 여성억압 관습에서 해방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자른 것이다. 1920년대 신여성들을 중심으로 유행한 단발머리는 구습에 억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여성들의 바람으로 시작되었다.[1]

3.4 해외 연예인

배우들

    • 프랜시스 맥도먼드: 탈메이크업하고 시상식 참석
    • 크리스틴 스튜어트: 칸 영화제에서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규정인 하이힐을 벗고 운동화로 갈아신는 모습
    • 알리시아 키스: 탈메이크업을 하고 무대나 행사에 참여 중
    • 알레시아 카라: 'Scars to your beautiful' 무대에서 드레스를 찢고 메이크업을 지우는 퍼포먼스

4 역사(제4물결 여성주의)

  • 탈코르셋 100인 흑백 사진전
    • 1번째 전시 : 2018.09.01-2018.09.05
      • 장소 : 갤러리원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 71길 14)
    • 2번째 전시 : 2019.02.15-2019.02.19 (예정)
      • 장소 : 갤러리 루미나리에 (서울 서초구 서초대로 70길 6)

해외 사례

#TireOEspartilho 탈코르셋의 포르투갈어 해시태그.

2021년 3월 초 포르투갈과 해외연대로 4물결 페미니스트들의 탈코인증이 다시 이어졌다.


탈코르셋 열풍이 브라질과 포르투갈 등에 전해지며 남아메리카에서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여성을 옥죄는 꾸밈노동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로 브라질과 포르투갈 여성들이 화장품 버리는 사진 등을 온라인 공간에 게재하자, 국내 지지자들이 이를 다시 공유하고 있다.

11일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 서비스에서는 ‘코르셋을 벗다’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TireOEspartilho’가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로 떠올랐다. 브라질 여성들이 화장품을 부순 사진 등과 함께 자신이 지금껏 해온 꾸밈노동을 거부하겠다는 다짐을 ’코르셋을 벗다’는 뜻의 해시태그와 함께 게재했고, 이를 국내 여성들이 다시 공유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브라질 여성들의 메시지를 한국어로 번역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퍼나르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한국의 트위터 사용자들은 탈코르셋을 의미하는 각국의 언어 ‘#TireOEspartilho’, ‘#offthecorset’, ‘#日韓脱コル展示’ 등을 함께 열거하며 한국, 일본, 브라질 여성들의 연대 가능성에 기대감을 표했다.[1] 

5 실천

탈코르셋의 의의를 인지하여 실천하고자 하지만 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혼란을 겪는 이들이 많다. 탈코르셋을 향한 왜곡과 공격으로 인해, 마치 무엇이 진짜 코르셋이고 무엇이 탈코르셋인지 가리는 게 제일 중요한 것처럼 형성되기가 쉬운 사회 분위기도 이러한 혼란에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디폴트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하였더라도 실생활에서 자신을 바꿔나갈 때, 특히 외적 탈코르셋을 실천하려 할 때에는 "올 여름에는 어떻게 입어야 하나" "직장에서는 뭘 입고 다녀야 할까" "경조사에 불가피하게 참여하게 됐을 때 디폴트 상태를 지키면서도 격식을 갖추려면 어떤 복식을 해야 할까" 등을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디폴트를 이미 실천하고 있는 이들의 실전 팁을 참고한다면 보다 수월한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6 탈코르셋에 대한 비판과 반론

6.1 탈코르셋은 남성성 추구다?

탈코르셋은 남성성을 취하는 운동이 아니라 여성성을 타파하는 운동이다. 어째서 여성은 꾸밈노동 값이 제로가 되면 '남성 같다'는 소리를 듣는가? 외적 남성성은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활동성 편한 바지, 관리가 쉬운 짧은 머리 등), 외적 여성성은 불편함과 동반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외적 남성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남성은 꾸밈노동을 전혀 하지 않아도 어떤 간섭도 받지 않는다. 탈코르셋이 지향하는 간편한 외모 관리는 인간다움인 것이다.

화장을 하지 않는 여성, 중요한 날 치마를 입지 않는 여성, 긴 머리를 하지 않는 여성의 수가 많아질수록 여성 한 명 한 명이 느끼는 화장에 대한 의무감, 활동성을 제약하는 치마를 입겠다고 느끼는 날, 짧은 머리를 시도할 때 느끼는 부담은 줄어든다. 여성에게 강제되던 여성성을 타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가부장제의 인지와 비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타파를 위해 실질적으로 액션을 해야 한다고 가정했을 때, 여성은 가부장제가 유지되어 온 가장 강력한 수단 중 하나인 코르셋을 벗어나야 한다. 즉 아름다움의 정형을 벗어나고 의도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분명 가부장제에 대한 매우 강력한 저항이다.

6.2 삭발과 절바지, 슬리퍼가 탈코르셋의 완성형이다?

탈코르셋의 핵심은 화장과 다이어트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지닌 아름다움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컨데 '노메이크업도 예쁘다'는 말은 또 다른 형태의 코르셋이다.

6.3 탈코르셋 강요

"탈코르셋을 전시하면서 자꾸만 우리에게 강요하지 마라, 불편하다."라며 탈코르셋 운동을 지탄하는 세력은 탈코르셋 운동이 가시화되기 시작할 때부터 꾸준히 존재해 왔다. 이들은 탈코르셋 운동의 의의가 무엇이며 왜 탈코르셋이 '운동'인지, 또 왜 자꾸 전시하는 것인지에 대해 왜곡된 사고를 지닌다. 주로 자신이 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이들이 눈에 거슬리고, 자꾸 무언가 바꾸리라 말하는 사람들이 미우며 살던 대로 살고 싶을 때 위와 같은 근거로 탈코르셋 운동을 폄하하려 들곤 한다.

탈코르셋한 개개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여기에 사회적 여성성을 벗고도 잘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이 있음을 알리는 정치적 행위이며 디폴트인 여성의 모습을 더 익숙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인터넷, 또는 실생활에서 코르셋을 벗은 모습은 그를 알거나 그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탈코르셋을 한 모습을 SNS 상에서 보기만 해도 탈코르셋 운동을 강요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압도적으로 많은 코르셋 광고나 코르셋을 찬 여성들의 모습을 볼 때에는 사회적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까? 강요란 남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하게 하는 것으로, 심하면 강요죄를 적용받기도 하는 행위이다. 가위와 클렌징 티슈, 사회적 여성성을 벗어난 옷가지를 들고 다니며 지나가는 여성들을 탈코르셋 '시키'거나 코르셋을 유지하는 여성에게 탈코르셋을 하라며 협박을 하지 않는 이상 탈코르셋 강요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회의 코르셋 강요가 이처럼 심한 상황에서는 설령 거친 말로 탈코르셋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할지라도 강요가 이루어질 수 없다. 무엇보다 탈코르셋은 타인의 강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운동이 아니다. 코르셋이 대체 무엇이며 이것을 왜 벗어야 하는지에 대한 개개인의 각성이 탈코르셋을 가능케 할 뿐이다.

6.4 여성성에 대한 비하다?

탈코르셋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코르셋에 대한 고찰 혹은 탈코르셋 운동이 여성성에 대한 비하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과를 뒤집어 생각하는 것이다. 코르셋을 착용했기 때문에 여성인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코르셋을 쓰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여성성 즉 여성혐오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코르셋을 쓰지 않은 여성이 디폴트가 되게끔 하는 다수의 탈코르셋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성성이 만들어진 것, 인공적인 것이라면 여성/남성의 구분을 하기 위해 여성성을 가져오는 것은 인위적이다. 여성성을 꾸며서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꾸미지 않은 여성은 보편적 인간의 표상인 '남성'의 모습에 더 부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탈코르셋을 하는 것이 여성성에 대한 비하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즉 탈코를 하는 것은 '남성이 되고 싶어서' 라는 주장은 완전히 오류이다. 같은 맥락에서 트랜스젠더 혹은 크로스드레서, 드랙퀸 등의 과잉여성성(hyper-femininity)은 여성성(성별 고정관념)의 해체 주장이 아니기에 가부장제 전복이 될 수 없다.

덧붙여, 여성이 남성을 위해 섹스어필하지 않음으로써 눈요깃거리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독자성을 되찾는 것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이 거세다. 예전같으면 오크녀, 상폐녀 등의 외모 기준으로 여성을 평가할 수 있었으나 여성이 이 기준을 벗어던짊으로써 표준형의 모습에 가까워지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6.5 탈코르셋이 오히려 코르셋이다

"머리를 짧게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더 많이 들고, 미용실에 자주 가야한다. 머리카락을 길러 묶거나 그냥 푼 상태로 다니는 게 더 편하다."라며 탈코르셋이 오히려 기존 코르셋보다 안 좋은 게 아니냐는 주장이 존재한다.

우선, 탈코르셋 운동의 궁긍적 의의는 경제적 이점이나 생활에서의 편의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돈이 많이 든다거나 불편하다는 이유로 탈코르셋 운동을 비판하는 것은 본질을 놓친 채 그저 깎아내리기만을 위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탈코르셋은 개인의 삶에 있어 여러 이익을 안겨다 주기도 하므로 탈코르셋을 실천한 이들이 자신이 겪은 변화를 표현할 때 "얼마나 편한지"를 함께 얘기하기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엔 그 말처럼 편하지 않고 미용실도 자주 가야 하며 돈도 많이 드니 탈코르셋은 별로다"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왜 짧은 머리는 편하지 않다는 걸까, 왜 돈이 많이 든다는 걸까? 이와 같은 주장은 결국 탈코르셋의 본질을 이미 놓친 주장이지만, 굳이 반박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머리를 짧게 유지한다고 해서 돈이 꼭 많이 드는 것은 아니다. 직접 바리깡을 사서 셀프컷을 하는 사람도 많으며, 너무 뜨는 머리라서 눌러주는 시술이 필요한 경우 직접 펌제를 사 저렴한 가격으로 다운펌을 하기도 한다. 이미 유튜브에는 '셀프 투블럭'만 쳐도 무수히 많은 영상이 존재하며 지인의 도움을 받아 머리카락을 자르는 영상도 찾기 쉽다. 미용실에서 헤어컷을 하더라도 한두 달에 한 번 컷 비용을 내면 그만이다. 머리카락이 긴 경우 펌이나 매직 등 시술에 막대한 돈이 들어가지 않던가. 따로 하는 것 없이 그저 기르는 경우에도 트리트먼트·에센스 등 머릿결 관리에 돈을 투자하는 이들이 많다. 예뻐 보이려는 목적이 없을지라도 머리카락은 죽은 단백질이기에 길이가 길어질수록 잘 엉키고, 그를 방지하기 위해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 그러나 짧은 머리스타일에는 린스조차 쓰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머리가 짧아도 난 예뻐야 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람이 아닌 이상 돈이 많이 들어간다든지, 관리가 어렵다는 말은 부적절하다. 머리카락 길이가 긴 편이 일상생활에서 더 편리하다는 주장 또한 주관적인 생각이다. 물론 정말 긴 머리가 더 편하게 여겨질 수도 있으나, 탈코르셋은 편해지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명심하자. 또한 상당수의 탈코러들이 탈코하고 광명 찾았다며 그 편안함에 찬사를 보낸다는 것을 참고하자.

6.6 내 취향도 탈코르셋이다

"과거엔 미니스커트도 검열의 대상이었으므로, 노출 있는 의상은 탈코르셋에 해당한다." "나 때는 화장이 탈코르셋이었다." "나는 로리타룩 등의 취향을 가졌는데 이것도 사회에 대한 저항이므로 탈-코르셋이다." 탈코르셋 운동이 국제적 지지를 받기 전, 꽤 많이들 쏟아졌던 주장이다. 특히 3040에게서 이러한 주장이 제기되곤 했다.

코르셋은 '사회적 여성성'이다. 언어가 사회에 따라, 즉 시대에 따라 또 사람들의 쓰임에 따라 변화하듯 구체적인 코르셋의 형태는 계속해서 변모한다. 과거에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이 여성주의적 행위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시대의 코르셋이 여성의 활동성을 방해하는 의류였기 때문이다.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미니스커트를 입는 것이 탈코르셋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2010년대다. 치마는 전형적인 코르셋이 된 지 오래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그 시대에 혁명적이었던 미니스커트를 이제 와서 탈코르셋의 상징으로 세울 수 없지 않은가. 또한 "나 때는 화장이 탈코르셋이었다."라는 주장에는 중요한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학창시절에 학생은 화장하지 말라며 제한했던 과거의 학교를 전제로 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꾸미지 못하게 하지만 그 학생이 성인이 되거나 대학에 입학하면 곧장 '여자'로서 잘 꾸미고 다니라던 사회의 압박 말이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히려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화장 특강을 제공하고 하이힐 체험을 시키는 등 일찍부터 코르셋을 조장하고 있다. 시대는 변했고, 코르셋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취향이 사회에서 환영하지 않는 스타일이므로 로리타룩 또한 탈코르셋 운동이라는 주장은 코르셋의 의미에 대해 잘못 파악한 것이다. 코르셋은 사회적 여성성이지 사회가 꺼리는 모든 것이 아니다. 예시에서 말하는 로리타룩은 포멀한 장소에서 입을 수 없는 복장이지만 사회적 여성성에 부합하는 복장이기도 하다. 일상생활에서는 그리 흔하게 보이지 않지만 로리타룩스러운 디테일이 들어간 의류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무대의상에서는 의외로 흔하게 보이는 편이다. 개인을 향한 사회적 억압이 언제나 코르셋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6.7 탈코르셋은 새로운 개념녀이다

"탈코르셋이 결국 개념녀 아니냐? 안 꾸미고 꾸미는 데에 돈도 안 들이는 알뜰한 여자는 남자들한테 개념녀잖아."라는 부류의 주장이다.

탈코르셋은 사회적 여성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개념녀는 "안 꾸며도 수수하게 예쁜" 여자이며, 돈을 아껴 자신을 '여자답게' 챙겨주는 여자지 남자들의 평가를 거부하고 사람으로 살고자 결심한 여자들이 아니다. 또한 남자들은 탈코한 여자에게 심한 반감을 느끼기 일쑤이고, 무엇보다 탈코러들은 남자가 어찌 생각하든 관심 없다.

6.8 탈코한다더니 이것도 하냐?

"탈코 한다더니, 손도 씻고 선크림도 바르냐? 그건 탈코가 아니다." '찐탈코러'를 가리려는 놀라운 말들도 탈코르셋 운동을 비판하겠답시고 나오는 레퍼토리 중 하나다. 이와 반대로 "위생 코르셋이라며, 탈코러들은 잘 씻지도 않고 선크림도 코르셋이라 피부암 걸려도 안 바른단다~"라는 루머 유포성 조롱을 하기도 한다. 전혀 다른 주장 같지만 둘은 동류다.

위생 코르셋에 대한 얘기는 SNS 상에서 어느 남성의 페미니스트 코스프레(분탕질)를 진짜로 믿은 여러 사람들에게서 퍼진 루머다. 혹여나 자신에게 안 좋은 냄새라도 날까 싶어 남성에 비해 훨씬 신경 쓰고 청결과 체취 문제를 염려하는 여성의 경우, 정신적 코르셋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위생 코르셋이 아니다. 위생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수칙이자 공중도덕이다. 아무리 탈코가 싫대도 남자의 분탕을 덥썩 믿지는 말자. 이와 별개로, 탈코하고 나면 씻고 말리는 데에 시간이 파격적으로 줄어들게 마련이라 아침에 한 번 일 마치고 운동 후 한 번 자기 전 한 번 씻어도 별 무리가 없다.

선크림은 한 때 코르셋이냐, 아니냐 하는 논의가 진행되었었다. "타는 게 싫고 하얀 피부가 좋아서" "햇빛을 그냥 받으면 주름 생기고 기미 생기고 못나지니까" 자외선 차단 제품을 바른다든지, "피부결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보정 선크림" 따위를 이용한다면 코르셋에 해당되겠지. 선블록도 화장품이므로 협박성 마케팅을 사용하고, 주름과 기미·밝지 않은 피부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마케팅, 실재하는 '밝지 않은 피부'를 향한 멸시나 걱정들이 존재하며 이 모두가 코르셋이긴 하다. 그러나 선블록을 바르는 것 자체가 코르셋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피부는 외부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조직이다. 강한 자외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피부는 손상을 입고, 제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피부가 타면 아프다. 사람에 따라 피부가 타서 생기는 현상이 꽤 차이가 나긴 하지만, 기능으로서의 피부를 위해 바르는 선블록은 코르셋이 아니므로 "선크림 바르면 찐탈코러 아님"이나 "쟤넨 선크림도 코르셋이람서?"와 같은 힐난은 부적절하다.

6.9 탈코르셋은 여성의 남성화다

"여성들은 남성화되자는 것인가? 점점 남자에 가까워지고 있다." "저게 남자지 누가 여자래냐"와 같은 조롱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 또는 비난의 특징은 기성세대에 가까운 페미니스트 집단에서도, 남성으로부터도 비슷하게 제기된다는 것이다.

자, 바로 이게 탈코르셋 운동의 효과다. 여성의 키나 어깨 넓이 등 신체 조건은 남성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특히 여성 신체의 특징으로 여겨져온 넓은 골반과 얇은 허리, 도드라진 가슴이 얼마나 미디어를 통해 과장되어 왔는지를 느낄 수 있다. 조금 품이 넓고 편안한 옷, 또는 '여성용'이 아닌 정장 따위를 입어보면 '신체적 여성성'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19년 경, 어느 남성은 유튜브에 탈코르셋을 폄하하기 위한 영상을 올렸다. 그 썸네일에는 남성 본인의 상체가 올라와 있었는데 영상의 댓글란에는 "죄송한데 탈코한 여자인 줄 알았다"라는 댓글이 큰 호응을 얻었다. 여남 신체 차이가 유난히 적은 한국에서는 정말로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기가 어려움을 증명하는 일화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를 외적으로 구분하기 위한 코르셋이 더 발달한 것이다. 사회적 여성성을 벗어던지고 사람다운 모습을 되찾는 것은 지금까지 인류의 디폴트로 여겨져온 사회적 남성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바로 탈코르셋의 본질이다. 남자들이 독점해온 인간됨을 되찾는 것,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사회에 의해 떠안아왔던 코르셋을 깨는 것. 그토록 우월하다고 여겨져온 '남성성'의 신화 또한 해체하는 것.

이와 비슷하지만 악의를 담지는 않은 흔한 말들도 존재한다. "너랑 있으니까 남자랑 있는 것 같아!" "네가 진짜 남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 말들에는 악의가 없지만 매우 이성애중심적이며 무례한 행위이니 탈코러에게 이런 말을 스몰토크처럼 실시할 생각일랑 접어두자.

6.10 탈코하면 사회생활 못한다

"탈코하면 사회생활 못할 거다, 탈코하면 잘릴 만한 사람들은 어쩌냐, 탈코하고 사회적 불이익 얻으면 책임질 것이냐, 사회생활 안해본 애들이라 저렇게 세상 이치도 모르는 소리를 하는 거다." 고장난 오르골처럼 자꾸만 반복되는 비판의 논거다. 과연 사회생활을 못 해본 사람은 누구일지 짚어보도록 하자.

탈코하면 사회생활을 못 한다는 이들은 주로

탈코르셋 = 절복, 삭발, 또는 기안내 나는 후줄근한 차림

이라고 생각한다. 탈코르셋은 사회적 여성성을 벗자는 움직임이지 TPO 개무시하고 기안처럼 다니자는 운동이 아니다. 절복 입고 회사 못 다니란 법은 물론 없지만, 절복+삭발만이 답은 아니며 각 직장의 특성에 맞춰 실천하면 된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할 수 있는 만큼 실천하자.또, 탈코하면 불이익 당하는 사람은 어쩌라고 탈코하자는 말을 하냐는 비판에는 탄식부터 나온다. 그렇게 불이익이 강하게 오는 직종은 여성혐오가 심한 직종들이기도 하고, 탈코르셋 운동은 바로 그들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탈코하면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에게 탈코르셋을 요구하지는 않아왔다. 탈코르셋 운동을 얘기하면 자꾸만 청자로 설정하지 않은 대상,특히 약자를 끌고와서 "이 사람들은 어쩔 거냐 이 못된 것들아!"라고 호통치는 사람들이 찾아오곤 한다. 맥락을 잘 파악하고 얘기했으면 한다.

또한 사회생활 못 해본 애들이 탈코탈코 거린다는 비아냥에는 탈코러들이 '어린' '무시해도 될' 사람들이라 가정하는 저열한 잠재의식이 내재되어 있다. 탈코러가 사회생활을 잘 못하며 고초를 겪길 바라는 심리가 투영된 비아냥일 수도 있으며, 자신 스스로 "꾸미지 않은 여자"를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6.11 난 원래 안 꾸몄다

"난 원래 뫄뫄뫄 했으므로 탈코르셋 한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쟤들은 이제야 탈코하는 거면서 아주 해방감에 환장을 했는지 호들갑스러워 죽겠다."와 같은 말로 자신의 선구자성과 탈코러를 향한 경멸을 드러내는 이들은 유독 즐거워한다. 이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을까? 그들은 이전부터 탈코르셋을 해온 것이며, 그러므로 '이제야 탈코해서 난리치는 자들'을 조롱해도 될 자격을 부여받은 걸까?

대부분의 경우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은 그냥 편해서 꾸미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신은 진작에 안 꾸미고 다녔으나 동네방네 소문내면서 한 것이 아니며 '유세'를 떨지도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는 탈코르셋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운동의 의의만을 훼손하려는 전략이다. 우월감 느끼며 시끄럽게 떠들지 말아라, 난 안 그랬다, 나는 진작에 실행했었는데 이제야 뭘 해보겠다는 애들이 왜 그리 유난이냐-라는 주장은 결국 '우월감을 느끼지 말아라'라고 말은 하면서 정작 자신의 선구자성에 대해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 또한 탈코르셋은 여성주의 운동이므로 동네방네 더 시끄럽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호들갑을 떨어도 모자라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코르셋이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목소리는 유난에 유난에 유난을 떨며 난리를 쳐야만 겨우 세상에 들린다.

참고로, 자신이 안 꾸몄다고 해서 탈코르셋을 했었던 것이 되지는 않는다. 탈코르셋은 사회적 여성성의 해악을 깨닫고 그 본질을 안 뒤 내적 탈코를 거쳐 외적 탈코를 하게 되는 형태로 진행된다. 과거에 코르셋을 스스로 깨우쳐 꾸미지 않았던 거라면 탈코가 맞지만 그런 의식 없이 다른 이유로 사회적 여성성을 껴입지 않았던 거라면 그것을 탈코르셋이라 부를 수는 없다. 물론 여성주의적 자각 없이 꾸밈노동을 버린 사람도 여성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6.12 네가 코르셋은 뭐 차봤겠냐

탈코르셋 담론에 들어오는 딴지는 많고도 많다. "못생긴 애들은 탈코 못 한다." "너네 코르셋도 안 차보지 않았냐? 로드샵 저렴이나 사는 것들이 뭔 탈코냐." 같은 저열한 비아냥도 그 중 하나. 코르셋에 찌들어 있는 이, 혹은 코르셋을 사랑하는 남자들이 손쉽게 꺼내드는 카드다. "시키지도 않은 꾸밈노동 개빡세게 한 애들이나 탈코하지"와 같은 비난과는 모순되는 의견인데도 두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는 대립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적.

외모가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모든 이는 사회적 코르셋의 영향을 받는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의 영향까지 받아 여성은 어떤 외모를 지녔든 조금씩 다르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압박을 받게 된다. 이러한 비난은 코르셋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못생긴 애들은 탈코르셋을 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뒤집어 말하면 "코르셋을 부찬 사람만이 예쁘다."라는 명제를 이끌어낼 수 있게 되기 때문. "로드샵 저렴이나 샀던 애들이 무슨 탈코를 해"와 같은 의견도 이와 유사한 논리구조를 띈다. 애초에 코르셋 비용에 얼마나 막대한 돈을 지출했고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고 어떤 노력을 기울였었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탈코 이전에 별다른 꾸밈노동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탈코르셋 담론을 접하며 의식적으로 사회적 여성성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가 인간임을 선언하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꾸밈노동에 큰 지출을 유지했던 사람이 탈코르셋을 했다고 한다면 대번에 "난 쟤처럼 돈 안 쓰고 적당히 압박 안 느낄 만큼만 꾸몄음ㅋ"이라고 할 사람들이므로 이런 부류의 반응은 무시하길 추천한다. "로드샵에서 저렴한 화장품이나 사던 것들이"라는 말은 그저 상대, 즉 탈코러를 돈 없는 존재, 코르셋을 잘 알지도 못하는 존재로 프레이밍함으로써 더 쉽게 무시하고 마구 욕해도 될 만한 존재로 상정하려는 시도다. 동시에 로드샵에서 화장품을 사는 사람들을 인격적 무시를 당해도 싼 존재로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반응이기도 하다.


6.13 부르주아 운동이다

"저소득층 여성은 탈코하면 강간 당하기 쉽다. 너넨 살 만하니까 탈코라도 하는 것 아니냐." SNS 상에서 어떤 이용자가 탈코르셋에 대해 남긴 말이다. 이 외에"평소에 화장품 많이 사보고, 꾸며본 애들이나 하는 거다. '일반인'은 탈코가 필요할 정도로 꾸미지도 않고 돈도 많이 안 들이는데 너희가 오버해서 꾸몄던 것이다. 너희는 부르주아고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것이다."와 같은 비난이 쏟아지기도 한다.


계층을 막론하고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많이 부과되는 꾸밈노동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운동을 '부르주아 여자들이 진짜 힘든 게 뭔지도 모르면서 불만을 제기한다'고 보는 남성 사회의 유구한 역사와 닮아있는 문장들이다. 여성이 꾸미지 않은 모습이 왜 취약계층의 모습으로 보이는지, 여성이 꾸민 모습은 왜 부유한 여성의 모습으로 보이는지가 오히려 탈코르셋 운동의 필요성을 뒷받침함에도 불구하고 강간의 책임을 남성권력이 아닌 탈코르셋 운동에게 떠넘기고 있다.


어떤 사회든 사회의 주된 이데올로기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개인이 있고 그렇지 않은 개인이 있다. 하지만 영향을 덜 받은 개인도 그 이데올로기 안에서 어느 정도는 순리를 따라 살아가고 있다. '덜 꾸미는' 여성들도 면접을 볼 때는 파운데이션과 립스틱을 발라야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덜 꾸미는' 여성들도 남성과의 소개팅 자리에 나갈 때는 화장을 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압박을 느낀다. '덜 꾸미는' 여성들도 립스틱을 발라야 더 생기 있는 얼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탈코르셋 운동은 꾸밈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더이상 추가적인 힘을 들이지 않는 여성들에게도 질문한다. 5분이면, 10분이면 된다고? 그 허상의 마스크를 익숙하게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왔어?


6.14 너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넌 얼굴도 갸름하고 남는 면적도 적으니까 그런 게 어울리는 거야." "난 얼굴이 별로라 못 하겠어." "좋겠다, 넌 그런 옷도 잘 어울리는구나. 난 원피스 아니면 안 어울려." 조롱도 힐난도 아니지만 다른 어떤 반응보다 가슴 아픈 말들도 흔히 듣게 되곤 한다. 이는 탈코르셋을 향한 비난이 아니지만, 비탈코러 중 많은 이들이 보이는 반응이다. 보통 복장보다는 헤어스타일에 대해 나오는 반응들인데, 짧은 머리칼은 어울리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자. 남성들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든 두상이 어떻든 아랑곳않고 머리를 짧게 유지한다. 특히 중장년 남성층의 머리는 사회적 미학과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서로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아름다워지기 위해, 또는 내게 어울리는 외형을 찾기 위해 탈코르셋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신체는 신체일 뿐이다. 신체를 기능으로 파악하는 습관을 들이자. 탈코르셋의 의의도 다 아는 사람이 "나한테는 안 어울려서 못 하겠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직 내면화된 코르셋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므로, 굳이 아니라고 어울려서 탈코 가능한 게 아니니 너도 할 수 있다고 격려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이 조금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6.15 레즈비언은 탈코 필요 없다

"레즈비언은 남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니니 탈코 필요없다."라는 주장이 있다. 헤테로여도 자기만족으로 코르셋을 차는 거니까 괜찮은 게 아니냐는 주장과 상당 부분 겹치는 주장이다.

인간의 욕망은 절대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날 때부터 코르셋 차고 나오는 사람이 있나? 모든 건 사회의 영향을 받고 각자의 환경과 천성, 자라면서 겪게 되는 경험들이 결합한 결과다. 이 주장을 조금 더 단순하게 정리하면 "남자에게 잘 보이지 않기 위한 코르셋은 괜찮다."가 된다. 코르셋의 개념을 부디 잘 숙고해 보시길 바란다.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사회적 여성성을 뒤집어 쓸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까? 그 어떤 이유로 입은 코르셋이라도 나와 다른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 셈이다.

6.16 탈코르셋은 레즈비언의 음모다

<코르셋>을 쓴 쉴라 제프리스는 레즈비언이다. 탈코르셋에 레즈비언 이론이 많이 들어가 있다.


7 같이 보기

  • <a href="/dok/탈코일기">탈코일기</a>
  • <a href="/dok/코르셋">코르셋</a>
  • <a href="/dok/외모%20권력">외모 권력</a>


각주

  1. 출처 역사채널e 단발머리를 한 모단걸
  1. 한겨레 김미향 기자, https://news.v.daum.net/v/20210311145619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