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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없음)[1]
생몰년도 음력 서력 1575년 4월 26일~서력 1641년 7월 10일
양력 서력 1575년 6월 4일~서력 1641년 8월 16일
재위기간 음력 서력 1608년 2월 1일~서력 1623년 3월 13일
양력 서력 1608년 3월 16일~서력 1623년 4월 12일
부모 어머니 공빈김씨(恭嬪金氏)
아버지 선조
배우자 폐비 유씨(廢妃 柳氏)
후임 왕 인조(仁祖)
시호 (없음)
혼(琿)
생몰장소 탄생장소 ?
사망장소 제주도

조선의 제15대 왕. 생몰년도 1575~1641년, 재위기간 1608~1623년. 폐위당해서 묘호와 시호는 없다.

1 설명

광해군은 선조의 차남으로, 사실 원래대로라면 결코 왕이 될 수 없었던 인물이다. 이는 그에게 위로는 형인 임해군이 존재했던데다가, 아래로는 서자 출신인 임해군과 자신과는 달리 정실 소생이라는 막강한 혈통빨을 지닌 영창대군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선조 자신도 선대왕인 명종의 직계 자손이 아니라 명종의 조카였다가 명종이 후대가 없어 왕이 된 케이스라 늘 혈통적 정당성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렸고, 때문에 자신의 자손들 중 그나마 '정실 소생'이라는 좋은 혈통을 지닌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주는 것을 강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광해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는 영창대군은 지나치게 어렸고 그나마 남는 두명 중 임해군이 너무 무능하고 막장이라 유능한데다가 이미 검증도 끝난 광해군에게 가는 것이 그나마 가장 합당했기 때문이다.

임금으로서의 평가는 후술하겠지만 호오가 갈리나, 세자 시절의 광해군은 확실이 빠와 까가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긍정적이었다. 우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것은 임진왜란 때의 일로 무능한 임해군과는 달리 총명했던 광해군을 눈여겨본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세자가 된 광해군이 임진왜란에서 손수 전방으로 나가 전투를 치루거나 피난민들을 구출하는 등 세자로서의 모범을 보여 왕실의 권위를 지키는데 한 몫 단단히 하였고 백성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얻었다.

문제는 그 이후의 일로 너무나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나머지 마침 세자라는 정통성도 있겠다 하여 신하고 백성이고 죄다 광해군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게 되었고 심지어는 명나라조차 광해군을 마음에 들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선조는 혹여 누가 광해군과 손잡고 자길 내쫓지 않을까 불안해해야 했으며, 이것이 이후 선조가 계속해서 영창대군과 광해군을 저울질하는 계기가 된다. 즉 선조는 자기 나름대로 광해군을 견제하려 했던 것(하지만 사실 단순한 견제질 정도가 아니라 여차하면 진짜 광해군을 폐위하고 영창대군을 밀 수도 있었다).

2 즉위 후

선조의 승하 이후 광해군은 차기 임금으로 추대되었으며 조선을 통치하게 되었다.

광해군대의 조선은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였다. 이제 막 임진왜란이 끝나 국토가 피폐해진 상태였던데다가, 임진왜란의 또 다른 주역인 일본 또한 전후 다시 내전이 발생해 누가 일본의 실권을 잡느냐에 따라 차후 일본과의 관계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는 조심스러운 단계였다. 게다가 중국도 임진왜란 이후 힘이 약해진 명과 그런 명의 틈을 비집고 일어선 후금의 등장으로 누가 중국의 실권을 잡느냐에 따라 차후 중국과의 관계도 재정비해야 하는 시기였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전후복구에 힘 썼으며 이 외에도 같은 범 국가적 침공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국방 강화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맥이 끊긴 문화 사업을 복구를 위하여 어의 허준동의보감 편찬 작업을 지원해주고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재간과 보급에도 신경 썼다. 또한 최초로 탕평책을 실시하여 계파에 관계 없이 능력 위주로 인재를 뽑아 국정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려고 하였다.

더불어 혼란한 국제 정세에서 살아남기 위해 명분보다는 실리를 우선시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 일례로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고 쇼군이 되어 에도 막부를 설립해 일본을 통치하게 되자 도쿠가와 정권과 협상을 가져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하였으며, 후금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무시할 수 없게 되자 겉으로는 '그래도 명나라 형님들과의 의리가 있지!'라고 하여 명나라를 안심시키는 한편 뒤로는 후금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 후금과도 좋은 관계를 맺는 등 최대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줄타기를 행했다.

이렇게 좋은 일만 했으면 참 좋았겠지만, 실책 또한 뚜렷했다. 우선 세자 시절부터 영창대군에게 비교당하며 목숨이 계속 저울질을 당했던 과거 때문에 아버지 선조처럼 정통성에 집착하는 편이었고 이 때문에 몇몇 총애하는 신하들의 말만 믿고 무고한 이들을 역모 혐의로 내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종국에는 그가 총애하는 신하 몇몇이 국정 전반을 틀어쥐게 되어 왕권 약화에 한 몫 했다.

더불어 피폐해진 국가의 권위를 세우겠답시고 궁궐 재보수 및 건설 사업에 지나치게 몰두한 것도 실책 중 하나이다. 의도는 좋았다면 말 그대로 전쟁 직후라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에게 재원과 돈 그리고 노동력을 납부하라고 강요하였으니 좋아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무리하게 궁궐 사업을 벌인건 광해군 전후에도 몇번 있어왔지만, 다른 국왕들이 평시에 그랬던 반면 광해군은 막 국가적인 전쟁이 끝나고 그랬다는 점에서 차원을 달리 한다.

3 반정 후

신하들을 의심하여 자주 내친데다가 지나친 궁궐 토목 사업으로 민심까지 잃은 상황에서 결국 몇몇 신하들이 '이러다가 우리도 언젠간 비참하게 죽을지도 몰라'하면서 결국 '공격 받기 전에 먼저 공격한다!'는 심정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결국 광해군은 반정으로 쫓겨나 폐위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는 능양군, 즉 오늘날의 인조였다.

광해군은 폐위 후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사실 조정에서 광해군의 정적이 하도 많았던지라 그냥 사사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각계에서 '임금이 아주 못날지언정 죽이는 법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이유로 반대 의견이 많아서 무산되었다.

사실 광해군이 목숨을 부지한건 이런 도의적인 이유 하나 뿐만은 아니였다. 이 이면에는 우선 광해군에게 호의적이었던 명나라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인데 명나라 입장에서는 자기들에게 이쁜 짓 잘 하던 광해군을 납득가지 않는 이유로 내친 인조 정권에 불만이 가득했고 이런 판국에 광해군까지 죽이면 명나라가 들고 일어날게 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명나라는 자그마치 1년 가까이 인조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인조 정권은 막대한 뇌물을 바치고서야 겨우 명나라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명나라 장수 모문룡에게 너무 굽실댄 나머지 이후 모문룡이 '야! 그 때 내가 니들 안도와줬으면 너넨 지금 국물도 없었어!'하며 인조정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짓을 할 구실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이지만. 더군다나 이때 인조 정권이 명나라에게 바친 뇌물의 액수는, 광해군이 재위기간 15년 동안 그간 명나라에 바친 뇌물의 액수 총합을 한참 능가했다. 인조 정권이 명나라에게 잘 보이려고 얼마나 굽실대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이 외에도 청나라도 자기들에게 이쁜 짓 많이 하던 광해군을 내친것에 대해 불만이 팽배했는데, 실제로 병자호란의 명분 중 하나가 '광해군의 복수를 대신 해주겠다!'는 것일 정도였다(물론 이건 말 그대로 조선을 치고 싶어 만들어낸 그냥 명분일 뿐이니 큰 의미는 없지만).

더불어 인조가 광해군의 목을 끝내 치지 않은 것은 자신이 먼저 선대왕의 목을 치는 선례를 만들었다간 혹여 나중에 누가 자길 반정으로 몰아내면 자신이 광해군을 죽인 일화를 선례로 들어 새 임금이 자기 목을 칠 까봐 두려워했다는 점 또한 작용했다. 인조 또한 모두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점 때문에 광해군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불안증에 시달렸으며 때문에 인조 또한 후에 광해군이 그랬던 것처럼 여러 사람을 의심해 내치는 짓을 반복하게 될 정도로 생존 욕구가 엄청났다(...). 즉 어느 정도는 미래 보장 차원에서 광해군을 살려둔 것이라 할 수 있다.

4 귀양 생활

광해군은 처음에는 강화도로 귀양을 갔지만, 상술했듯 인조 정권을 인정하지 않건 명이나 청이 계속 '광해군이 조선의 왕이 되는 게 백배천배 더 옳다!'며 인조 정권을 압박해댔고, 옛 광해군 측근들이 역모를 모의하던 정황이 몇차례 발견되자 결국엔 제주도로 옮기게 되었고 그 곳에서 4년 만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광해군은 특이하게도 재위 시절보다 폐위 시절의 생존기간이 더 긴 임금이며, 동시에 조선에서 4번째로 장수한 임금이기도 하다. 폐위된 다른 임금인 단종의 경우 애초에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얼마 못 가 쫓겨난데다가 귀양지에서 자결했기 때문에 오래 살지 못했고, 연산군은 성격이 포악해서 제 설성질을 못이기고 홧병으로 죽었지만, 광해군은 폐위된 순간 모든것을 달관한데다가 위의 이유들로 그를 죽이려는 시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속 편히 시골 맑은 공기 쐬며 나름대로 웰빙(...)을 하였기에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양반이 제주도에 가서 4년 만에 죽었다는 점 때문에 사실은 암살된 게 아니냐는 설도 있는데 사실 광해군이 제주도로 갈때는 이미 60이라는, 현대 사회에서도 고령에 속하는 초고령이었던데다가 당시 제주도는 말 그대로 불모지라 삶에 어려움이 많아서 오히려 오래 사는 게 더 신기할 지경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제주도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는 광해군도 제주도로 옮겨온 후 '왜 하필 많고 많은 유배지 중에 제주도란 말이냐!'며 탄식했을 정도.

5 사후

광해군은 사후 영원히 복권되지 못하고 군으로 계속 모셔졌으며, 그의 기록을 담은 실록도 '광해군 일기'로 격이 낮추어져 정리되었다.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실록으로 정리되려면 우선 그 왕의 묘호(사후 지어주는 이름)를 만들어야 하는데 광해군은 왕이 아닌 군으로 죽었고 이후 조선의 국왕들이 죄다 인조의 후예이다보니 복권 시켜주고 싶어도 복권 시켜줄 수 없었기 때문.[2] 조선이 망하고 없는 지금은 더더욱 광해군을 복권해줄 길이 없으니 평가가 어떻든 광해군은 광해군일 뿐이라 할 수 있다.

6 평가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호오가 극명하게 갈린다.

일단 궁궐공사로 백성들을 도탄에 파뜨린 암군이라고 볼 수 있다.

틀:주석 틀:조선의 왕

  1. 폐주(廢主)여서 묘호, 시호가 없다. 종묘에도 배향되지 못함.
  2. 광해군을 복권시킨다는 것은 다르게 말해 자신이 왕의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차마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약 광해군을 '정당한 왕'으로 복권시킨다면, 그런 '정당한 왕'을 폐위시킨 인조는 뭐가 되며, 그런 인조의 후예들도 뭐가 되겠는가? 때문에 인조 본인은 물론 후대도 광해군을 절대 복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정종과 단종을 복권한 숙종조차 광해군만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