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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1년 11월 1일 (월) 23:21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잉그레, 1806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년 8월 15일~1821년 5월 5일)는 코르시카 출신의 프랑스정치가, 군인이다. 프랑스 제1제정의 황제로 등극했으며, 황제로서는 나폴레옹 1세라고 부른다.

인류사를 통틀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한니발 바르카와 버금가는 손꼽히는 천재 군사전략가. 더군다나 비교되는 다른 2명이 고대의 인물인 데 비해 나폴레옹은 근대의 인물로, 사실상 혼자서 전 유럽을 상대했다는 평가를 듣기에 더더욱 부각된다. 이는 당대에 그를 적대했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프로이센의 블뤼허 원수,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꺾은 아서 웰즐리 웰링턴 모두 인정했던 사실이었다.

19세기 유럽 외교사는 이런 인간이 어떻게 다시 튀어나와 국제질서를 뒤흔드는 것을 막는가란 질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생애

유년기

코르시카의 아작시오 태생이다. 부친은 이탈리아계로 제노바 공화국이 프랑스에 코르시카 섬을 매각한 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패하자 항복, 전향하여 프랑스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 즉, 시골뜨기라 놀림받을지언정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귀족이다.

10살이 되던 1779년에 본토로 가 유년사관학교, 뒤이어 정식으로 사관학교로 진학하여 졸업했는데 졸업동기 58명 중 42등으로 졸업, 겉보기엔 상당히 안 좋은 성적이지만 사실은 미친 듯이 월반해서 무려 4년 월반 졸업이었다. 과목 대부분, 특히 수학과 역사에서 우수했다고 전해지며 본국 귀족 출신 학생들과 교우관계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능력만큼은 인정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부친이 비교적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사관학교 시절 경제적으로는 궁핍했다. 물론 먹고살며 학교를 다니는데 부족하진 않았지만 당시 사관학교는 프랑스 본토의 이름높은 귀족가의 자제들이 득실거리다보니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혁명 속에서

1785년 포병 소위로 임관 후 별다른 특색 없이 지내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면서 역사의 격동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나폴레옹은 자코뱅 파를 지지했으며, 이후 고향으로 잠시 돌아갔으나 코르시카 독립운동의 지도자 파울리와 충돌했다. 혁명의 혼란 속에서 독립국가 코르시카를 건설하자는 파울리와 프랑스에 남아야 한다는 나폴레옹의 충돌은 결국 코르시카 정계에서 세력이 미미했던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나고 나폴레옹은 가족들과 함께 본토로 이주한다.

이후 1793년의 툴룽 포위전에서 왕당파 반군을 격파하고 이를 지원하러 온 영국 함대를 포격으로 쫓아내는 전공을 세워 혁명전쟁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고, 채 30세도 되지 않아 사단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국민공회가 몰락하자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1795년 방데미에르 13일 사건으로 파리에서 왕당파가 궐기하자 수도의 시내 한복판에서 포도탄(산탄)으로 포병 일제사격을 가하는 충공깽한 짓으로 간단하게 봉기를 진압했다[1].

방데미에르 13일의 사건. 포병 사격으로 왕당파를 진압하는 프랑스군

1796년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이 되어 이탈리아 방면의 오스트리아군을 보이는 족족 격파, 1797년 2월 최대 요충지 만토바를 함락하였다. 그 결과 캄포 포르미오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세력을 북부 이탈리아에서 밀어내고 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뒤이어 1798년 이집트 원정을 떠나 소기의 성과를 거뒀으나 아부키르 만 해전의 패배로 호레이쇼 넬슨에게 함대가 괴멸당하고, 오스만 제국의 선전포고로 중동 방면으로의 진격이 난항을 거듭하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본국의 정치상황이 급격하게 돌아가자 1799년 10월 이집트를 탈출해 급거 귀국하기에 이른다.

나폴레옹의 독재

500인의 의원에게 둘러싸인 나폴레옹. 나폴레옹을 호위하던 뒤쪽의 두 척탄병은 후에 조세핀에게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고 한다.

이집트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귀국한 나폴레옹은 귀국 직후인 1799년 11월 9일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 정부를 해산하고 새로운 헌법을 공표한 뒤 1, 2, 3통령을 두었으며 본인은 스스로 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있었고 2통령과 3통령은 허울에 불과했다.

이후 다시 한 번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 또 다시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북이탈리아와 라인강 서쪽 지역에서의 확실한 프랑스 우위를 다졌으며, 1802년 영국과 아미앵 화약을 맺고 실로 오래간만의 평화를 프랑스에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스스로 종신통령에 취임했으며, 대대적인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상공업 진흥과 조세 및 교육제도 개혁 등을 실시했다.

황제 즉위와 전성기

이후 높아진 인기를 바탕으로 1804년 국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전통적인 서유럽 세계관에서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 계승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단번에 깨트린 것이다. 이는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이 나폴레옹이 대관식에서 교황이 관을 수여하는 관례를 거부하고 스스로 황제의 관을 썼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원래 그림은 나폴레옹이 스스로 관을 쓰는 것으로 그리려 했으나 교황청의 항의로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조세핀과 나폴레옹의 가족들은 사이가 매우 나빠서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누이들은 실제 대관식에 참석도 안 했지만, 나폴레옹의 의향이 반영되어 그림에는 그려졌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는 전 유럽의 반발을 불러왔고, 이에 영국은 아미앵 화약을 파기하며 프랑스는 다시 한 번 전쟁에 휩쓸린다. 그러나 트라팔가르 해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전격적으로 오스트리아를 침공, 빈을 함락하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섬멸하며 최전성기에 달한다. 이후 1806년1807년에 걸쳐 프로이센, 러시아군을 격파하고 러시아와 틸지트 화약을 체결, 전 유럽을 완전히 프랑스의 세력권에 두게 된다.

몰락

하지만 이후 단행한 이베리아 반도 원정이 지리한 장기전으로 흐르고,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단행한 대륙봉쇄령이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한채 오히려 타격만 받자 대륙봉쇄령에 성실히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812년 60만 대군과 함께 러시아 원정에 나선다. 그러나 러시아의 기나긴 영토와 혹한 속에서 청야전술과 모스크바 대화재로 끝내 퇴각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잃는 최악의 실패를 경험한다.

이후 1813년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여러차례 대프랑스 동맹군을 격파했지만 전체적인 열세를 뒤집지 못해 유럽의 운명이 걸렸다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재기하지 못한 채 퇴위하여 이탈리아의 엘바 섬으로 유배된다.

1815년, 부하들의 도움으로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은 루이 18세가 도망간 틈을 타 황제로 복위하고 전격적으로 선제공격에 나섰으나 블뤼허와 웰링턴의 저항으로 워털투 전투에서 그 뜻이 꺾였다. 이후 미국 망명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아프리카의 외딴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다가 1821년 죽었다.

능력

군사적인 능력 면에서는 세계사 전체에서 손꼽히는 특급 괴수. 전략/전술적인 측면 모두에서 당대 최고였고,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그야말로 세계사 역대급으로 꼽히는 재능이다. 적은 병력으로도 적절한 판짜기를 통해 국지적으로 수적 우위를 유지하는 재능은 그야말로 탁월했고, 지켜야 할 때와 과감하게 적을 분쇄해야 하는 타이밍도 기가막히게 잡아냈다. 이베리아 반도 전쟁과 러시아 전쟁에서 실패가 오점으로 남긴 하지만 이는 나폴레옹의 외교적/정치적 감각 부족 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황제로 즉위하고 나서는 교만해져서 전성기의 군사적 역량을 다 잃어버렸다고 아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물론 러시아 원정 자체는 삽질이 맞다. 하지만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고 나서 전 유럽이 나폴레옹을 물어뜯기 위해 덤벼들었을 때 새로 징집한 신병들로 모집한 군대를 가지고 당대 유럽 올스타 장군들과 맞서 죄다 격파한 게 나폴레옹이다. 다만 말기에는 건강악화(위장병, 치질)로 인해 제정신으로 전장에 있기 힘든 건강상태이기도 해서 워털루 전투에서는 이런저런 삽질을 하기도 했다.

정치적인 능력은 미묘하다. 법전 정비, 도량형 통일, 세금체제 개편과 같은 내치-행정 분야에서는 탁월한 정치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하지만 국제정치와 외교에 있어서는 관심이 없는 건지 능력이 없는 건지 전 유럽을 적으로 돌렸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다 두들겨 팰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는 몰라도(이게 사실 유력하다. 싸우면 다 이기는데) 하다못해 정복지에서 피지배층 혹은 지배층 둘 중 하나의 지지 정도만 받아 냈더라면 저정도로 다구리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전 유럽의 민중과 지배세력 모두의 증오를 한몸에 받았다.

잠깐의 대화 만으로도 상대를 반하게 만들 수 있는 매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숙적 중의 숙적인 메테르니히마저도 "황제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에게 매료되게 만든다" 라고 인정했을 정도. 병사들의 지지는 말할 것도 없다. 앨바 섬에서 탈출했을 때 그를 체포하기 위해 프랑스 정규군이 달려오자 그의 말 한마디에 그를 체포하러 온 군대가 그의 군대로 탈바꿈한 것은 유명한 일화. 다만 휘하 부하 및 신하들에 대한 장악력에 대해서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 제법 있다. 조아생 뮈라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같은 경우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면서도 결국 그를 배신했고, 그 배신을 부추긴 것은 나폴레옹의 혈족들이었다. 물론 끝까지 지조있게 열렬히 나폴레옹을 지지한 휘하 장수들도 얼마든지 있지만, 배신하면 타격이 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잃은 대목은 전쟁에서 진 적이 없지만 계속 고립되고 배신당하는 중국 초한쟁패기의 항우를 연상하게 만든다. 항우도 개인적인 매력은 엄청난 사람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업적

민주주의 혁명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황제의 자리에서는 철저히 권력을 개인에게 집중시킨 인물이지만 아이러니하게 전 유럽에 프랑스의 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한 업적이 있다.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유럽 민중들에게 민족주의 성향이 발현되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민주주의 사상이 이들 국가에게도 전파되어 메테르니히를 비롯한 유럽의 기득권층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나폴레옹 시대 이전의 체제로 유럽을 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만(빈 회의) 이는 부르주아와 민중의 반발을 불러와 유럽을 크게 변화시킨다. 나폴레옹이 앨바 섬에서 탈출한 후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만든 초 자유주의적 법전도 이에 한 몫을 담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폴레옹을 유럽의 민주화와 근대화를 위해 한몸 바친 투사라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 그가 천재적인 장군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사용한 인물이었을 뿐이다.

기타

  • 나폴레옹은 작은 키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단신이라는 것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의 시체를 부검한 이후 키가 '5피트 2인치(157.5cm)'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와전된 것이다. 그의 키는 실제로 '5피에 2인치'로서, 프랑스의 옛날 길이 단위인 피에(1피에=32.48cm)는 영국의 피트(1피트=30.48cm)보다 2cm 가량 길었으니 실제 키는 167.6cm였다. 당시 프랑스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4.1cm였으니 평균보다 큰 셈.
  • 한국 등 다른 국가들에서의 평가는 천재에 노력파로 자수성가하여 시골 총각에서 대국의 제왕이 된 존재로 고평가를 받고 있으나 정작 프랑스 내에서의 평가는 미묘하다. 한창 혁명운동으로 혼란해진 것을 잠재워준건 고맙지만 또 다른 전쟁을 선사하여 다시금 프랑스를 고통받게 만들었으며, 민주주의 혁명 세력의 도움으로 1인자가 되었으면서 정작 끝에는 그 스스로가 황제가 되어 민주주의를 스스로 철저히 부정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타국에서 나폴레옹을 동경한다는 점을 이용해 생가 관광, 기념품 장사 등은 잘 하고 있지만. 다만 에스파냐에서는 그런거 없고 아예 히틀러랑 동급으로 치고 있다.
  • 그의 사망에 대해 여러 음모론이 돌고 있다. 가장 유명한건 그의 방 내부를 녹색 페인트로 칠해놓았는데 사실 당시엔 녹색 페인트를 만드는 기술이 시원찮아 독성이 가득한 염료를 사용해 만들었고 그 결과 그 페인트에서 나오는 독성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것. 하지만 나폴레옹은 패왕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변비 등 여러 질환들을 고루 앓고 있었던 허약한 인물이라 원래 단명할 운명이었다. 그 유명한 코트 중앙에 손 일부를 끼워넣은 품격 있는 자세는 실은 초상화 작업 당일 장 질환이 도져서 배가 아파 부여잡고 있던 것이었다.
  • 나폴레옹이 쓰던 모자는 21세기에 경매로 나왔으며 하림에서 21억 원에 낙찰받았다. 2015년 완공되는 강남구 신사동의 신 사옥에서 전시될 예정이라고…….
  1. 이 진압으로 나폴레옹은 포도달 장군(Général Vendémiaire)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방데미에르가 포도의 달이라는 의미가 있는 동시에 포도탄을 동족에게 쏘아댄 냉혈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