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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1년 11월 1일 (월) 22:58

파일:Dutch East India.png

영어 : Dutch East India Company 네덜란드어 : 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17~18세기를 주름잡던 세계 최대의 회사로, 인도양과 동남아시아에 걸쳐 네덜란드 해상제국을 건설하는데 일조하였다. 네덜란드어 표기의 앞문자를 다서 VOC로 통칭한다.

설립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설립에 뒤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동인도 회사이다. 다만, 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에 자극받기보다는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있어 동인도회사 설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는 네덜란드스페인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가라는 점과, 당시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동군연합(이베리아 연합)중이었다는데 기인했다.

스페인 제국은 어쩔 수 없이 네덜란드의 독립을 승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네덜란드의 성장을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펠리페 2세는 보복조치로 네덜란드 상인들이 리스본의 향신료 시장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했다. 당시 유럽 향신료 시장은 인도항로와 동남아시아 향신료 산지를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에 의해 거의 독점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네덜란드가 배제된 것이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타개책으로 인도-동남아 항로로 직접 뛰어들고자 했다.

한편, 1590년대 이후 몇몇 네덜란드 상인들이 선단을 형성하여 자체적으로 동남아시아 향신료 항로에 뛰어들었고 정향의 최대산지였던 암보이나와 직접 거래를 하는데 성공, 1600년에 귀환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었다. 이를 본 다른 네덜란드 상인들도 뒤이어 너도나도 동남아시아로 진출하고자 했고, 1600년경부터 이와 같은 목적의 회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자 네덜란드 의회는 자본과 자원을 집중시키고 잉글랜드, 포르투갈과 경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이들 회사를 통합시켜 1602년 정식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고, 회사에 동양무역의 독점권 및 현지 국가 및 토후와의 통상 및 외교교섭권, 현지에서의 군대 및 요새 유지권을 부여했다.

초기 자본금은 6,424,588길더로 이중 절반 이상이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출자되었다. 정부 외에 네덜란드의 상인 및 자본가들이 공동으로 출자하였고, 출자자들에게 권리증서를 나누어주었다. 이를 현대 주식회사와 증권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활동과 성장

동남아시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최대목적은 바로 동남아시아의 향신료였고, 때문에 회사는 동인도제도 경영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이는 이미 동남아 항로를 선점한 포르투갈과의 혈투를 의미하기도 했다. 실제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초기 역사는 포르투갈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포르투갈 외에도 잉글랜드 역시 회사의 강력한 경쟁상대였다.

회사 설립 이후 1620년까지 회사의 선박들은 주요 향신료 산지인 테르나테, 암보이나, 아체 등으로 진출하여 항로를 개설하고 상관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진출해 있던 포르투갈 세력을 격퇴하고, 새로이 도전해오는 잉글랜드 세력과 맞서는 등 매일매일이 혈전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포위전 끝에 1641년, 포르투갈의 동양진출 거점인 말라카가 회사의 손에 떨어졌으며, 비슷한 시기 룬과 암보이나에서 이뤄지던 잉글랜드와의 싸움에서도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1601~1661)이 끝날 무렵이면 동남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고, 간신히 백단의 산지인 동티모르만을 건졌을 뿐이었다.

한편 회사는 1619년 자바섬 서북해안의 항구를 점령하고 바타비아(Batavia, 현재의 자카르타)를 건설하여 회사의 동양경영 거점으로 삼았으며 이후 반자르마신, 수라바야 등을 추가로 점령하여 수마트라에서 뉴기니에 걸치는 거대한 해상무역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향신료, 설탕, 커피 등의 플랜테이션으로 부를 쌓았다.

그밖에도 메콩강 유역 및 인도차이나 반도에도 진출하여 상관을 두었다.

인도 및 인도양

네덜란드의 인도 진출 역시 향신료에 초점을 맞추었다. 1640년, 회사는 포르투갈로부터 실론(현 스리랑카)의 남부 갈레를 탈취했는데 이곳은 최대규모의 계피 산지였고, 이로서 포르투갈이 독점하던 계피의 시장 공급은 네덜란드에게로 넘어가기에 이른다. 뒤이어 인도 남부 몇몇 항구를 점령하고 상관을 개설하여 인도 진출을 본격화하였고, 페르시아와 벵골에도 상관을 개설하여 포르투갈 세력을 완전히 대체하기에 이른다.

덕분에 포르투갈 세력은 인도에서 완전히 몰락, 고아와 디우, 다만 외의 모든 거점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일본

흑선사건으로 일본이 개항하기 이전까지 네덜란드는 일본과 교역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회사는 종교의 전파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에도 막부로부터 제한적이나마 거류와 교역을 허가받았다.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에 거류한 네덜란드 상인들은 모두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였으며 일본으로부터 상품대금으로 은을 받아 이를 무역대금으로 활용했다.

대만

회사가 대만에 처음 발을 내딛은 것은 1624년의 일이었다. 회사는 대만을 포모사(Formosa)라 칭하고 섬 남부를 점령한 뒤 중국과 일본 진출의 교두보이자 동북아시아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삼았다. 회사는 현재의 안핑 지역에 질란디아 요새(Fort Zeelandia, 현 안평고보)를 건설하여 대만 식민지의 중심으로 삼았고 대만 남부와 해안 일대를 지배하며 설탕과 차의 플랜테이션 및 사슴의 가죽 등을 수출하였다.

그러나 청의 남정 와중에 쫓겨난 정성공의 세력이 근거지를 찾기 위해 대만에 상륙하면서 네덜란드의 대만 지배는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고 결국 1661년 질란디아 요새가 함락되면서 회사의 대만 지배는 37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는 대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줄기차게 대만 탈환에 나섰으나 모조리 격퇴당한 후에야 대만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남아프리카

희망봉에 처음 도달한 것은 포르투갈이었지만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식민지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다. 회사는 인도-동남아 항로로 향하는 선단의 중간기착지이자 보급, 정비의 거점으로서 남아프리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를 케이프 식민지라 하며 케이프타운이 바로 그때 개척된 식민도시이다.

이후 남아프리카 식민지로 네덜란드인 다수가 이주했고, 이들이 바로 현대 보어인의 기원이다.

쇠퇴와 해체

18세기 들어 회사는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청 왕조의 중국 대륙 통일과 이로 인한 해금정책 강화, 일본산 은의 산출량 급감 등이 이유로 꼽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과 프랑스라는 강력한 경쟁자들이 본격적으로 도전해왔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네덜란드는 소국이었고, 이 소국에 기반을 둔 회사는 물량을 앞세운 영국과 프랑스의 거센 도전을 방어해낼 수 없었다. 18세기 중엽이 되면 회사의 인도양 영향력은 거의 상실, 몇 개의 상관밖에 남지 않은채 프랑스와 영국이 인도의 패권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향신료도 더는 황금알이 되지 못했는데, 향신료가 안정적으로 수급되면서 유럽의 향신료 가격이 빠르게 내려갔기 때문이다. 회사는 이를 막고자 향신료 밭을 대대적으로 불태우고 향신료를 자체적으로 재배하던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악랄한 방법까지 동원하며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향신료 가격의 하락을 막지는 못했다.

향신료를 대체하기 위한 설탕, 커피 등의 플랜테이션 작물 역시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의 카리브 식민지들이 본격적으로 경영되면서 직격타를 맞이했다. 카리브해에서는 위 3국이 흑인노예라는 훨씬 싼 노동력을 가지고 똑같은 작물을 재배해서 인건비에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던 데다가, 머나먼 동남아시아에서 플랜테이션을 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작물과 달리 카리브해에서 재배되는 작물들은 훨씬 빨리 유럽에 공급될 수 있었기에 운반비 면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던 것.

결국 18세기 후반이 되면 회사는 리즈시절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바타비아와 인근 상관들만을 겨우 유지하며 몰락,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다가 1798년 네덜란드가 망하고 그 자리를 대신한 프랑스의 괴뢰정부 바타비아 공화국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회사 소유의 동인도제도 영토들은 법적으로 바타비아 공화국에 넘어갔지만 이를 인정치 않은 영국이 모조리 접수했고, 1815년 네덜란드가 재건된 후 반환하게 된다.

기타

유럽 국가나 상인 중 최초로 조선과 직접무역을 시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멜표류기로 유명한 핸드릭 하멜의 귀국 이후 회사는 일본의 막부가 조선과 회사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며 이득을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조선과의 직접 교류 및 조선 영토에의 상관 개설을 교섭코자 한 것이다. 그러나 회사가 조선 조정과 접촉하기도 전에 이를 눈치챈 막부가 데지마 상관 폐쇄를 거론하며 강력히 대응, 조선과의 거래를 포기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