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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奴婢)는 동아시아의 전근대 사회에 존재하였던 최하층 신분이다. 사실 과거에도 노비제를 폐지한 지배자들이 있었으나 행정력 등이 부족하여 진짜로 노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1 중원(中原)의 노비

노비에 대한 기록은 거슬러 올라가 《주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의 노비 신분은 세습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또한, 노비는 70세가 지나면 양인으로 삼았다.

2 만주, 한반도 유역의 노비

이른바 팔조법금이라 일컫는 고조선의 8개조 법에 노비 제도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도둑질을 한 자 중 남자는 노(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여 노비의 노는 남자 종, 비는 비는 여자 종이라 표현한다는 설이 있으나 정설은 아니다(노(奴)에도 계집녀부가 붙어 있지 않은가?). 또한, 고조선의 노비는 돈을 내면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1] 부여에서는 살인자를 사형시킴과 동시에 그 가족을 노비로 삼는다는 기록이 있었으니 이는 연좌제(緣坐制)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삼국시대에는 잦은 전란으로 전쟁 포로가 많이 생겨났고 대부분을 노비로 삼았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굳이 노비가 된 전쟁 포로를 양인으로 풀어 주니 사람들이 이를 마땅히 칭찬했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을 신라가 통일하면서 이러한 전쟁포로는 감소하였으나 빚을 갚지 못해 노비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등 노비의 수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도 노비 제도는 건재했다. 의외로 조선시대의 노비제의 원형이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사의 형법지에서는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이 노비가 되는 조선의 종모법과 같은 천자수모법이 등장한다. 원간섭기[2]에서는 이것이 더욱 강화되어 일천즉천(一賤則賤: 부모 중 한쪽만 노비여도 그 자손들도 무조건 노비가 되는 법)의 원리를 제창하면서 이후 노비 인구가 급증하였는데 기여했다. 노비들은 고려 귀족들의 경제력과 관련이 있었는데, 엄청난 숫자의 노비들을 동원할 수 있었을 때 기록된 고려 귀족들의 부귀영화는 상상을 초월[3][4]했다고 한다. 물론 왕은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노비안검법 등으로 노비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건국 직후에는 경국대전 등을 선포하여 귀족들에게 속했던 노비들을 양인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양인들에 대한 세금이 너무나도 막중하여 스스로 노비가 되는 일도 있었고 양반[5]들 역시 고려 귀족처럼 하려는 성향이 있었다. 노비는 주인[6][7]이 세금을 대신 내기 때문에 선호되기도 했다. 특히 이렇게 노비가 되는 자들은 대개 사노비가 되었으므로 국가재정 악화와 동시에 귀족적 성향의 강화를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양반들은 노비제를 옹호하기도 하였으며 노비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던 시기도 있었다. 이후 조선에서는 갑오개혁 이후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2.1 조선은 고대 노예제 사회?

일부 서양의 사학자들이나 일본의 학자들은 조선을 고대 노예제 사회로 간주하고는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개소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노비(奴婢)와 노예(Slave)는 절대로 일대응대응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도의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의 수드라(Sudra)를 노예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일반적인 자유민이 없이 대부분의 인구가 농노(Serf)였던 서양의 중세 사회를 생각해 보면, 서양사학자들이 외려 조선을 노예사회 취급하는 건 실로 헛웃음이 나오는 일이라 하겠다.

노비는 땅을 소유할 수도 있었고 일부 공노비는 문무잡직, 유외잡직이라 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들은 일반 관리와는 철저하게 구분되었지만 품계를 하사받고 녹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농노는 관직에 나아가긴 커녕 토지를 소유할 수도 없었고 토지를 거래할 때 감자튀김에 딸려나오는 케첩마냥 토지의 부산물로서 거래되었다. 노비는 다양한 신분상승책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농노는 도시민, 부르주아 개념이 생기기 전까지는 절대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없었다. 과연 노비(奴婢)와 농노(Serf)중 어떤 쪽이 노예(Slave)에 가까울까? 생각해보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미국의 경우 19세기에나 간신히 연방법에서 노예제가 사라졌고 2013년까지 미시시피 주에는 법적으로 노예제가 남아 있었는데 대체 누가 누구를 노예제 사회라고 비난해야 할지...본래 서양사학자들이 유럽사를 제외한 다른 문화권의 역사를 제멋대로의 잣대로 이상하게 왜곡, 비난하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현대에 들어와서야 문화의 상대성을 강조하면서 그러한 부분이 완화되고 있긴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을 고대 노예제 사회로 분류한다면 법적으로 노예제가 남아 있는 개척시대의 미국도 노예제 사회라고 분류가 가능하다.

게다가 애초에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서양의 노예들[8]과는 달리 동아시아의 노비는 일단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고려 시대 공양왕 3년의 상소에는 「말이나 소가 노비보다 비싸다. 사람 가격이 마소보다 못하다니 이게 뭐하자는 거냐?」며 한탄하는 내용이 있다. 사람을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한 것부터가 막장인 것 같은데?

사실 일본만 봐도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히닌(非人)과 같은 신을 모실 수 없는 자라는 에타(穢多) 등이 있었다.

  1. 중국의 기록인 《한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2. 후기의 원나라는 중국화의 영향을 받은 후 노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고려의 노비 제도에 간섭하여 고려의 노비 숫자를 줄이고자 하였으나 고려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한다.
  3. 고려사에서는 인공적인 폭포를 만들기도 했을 정도라 하며 현대 고고학의 성과에 의하면 사치스러운 저택이 수십 채나 있었을 정도다.
  4. 고려의 백성들은 이에 따라 상당히 비참하게 살았던 것 같다.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6&cp_code=cp0801&index_id=cp08010005&content_id=cp080100050001&print=Y 고려인이 깨끗하다고 칭찬한 고려도경에서는 백성들의 집은 벌레 같다고 전하고 있다.
  5. 이들은 아예 전에 고려 귀족이었던 사람들도 많았다. 심지어 조선의 주요 양반 가문들은 절대 다수가 고려 귀족 출신이었다.
  6. 조선의 양반들도 고려의 귀족처럼 세금 자체를 잘 내지 않으려고 하였고 평민들보다 힘이 더 강했기에 세금 문제에서 유리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잘난 주인을 만나면 양인으로 사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었기에 고려 시절에도 스스로 노비가 된 자들이 많았다. 사회적 지위 역시 운이 좋으면 최의와 같은 주인으로부터 관료직 등을 받아 출세할 수도 있었다.
  7. 쉽게 말하자면 주인이 대신 세금을 덜 내고 그 잉여분을 자기도 좀 먹고 노비들에게도 줬다고 보면 된다.
  8. 이들은 생물학적으로 인간 취급을 받지 않았다. 인간처럼 생기긴 했는데 좀 다른 것, 말할 수 있는 물건 정도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노예제 사회로 유명한 이집트나 로마의 노예는 이류시민이긴 했어도 일단 노예를 인간 취급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참고. 유럽인들도 과거 조상들의 전통이 강하게 남은 인도를 제외하면 사람으론 취급했다. 인도는 짐승과 서열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