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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1년 11월 1일 (월) 23:09

논어(論語)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으로 사서 중 하나이다. 저자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대체적으로 공자 사후 2~30년 내에 작성된 것으로 본다. 다른 경전과 달리 한 사람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주로 격언이나 금언을 모아놓은 형태를 띠고 있다.

공자가 제자 및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토론한 것이 '논'. 제자들에게 전해준 가르침을 '어'라고 부른다.

구성 및 본문

현재 논어는 전20편, 총 482장 또는 498 내지 499장[1], 600여 문장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서술방식과 호칭의 차이 등을 기준으로 앞의 열 편을 상론(上論), 뒤의 열 편을 하론(下論)으로 구분하여 앞의 열 편이 더 이전 시대에 서술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각 편의 이름은 그 편 내용의 첫 두 글자를 딴 것으로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논어
20편의 구성
상론(上論) 하론(下論)
제1편 학이(學而) 제11편 선진(先進)
제2편 위정(爲政) 제12편 안연(顔淵)
제3편 팔일(八佾) 제13편 자로(子路)
제4편 이인(里仁) 제14편 헌문(憲問)
제5편 공야장(公冶長) 제15편 위령공(衛靈公)
제6편 옹야(壅也) 제16편 계씨(季氏)
제7편 술이(術而) 제17편 양화(陽貨)
제8편 태백(泰佰) 제18편 미자(微子)
제9편 자한(子罕) 제19편 자장(子張)
제10편 향당(鄕黨) 제20편 요왈(堯曰)

이중 대표적인 학이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틈나는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역사

논어는 전한 시대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는 논어라는 명칭 대신 전(傳), 기(記), 논(論), 어(語) 등의 이름으로 불렸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판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논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전한 (前漢)의 6대 경제 (BC 188 - BC 157 - BC 141) ~ 7대 무제 (BC 156 - BC 141 - BC 87) 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 있다.

논어는 어느 한 시기에 편찬되었다기보다, 몇 차례에 걸쳐 지어졌다고 보이는데, 첫 번째 공자 사후에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제자가 일익을 주도했고, 두 번째 증자 사후에 유자,민자 등이 일익을 주도했으며, 전국시대 맹자 시기 또는 맹자 사후에 누군가 내용을 첨가하고 보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것은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관중에 대한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론과 제론을 모두 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내용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 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하면 인(仁)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세부 덕목으로서 지(知, 지혜)와 인(仁, 어짊)과 용(勇, 용기)에서의 ‘인’은 협의의 ‘인’이며, 공자가 내세운 모든 덕목을 총칭하는 개념이 광의의 ‘인’이다.

공자는 법이나 제도보다 사람을 중시했다. 사람을 통해 그가 꿈꾸는 도덕의 이상 사회를 이루려고 했다. 그래서 ‘어짊’을 실천하는 지도자로 군자를 내세웠다. 원래 군주의 자제라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군자’는 공자에 의해 이상적 인격의 소유자로 개념화되었다. 군자는 도(道)를 추구하고, 도에 입각하고, 도가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존재다. 이 위대한 정치가는 예(禮)로 자신을 절제하고, 악(樂, 음악)으로 조화를 추구한다. 문(文, 문예)을 열심히 공부[學]해 훌륭한 군자로 거듭나고, 정치(政治)를 통해 민생(民生)을 안정시키고 도덕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덕(德)과 의(義)가 사회의 중심 가치가 되는 자신의 이상 사회를 끝내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지난한 삶의 역정 속에서도 도덕 사회의 구현이라는 처음의 꿈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는데, 이 꿈이 녹아 있는 책이 ≪논어≫다.

주석서

논어는 수많은 주석서가 있다. 하안논어집해를 "고주"라 하고 주희논어집주를 "신주"라 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조선정약용이 지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는 고주와 신주에서 각기 보이는 폐단을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공자의 원의에 가까운 해석을 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당시 조선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오규 소라이 그리고 이토 진사이 등 일본 유학자들의 주석에까지 고루 시야를 넓힌 점은 정약용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고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향

공자 시대 이후로 논어는 중국의 철학자들과 가치관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후 동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유교 경전의 다른 세 책과 함께 사서라고 불리며 유교의 기본 가치관인 "예, 의, 충, 인(禮、義、忠、仁)" 이라는 유교적 인본주의를 가르쳐왔다.

광동의 과거 시험장(1873년)

거의 2천년 동안 논어는 중국의 학자들이 배우는 기본 과정이 되어왔는데, 공자의 저작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학식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중국의 과거 시험은 진나라(265-420)에서 시작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과거 시험에서는 유교경전을 강조하여 수험생들이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글에 어떻게 사용하였는지 평가하였다.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서 웨일리찰스 뮬러, 그리고 윌리암 수딜의 번역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볼테르와 에즈라 파운드는 열 번째 향당편에서 공자가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근래에 논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한 시몬 레이즈는 이 어록은 유명한 사람의 개인의 삶을 묘사한 첫 기록일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공자의 논어가 가장 오래된 지적이고 영적인 완벽한 개인의 초상이라고 말하며 향당편은 근대적인 책과 같이 감동을 주는데,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면서도 정말 중요한 것은 빼놓고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했다.

조선시대에는 훈민정음의 반포로 언해가 시작되었는데, 세종대에는 사업이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조선 전기의 학자 유숭조가 최초로 칠서언해를 내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언해사업은 선조의 명에 따라 교정청을 두어 사서삼경과 효경 등을 언해하였는데, 그 결과 칠서언해의 하나로 1590년(선조 23년) 총 4권의 논어언해가 간행되었다. 논어언해는 실제로 백성을 교화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 그 수요가 많아 이후에도 광해군, 인조, 숙종대 등 여러 차례 중간되었다. 또한 '틀:첫가끝'과 방점이 사용되는 중세 한국어의 특징을 보여주고 원간본의 '틀:첫가끝' 가 인조 목판본(1631년판)에서는 '틀:첫가끝'로 수정되는 등 한국어 사용의 변화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논어언해는 저작권이 만료되었기 때문에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에서 원간본을 영인한 1976년 종로대제각 영인본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1976년 영인본. 한편 언해본은 1749년(영조 25년) 간행된 율곡논어언해도 있다. 이는 율곡 이이가 교정청의 언해사업과는 달리 원문의 한자를 그대로 사용하여 언해한 것인데, 후대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서 간행한 것이다. 국한문을 혼용한 언해형태의 번역은 조선시대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다가, 광복 후 순한글로 번역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각주

  1. 논어 원문 자체는 분장이 되어있지 않았으나, 주희의 『논어집주』에서 분장한 것이 통용되고 있다. 단, 여기서도 『논어집주』 향당편에서 '舊說凡一章, 今分爲十七節.'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구설을 따르면 향당편 전체가 1장이 되어 총 482장이라 할 수도 있고, '今分爲十七節'을 주희가 '17등분했다'고 해석하면 17장이 되어 총 498장이 된다. 그런데 향당편 '색사거의'장이 주희의 17절 개념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파악하면 1장이 더 추가되어 총 499장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현대에도 학자마다 502장, 499장, 492장, 509장 등 492장부터 513장까지 다양하게 분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