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위키: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멕시코

최근 편집: 2021년 11월 14일 (일) 12:49
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멕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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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북아메리카에 있는 나라다. 북쪽으로는 미국과의 긴 국경이 있고 남쪽으로는 과테말라벨리즈와의 짤막한 국경이 있다. 서부는 태평양 그리고 동부는 대서양멕시코 만카리브 해. 수도는 멕시코시티. 공식 언어는 스페인어. 31개의 주가 있고 수도인 멕시코시티는 직할시. 화폐는 멕시코 페소를 쓴다.

역사

스페인이 점령하기 오래전부터 발달된 문명이 있었다. 마야 문명은 남부의 유카탄 반도와 지금의 벨리즈, 과테말라, 엘살바도르에서 활약했었고 아즈텍 문명은 테노치티틀란(현 멕시코시티)을 중심으로 한 멕시코 중부지방에서 활약했었다. 스페인 콘키스타도르들이 침략하기 전 마야 문명은 많이 쇠퇴해서 쉽게 함락했다. 반대로 아즈텍 문명은 스페인과 대규모의 전쟁을 했지만 역시 함락되었다. 마야 문명과 아즈텍 문명은 500년 전 멸망했지만 아직도 멕시코에서는 아즈텍에서 쓰던 나우아틀어와 마야어를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이후로 스페인 식민지와 독립국가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게 된다. 아즈텍 제국의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은 멕시코시티가 되고 누에바에스파냐(신 스페인)의 일부가 되었다. 이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영토는 오늘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플로리다까지, 캐나다 남부, 그리고 남쪽으로는 코스타리카까지 확장했었다. 한때는 알래스카까지 누에바에스파냐 영토라고 주장했었다. 스페인은 필리핀도 멕시코를 통해서 통치했다.

1800년대 초기부터 독립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821년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아구스틴 1세)는 스페인으로써의 멕시코 제1제국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과의 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멕시코 내부 세력들이 아구스틴을 반대하면서 1823년 제국은 물거품으로 넘어간다. 이후로 중앙아메리카 지역들은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으로 독립해 나간다. 너도 나도 독립 이후 멕시코 제1공화국으로 바뀌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공화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당시 불안정적이여서 1835년에 연방제도를 폐지했다.

멕시코-미국 전쟁

텍사스 혁명으로 인해 1846년도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고 캘리포니아, 텍사스, 네바다, 콜로라도, 유타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미국에게 잃었다. 멕시코에서는 미국침략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부터 멕시코의 반미정서가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불안정한 연방제도로 다시 돌아갔지만, 1863년도에는 부유층과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의 지지로 멕시코 제2제국을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를 내세워 설립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1867년도 다시 멕시코는 연방공화국이 되었다.

멕시코 혁명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통치하는 기간동안 멕시코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철도연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안정된 중앙집권적 연방정부를 만들어냈다. 디아스는 그의 모토이던 "질서와 진보"를 거의 달성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업적들은 지방경비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이루어진 질서와 불균형한 성장을 통해 이루어낸 진보였다. 멕시코의 빈부격차는 증가하였고, 노동자는 낮은 임금과 긴 노동시간에 분노하여 곳곳에서 파업이 발생하였다. 거기에 신흥 지배층은 기존 디아스 체제에 참여할 기회가 적어 박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중산층과 신흥자본가 계급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를 중산층 중심으로 개혁해 나갈 수도 없었다. 사회양극화가 극단적으로 심화된 상황은 결국 혁명을 불러왔다.

처음에는 자유주의자이자 의회주의자이던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재선반대당을 통해 선거운동으로 디아스 정권을 교체하려 시도했으나, 디아스는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천명을 감옥에 집어넣었는데, 마데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감되었다 탈옥하여 미국으로 도주한 뒤 자신이 수감되었던 산루이스포토시(San Luis Potosi)의 감옥에서 구상한 산루이스포토시 강령을 발표하고 저항군을 조직하였다. 1911년에 결국 디아스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망명길에 올랐다. 하지만 압도적 지지율로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된 마데로는 곧 급진파와 보수파 양쪽의 불만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급속도로 인기를 잃었다. 이런 와중에 혁명 지도자들중 일부가 이탈하는 등 불안한 정권을 유지하다 1913년 군부의 쿠데타로 마데로는 대통령에서 쫓겨난 뒤 일주일 만에 부통령과 함께 암살당했다.

그리하여 다시 멕시코는 내전에 휩싸였다. 혁명군은 세력별로 혁명 노선이 달랐으나, 기존의 부패한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는 목표는 같았다. 에밀리아노 사파타, 판초 비야,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등의 혁명군은 1914년 군부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다. 새로운 대통령으로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취임했으며, 1917년에 혁명 헌법을 반포하면서 혁명은 끝이 났다. 하지만 혁명 세력간의 노선 대립은 더 심해져 1920년대까지 혼란이 지속되었으며, 이 와중에 카란사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은 암살되고 만다. 이후 1920년의 반란을 마지막으로 국민혁명당의 1당체제로 멕시코는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찾는다.

1930~1940 제2차세계대전과 멕시코

안정된 멕시코는 카르데나스 정부에 들어서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카르데나스 정부는 국민혁명당(PNR)을 개편해 멕시코혁명당(PMR)으로 이름을 바꾸는 한편,[1] 스페인에서 내전이 일어나자 부족한 재정형편에도 스페인 공화파를 지원하였다.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가장 큰 사건은 석유의 국유화였다. 카르데나스는 멕시코 헌법에 기반해 땅에서 산출되는 자원은 멕시코의 것이라고 규정하며 석유를 국유화 한 후, 멕시코석유공사(PEMEX)를 설립하였다. 1940년에 단행된 석유 국유화는 생각 외로 적은 저항에 부딪히며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이는 전쟁 중인 미국이 멕시코를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서는 멕시코와 전쟁을 한다면 못이길 것은 아니었으나, 당장 유럽과 태평양 뿐만 아니라 본토에서도 전쟁이 벌어지면 전선이 확대되기 때문에 멕시코까지 적으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선택지였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주축군에 붙어버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던 시기였다.

점점 제도혁명당은 색이 독재적으로 바뀌어졌다. 1968년도 하계 올림픽을 멕시코시티에서 개최하지만 올림픽 개최 10일전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학생들을 틀라텔롤코(Tlatelolco) 광장에서 대규모로 사살했다. 1당체제는 계속 이어갔지만 90년대 초반 외환 위기가 사태가 터지면서 71년 만에 제도혁명당 후보가 지고 보수정당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가 대통령이 되었다.

NAFTA와 사파티스타

NAFTA 발효일 이었던 1994년 1월 1일,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이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하였다. 명칭은 멕시코 혁명 당시 남부 해방군의 사령관이었던 에밀리아노 사파타에서 나왔다. 이들은 무정부주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요소를 결합한 이념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다. 계기가 세계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자유무역협정 체결이다보니, 반(反) 신자유주의를 표방한다. 농지개혁을 주장했던 사파타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계자로 자처하며, 지역 주민에 의한 통치와 지역 자원의 통제를 주장한다. 이들은 무장투쟁과 동시에 세계 시민단체와 연대를 노리며, 인터넷을 활발히 활용하는 방법 등을 통해 지원을 받고 있다.

각주

  1. 나중에 카마초 정권 때인 1946년에 다시 한번 당명을 바꾸는데 이게 바로 현재의 제도혁명당(PRI)이다.

틀:아메리카의 나라 틀:G20 틀:OECD

틀:리브레 맵스 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