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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

동남아시아나라. 수도는 네피도(Naypyidaw 혹은 Nay Pyi Taw). 1989년 6월 버마(Burma)에서 미얀마로 개명했다.

역사

이 지역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인도 문화의 영향력이 큰 지역이었고, 특히 스리랑카와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 덕분에 동남아에 소승불교를 전하는 역할을 하였고, 나중에는 스리랑카에 역으로 소승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기까지 한 나라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정령신앙인 낫 숭배도 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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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구성적으로도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달리, 주민족인 버마족이 주도적이긴 하나, 압도하지는 못하였다. 동부 샨 고원의 타이계 민족인 샨족과, 남부의 수준높은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몬족, 서남부에 아라칸 산맥으로 고립된 아라칸족이[1] 역사적으로 각기 상당한 비중을 보였다. 특히 아라칸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현재 미얀마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참고로 위의 지도는 현재 미얀마의 종족분포이고, 역사적으로 하면 남부 전체가 몬족이었지만, 지금 몬족의 분포는 크게 줄었다. 이후 서술하겠지만 18세기 말 몬족이 태국으로 엑소더스를 했기 때문.

고대

역사의 시작은 여타 동남아 국가들처럼 연대기로 뒤섞인지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미얀마의 주종족인 버마족이 도착한 때는 9세기경으로 본다. 그 전에 살고 있던 민족은 남부에는 몬족, 중북부에는 퓨족이었다. 몬족은 현재의 태국과 버마에 살던 동남아의 토착종족이었고 수준높은 불교문화를 지닌 민족이었다. 인도의 불교문화도 이 몬족을 통해 동남아 각지로 전해질 수 있었다.

한편 미얀마 중북부에 도착한 퓨족은 약 200여년간 거주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불교 덕후질로 인해 엘프적인 삶을 살던 종족이었다. 남녀불문하고 7세부터 20세까지 절에 들어가 승려와 같은 생활을 했고, 잔인한 형벌도구나 처벌도 없고, 누에의 목숨을 해친다고 비단조차도 경멸했다고 하는 말 그대로 엘프적인 삶을 살던 종족이었다. 물론 이것이 모두 진짜인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러한 퓨족은 남조의 확장으로 크게 쇠퇴하고 버마족으로 대체된다.

버간 왕조

9세기 중반 전성기를 맞은 남조는 각지로 영역을 확장하였는데 북으로는 사천의 성도를 점령하고, 동으로는 베트남을 일시적으로 지배하고, 남으로는 현재 태국과 미얀마 일대도 공략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국에 살던 몬족과, 미얀마 중북부에 살던 퓨족은 큰 타격을 입은 듯하고, 침공의 과정에서 운남쪽에 살던 버마족과 타이족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듯 하다. 타이족은 미얀마 동부 샨 고원에 정착하기 시작해 미얀마의 타이족인 샨족이 되었고, 버마족은 미얀마 중북부에 정착해 퓨족을 대체하여 미얀마의 첫 번째 왕조인 버간 왕조를 세운다.[2]

버간 왕조는 공식적으로 849년에 성립되었다고 하나, 전설과 뒤얽혀서 정확히는 알 수 없고, 그나마 역사적으로 뚜렸해지는 것은 11세기 아노야타 왕(제위 1044~1077) 때이다.[3] 아노야타 왕은 버마족을 통합하고 버마족의 전통신앙인 낫 신앙을 정리하였고 몬족의 승려 신 아라한을 통해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도입하였다. 아노야타 왕은 소승불교를 대대적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하고, 남쪽의 몬족 도시인 타톤에 불경을 요청하였다. 거기에 타톤이 거부하자 타톤을 공격해서 점령하고 불경을 삥뜯었다고 한다-_-; 다만 실제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전성기를 맞고 있던 캄보디아의 앙코르조가 테나세림 일대로까지 확장을 하자 그것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미얀마 남부 몬족의 도시들을 병합할 수 있었지만, 몬족은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버마족에 반항하였다. 이후 역사를 보면 버마족이 공격해서 합병하고, 몬족이 독립하고, 버마족이 진압하고, 몬족이 태국으로 탈출하고, 또 다시 버마족이 합병하는, 그런 상황이 계속 역사적으로 반복된다.

이렇게 발전하던 버간은 원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스스로 비문에 3600만 병력의 지휘관이며 3000명의 후궁을 두고 매일 300그릇의 밥을 먹는다고 어처구니없는 오바로 자랑을 하며 적은 깐수 4세 나라티하파테는 원이 복종을 복종을 요구하였을 때 오히려 선빵을 때려 운남으로 공격했으나 원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원의 점령도 완전하지 않아 미얀마 남부의 몬족은 정복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독립을 하고,[4] 중북부는 버간의 왕족을 포섭한 타이계 샨족의 저항군이 원을 몰아내서 잉와[5]를 수도로 하여 독립한다. 이로써 200여년간 미얀마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버고 왕조와 잉와 왕조

이때 남부의 몬족은 13세기 말부터 깽판을 친 현재 태국의 쑤코타이와 아유타야에 동남부 해안을 따라 길게 뻗은 테나세림을 삥뜯겼으나 불교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고, 수도인 버고[6]를 중심으로 해외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5세기 신소부 여왕은 자신의 몸무게와 동일한 양인 금 약 40 킬로그램을 높이가 107 미터나 되는 슈웨디공 파고다에 입혔고, 그 뒤를 이은 담마제디는 신소부와 자신의 몸무게의 4배의 달하는 금을 또 떡칠했다고 한다. 왕의 다이어트가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한편 북부의 샨족-버마족 왕국인 잉와는 버마화가 덜한 북부의 샨족과 수도 없이 싸웠다, 이 샨족이 간덩이가 부어 운남을 공격해 버린 결과 분노한 명이 1444년1446년에 연속으로역공을 가해 그들은 물론 잉와까지 초토화시키고 속국으로 삼은 후에야 물러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잉와는 쇠퇴하기 시작하고, 간덩이가 부은 짓을 한 북부의 샨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남아 1527년에 잉와를 멸망시켰고, 잉와의 속국이었던 버마족의 따웅우[7]가 독립해 떨어져나갔다.

그리고 남부의 몬족은 번영을 하였다고 하지만 새로운 변수들의 등장으로 골아픈 상황이었다. 북부에는 15세기 후반부터 힘을 키우기 시작한 버마족의 도시 따웅우와 삐의 확장으로 골치를, 남부에는 1498년부터 인도양에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고, 1511년에는 말라카까지 점령한 포르투갈인들의 확장으로 골이 아프게 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인들은 본국의 힘이 약해지면서 자구책으로 해적질과 용병짓을 하면서 주변을 어지럽혔고, 이들은 미얀마의 각 세력에게 고용되면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때 따웅우의 왕으로 즉위한 사람이 따빈슈웨티이다.

따웅우 왕조

1531년 따웅우의 왕으로 즉위한 따빈슈웨티는 본격적인 통일전쟁을 시작했다. 북부는 모가웅 지역의 샨족의 깽판으로 주요한 세력도 없었던 상황이라 남부의 몬족세력부터 그의 공격대상이었고, 이를 통해 버마 남부에 포르투갈 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확장은 주변의 경계를 불러와 삐, 버고, 아라칸이 동맹을 맺어 따웅우에 맞섰으나, 따빈슈웨티는 이들을 모두 무찌르고, 삐와 버고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북진을 해서 분열되어 있던 잉와주변과 동부의 샨족을 복속시키고 아라칸을 공격하던 중 몬족의 문제등으로 아유타야와의 전쟁을 하게 되었다.[8]

1547년 아유타야를 공격한 따빈슈웨티는 비록 아유타야 함락에는 실패하였지만 아유타야의 왕비 수리요타이를 전사시키고 돌아온 후, 포르투갈인 근위장교와 BL을 연출하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BL을 하면서 사냥을 하던 도중 암살을 당하고 다시 미얀마는 분열되는 듯했으나, 따빈슈웨티의 이복형 버인나웅에 의해 미얀마는 빠른시일안에 재통합되고 동남아 최강제국으로 발돋움한다.

버인나웅은 서로는 인도의 마니푸르, 서남은 아라칸, 북부는 중국 경계지역의 샨족까지, 동북으로는 현 태국 북부의 란나를 점령하고 아유타야를 공격했다.[9] 1563년 란나에서 진격해온 버마군은 아유타야를 포위하였고 아유타야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10] 그리고 다시 반항하려는 아유타야를 1569년 재공격해 함락하였고, 1570년에는 아유타야와 동맹을 맺어 버마에 맞선 란쌍을 공격해 위앙쨘을 공격했고, 비록 보급과 게릴라전으로 철수하였으나, 란쌍의 왕 세타티랏이 사망하자 재공격해 1574년 란쌍마저도 정복하여 동남아 최강의 국가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버인나웅이 1581년 죽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특히 아유타야의 흑태자 나레쑤언의 등장은 치명타였다. 버마의 연이은 공격을 모두 물리치고 버마 본토까지 진격해 싸운 나레쑤언의 활약으로 버마는 북부의 잉와, 중부의 삐와 따웅우, 그리고 포르투갈인 필리페 데 브리투가 점령한 남부로 나뉘었다.[11] 이중 가장 강한 세력은 북부의 잉와로써 1605년 나레쑤언이 잉와를 공격하려다가 도중에 사망하자 위기를 넘기고 확장할 수 있었다. 잉와의 왕 아나욱페룬은 삐, 따웅우를 점령하고 1613년 마지막으로 남은 필리페 데 브리투의 세력까지 공략에 성공함으로서[12] 미얀마를 재통합할 수 있었다.

이때 미얀마의 왕조를 부흥 따웅우 왕조라고 하는데, 비록 수도는 따웅우가 아니었지만 왕족의 핏줄은 이전 따웅우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후 버마는 한세기 이상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된 충돌이라 해봤자 1631년 태국 북부의 란나왕국 재정복과 그 이후 란나를 정복하려던 아유타야와의 충돌 정도였다.[13] 하지만 미얀마 역사의 전통으로 몬족은 다시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동남아에 기반을 다지려는 프랑스인들의 협조로 1740년 버마에게서 독립을 하여 부흥 한타와디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1750년 몬족은 북부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1752년 잉와를 함락시킴으로써 부흥 따웅우 왕조는 멸망했다.

꼰바웅 왕조

하지만 꼰바웅 왕조를 세운 슈웨보의 영주 알라웅파야의 등장으로 몬족은 곧바로 밀리기 시작했고, 1757년에는 수도인 버고가 함락당함으로써 다시 멸망하고 버마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리고 200년 전처럼 몬족은 다시 몬족을 지원했던 아유타야로 엑소더스를 시작하고, 이들을 쫓던 버마군이 국경을 넘으면서 다시 전쟁 발발.[14] 알라웅파야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유타야를 포위공격했으나 포탄의 오발로 부상을 입어 1760년 사망한다.

이후 꼰바웅 왕조의 3대 왕 신뷰신은 1765년 서와 북의 양방향으로 아유타야를 침공해서 2년간의 전쟁 끝에 1767년 아유타야를 함락해서 멸망시켰고, 곧바로 일어난 청의 침공도 물리쳐서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청의 침공 때문에 버인나웅 때와 달리 아유타야를 합병하지 못하였고, 구-아유타야는 딱씬에 의해 빠른속도로 통합되고 강력하게 부활한다. 톤부리-방콕 왕조 시암은 버마에 복속된 란쌍과 란나를 종복하였고, 테나세림 일대에서 버마와 대립하였다. 대신에 서쪽으로의 확장도 계속하여 인도국경의 마니푸르를 합병하고, 아라칸을 압박할 수 있었다.

꼰바웅 왕조 6대 국왕인 보도파야의 치세기에는 최전성기에 달해 1784년에는 아라칸을 병합하였고, 144000명의 대군으로 시암을 침공하였다. 하지만 아라칸의 통치에 실패함으로써 아라칸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이웃한 영국령 인도로 도주하였으며, 그 와중에 또(...) 국경을 넘어 아라칸 반란군을 잡다가 영국군과 충돌해서 긴장이 증폭되었다. 영국은 국경을 침해하지 말라고 버마에 경고를 하였는데, 버마는 국경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15]

다음 왕인 버기도가 즉위한 이후에도 이러한 사태는 계속되고, 버마가 아쌈의 타이계 왕국인 아홈 왕국까지 복속시키자 긴장은 극에 달해 결국 1824년 1차 영국-버마 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버마군은 벵골로 선공을 가해 벵골의 영국군을 고전시켰지만, 버마 남부에 상륙한 영국군에게 빈집털이 당하자 1826년 항복하고 아라칸과 테나세림을 영국에게 할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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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속 일어나는 버마인과 영국인의 충돌은 2차, 3차 전쟁까지 이어졌고, 1852년에 일어난 2차 전쟁에서는 버마 남부를, 1885년의 3차 전쟁에서는 전토를 병합당하고 미얀마는 영국령 인도 제국의 일부로 병합되어서 멸망했다.

영국령 버마

현재

[16] [17]

정치

군사

문화

  1. 현재는 라카인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이지만, 라카인이란 말 자체가 버마족이 쓰는 표현이고, 아라칸 현지에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다.
  2. 보통 파간(Pagan) 왕조로 알려져 있다. 버마어의 알파벳 표기법의 혼선이 심해서 버마어 발음과 표기가 상이한 기존 표기법과, 현지 발음과 비슷한 새로운 표기법의 차이가 심하다. 아직까지 혼선이 심하지만, 새로운 표기법이 정착되어 가는 듯하다.
  3. 아노라타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4. 몬족의 이 왕국은 한타와디라는 이명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수도를 따서 버고 왕조라고도 하지만, 한타와디 왕국이라는 표현도 자주 쓰인다.
  5. 코에이 게임에서 자주 보이는 아바(Ava)가 이 도시이다.
  6. 페구(Pegu)라고 알려진 도시.
  7. 역시 퉁구로 알려진 곳.
  8. 따웅우의 힘이 커지니 아유타야는 아유타야 나름대로 몬족들을 지원했고, 몬족들이 아유타야로 도주하자 버마군이 국경을 넘어서 이들을 추적하고, 이 때문에 열받은 아유타야가 선빵을 때리고, 버마도 나름 열받는다고 공격한 것이다. 실제 태국과 미얀마의 전쟁은 상당수가 이런 형식으로 일어났다.
  9. 이 전쟁은 백상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버인나웅이 흰 코끼리 2마리를 내주면 전쟁 안 하겠다고 하고, 아유타야에서 KIN을 때리자 공격해서 항복시킨다음 흰 코끼리 4마리를 삥뜯었다.
  10. 왕인 마하 짜크라팟이 버고로 끌려가 중이 된 듯하다.
  11. 필리페 드 브리투는 아라칸 왕의 사령관으로 나레쑤언을 물리치기 위해 남부 버마로 왔다가 독립하고 몬족을 통합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 미얀마에서는 파불자 응아 진까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인도 고왕의 포르투갈 부왕에게 사절을 보내 복속한 후 부왕의 딸와 결혼했던 인물이다.
  12. 이때 몇 개월 간 아나욱페룬의 버마군은 포르투갈인들의 강력한 군사력을 경계하여 공격을 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땅굴로 공격했는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점령했다. 이유는 그 날 미사 중이어서...
  13. 남명의 잔당문제는 그냥 쇼부처서 넘긴 것이니 충돌이라 보기도 뭐하다.
  14. 200년 전과 패턴은 동일하나, 이때의 엑소더스로 남부 버마의 몬족 인구는 크게 줄어서 현재처럼 버마족의 비중이 훨신 높아졌다.
  15. 토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동남아에서는 지배는 땅보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여러 번 일어나긴 했지만, 버마는 좀 심한 편이었다-_-;
  16. 미얀마왕조사 -김석원-
  17. 동남아시아사 -전통시대- 최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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