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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소문자역사

셈조어 문자 (기원전 18 ~ 15세기)

메로이트 문자 (기원전 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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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1443년
캐나다 문자 1840년
주음부호 19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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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한국어 표기에 주로 사용되는 표음 문자이다.

15세기에 조선세종대왕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반포했다. 반포 당시 28자의 기본 자모가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고 쓰이지 않게 되는 자모가 생겼다. 이후 한문을 고수하는 사대부들에게는 경시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왕실과 일부 양반층과 서민층을 중심으로 이어지다가 1894년 갑오개혁에서 한국의 공식적인 나라 글자가 되었고, 1910년대에 이르러 한글 학자인 주시경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현대 한국어에는 24자의 기본 자모와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일부 합성 자모들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갈래는 표음 문자 가운데 음소 문자에 속한다. 음소 문자로서 음운 자질도 나타낼 수 있는 특이한 문자이고, 현대 한국어에서처럼 모아쓰기를 하는 경우 음절도 나타내게 된다.

한국어와는 다르다. 한글은 글자이고 한국어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글을 언어라고 하지는 않는다.

명칭

한글이라는 명칭은 주시경(周時經)이 지은 것으로 ‘크다’, ‘바르다’, ‘하나’를 뜻하는 고유어 ‘한’에서 비롯되었다. 그 뜻은 큰 글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좋은 글, 온 겨레가 한결같이 써온 글, 글 가운데 바른 글(똑바른 가운데를 한가운데라 하듯이), 모난 데 없이 둥근 글(입 크기에 알맞게 찬 것을 한 입이라 하듯이)이란 여러 뜻을 한데 모은 것이라 하기도 한다.

한글 창제 당시에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이라 하였고, 줄여서 ‘정음(正音)’이라는 이름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지식층으로부터 경시되며, 본래의 이름으로 쓰지 않고 막연히 ‘언문(諺文)’[1], ‘언서(諺書)’[2], ‘반절(反切)’ [3] 로 불리거나, 혹은 ‘암클(여성들이 배우는 글)’, ‘아햇글(어린이들이 배우는 글)’이라고 낮추어 불렀다고 알려져 있다. (단, 암클, 아햇글이라는 표현은 그 출전이 불분명하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국서(國書)’, ‘국문(國文)’이라고 불렀고 혹은 ‘조선글’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의 글이라는 보통 이름일 뿐이며, 고유명사로 한글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전에는 ‘가갸’, ‘정음’ 등으로 불렀다.

처음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된 것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1913년 3월 23일 주시경이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 朝鮮言文會)[4]’를 ‘한글모’로 바꾼 바 있고[5], 같은 해 9월 최남선의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에서 창간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가로글씨로 '한글풀이’라 한 것이 있고[6], 1914년 4월에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이 ‘한글배곧’으로 이름을 바꾼 것 등으로 볼 때 1913년 무렵 주시경이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1927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한글이라는 잡지를 매달 발간하였다.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1928년 11월 11일 조선어연구회에서 가갸날한글날로 고쳐 부른 때부터라고 한다.

현재 한글의 명칭을 대한민국에서는 한글로, 북한에서는 ‘조선어자모’로 부르는데[7], 2001년 2월 중국 옌지에서 열린 ‘제5차 코리안 컴퓨터 처리 국제 학술 대회(ICCKL 2001)’에서는 남과 북, 해외 동포 학자들이 국제 표준화 기구(ISO)에 등록하기 위한 명칭으로 ‘정음(Jeongeum)’을 쓰기로 합의하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한글(Hangul/Hangeul)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지만, 중국에서는 조선 자모(朝鲜字母, Cháoxiǎn zìmǔ, 차오셴 쯔무)와 같은 이름을 쓴다. 일본에서는 한글은 물론 한국어를 ハングル(한구루)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NHK 방송에서 한국어 강좌를 설립시에 남한의 ‘한국어’와 북한의 ‘조선어’ 사이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기 위해 한국어 강좌 명칭으로 '한글 강좌'를 사용하여 많은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한글의 뜻을 한국어로 오해한 것이다.

유래

세종실록에 최만리가 훈민정음이 “고전(古篆)을 본땄다(倣)”라고 말한 기록이 있는데,[8][9] 이 말이 모호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고전’의 해석에는 한자의 전자체(篆字體)라는 설과 당시에 ‘몽고전자’(蒙古篆字)로도 불렸던 파스파 문자를 말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환단고기를 진짜 역사서라고 우기는 환빠들은 이것이 가림토를 일컫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본땄다’(倣)에 대해서도 그 생김새만이 닮았을 뿐이라는 풀이와 만드는 데에 참고를 했다, 또는 모두 본땄다 등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설명한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그 유래에 대한 여러 이론이 제기되었다. 그 이전에 제기되었던 주요 학설은 다음과 같다.

  • 발음 기관 상형설: 발음 기관을 상형했다는 설. 신경준(申景濬), 홍양호(洪良浩), 최현배
  • 전자 기원설: 한문 비석 등에 쓰이는 전자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황윤석(黃胤錫), 이능화
  • 몽골 문자 기원설: 몽골문자(파스파)에서 유래했다는 설. 이익(李翼), 유희(柳僖), 게리 레드야드(Gari Ledyard)
  • 범자(梵字) 기원설: 불경과 함께 고대 인도 문자가 전해져, 그것에서 유래했다는 설. 성현, 이수광(李晬光)
  • 고대 문자 전래설: 훈민정음 이전 민간에서 전해지던 고대문자로부터 유래했다는 설.
  • 창문 상형설: 한옥의 창살 모양에서 유래했다는 설. 에카르트(P. A. Eckardt)
  • 서장(西藏)글자·오행(五行)이론.[10]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자음과 모음 각각에 대한 창제 원리가 상세히 설명되어 기본 자음 5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을 추상화하고, 기본 모음 3자는 천지인 3재를 상징하여 창제되었고 다른 글자들이 획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여러 이설들을 잠재우고 정설이 되었다.

역사

훈민정음 언해본의 서두

창제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이두(吏讀)와 구결(口訣)을 써 왔는데, 구결은 본래 한문에 구두(句讀)를 떼는 데 쓰기 위한 일종의 보조적 편법에 지나지 않았고, 이두는 비록 한국어를 표시함에 틀림이 없었지만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적을 수 없었으며, 그 표기법의 일원성(一元性)이 없어서 설사 이두로써 족하다 해도 한자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이러한 문자생활의 불편은 한자를 쓰지 않고도,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새로운 글자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사조가 세종 때에 특히 두드러져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문자혁명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에 관하여는 세종이 손수 저술한 훈민정음 예의편(例義篇)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는데, 첫째 한국어는 중국말과 다르므로 한자를 가지고는 잘 표기할 수 없으며, 둘째 우리의 고유한 글자가 없어서 문자생활의 불편이 매우 심하고, 셋째 이런 뜻에서 새로 글자를 만들었으니 일상생활에 편하게 쓰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11],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 서(序)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 당시까지 한문 의존에 따른 어려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한국어의 고유 문자로서 창제되었다.

한편, 훈민정음 창제 후 5년 뒤에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되는데,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한자음을 중국어 원음으로 교정하기 위한 책으로서 이것의 발음 표기에 훈민정음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가 한자 및 한문의 폐지를 목적한 것은 아니라고 보이며, 훈민정음의 활용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에 대하여 반대하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최만리는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경이 운서를 아는가? 사성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는가? 만일 짐이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낱자 28글자와 성조를 나타내는 기호(방점)가 따로 있었으나, 지금은 , , , 네 글자와 성조 기호(방점)가 사라져서 24글자가 되었다. (제주도를 비롯한 몇 곳에서는 아직도 ㆍ의 발음이 남아 있다.)

그 뒤로 몇 백 년에 걸쳐, 식자층은 주로 한글보다는 한문 위주의 문자 생활을 했지만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백성과 여자들은 서로 주고 받는 편지나 계약서 등에 한글을 썼고, 궁궐에서 여자끼리 주고 받는 문서에 한글을 쓰기도 하였다.

친제 논란

오늘날 한글이라 불리는 글이 창제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세종대왕 25년인 1443년이다. 창제 당시에 한글은 '훈민정음'이라 불렸으며 1446년 음력 9월 초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책으로 엮어졌다. 이 사실은 정인지(鄭麟趾)가 쓴 서(序)로 확인된다.[12]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세종대왕이 홀로 글을 창제했는지,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는지, 아니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집현전 학자들이 글을 창제했는지가 문제이다. 세종실록(世宗實錄)은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이 친히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13],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14]

다시 말하면 시월 상친제언문이십팔자(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세종 25년, 12월 30일)에서 ‘상친제(上親制)’란 세종이 직접 한글을 만들었다는 뜻인데 '세종실록' 안에는 다른 업적에 관해서는 "친제"라는 말이 없었지만, 훈민정음(한글)에 관해서는 이렇게 확실하게 적어 놓았다는 것이다. 또한,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집필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 중에도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창제했다는 내용이 있다.[15]

그러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제7권에서 세종이 언문청을 세워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글을 짓도록 명을 내렸다는 주장이 나왔다. 주시경은 대한국어문법(1906년)에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창제했다고 썼다. 그리하여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관여했다는 설이 우세하게 되었으나, 이기문을 비롯한 학자들은 기록에 나타난 당시 정황을 볼 때 세종이 한글을 홀로 창제한 것이 아니라고 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글 창제 후 세종은 표음주의 표기가 일반적인 당대의 표기법과는 달리 형태주의 표기를 주로 활용하고 동국정운 같은 책을 편찬한 예에서 보듯이 국어와 중국어의 전반에 걸쳐 음운학 및 언어학에 깊은 조예와 지식을 보여 주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창제 후 정음청에서 한글을 사용한 편찬 사업에만 관여했다는 것이다.[16]

조선

처음에 ‘훈민정음’으로 반포된 한글은 조선시대에는 '언문'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세종실록에서 '상친제언문이십팔자(上親製諺文二十八字)'라고 한 것에 연유하는데 한자를 제외한 문자는 ‘언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많이 한글을 썼기 때문에 ‘암클’ 등으로 낮추어 불리기도 하였으나, 궁중과 일부 양반층, 백성들 사이에서 사용되었다.

1445년(세종 27) 4월에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하였다. 목판본 10권 5책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어진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 된다. 세종은 “어리석은 남녀노소 모두가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세종실록, 세종 26년)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도록 했으며,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에는 일부 관리를 뽑을 때 훈민정음을 시험하도록 했다. 이후로 민간과 조정의 일부 문서에서 훈민정음을 써 왔다.

이러한 한글 보급 정책에 따라 한글은 빠르게 퍼져 반세기만인 1500년대 지방의 노비 수준의 신분인 도공에게까지 쓰이게 되었다.[17]

연산군1504년(연산군 10년) 훈민정음을 쓰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했지만, 조정 안에서 훈민정음을 쓰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으며, 훈민정음을 아는 사람을 일부러 궁궐에 등용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 이후로 가사 문학, 한글 소설 등 한글로 창작된 문학이 유행하였고, 서간에서도 한글이 종종 사용되었다.

근대 이후

1894년(조선 고종 31년) 갑오개혁에서 마침내 한글을 ‘국문’(國文)이라고 하여, 1894년 11월 21일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 제14조[18]1895년 5월 8일 칙령 제86호 공문식 제9조[19] 에서 법령을 모두 국문을 바탕으로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국한문을 섞어 쓰도록 하였다. 1905년 지석영(池錫永)이 상소한 6개 항목의 신정국문(新訂國文)이 광무황제의 재가를 얻어 한글 맞춤법으로서 공포되었으나, 그 내용의 결점이 지적되면서 1906년 5월에 이능화(李能和)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건의로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설치되었는데, 국문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에 제출한 보고서로서 국문연구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 및 어윤적, 이종일(李鍾一), 이억(李億), 윤돈구(尹敦求), 송기용(宋綺用), 유필근(柳苾根), 지석영, 이민응(李敏應)의 8위원 연구안으로 완결되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1906년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大韓國語文法)을 저술하여 1908년에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으로 출판하였으며, 1908년 최광옥(崔光玉)의 대한문전(大韓文典), 1909년 유길준(兪吉濬)의 대한문전(大韓文典), 김희상(金熙祥)의 초등국어어전(初等國語語典), 1910년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등이 출간되고, 이후에도 1911년 김희상의 조선어전(朝鮮語典), 1913년 남궁억(南宮檍)의 조선문법(朝鮮文法), 이규영(李奎榮)의 말듬, 1925년 이상춘(李常春)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등으로 이어지면서, 1937년 최현배(崔鉉培)의 우리말본으로 집대성된다.

이와 함께 조선어학회와 같은 모임에서 꾸준히 애쓴 덕에 조금씩 한국어의 표준 문자로 힘을 얻게 되어 누구나 쓸 수 있게끔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글'이라는 이름은 주시경이 지은 것이며 조선어학회가 이 이름을 널리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이한 다음에는 남북한 모두 공문서와 법전에 한글을 쓰게 되었고, 끝내 한국어를 받아 적는 큰 글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만, 현재 북한에서는 한글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조선글'이라 한다.

현대 이후

한국에서는 한글전용법이 시행되어 한자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1990년대 그 사용이 절정을 이루었다.[20] 이후 정부차원에서의 영어우대정책 및 신사대주의 부활로 인해 한글의 사용이 점차 줄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21]

2009년에는 문자가 없어 의사 소통에 곤란을 겪었던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이 자신들의 언어 찌아찌아어의 표기 문자로 시범적으로 한글을 채택, 도입하였다. 그리고 2012년솔로몬 제도에 있는 일부 주가 모어 표기문자로 한글을 도입했다.[22]

구성

창제 원리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바탕으로 한글과 음양오행의 관계를 기록하였다.

가. 모음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 기본 모음'ㆍ, ㅡ, ㅣ'를 보면 'ㆍ'(아래 아)는 양(陽)인 하늘(天)을 본 떠 만들고, 'ㅡ'는 음(陰)인 땅(地)을 본 떠 만들었으며 'ㅣ'는 음과 양의 중간자인 인간(人)의 형상을 본 떠 만들었다. 천지인(天地人)은 단군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주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인 하늘(·)과 땅(ㅡ), 사람(ㅣ)을 나타낸다.[23]
  • 훈민정음 해례본에 따르면 'ㅏ,ㅑ, ㅗ, ㅛ'는 'ㆍ'(아래 아) 계열의 글자이다.

'ㆍ'(아래 아)의 속성은 양이다. 양의 특성은 위로의 상승, 바깥으로의 확장이다. 따라서 점을 위, 바깥 쪽에다 찍은 것.

  • 'ㅓ, ㅕ, ㅜ, ㅠ'는 그 반대로 'ㅡ' 계열의 글자이기 때문에 음의 속성을 따라, 하강, 수축의 뜻으로 점을 안쪽, 아래로 찍은 것.

나. 자음오행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 훈민정음 해례본에선 각 방위와 발음기관을 연결시키고, 해당 발음기관에서 나는 소리 또한 방위와 연관시키고 있다. 방위는 또 계절과 연결이 되므로, 결국 소리는 계절과 연결된다.

(소리=방위=계절, 소리=계절) 계절은 봄, 여름, 늦여름, 가을 ,겨울 순이므로, 소리 역시 어금닛소리(ㄱ, 봄), 혓소리(ㄴ, 여름), 입술소리(ㅁ, 늦여름), 잇소리(ㅅ, 가을), 목소리(ㅇ,겨울) 순으로 배열한다.

  •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기본 자음을 ㄱ,ㄴ,ㅁ,ㅅ,ㅇ,ㄹ 순으로 배열한 것은 오행 원리와 연관이 있다.
자음과 오행의 관계 정리표
속성 계절 방위 음성 음계
목(木, 나무) 춘(春, 봄) 동(東, 동녘) 어금닛소리(ㄱ,ㅋ,ㄲ) 각(角)
화(火, 불) 하(夏, 여름) 남, (南, 남녘) 혓소리(ㄴ,ㄷ,ㅌ,ㄸ) 치(徵)
토(土, 흙) 계하 (季夏, 늦여름) 중앙(中, 無定) 입술소리(ㅁ,ㅂ,ㅍ,ㅃ,) 궁(宮)
금(金, 쇠) 추(秋, 가을) 서(西, 서녘) 잇소리(ㅅ,ㅆ,ㅈ,ㅊ,ㅉ) 상(商)
수(水, 물) 동(冬, 겨울) 북(北, 북녘) 목소리(ㅇ, ㅎ) 우(羽)

제자 원리

  • 자음: 각 글자를 발음할 때 혀, 입, 목구멍 등의 발성 기관의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
  • 모음: 천지인의 개념을 적용하여 하늘을 뜻하는 ㆍ(아래아), ㅡ(땅), ㅣ(사람)을 만들고 이들을 조합해서 나머지 모음을 만들었다.

자모

처음 한글 낱자는 닿소리 17자와 홀소리 11자로 총 28가지였다. 오늘날 한글 낱자에 쓰이지 않는 없어진 글자를 소실자(消失字)라 하는데, 닿소리 ㅿ(반시옷), ㆁ(옛이응), ㆆ(여린히읗)과 홀소리 ㆍ(아래아)의 네 글자이다. 이로써 현대 한글은 모두 24자로서 닿소리 14자와 홀소리 10자로 되었다. 낱자의 이름과 순서는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낱자 자체의 칭호법(稱號法)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고, 중종 때 최세진훈몽자회에 이르러 각 낱자의 명칭이 붙게 되었다. 하지만 기역, 디귿, 시옷은 이두식 한자어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일제시대의 언문 철자법을 거쳐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24]

각 자모에 대한 소릿값을 살펴보면, 첫소리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와 반설·반치(反舌半齒)의 7음으로 구별하였고, 모음은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 이러한 7음과 각 자모의 독특한 배열 순서는 중국 운서(韻書)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쓸 적에는 각 낱자를 독립시켜 소리 나는 차례대로 적지 않고, 반드시 닿소리와 홀소리를 어울려 쓰기로 하였으니, 곧 <· ㅡ ㅗ ㅜ ㅛ ㅠ >는 자음 아래에 쓰고, <ㅏ ㅓ ㅑ ㅕ>는 자음 오른쪽에 붙여 쓰기로 하였다. 즉 음절문자(音節文字)로 하되, 그 모양이 네모꼴이 되도록 하였으니, 이는 한자의 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자음

모음

초성, 중성, 종성

‘한’이라는 글자에서 ㅎ이 초성, ㅏ가 중성, ㄴ이 종성이다. 초성과 종성은 모두 자음이며, 중성은 모음이다.

  • 초성은 글자의 맨 처음에 오는 자모이다. 현대 한국어에는 기본 자음 자모 14자와 합성 자모 중 ㄲ, ㄸ, ㅃ, ㅆ, ㅉ이 사용된다.
  • 중성은 글자의 가운데에 오는 자모이다. 현대 한국어에는 기본 모음 자모와 그것들을 조합한 합성 자모(ㅐ, ㅒ, ㅔ, ㅖ, ㅘ, ㅙ, ㅚ, ㅝ, ㅞ, ㅟ, ㅢ)가 사용된다.
  • 종성은 글자의 마지막에 오는 자모로, 받침이라고도 한다. 현대 한국어에는 기본 자음 자모 14자와 합성 자모 중 ㄲ, ㄳ, ㄵ, ㄶ, ㄺ, ㄻ, ㄼ, ㄽ, ㄾ, ㄿ, ㅀ, ㅄ, ㅆ이 사용된다.

표기 가능한 글자 수와 소리나는 음절 개수

폐지된 낱자를 포함하여 기본 닿소리를 다 나열해보면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따위로 총 37개다.

홀소리
ᅟᆝᅟᆜᅟퟄ
따위로 12 개.

합해서 총 49개나 된다. 또 나머지 이중 모음, 합용 병서까지 다 나열하려면 여백이 부족하여 기본 글자만 나열하였다.

한편 현대 한글은 낱자를 엮어 11,172(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27 + 끝소리 없음 1))글자 마디를 쓸 수 있다. 11,172자 중 399자는 무받침 글자이며 10,773자는 받침 글자이다. 사용 빈도는 KS X 1001 완성형 한글 코드에 선별된 2,350글자가 상위 99.9%로 알려져 있다.

어문 규정에 의하여, 현대 한국어 표준어에서 실제 사용하는 음절은 이보다 적다. 한국어의 소리는 첫소리+가운뎃소리(+끝소리)로 이루어지는데, 표준어에서 첫소리에는 19가지 닿소리가 모두 쓰이되 첫소리에 놓인 ㅇ은 소리 나지 않는다. 끝소리는 7종성법에 따라 7갈래로 모이며 끝소리가 없는 것까지 더하여 모두 8갈래이므로 현대 한국어의 발음은 첫소리 19 × 가운뎃소리 21 × 끝소리 8 = 3,192가지 소리가 된다.

그런데, 표준 발음법을 따르면 구개음 ㅈ, ㅉ, ㅊ 뒤의 이중 모음 ㅑ, ㅒ, ㅕ, ㅖ, ㅛ, ㅠ는 단모음 ㅏ, ㅐ, ㅓ, ㅔ, ㅗ, ㅜ로 소리나므로 첫소리 3 × 가운뎃소리 6 × 끝소리 8 = 144소리가 빠지고, 아울러 소리나는 첫소리 (ㅇ이 아닌 첫소리 뒤에 오는)를 얹은 가운뎃소리 [ㅢ]는 ㄴ을 제외하면(ㄴ의 경우는 구개음화에 따른 다른 음소로 인정하고 있다.) [ㅣ]로 소리나므로(한글 맞춤법 제9항 및 표준 발음법 제5항 단서 3) 첫소리 17 × 가운뎃소리 1 × 끝소리 8 = 136 소리가 다시 빠진다. 따라서, 현재 한국어 표준어에서 실제 사용하는 소리마디는 3192 − 144 − 136 = 2,912가지가 된다.

옛한글의 경우, 2009년 여름 발표 예정인 유니코드 5.2에 포함되어 있는 옛한글 자모의 총 갯수는 초성 124개, 중성 95개, 종성 137개와 채움 문자 2개(초성, 중성)이다. 방점 2개는 현재 유니코드에 등록돼 있다. 방점을 제외하고, 총 조합 가능한 글자 마디 개수를 구한다면 다음과 같다.

  • 조합 가능한 한글 코드(125×96×138): 1,656,000개
  • 완성된 한글(124×95×138): 1,625,640개
  • 조합 가능한 비표준 한글: 총 16,989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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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 관한 이설

파스파 문자 기원설

파스파 문자와 한글과 비교

1966년 컬럼비아 대학게리 레드야드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훈민정음에서 언급한 고전(古篆)을 몽고전자(蒙古篆字)로 해석하며 한글이 파스파 문자에서 그 기하학적 모양을 차용했다고 주장했다.[25] 레드야드는 그 근거로 당시 조선의 궁에는 파스파 문자가 쓰이고 있었고, 집현전 학자 일부는 파스파 문자를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들며, 한글의 기본 자음은 ㄱ, ㄷ, ㅂ, ㅈ, ㄹ라고 제시했다.

레드야드에 따르면 이 다섯개의 글자는 그 모양이 단순화되어 파열음을 위한 가획을 할 수 있는 여지(ㅋ, ㅌ, ㅍ, ㅊ)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그는 전통적인 설명과는 다르게 비파열음 ㄴ, ㅁ, ㅅ은 기본자 ㄷ, ㅂ, ㅈ의 윗부분이 지워진 형태라 주장했다. 그는 ㅁ이 ㅂ의 윗부분을 지워서 파생되기는 쉽지만, ㅁ에서 ㅂ의 모양을 이끌어 내는 것은 불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즉 다른 파열음과 같은 방법으로 파생되었다면 ㅂ의 모양은 ㅁ위에 한 획이 더해진 형태(ㄱ-ㅋ, ㄷ-ㅌ, ㅈ-ㅊ의 관계처럼)여야 한다는 것이다.

ㆁ자의 유래에 대한 설명도 기존과 다르다. 많은 중국 단어는 ng으로 시작하는데 세종대왕 집권 시기 즈음의 중국에서는 앞에 나오는 ng는 [ŋ]으로 발음하거나 발음하지 않았으며, 이런 단어가 한국어로 차용되었을 경우에도 이는 묵음이었다. 또한 논리적으로 추론 가능한 ng음의 모양은 ㄱ에서 가로 획을 제한 모양인데, 이는 모음 ㅣ과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가로 획을 제한 ㄱ에 묵음이라는 뜻의 ㅇ을 더해 ㆁ을 만들었을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단어 중간 혹은 끝에서의 [ŋ]의 발음과 단어 처음 부분에서의 묵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다른 글자는 ㅱ이었는데 훈민정음은 이를 微(미)의 초성이라 설명했다. 이는 중국 방언에 따라 m 혹은 w로 발음되는데 한글에서는 ㅁ([m])과 ㅇ의 조합(이에 대응되는 파스파 문자에서는 [w]로 발음한다)으로 만들어졌다. 파스파 문자에서 글자 밑에 환형의 모양을 그리는 것은 모음 뒤의 w를 의미했다. 레드야드는 ㅱ자의 'ㅇ'모양이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 졌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증거로 레드야드는 ㄷ의 좌측 상단에 작게 삐져나온 형상(입술 모양으로)은 파스파 문자의 d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입술 모양은 티벳 문자의 d인 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만약 레드야드의 이러한 기원설이 사실이라면 한글은 파스파 문자→티벳 문자→브라미 문자아람 문자를 거슬러올라가 결국 중동 페니키아 문자의 일족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레드야드 본인은 한글이 조음부위별로 기본형이 되는 5자의 구조만 파스파문자를 참고해 만들어졌을 뿐, 나머지 과정은 중국 운서의 음운론 지식에 따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오히려 실제 한글의 창제과정에서 파스파문자가 준 영향은 극초기에 제한된 미미한 수준이므로, 한글이 파스파문자의 변형이라는 식의 논리비약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무튼 이런 종류의 기원설에 대해 2009년 국어학자 정광(鄭光)은 훈민정음이 36개 중국어 초성을 기본으로 하는 등 파스파 문자로부터 일부 영향을 받았지만 글자를 만든 원리가 서로 다르며,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여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라고 반론하였다.[26]

기타 한글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문자

생김새가 한글과 비슷한 문자가 있어서 한글 이전의 고대문자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연히 닮은 경우이거나 신뢰할 수 없는 출처를 근거로 하고 있다고 설명된다.

가림토신대 문자

송호수1984년 광장(廣場) 1월호 기고문에서 천부경환단고기 태백일사를 참조하여 한글이 단군 시대부터 있었고, 단군조선가림다문(加臨多文)에서 한글과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기원했다고 주장하였다.[27] 이에 대하여 국어학자 이근수는 《광장(廣場)》 2월호의 기고문을 통하여 과학적 논증이 없는 이상 추론일 뿐이며, 참조한 고서의 대부분이 야사임을 지적하였다.[28] 또한 가림토 문자는 황당환단고기의 저자로 의심되고 있는 이유립이 한글의 모(母)문자로 창작한 가공의 문자일 가능성이 높아[29] 이러한 주장은 역사학계 및 언어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신대 문자 중에서도 모습이 한글과 비슷한 것이 있어 이를 가림토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신대 문자가 새겨져 있는 비석마다 문자의 모습이 달라 일관성이 없고 언어학자들이 추정하는 고대 일본어의 음운 구조와도 맞지 않으며,[30] 신대 문자가 기록되었다고 하는 유물 거의 전부가 18~19세기의 것이고 에도 시대 전의 것을 찾을 수 없는바, 신대 문자라는 것은 고대 일본에 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에도 시대의 위작이며, 특히 그 중에 한글과 비슷한 것들은 오히려 한글을 모방한 것임이 밝혀졌다.[31]

구자라트 문자

1983년 9월 KBS가 방영한 8부작 다큐멘터리 신왕오천축국전은[32] 구자라트 문자를 소개하면서 '자음은 ㄱ, ㄴ, ㄷ, ㄹ, ㅁ, ㅅ, 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의 열 자가 꼭 같았으며,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개천학회 회장 송호수[33]1984년 이를 인용하면서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는 구자라트 문자가 가림토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34][35]

그러나 구자라트 문자는 문자 구성상 자모로 완전히 분리되는 한글과는 달리 모든 자음이 딸림 모음을 수반하는 아부기다이며, 데바나가리 문자에서 수직선을 제거한 데바나가리 파생문자로서 다른 인도계 여러문자와 친족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기 때문에 이는 구자라트 문자의 특정 글자체와 한글 사이의 표면적 유사성에 대한 착오일 뿐이다.[36]

다른 언어에서의 한글 사용

한글은 2009년에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의 언어인 찌아찌아어를 표기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한국에서는 한글을 표기 문자로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으며 2012년 솔로몬제도의 토착어를 한글로 표기하여 교육하는 활동이 시작됐다. 2012년 10월 현재 시행되는 것은 2개 언어이며 결과에 따라 솔로몬제도 전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37]

간혹,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옛한글 등을 부활시킨 표기법을 연구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개인 연구자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만든 인공어인공 문자 井卜文(Jingbu Script) 등에서 일부 한글 또는 한글을 모티브로 한 문자를 개인 수준에서 사용한 예를 볼 수 있다.

한글의 오해

  •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한글이 아니라, 책인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기록물이 담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기록물 자체만을 등록 대상으로 한다.
  • 실제의 한글은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현재의 한글은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보다 표현할 수 있는 발음 수가 적다.
    •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원래 언어학적 명제가 아니고, 창제 당시에 '모든 소리는 기본 5음의 조화로 이루어진다'는 사상을 배경으로 한 철학적 표현이다.
    • 한글 낱자는 모두 소릿값이 확정되어 있고 실제 한글 쓰임에서는 모아쓰기의 규칙도 정해져 있으므로, 한글로 표현되는 소리의 숫자는 본래 유한하며, 한글은 기본적으로 한국어에 맞추어져 있다.
    • 현재 한글은 한국어 발음에만 사용하고 있으나, 원래의 훈민정음에서는 모아쓰기가 좀 더 다양하며, 아울러 동국정운에 따르면 실제의 한국어 발음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한자음도 훈민정음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 한글은 언어의 이름이 아니라 글자의 이름이다.
    • 창제 당시의 이름인 '훈민정음'과 그 약칭인 '정음'도 본래 글자의 이름이었다.
  • 찌아찌아족찌아찌아어의 표기에는 사용되나 공식은 아니다.

기타

해외 게임 등의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를 한글화라고 하는데, 한글은 한국어를 나타내는 데 최적화된 글자이지 한국어 자체는 아니다. 다른 언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명확하다. 어떤 게임을 다른 언어권에 수출했을 때 ‘영어 번역’이라고 하거나 ‘일본어판’ ‘러시아어 버전’ ‘중국어화’라고 하지, ‘로마자 번역’이라고 하거나 ‘히라가나판’ ‘키릴 문자 버전’ ‘한자화’ ‘병음 패치’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처럼 ‘한글화’ 내지 ‘한글 패치’는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이다. 정확히는 ‘한국어판(국어판)’, ‘한국어 번역(한국어역, 국어역, 국역)’ 혹은 ‘한국어화(국어화)’라고 하여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한글패치는 “Iam your father”를 “아이 앰 유얼 ᅗᅡ덜”이라고 적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한국어를 나타내는 글자는 보통 한글이고, 무언가 (의미 있는 내용이) 한글로 적혀 있다면 보통 한국어일 것인 점, 특히 아무래도 음성보다는 화면을 통해 전달되는 텍스트가 지배적인 전달 수단인 비디오 게임에서의 한국어 번역은 그 텍스트를 한글로(한글로 적힌 한국어로) 바꾸는 것이 주된 할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서 구분을 잘 하지 않고 이래저래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한국인이 아랍 문자를 지렁이 글씨라고 하듯,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이 한글을 보면 뭔가 기호나 무늬의 조합체로 보기도 한다. 일례로 ''이라는 글자는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을, '스위스'는 산 중에 창 들고 서 있는 근위병을 묘사한 것 같다 카더라.

같이 보기

각주

  1.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보인다. 예컨대, 세종실록은 훈민정음 창제를 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주상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어 …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이른다)이라고 기록하는데, 이것은 한글의 이름이거나 또는 굳이 한글만 지칭한 것은 아니고 한자 이외의 문자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예컨대 순조실록(純祖實錄) 9년 12월 2일 기사에 역관 현의순(玄義洵)이 대마도의 사정을 보고한 글 가운데 敎之以諺文名之曰假名(언문을 가르치는데, 그 이름을 일러 가나라고 한다)과 같은 문장이 있어, 일본 문자에 대해서도 언문이라는 표현이 사용됨을 볼 수 있다.) 또한 세종실록 28년 11월 8일자에 언문청이라는 한글을 보급하는 구실을 하는 기관 이름이 나온다.
  2. 한문을 지칭하는 ‘진서(眞書)’와 대비되는 표현이다.
  3. 諺文字母俗所謂反切二十七字(세간에서 이른바 반절 27자라고 하는 언문 자모). 최세진(崔世珍), 범례(凡例),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 반절은 본래 2개의 한자로 다른 한자음을 표기하는 방법을 말하며, 이렇게 소리의 표기에 사용된 글자를 반절자(反切字)라고 한다. 당시 훈민정음이 이와 비슷한 용법으로 한자음 표기에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반절이라고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4. 1908년 설립한 ‘국어연구학회(國語硏究學會)’가 1911년 9월에 명칭을 바꾼 것으로, 공식적으로 한글과 한문 표기를 나란히 사용했다.
  5. ‘本會의 名稱을 한글모라 改稱하고 이 몯음을 세움몯음으로…’, 한글모세움몯음적발, 한글모 죽보기. 이규영. 1917.
  6. 한글풀이의 수록이 확인되는 것은 1914년 3월의 제7호부터 1914년 7월의 제11호까지
  7. 맞춤법, 조선말규범집. 북한 내각직속 국어사정위원회. 1987.
  8. 其字倣古篆分爲初中終聲合之然後乃成字 :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중·종성으로 나뉘어 그것을 합한 연후에 글자를 이룬다.) 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
  9. 象形而字倣古篆因聲而音叶七調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고, 소리()로 인(因)하여 음(音)은 칠조(七調)에 맞아). 세종실록 28년 9월 29일. 이 기사는 훈민정음의 정인지 서(序)를 옮겨 놓은 것이다.
  10. 글로벌세계대백과, 〈양반관료의 문화〉, 한글 창제.
  11. “훈민정음은 백성(百姓) 가르치시는 정(正)한 소리라”(현대어 표기로 옮김), 세종어제훈민정음, 월인석보. 1459년.
  12. 癸亥冬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계해년 겨울,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 간략하게 예를 들어 보이시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정인지, 서(序), 훈민정음. 1446년.
  13. “上親制諺文二十八字…是謂訓民正音”, 세종실록 25년 12월.
  14. 정인지는 훈민정음을 지은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설서’의 편찬을 명했다고 적고 있다. 遂命詳加解釋以喩諸人…謹作諸解及例以敍其梗槪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더하여 사람들을 깨우치라고 명하시어… 여러 풀이와 예를 지어 그 개요를 펴내니), 정인지, 서, 훈민정음. 1446년.
  15. "錢下槍制', 훈민정음 해례본
  16. 훈민정음 친제론, 이기문, 한국문화 제13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992년.
  17. '라랴러려' 분청사기..."16세기 지방 하층민도 한글 사용".YTN.2011-09-08.
  18. 第十四條 法律勅令總以國文爲本漢文附譯或用國漢文
  19. 第九條 法律命令은 다 國文으로써 本을 삼꼬 漢譯을 附하며 或國漢文을 混用홈
  20. 세계는 지금 '언어전쟁' 중
  21. 한글 홀대하는 사회
  22. 솔로몬제도 일부 주(州)서 표기문자로 한글 채택
  23. package.lua 80번째 줄에서 Lua 오류: module 'Module:Citation/CS1/Suggestions' not found.
  24. (북녘말) 기윽 디읃 시읏 / 김태훈, 한겨레
  25. "The Korean Language Reform of 1446", Gari Ledyard. (1966)
  26. [Why] 세종대왕 한글 창제가 '표절' 누명 쓰고 있다고?, 《조선닷컴》, 2009.10.10.
  27. "한글은 檀君시대부터 있었다" 송호수 교수 주장에 學界관심, 《경향신문》, 1984.1.12.
  28. 한글 世宗전 創製 "터무니없다" 李覲洙교수, 宋鎬洙교수 主張 반박, 《경향신문》, 1984.2.6.
  29. 이문영(초록불),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 2010
  30. "日 神代文字는 한글의 僞作이다", 《경향신문》, 1985.7.17.
  31. MBC 다큐멘터리 “미스터리 한글, 해례6211의 비밀”, 2007. 10. 7. 방송
  32. 《新往五天竺國傳(신왕오천축국전)》. 문순태, KBS 특별취재반. 한국방송사업단, 1983. 참조
  33. 당시 보도에는 S베일러대 교수로 소개되었다.
  34. 〈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송호수,《廣場(광장)》1984년 1월호. 세계평화교수협의회.
  35. 일본 神代文字 논란, 충북대학 국어국문학과 국어학강의실
  36. 〈한글과 비슷한(?) 구자라트 문자〉, 김광해, 《새국어소식》1999년 10월호. 한국어문진흥회
  37. 솔로몬제도 일부 州, 표기문자로 한글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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