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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1년 11월 14일 (일) 14:13

3김 시대대한민국정치 역사에서 김씨 성을 가진 세 인물,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정치적 이해관계로 서로 협력하거나 반목하던 시대를 의미한다.

배경

3명의 정치인들은 각자 특징 있는 정치적 배경을 가졌다. 3김중 가장 정치적인 기반이 좋았던 사람은 김종필이었다. 그는 처삼촌이던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면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박정희의 오른팔 혹은 두뇌라 불릴정도로 실세였으며 중앙정보부장을 거치며 그 영향력이 상당한 인물이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1971년 40대 바람을 일으키며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의 세대교체 주자로 급부상하였다.

3김 시대의 시작

1979년 발생한 10.26 사태로 말미암아 정치적 혼란기가 도래했다.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초유의 사태로 응당 새로운 대통령을 뽑을 명분이 생겼고, 이때를 노려 군사정권을 갈아엎을 사명을 띤 야당의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박정희의 이념 계승을 표방하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움직임을 보이던 김종필의 본격적인 3김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이런 평화적 정권교체의 희망은 전두환노태우를 위시한 군내 사조직 하나회 멤버들로 구성된 이른바 신군부의 등장과 12.12 사태로 수포로 돌아갔다. 쿠데타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잡은 신군부의 수장 전두환은 집권하자마자 그의 강력한 정적이었던 3김을 매몰차게 숙청한다.

상대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실세였고 군부출신이라 안전할 것으로 여겨졌던 김종필은 부정축재 혐의로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고 야인으로 돌아갔으며, 김영삼은 가택연금에 처해졌고, 김대중은 내란음모죄를 뒤집어쓰고 구속되었다. 특히 김대중은 내란음모죄에 대한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3김 시대 삼국지

파일:김대중 김영삼 옛날.png
어제의 동지가
파일:김대중 김영삼.png
오늘의 적으로

전두환 치하 5공화국의 독재체제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매우 높았고, 군부의 탄압에서 조금 숨통을 튼 김대중과 김영삼은 민주정권 수립이라는 정치적 명분아래 협력관계를 맺고 제1야당의 양대 주류로 자리잡았다.

5공화국이 마무리되고 치뤄질 대선을 앞두고, 6월 항쟁 및 당시 신군부의 유력한 후보였던 노태우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확정된다. 이에 타도 군사정권을 외치며 단합했던 김대중과 김영삼은 선거를 앞두고 후보 단일화 과정을 겪다가 동맹이 깨지고 각자 독자적으로 출마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국민들의 성향으로 보면 김대중과 김영삼 둘 중 하나가 후보로 나서 야권의 표를 결집하면 충분히 노태우를 누르고 평화적으로 정권교체가 가능하였으나, 이런 유리한 상황에서 서로의 정치적 야심을 누르지 못하고 결국 야권의 표가 분열되었고, 정계에서 잠시 은퇴했던 김종필이 다시 등장하여 충청권의 표를 잠식하던 상황인데다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이 터지자 보수표가 결집하여 노태우가 당선되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것이다. 노태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어부지리.

이 과정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파탄에 이르렀다. 특히 선거 결과 두 후보가 그토록 비난했던 군사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서로간에 책임공방을 벌이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노태우가 당선된 이후 실시된 총선에서 야권 단일화 실패에도 13대 총선 후반으로 갈수록 여당의 선거비리가 연달아 터지면서 여권이 패배하고 야권이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확보하는 여소야대 정국이 현실화되었고, 여당의 불리한 상황은 1989년 상반기까지 계속되었다가 잠시간의 공안정국으로 해소되는듯 싶었지만 5공 청문회로 5공 시절의 어두운 면이 상당부분 밝혀짐과 동시에 부동산 가격의 폭등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지지율은 되려 낮아졌던 상황이었고, 민주당과 평민당이 각각 정당 지지율 1, 2위를 차지하는 형국이었다. 거기에다가 1989년에 치러진 두차례의 재보궐 선거에서 민정당이 승리했지만 민정당내에서 뚜렷한 차기 대권주자도 없던 상태여서 정권재창출도 어렵게 되자 노태우는 이런 정치적 부담감을 해소하기 위한 신의 한 수를 두는데 그것이 바로 3당 합당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토록 군사정권을 타도하던 김영삼이 노태우와 야합하는 충공깽을 시전하였고, 결과적으로 노태우는 자신의 세력과 김영삼, 김종필의 당을 흡수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 정국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이 과정에서 소외된 김대중은 정치적 입지가 대단히 좁아졌고, 자신의 출신지인 호남지역에 갇혀버린 형국이 되었다.

문민정부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1990년의 민자당은 지지율이 그리 높은 상황은 아니었고 1990년 두차례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민자당이 모두 패배할 정도로 예상보다 지지율이 낮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1991년 양대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은 예상을 뒤엎는 압승을 거둠으로써 김영삼의 입지는 탄탄해졌다. 그렇게 대권주자 자리를 위협받는 상황이 된 김대중은 민주당과 합당해 민주당을 창당하였고 정주영도 통일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정계진출을 하계된다. 선거 초반에는 민자당이 안정적으로 과반의석을 확보할것으로 보였지만 공천에 문제가 생겨서 공천탈락자들이 대거 무소속으로 출마한데다가 안기부에서 흑색선전물을 뿌리는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1992년 총선에서 민자당은 과반수를 넘기지 못하는 패배를 당했고, 노태우는 물론이고 김영삼에게도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김영삼은 오히려 자신만한 후보가 없다는 점을 내세워 노태우를 레임덕으로 몰아냈다. 김대중은 1992년 총선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호남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면서 대항마로 출마했으며, 정주영은 총선에서의 선전과 막대한 자금력과 3김을 타도하는 전략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선거 막판 김대중과 정주영이 뒤엎는 것은 힘겨운 일이었고, 결국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3김 정치인중 처음으로 정권을 차지했다. 김대중은 선거결과에 승복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정주영은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탓으로 이후 정치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정권을 잡은 김영삼은 과감한 개혁정치를 추진했다.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단행해 비자금 유통을 상당부분 혁파했고,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전두환노태우를 법정에 세웠으며, 그들의 사조직인 하나회를 일거에 쓸어버렸다. 이런 적극적 개혁정치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의 지지율은 실로 대단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초반의 기세와는 다르게 임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서서히 경제위기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결국 임기말에 터진 IMF 사태는 그의 정치적 명성에 먹칠을 했다. 또한 그의 아들인 김현철이 물의를 일으키며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고, 결국 문민정부는 초라한 마무리를 지어야했다.

국민의 정부

문민정부 출범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IMF 사태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한 문민정부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다 정계복귀를 선언,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다시 대권에 도전했다. 김종필 역시 1995년 민자당을 탈당,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충청권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며 독자행보에 나섰다.

15대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선 이회창은 김영삼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대쪽 이미지를 앞세워 유력한 대권후보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다. 이에 김대중과 김종필은 야당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였고, 김종필이 김대중 지지를 선언하면서 이회창과 김대중의 양강구도로 선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야당 단일화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이회창에게 지지율이 뒤쳐진 불안한 상태였다가뜻밖에도 이회창의 아들들이 미심쩍은 이유로 모두 병역면제를 받은 것이 불거지면서 이른바 병풍(兵風) 논란이 대선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터졌고, 병역에 민감한 대다수 남성들은 실망감을 표출하면서 이회창의 지지율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 이후에 이인제 후보가 한 동안 2위로 치고 올라오는 양상이었다가 때마참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음에도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져서 이회창 후보로 지지세가 몰렸지만 판세를 뒤집지는 못하고 김대중 후보가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집권후 자신을 지지하면서 대선에서 물러난 김종필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일체의 정치적 보복은 없음을 선언하고 김영삼 세력에 대한 불이익을 주지 않겠노라고 천명했다.

김대중은 국민의 정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김영삼이 싸지른 똥 IMF 구제금융 졸업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전 국민 금모으기 운동, 과감한 경제정책 등으로 비교적 빠른 시일에 IMF 사태를 해결하면서 지지를 얻었다. 그의 임기중에 개최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는 등 정치적 호재가 이어졌으나 같은 시기 발발한 연평해전에 대한 허술한 후속조치로 보수층의 반발을 일으켰다.

임기중 남북관계 개선에도 진보적으로 접근햇으며, 그 자신이 직접 평양을 방문해 전격적으로 김정일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며서 남북관계가 외적으로나마 온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했다. 그는 이런 대북정책을 햇볕정책으로 규정하면서 지속적으로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추진했다. 하지만 보수층은 이런 경제적 지원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한 정치적 쇼라고 폄하하는 등 국민적이 지지를 이끌어낸 정책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우여고절을 겪으면서 국민의 정부도 막을 내렸으며 김영삼과 비슷하게 그의 아들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에 이익을 취하면서 임기 말에는 대국민 사과를 하는 굴욕을 겪어야했다.

3김 시대의 종언

노무현이 김대중의 뒤를 이어 16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같은 당 출신의 노무현이 정권을 잡아 김대중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속될 것으로 여겨졌지만, 노무현은 끊임없이 지역구도 타파를 외치면서 대연정 제안 등 파격적 행보를 이어갔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기존 김대중의 정치적 세력을 분열시키고 독자적 노선을 추구했다. 임기말에 초라한 모습으로 퇴임한 김대중은 이렇다할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이는 김영삼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김종필은 여전히 충청권의 맹주로서 자민련을 공고히 유지하고 있던 상황. 그러나 2000년 치뤄진 총선에서 17석을 확보한 중소정당의 입장이었고, 노무현 집권후 치뤄진 2004년 총선에서 지역구도 타파를 외친 노무현에게 충청권의 지지가 몰리면서 자민련은 겨우 4석의 의석을 확보하는데 그쳐 정치적 위기에 내몰렸다. 김종필 자신마저 자민련이 거둔 초라한 성적으로 비례대표에 당선되지 못하는 참패를 겪은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자민련은 뿔뿔히 흩어져 조용히 사라졌다.

3김이 정계에서 야인으로 돌아간 이후 그들은 국가 원로로서 가끔 인터뷰를 하거나 정치인들에게 훈수하는 정도에서 조용한 일상을 이어갔다. 사실상 김종필이 정계 은퇴를 선언한 시점에서 3김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이후 김대중이 가장 먼저 2009년 지병이 악화되 서거했고, 김영삼과 김종필은 고령이다보니 건강관리를 하면서 칩거에 들어가 언론의 관심도 줄어들게 되었다. 그 후, 김영삼 역시 2015년 11월 22일, 노환으로 서거하면서 3김 시대의 주역은 오로지 김종필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3김의 주역인 김종필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2018년 6월 23일 노환으로 별세[1]하면서 3김 시대의 주역들은 모두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3김 시대의 명암

사실 3김이 권력을 쥐락펴락했던 3김 시대는 민주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과정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3김의 전성기였던 시절 자체가 군부 독재정권의 타도를 위한 민주화 운동이 끊임없이 발발했던 시기였고, 민주화 운동권의 결집을 위해 김대중과 김영삼은 힘을 합치거나 서로의 세력을 결집시키면서 군부독재에 대항했다. 결과적으로 김영삼이 3김 중 가장 먼저 대통령에 당선되어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 정권을 수립했고, 김대중 역시 민주 정권을 이어갔다. 비록 두 사람이 권력을 두고 반목한 아픔이 있지만 어쨌든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은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김종필은 군부 독재정권의 실세였지만 12.12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에게 배신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3당 합당에 기여하면서 결과적으로 김영삼이 14대 대통령이 되는데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반대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데 힘을 보태는 등 3김 시대의 평형추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비록 김대중이나 김영삼처럼 민주세력의 지지를 얻는 것이 힘들어 커다란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김영삼이나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3김 시대의 가장 큰 병폐는 지역구도의 심화이다. 즉 김영삼은 영남지역, 김대중은 호남지역, 김종필은 충청권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때로는 지역구도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권력을 추구하는 등 3김 시대의 그늘도 존재했다. 또한 그들중 어느 하나 부정부패의 고리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없었고, 워낙 정치적 입지가 강하다보니 이른바 제왕정치라고 불릴정도로 독재 아닌 독재를 하는바람에 붕당정치가 심화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