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위키: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M4 셔먼

최근 편집: 2021년 11월 1일 (월) 23:07

틀:무기 정보

M4 셔먼(Sherman)은 미국의 중형전차이다.

개발

유럽에서 진행되던 프랑스 침공을 보던 미 육군은 자신들이 새로 뽑으려던 M2 중형전차가 시대에 격하게 뒤떨어진 잉여한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독일의 4호 전차를 본 미 육군은 '시대에 맞추려면 우리도 포탑에 75mm를 달고 다닐 수 있어야한다'라는 생각을 했고, 만들려던 M2 중형전차의 생산량을 확 까내린 후 병기국에 쳐들어가서 '우리도 75mm 포탑에 단 전차 주세요.빼애액'를 시전했으나... 자신들이 원하는걸 얻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는 당시 미국의 기술력으로는 75mm 포가 장착가능한 포탑과 포탑링의 설계가 불가능해서 연구를 해야했기 때문인데, 그런다고 해서 M2 중형전차를 그때까지 써먹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잔머리를 굴려서 '당장에 필요한 75mm 포 탑재 전차는 날림으로라도 대충 만들어서 써먹고, 75mm포를 포탑에 달고 돌아다닐 수 있는 전차를 그 사이에 날래날래 만들어서 배치하자!'라는 결론을 내렸고, 전자가 M3 리 후자가 M4 셔먼이 된다.

75mm를 탑재 가능한 포탑을 장착한 새로운 시험 모델이 바로 T6 중형전차였다, 이 T6 중형전차는 75mm 주포를 장착 가능한 포탑을 장착했고, M3처럼 볼트 접합/용접식 외형이 아닌 완전 주조형이었다.

이 T6은 시제차 운행을 정상적으로 마치고 미 육군에 정식 채용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M4 셔먼이다.

활약

기본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록된 사례가 가장 많으나, 전후에는 의외로 2선급 장비로도 국공내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그리스 내전, 중동전쟁, 한국전쟁, 수에즈 위기,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 레바논 내전, 쿠바, 니카라과 내전까지 합쳐 40여년 가까이 전투를 치렀다. 그리고 아직도 운용되고 있을 거라고 추측된다고 한다.

초기

셔먼은 1942년에 처음 실전배치가 되었는데, 앞서 말한 M3 리보다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면서 엘 알라메인 전투와 횃불 작전 등에서 3호 전차와 4호 전차로 구성된 독일군들을 상대로 나쁘지 않은 전적을 거둔다. 태평양에서 얼마나 많은 일본군들을 갈아버렸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태평양의 셔먼 운용부대는 일본군의 전차가 하도 종이장갑이었기에 철갑탄이 아니라 고폭탄을 써서 때려잡는 쪽을 선호했다고 한다. 오히려 철갑탄은 일본군의 벙커를 파괴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유럽전선

그러나 유럽전선부터 잘못 설계된 종래의 전차개발사상과 안이한 작전계획[1]으로 인해 많은 피를 보게 되는데, 1944년 서부전선의 독일군들에게는 티거와 판터, 쾨니히스티거 등의 신예 전차가 배치되었고, 또한 보병들에게 판저파우스트가 대거 지급되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영국군의 졸렬한 운용으로 캉 일대에서 독일 티거 에이스들에게 단체로 꼬라박고 큰 피해를 본 뒤로 연합군은 독일군의 어떤 전차를 봐도 티거라고 보고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2] 피해가 누적되자 그동안 다수 장성들의 반대로 배치되지 못한 M26 퍼싱의 배치가 이뤄졌으나 이때 독일군은 단체로 붕괴한지 오래였으며, 1945년부터는 독일군의 전차보다 판저파우스트가 더 큰 위협으로 평가받게 되고 75mm 셔먼 도태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된다.

소련군에는 대략 4천여대의 셔먼 전차가 렌드리스로 인도되었는데 소련군은 이들의 일부를 76.2mm F1 주포로 환장해보기도 했으나, 곧 미국에서 75mm 포와 포탄이 너무 많이 들어와(...) 주포변환 바리에이션은 극소수에 속한다. 절반은 75mm, 나머지 절반은 76mm 무장형이었으며, 소련군은 셔먼에 대해 T-34에 비해 유폭에 안전하고 시야 확보의 용의함과 내부공간의 확보에 칭찬했지만 전고와 무게중심이 높아 전복위험이 높음을 지적하였다. 1944-45년 동안 제1,3,9 근위기계화군단이 이들 렌드리스 셔먼으로 무장했다.

대전후

  1. 당시 연합군 수뇌부는 독일의 신예 전차들이 셔먼보다 강력하더라도 그 수가 적어 물량전과 소모전을 강제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사실 이 판단이 틀린 건 아닌데 이기기 위해 예상보다 많은 피를 흘렸다는 게 문제.
  2. 다만 군사전문가 잘로가의 분석에 따르면, 미군들이 교차검증상 티거와 조우했던 것이 확실했던 적은 단 세번에 불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