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교회

최근 편집: 2019년 8월 26일 (월) 05:20

평화의교회로스앤젤레스에 소재한 활동 신자 60명 규모의 작고 진보적한인 개신교 교회이다. 1975년에 설립 되었고 미국장로교(PCUSA) 교단 소속이다.

역사

평화의교회는 2015년 설립 40주년을 맞아 교회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거치고 자료집을 출간했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탄생(1906):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는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제퍼슨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 된 미국 소재 최초의 한인 장로 교회이다. 1967년에서 1975년 사이 교회의 급격한 성장을 둘러싼 크고 작은 분란이 시작되고, 그 여파로 여러 계기를 거쳐 일부 교인들이 떠나 한인 남가주 교회와 나성 영락교회를 설립한다. 일부 교인들은 4대 목사였던 백리언 목사를 담임 목사로 다시 초빙하고자 했으나, 이를 둘러싼 찬반 의견 차이가 좀차 좁혀지지 않아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현 평화의교회; 설립시 교회명 해람장로교회)를 세우고 백리언 목사를 창립 목사로 초빙한다.

해람장로교회 창립 예배

해람장로교회 창립(1975): 제퍼슨장로교회를 떠난 교인들은 헝거리언개혁교회의 건물을 빌려 해람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새 교회를 시작했다. 새 교회 시작 직후 백리언 목사가 교통사고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어 이창식 목사가 1대 목사로 부임하고, 세번의 건물 이전을 거쳐 오늘날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다.

김재준 목사의 신학 공개 강좌

성장기 80년대(1980): 해람장로교회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호응하여 한국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행보를 밟았다. 기존 보수기독교 신학의 체제순응적이고 교회내에만 안주하는 기존신학의 틀에 반론을 제기하고 교회와 사회의 부조리를 향해 양심의 소리를 내면서 독재와 부패에 맞서던 김재준, 서남동, 안병무 등 진보 기독교 진영 인사들이 해람교회를 통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회는 진보적인 신학과 사회문제에 눈을 뜨고 보수일색의 미주 한인사회에서 진보의 목소리를 내는 몇 안되는 교회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1984년에는 미국장로교(PCUSA)에 가입했다. 한편 교회는 31명의 교인으로 시작하여 80년대 중반에는 280명 규모의 교회로 성장했다.

재미 동포 교회 지형의 변화(1990): 한국 교회들의 사회적 역할은 1990년대 들어서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해람장로교회는 이창식 목사의 사임 이후 위기를 겪었다. 분열은 없었으나, 교인 수가 수년에 걸쳐 70% 이상 줄고, 한인 영어권/아시아계 교회와의 합동 목회를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2대 조수경 목사는 3년만 부임하고 교회를 떠났다. 해람장로교회는 1999년에 교회 이름을 평화의교회로 바꾸는 한편 김기대 목사를 초빙하고 성경 번역본을 공동번역에서 개역개정판으로 교체하는 등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실험을 계속했다.

평화의교회 시대(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