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티스카 플라민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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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의 프란티스카 플라민코바


개요

프란티스카 플라민코바(체코어: Františka Plamínková, 1875년 2월 5일 ~ 1942년 6월 30일)는 체코의 교육자, 서프러제트, 저널리스트이다. 교사가 된 후 당시 교사들에게 결혼이 금지된 것에 대해 발언하면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애

프란티스카 파우스티나 플라민코바는 1875년 2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라하에서 프란티슈카(Née Krubnerová)와 프란티셰크 플라미네크(František Plamínek)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란티스카 가족은 유대인 혈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코블러(cobbler)였고 프란티스카는 세 딸 중 막내였다.

기초교육을 마친 후 프라하 주립교원(Prague State Teachers Institute)에 다녔다.

플라민코바는 1894년 타보르(Tábor)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 후 소브슬라브(Soběslav)에서 1년 중 마지막 6개월 동안 가르쳤다. 1895년 프라하로 돌아가 1900년 교직 인턴십을 마치고 그림, 수학, 물리학, 글쓰기 등을 가르치는 자격증을 취득했다.

업적

교육 및 초기 여성인권운동

그는 체코 교사 협회(the Association of Czech Teachers)에 가입했고 교사들의 결혼을 금지하고 그들이 독신생활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법(Austro-Hungarian law)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저널리스트로 전향한 뒤 불평등에 관한 기사를 썼다. 프라하 시의원으로 당선 되기도 하였으며, 체코의 국회의원으로 선출 되기도 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분리되었을 때는 상원 의장이었다. 국제여성연합(International Council of Women, ICW)의 부회장을 역임하였으며, 국제 여성 참정권 동맹(International Woman's Suffrage Alliance)의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01년 플라민코바는 프라하에 여성클럽을 설립했고 4년 후 여성참정권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는 체코의 선거권 부여 추진의 원동력이 되었고 투표권의 필요성에 대한 대중의 의식을 높이기 위해 일했다. 집회에서 여성들은 합스부르크 통치에 의해 투표권이 거부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보편적인 참정권을 지지했다.

1907년 남성들은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황실 선거의 권리를 부여받았으나 여성은 그렇지 못했다. 플라민코바는 지역 보헤미안 법이 실제로 지방 수준의 여성을 금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몇몇 정당들이 여성 후보를 뽑도록 설득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지만 이후 선거 때마다 이 운동이 반복되었고 훗날 체코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1912년, 첫 여성인 보세나 비코바-쿠네티카(Božena Viková-Kunětická)가 선출되었고, 주지사가 그 결과를 무효화시켰지만, 이 선거는 플라민코바와 체코 여성주의자들의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이 시기에 플라민코바는 유럽 전역을 여행했고 제1차 발칸 전쟁에서 뉴스 특파원으로 지냈다.

제1차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정치인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자유를 제한하고 체코 민족주의를 진압하려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시도는, 독립적인 체코슬로바키아를 추진하기 위해 망명자들에게 서방 연합군의 도움을 구하도록 강요했다는 점에서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제1차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수립한 "워싱턴 선언(Washington Declaration)" 은 귀족을 폐지하고 귀족지를 재분배하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제공했다. 또한 계급, 성별, 종교적 장벽을 없애고,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정치, 사회, 문화적 동등성을 부여했다. 서구 연합군이 워싱턴 선언을 평화 선언의 조건으로 삼으면서 1918년 여성들은 투표권을 얻었다.

변화는 즉각적이었다. 교사들에게 미혼과 독신을 계속하도록 요구하는 법은 1919년에 폐지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사회당의 일원인 플라민코바는 1919년 첫 지방선거에 참가했다. 프라하 시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교직을 사임했다. 또한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총회의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로 임명되었다. 플라민코바는 1920년 6월 제네바 국제 페미니스트 회의에서 1920년 첫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권자는 56%가 여성이라고 46%가 남성이라고 보고했다.

플라민코바는 1923년까지도 입법부는 여성의 평등을 가져올 민법을 수정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국제여성참정권동맹(IWSA)과 국제여성협의회(ICW)와 제휴해 영향력 있는 로비단체가 된 여성국민협의회(the Women's National Council (ŽNR))를 창설했다. ŽNR은 우선 결혼과 이혼에 관한 법률에서 법적 평등을 이루기를 바라며 가정과 결혼법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췄다. 플라민코바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기존의 유급 출산휴가를 유효한 특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3개월의 급여를 받지도 못한 채 해고 위협을 받고 있었다. 또 다른 목표로 플라민코바는 남자를 가정의 가장으로 지정하는 법을 변경하고자 했다. 이 법으로 여성들이 아이들과 같은 처우를 받도록 했고, 남성 가장들이 여성과 아이들의 경제 생활에 발언권을 갖지 못하게 했다.

한편으로 그는 1923년에 설립된 오르비스 출판사에서 글쓰기로 여성주의 목표를 더욱 높이고자 애썼다.

제3제국의 저항, 그리고 추방

플라민코바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 후 1942년에 다시 체포되어 테레시엔슈타트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플라민코바가 나치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는 일부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코빌리 사격장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1942년 6월 30일에 총에 맞았다고 한다.

기념

  • 1946년 플라민코바는 IWSA의 제1차 전후 의회에서 찬사를 받았다. 1950년 그녀는 체코슬로바키아군 자유훈장의 최고 계급인 황금별 메모리에 상을 받았다. 1990년 인권에 크게 기여한 체코인들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토마시 가리그 마사리크 훈장(Order of Tomáš Garrigue Masaryk)을 1992년 플라민코바에게 수여했다.
  • 2016년 2월 5일: 프란티스카 플라민코바 탄생 141주년을 기념하여 구글 두들이 체코 지역에 표시되었다.[1]

출처

  1. “프란티스카 플라민코바 탄생 141주년”. 《구글 기념일 로고》. 2016년 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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