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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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Révolution française)은 1787년부터 1799년까지 진행된 혁명을 말한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며 재정이 악화되자 부상하던 부르주아들이 왕을 폐위해 봉건 체제를 폐지하고 남성 시민으로 구성된 국민의회를 통해 남성 시민의 권리선언을 공표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에는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도 있지만 이 항목은 이들과 구분되며, 7월 혁명, 2월 혁명과 구분지어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근대 국민국가 및 자본주의 체제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반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확립해 자유주의를 주류 이데올로기로 올려놓은 한편, 급진적 공화주의 및 맹아적 사회주의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배경

프랑스 혁명은 다양한 원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일어났다. 따라서 원인에 대한 분석도 학자 및 학파에 따라 다양하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상황 : 앙시앵 레짐

본래 절대군주제란 국왕이 부르주아의 자본의 힘을 빌려 봉건귀족의 정치권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상승하는 부르주아와 하강하는 귀족 세력이 어느 쪽도 상대를 누를 수 없는 균형을 이루었을 때, 국왕이 어느 쪽의 제약도 받지 않고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양자의 대립을 조정할 수 있는 체제이다. 절대군주제 하에서 귀족세력이 후퇴하면서도 남은 봉건적 권리를 지키려 애쓰던 이 상황의 프랑스 사회를 앙시앵 레짐(Ancient régime)이라고 부른다. 18세기 프랑스는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사망률이 줄어 인구가 크게 늘고, 이에 따라 소비가 확대되어 상업이 번창하고 물가가 상승하는 호경기를 누렸다. 호황의 가장 큰 수혜자인 부르주아지는, 귀족과 부르주아지 간 조정 역할을 하던 절대군주권이 약화되자 더 힘을 발휘해 귀족 계급을 누를 수 있었다. 그런 반면에 호황과 물가 상승은 도시와 농촌의 서민에게는 불리해 빈부격차가 커졌다. 그러다 1730년경 이후 지속되던 호경기가 흉작, 기상 악화로 인한 식량 부족 때문에 1775년부터 갑자기 불황으로 빠져들자, 곡물 가격과 물가 상승으로 서민층의 고통은 더 커져갔다.

이처럼 혁명 이전 프랑스는 왕정 재정의 악화와 반대로 부상하는 부르주아가 맞물려 혼돈스러운 시기였다. 대부분의 부가 상류층에 집중되어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던 때에, 반대로 시민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턱없이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시작된 계몽 문화를 통해 시민들은 차차 평등과 인권이라는 개념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모순

18세기 프랑스의 사회질서는 제도상으로는 봉건 사회의 피라미드형 신분 구성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다. 신분은 세 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신분은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 제2신분은 세속 귀족, 나머지는 모두 제3신분 평민이었다. 앞의 둘은 면세를 비롯한 여러 봉건적 특권을 누리는 특권 신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각 신분 안에서 이해 대립과 계급적 분화가 일어나고 신분들 간의 상하 질서도 무너지고 있었다. 혁명은 쇠퇴하는 나라보다는 발전하고 번영하는 나라에서 일어난다. 가난은 더러 봉기를 부르지만 사회를 전복시키지는 못하며, 사회 전복은 언제나 번영 속에서 불거진 계급 간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제1신분 성직자 안에서는 거의 모두 귀족 출신에 이권을 독점한 고위 성직자들과 대부분 평민 출신에 가난한 하위 성직자들이 대립했다. 제2신분 귀족 안에서도 구귀족인 대검귀족(noblesse d’épée)과 세습직 관직을 산 신귀족인 법복귀족(noblesse de robe)이 나뉘었고, 구귀족 중에서도 최상층의 궁정귀족의 호화로운 생활과, 나머지 지방귀족의 쇠락해 가는 형편이 대비되었다. 제3신분 안에서는 아직 노동자들이 하나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형성할 만큼 자본주의가 발달하지는 않았으나,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분화가 일어나 상층 부르주아지는 호화로운 생활을 했던 반면 중소 상인, 길드의 우두머리, 소생산자 등 하층 부르주아지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제3신분과 프랑스 전체 인구의 대부분인 농민은 대부분 영세농이었고, 18세기 말엽에는 날품팔이로 전락하는 소작농이 늘어나고 있었다.

통치 체계의 모순

절대군주제에서 명목상 국왕은 모든 권력의 기원이자 유일한 결정권자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중앙행정, 입법, 사법, 지방행정의 제 분야에서 제도들과 기구들이 비일관적으로 조직돼 각자 자율권을 행사했다. 중앙행정에서 국왕이 주재하는 국정 토의 기관인 참사회(Le Conseil)의 기능은 약화되고 왕이 불참한 가운데 몇몇 주요 장관들로 이루어지는 예비 회합이 점차 관례로 자리 잡아 장관과 관료의 지배로 변해갔다. 입법과 사법에서 고등법원(parlement)은 국왕의 명령이 이들의 장부에 적혀야만 효력을 발휘하는 등재권을 지니고 직위를 세습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어 왕권을 위협했다.

특히 조세 체계가 합리적 원칙이 결여되어 있는 데다 불평등했다. 프랑스의 농민과 부르주아는 중세 이래의 각종 봉건적 부과조를 영주에게 바쳤을 뿐만 아니라 절대군주가 부과하는 국세도 부담했다. 농민들은 영주에게 지대에다 부역, 영내 재산 이전세, 도량형 검사세 등 잡다한 봉건적 부과조(les droits féodaux)를 바쳤는데, 물가 상승과 화폐 가치의 하락 때문에 줄고 있었으므로 지방 영주들은 문서에 적혀 있는데 징수되지 않고 있던 조항들을 들추어내 원성을 샀다. 국세도 성직자와 귀족은 면제받거나 다른 공납금으로 대체했고 평민들만이 부담을 졌다. 직접세인 타유세(taille)는 총액 할당제로서 징수 과정에서 수많은 직권 남용이 일어났다. 간접세의 징수는 금융업자들의 조직인 징세 청부인 조합이 일정 금액을 정부에 납부하기로 계약을 맺고 납세자에게서 엄청난 돈을 징수해 차익을 취하는 총괄징수청부제(ferme générale)의 방식을 취하여, 국가에도 납세자에게도 불리했던 반면 금융업자들에게만 폭리를 보장해 주었다.

봉건영주가 자신의 영지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쥐고 왕에게는 군사적 봉사만 제공하던 말 그대로의 봉건제는 이미 사라졌고, 많은 부르주아들이 몰락귀족의 토지를 사 영주가 되고 일부 귀족들이 상공업에 뛰어들며 부르주아와 귀족의 신분 구분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이 영주의 봉건적 소유권 하의 땅에서 경작하며 수확량의 일정분을 소작료로 납부하는 봉건제 경제구조는 남아 있었고, 왕의 주권과 영주의 소유권이 중첩되어 이중 통치 구조를 이루었다.   혁명 전야는 이렇게 과도기적이고 비일관적이던 시기였다.

사상적, 문화적 요인

혁명을 유발한 사상적 요인으로 꼽히는 것은 계몽사상이다. 계몽사상이란 모든 분야에서 전통적인 편견, 관습, 신념, 권위를 이성의 원칙으로 대체하려는 조류였다. 신분적 특권을 지니진 못했지만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통해 부(富)라는 새로운 권력을 얻은 평민들, 즉 부르주아지의 성장에 조응해 계몽사상이 크게 유행했다. 과거에는 문예를 애호하던 왕에 의존해 살던 작가들에게 부르주아지가 좋은 시장이 된 것이다. 계몽 사상은 부르주아지의 이해에 부응하여, 정치적 권력을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비합리적이고 질서 없는 제도가 경제활동을 방해한다는 것을 알고 노동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 철학과 과학 연구에 대한 교회와 국가의 검열 폐지, 일관된 원칙에 따른 국가 체제 조직 등을 주장했다.

이런 계몽 사상의 합리적 논증 외에도 중상비방문, 추문, 포르노그래피 등이 앙시앵 레짐의 기존 가치에 도전하고, 교회의 정신적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국왕을 탈신성화했다. 특히 특권 계급의 여성, 그 중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 대한 음란한 중상비방화가 돋보인다. 그렇게 해서 전통적 권위를 해체하고 혁명과 새 시대를 준비한 의의와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극히 미미했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특권을 향한 공격이 그 안에서도 약한 고리라 할 여성들에게 집중적이었던 것은 여성혐오로서 개탄스러운 일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도자의 통제를 받는 것이 아닌 대중의 자연발생적 움직임이 질서 없는 와중에도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지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뒤에 대공포 서술에서 상술하겠다.

여성의 삶

18세기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셋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여성이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인 면에서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시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남은 평등하지만 다르다는 것이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잠재적으로 동등해 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1] 물론 당대의 주류 분위기는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 남성의 미완성형으로 취급하는 것이었다. 사회계약론을 집필하며 보편적 인권의 개념을 주장했던 당대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 루소는 저서 '에밀' 5편에서 "여성과 남성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다르며 남성(최상위)와 동물(최하위) 사이에 놓인 존재"라고 여성을 규정하며,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고, 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으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여성의 경험과 역할은 꾸준히 확대되어 갔다.[2] 유럽의 모든 곳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살롱 문화는 여남이 한 자리에 앉아 정치, 사회, 과학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3]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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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시민의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 속의 여성

1789년 10월 5일 아침, 국민방위군보다 앞서 여성들이 베르사유궁으로 행진했다. 이후의 여러 봉기도 부녀자들의 시위로 시작됐다. 공화국의 출현은 정치적 권리 문제뿐 아니라 여남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이기도 했다. 프랑스 여성들은 자신을 개인으로서보다는 전체의 일부로 파악했기 때문에 18세기 내내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시민권이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여성시민(Citoyenne)’으로 불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모순 어법은 혁명공화국의 기본 원리와 배치돼 있던 양성 관계에서 연유했다. 혁명이 일어나자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정치클럽이나 협회를 만들어 활동했으나 새로운 질서의 창조자들은 공화주의 모성을 강조하며 여성들을 가정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했다. 당시 유럽에서 여성의 정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나라는 프랑스였다. 비록 여성들이 혁명 결사체의 정식회원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뜨개질하는 여자들(tricoteuses, 주로 서민층 여성으로 뜨개질감을 들고 집회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처럼 일부 여성은 30군데 도시에서 독자적으로 정치 클럽을 결성해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성 투사인 테루아뉴 드 메리쿠르는 남장을 하고 여성의 무장권을 주장하며 혁명을 이끌었으며, 폴린 레옹은 자연권에 의거해 여성도 국민방위군의 한 부대로 편성해달라는 내용과 함께 300명의 넘는 파리여성의 서명이 기재되어있는 청원서를 의회에서 낭독했다. 또 여성 상퀼로트들은 모든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3색 모장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대적인 ‘3색 모장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혁명 당시 프랑스 사회의 이상적 여성상은 ‘공화국의 어머니’였다. 여성의 임무는 아이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랑을 심어줌으로써 아이들을 훌륭한 공화국의 시민으로 키우는 일이었다. 여성들이 정치집회에 참가해 혁명의 원칙을 배우는 것은 허용되었으나, 정치토론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혁명기의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성해방과 보편적 인권의 획득을 꿈꿨다.[4]

권리 장전 : '남성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헌국민의회에는 여성의 권리와 정치 참여에 대한 여성들의 청원서가 빗발쳤다. 여성들은 “과부든 미혼 여성이든 토지나 재산을 소유한 여성들이 불만을 왕에게 토로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정당하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국세를 내고 사업계약을 이행할 의무를 지기 때문에,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정당하다. … 대표자들은 반드시 그들이 대표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이해관계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여성만이 여성을 대표할 수 있다.”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고, “당신들은 과거의 모든 편견들을 파괴했지만 가장 오래되고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편견 한 가지는 용인하고 있다. 그것은 이 나라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에게 관직과 지위와 명예를 허용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당신들과 자리를 같이 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며 공화정을 비판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1789년 8월 선포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여성을 시민에서 제외하며 오로지 남성의 권리만을 보장했다. 권리선언을 선포하며 장 폴 마라는 “여성과 아이들은 공적인 일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바, 그 이유는 그들이 가장에 의해 대리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며 여성이 시민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여성의 권리는 어디 있는가?

‘인간(Homme)’의 권리 선언은 보편적 인간의 권리를 말함인가, 아니면 보편적 ‘남성(homme)’의 권리를 말함인가? 권리선언에 따르면 여성은 프랑스의 시민이기 때문에 법의 규제를 받지만, 프랑스 시민(Citoyen)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1791년의 프랑스 헌법은 민법상의 성인 연령 규정을 여남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했고 여성이 이성적 사유 능력과 독립성을 가진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은 주체가 아니었다. 남성의 권리만이 언급되고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인정받지 못하던 때에, 문필가이자 정치평론가였던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의 권리’를 최초로 주장한다.

구즈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에게 ‘여성의 권리’,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사회계약 형태’의 세 가지 내용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여성의 권리’에서 구즈는 여성의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하고 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의 권리가 남성형만이 아니라 여성형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당연히 여성들에게도 법에 의거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가 부여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히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 10조와 11조에서 구즈는 사상과 견해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4]

여성의 굴레였던 프랑스 혁명

그러나 시민적 자유를 얻었다고 해서 이것이 곧 공민적 자유, 즉 정치적 권리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민적 자유는 장차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므로 시민적 자유를 획득한 이상 정치적 권리도 인정받아야 마땅했다. 혁명을 계기로 공민으로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최초로 제기됐지만 문제 해결도 혁명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여성도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과 여성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구즈는 혁명이 표방한 자유·평등·우애의 원칙이 지닌 한계를 폭로하고, 그 원칙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에 의문을 던졌다. 구즈의 입장에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압제야말로 온갖 형태의 불평등이 파생되는 근원이었으며, 남성들이 자신들을 결박하고 있던 사회적·정치적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자마자 양성간의 전쟁을 격화시키고 있다고 봤다.

이렇듯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만들어낸 공화주의 정신의 하나인 보편주의, 특히 보편적 시민권 개념이 갖는 내재적 모순인 ‘성차 시민권’ 개념은 프랑스 혁명이 여성들을 배제한 남성들만의 ‘반쪽혁명’이었다는 한계를 갖게 만들었다.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후 구즈를 포함한 혁명가 페미니스트들도 같은 운명을 걸었다. 국민공회는 여성정치클럽들을 모두 해산시켰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가 한층 더 심화되면서 여성들은 시민 사회에서 종속적 지위로 격하됐다. 여성들에게 프랑스 혁명은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굴레가 됐던 셈이다.[4]

프랑스 여성이 참정권을 획득하기까지

19세기 프랑스 페미니즘 운동은 구즈의 열망대로 연단에 오를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여전히 여성이 권리와 의무를 모두 갖는 주권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여성참정권 운동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중요한 사건이나 여성의 공민권 문제를 둘러싼 시험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시민권이 갖는 한계를 명백히 드러냈다.

1848년 혁명으로 프랑스 남성들에게만 최초의 보통선거권이 주어지자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참정권 문제를 공론화했다. 잔 드로앵, 레옹 리셰, 마리아 데렘으로 이어지는 19세기 초기 페미니즘 운동은 참정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후 단식 투쟁이나 방화 같은 과격한 수단을 사용했던 영국 페미니스트들의 영향을 받은 위베르틴 오클레르는 여성참정권 획득이야말로 가장 선결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선거권을 갖지 못한 여성이 세금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며 세금납부 거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 마들렌 펠티에, 루이즈 바이스 등 페미니스트들의 지속적인 여성참정권 운동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반대라는 높은 장벽에 부딪혀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1901년 여성참정권 관련 법안이 의회에서 최초로 발의되었으나 거부당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남성들이 전선으로 떠나자 여성들의 경제활동 비율이 늘어났다.

전쟁 이후 정상으로의 복귀가 이뤄지면서 ‘여성 본연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여성의 사회 활동은 위축되는 듯 했으나 여성참정권 획득, 노동·교육의 평등,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해 투쟁하던 페미니즘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19년 5월 여성참정권 법안이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이 이를 거부하면서 또 다시 좌절됐다. 그 배경에는 여성이 대개 남성보다 보수적이므로 여성참정권 허용은 보수파의 등장과 민주주의의 후퇴로 나타날 것이라는 우려가 깔려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여성들은 조국 수호를 위해 시민 정신을 보여주었다. 국내외적으로 레지스탕스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여성들도 자원병, 노동자, 간호사, 사무직원 등으로 동원됐다. 대독협력 정권인 ‘비시 프랑스’에 대항해 런던과 알제를 중심으로 ‘자유 프랑스’를 이끌던 드골은 “남성들보다 더 사려 깊고, 더 신중한 여성들 없이 레지스탕스는 해방활동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공적을 인정했다.

드골은 1944년 4월 21일 행정명령을 통해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해 정치적 평등의 길을 열어줬다. 드골의 정치적 결단은 ‘새로운 프랑스’의 여성들에게 150년에 걸친 족쇄를 풀어줬고, 1945년 4월 시의원 선거와 10월 하원선거에서 여성들은 처음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46년 헌법 전문은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재확인하며, 모든 분야에서의 양성 평등원칙을 포함시켰으며, 헌법 제4조는 “양성의 모든 시민과 국민은 법이 정한 조건에 따라 투표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마침내 ‘마리안느의 딸들’은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시민’이 되었다. 훗날 드골은 『전쟁 회고록』에서 “이 엄청난 개혁은 50년이나 지속돼온 논쟁들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할 만큼 프랑스 여성참정권 획득은 지난한 투쟁의 결과였다. 일각에서는 드골의 여성참정권 부여가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의 결과보다는 ‘국제적 우연’ 덕분이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시대착오적인 공화국과 결별하고 현대적인 공화국의 도래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여성을 완전한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정치적 통일체에 포함시키는 것은 국가적 화해의 몸짓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1848년 유럽국가 가운데 최초로 남성 보통선거권을 인정한 프랑스가 정작 여성참정권 문제에서만은 한창 지체된 ‘프랑스적 예외(L’exception française)’에서 벗어나 프랑스 민주주의의 터전을 더욱 확장시키는 전환점이 됐다.[4]

20세기 이후 프랑스 혁명사 연구

정통주의적 해석(자코뱅-마르크스주의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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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주의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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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코뱅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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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품 속 등장

회화, 조소, 음악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 영웅교향곡, 베토벤.
  • 마라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 : 프랑스 혁명 이후 과격적인 자코뱅파의 한 사람인 마라의 죽음을 그려낸 것이다.
  •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 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

5.2. 소설

  •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 1859년 단행본 출간되었다. 이후 약 2억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 프랑스 혁명 (사토 겐이치)
  • 혁명 극장 (힐러리 맨틀)
  • 마담투소
  • 서쪽의 성 : 심리 추리 소설.

5.3. 영화

  • 《마라, 사드》, 피터 브룩 감독, 1967년 (연극 원작)
  • 《프랑스 대혁명》, 로베르토 엔리코 감독, 1989년
  • 《당통》 안제이 바이다 감독, 1982년

5.4. 연극, 뮤지컬

  • 당통의 죽음 (게오르크 뷔히너, 1835)
  • 당통 사건 (스타니스와바 프쉬비셰프스카, 1929)
  • 테르미도르 (스타니스와바 프쉬비셰프스카, 미완)
  • 마라와 사드: 마르키 드 사드의 연출하에 사랭통 정신병원의 환자들이 연기한 장 폴 마라의 박해와 암살 (페터 바이스, 1999)
  • 두 도시 이야기 (소설 원작)
  • 스칼렛 핌퍼넬 (소설 원작)
  • 마리 앙투아네트
  • 1789 바스티유의 연인들

5.5.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 베르사유의 장미 (이케다 리요코, 1972)
  • 테르미도르 (김혜린, 1998)
  • 이노센트 (イノサン, 사카모토 신이치, 2013)  
  • 어쌔신크리드 유니티
  •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 (薔薇に隠されしヴェリテ, 오토메이트)

같이 보기

출처

  1. “Women's History as Scientists: A Guide to the Debates”. ABC-CLIO. 
  2. Whaley, Leigh Ann. Women's History as Scientists. (California: 2003), 118.
  3. “Redirect support”. 
  4. 4.0 4.1 4.2 4.3 문지영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17년 4월 25일). “다시 페미니즘 역사를 쓰다<5> 프랑스 페미니즘의 역설과 도전 남성들의 ‘반쪽 혁명’… 혁명가 페미니스트들 단두대서 스러지다”. 《여성신문》.  |title=에 라인 피드 문자가 있음(위치 35) (도움말)
  5. 이효재 엮음.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