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포

최근 편집: 2023년 1월 25일 (수) 17:13

대공포는 프랑스 혁명의 하위 항목이다.[주 1] la Grande Peur. 1789년 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프랑스 전국의 농촌에 퍼진 공황 사태. 동시에 벌어진 농민반란들과 함께 지방의 기존 지배 체제를 위협했으며, 그 해 8월 4일 밤 제헌국민의회의 봉건제 폐지 선언에 영향을 주었다.

배경

혁명 직전의 기근은 자연히 구걸 행각을 불러왔다. 구걸하는 사람은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도는 부랑자가 되고 낯선 사람의 출몰은 대개 토박이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부랑자들은 사악한 자들이라고까지는 못해도 흔히 남의 재산에 대한 존중심이 없어, 포도를 따먹거나 이제 익기 시작하는 밀을 베어가기도 했기에 안 그래도 수확이 부족한 농민들은 쉽게 공포에 질렸다. 그래서 부랑자들은 자주 비적이라고 불렸고, 이런 와중에 진짜 비적들도 횡횡했으며 공권력은 잘 막지 못했다. 실제로 문서로 남은 범죄 기록은 수가 많지 않고, 대부분은 위협, 강탈 등이며 방화와 강간, 살인 등의 강력범죄가 그렇게까지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정보를 얻기 힘들었고, 소식들은 구전되면서 과장되었다.

한편 하층민들은 혁명 직전 수년간의 자연재해가 자신들의 빈곤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풍요로운 시기에 곡물을 예비용으로 비축해두지 않은 것은, 부자들이 상인들과 담합하고 대신들과의 공모해 잉여곡물을 유리한 가격으로 팔기 위해 외국에 수출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또 밀의 경작을 촉진하기 위해 빵 가격이 비싸야 하며 그 결과 곡물 부족 사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경제학적으로 타당한 소리를 들었을 때, 인민들은 일반의 이익이 희생을 요구한다면 왜 가난한 사람들만 그 부담을 져야 하느냐고, 정부가 빵 가격의 인상을 방치할 것이라면 임금도 올리거나 부자들이 빈민들을 먹여 살리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무총감 네케르는 즉시 곡물 수출을 금지하고 곡물 수입을 장려했으나, 곡물 교역은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굶주린 사람들은 길 위에서 운송되는 곡식들을 보며 그것이 명을 어기고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거나 매점해 창고에 재어놓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곳곳에서 소요가 일었다. 그에 대한 진압은 전통적 방식대로, 닥치는 대로 무리의 일부를 체포해 번거로운 형식적 절차 없이 교수형이나 징역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이런 농민 반란은 흔히 있었던 일이고 매번 진압당했다. 그러나 1789년은 달랐다. 왕 자신이 농민들을 오랜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는 전대미문의 소식이, 농민들을 상상 이상으로 흥분시켰다.

식량 부족이 절정에 달한 1789년 봄에, 봉건적 부과조와 십일조 등의 부당한 부담들이 이미 사라졌다는 헛소문까지 돌아 그것들을 내기를 거부하는 소요가 여기저기서 일었다. 그런 소요를 일으킨 도시와 농촌의 하층민들은 자신들이 왕의 생각을 실천한다고 믿었다. 빈민들은 성이나 수도원을 침범해 영주나 성직자에게 자신들을 착취하던 권리들을 포기하라고 협박하고, 곡물을 탈취했고, 귀족이 사냥할 권리를 독점하고 있던 수렵지로 침입했고, 세무서를 공격했다. 7월의 대(大)농민봉기는 초봄부터 이미 그 원형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소요 사태 때문에 도시들에서는 기존의 과두적 시 정부가 부르주아지의 위원회와 권력을 나누고 부르주아지의 무장을 허락하기도 했다. 이런 경계조치는 오히려 불안을 높였고 위험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보였다. 바짝 긴장한 사람들은 수상한 사람, 한바탕 일어나는 먼지, 소음이나 섬광 등만 보고도 적이 쳐들어왔다고 확신하곤 했다. 이렇게 대공포의 기원이 되는 경계사태들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정치적 상황이 '특권계급의 음모' 관념을 부추겼다. 상기했듯 하층민들은 기근이 곡물 매점 때문이라는 음모론을 믿었다. 삼부회에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완강하게 머릿수 표결을 거부하는 것은 이제는 삼부회를 지배할 가능성이 없다고 느낀 그들이 삼부회가 해산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의심이 일었고, 왕비와 왕족들이 네케르를 쫓아내기 위해 왕을 속이고 있다는 의심도 있었다. 파리와 주변 지역에 군부대들이 매일 집결하고 태반의 부대가 외국인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사람들의 불안과 분노를 키웠다. 바스티유의 승리도 민중을 안심시키지 못해, 아르투아 백작, 콩데 공, 폴리냐크 가문 등 망명한 왕족 및 귀족이 외국 용병을 사서 침입해 파리와 국민의회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외세와 연계한 특권계급의 음모’라는 관념이 나타났다. 그리고 음모자들이 매점을 하여 제3신분을 굴복시키려 하며,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부랑자들이 특권계급을 위해 매수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특권계급이 특권을 잃고도 되찾기 위해 복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고, 적을 얕보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충실했다.

농민반란

이런 정치적 상황과 맞물린 '특권계급의 음모' 관념이 파리에서 도시로, 또 도시에서 농촌으로 전파됐다. 농민들이 특권계급의 음모를 믿은 것이 베르사유와 파리의 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농민들은 삼부회의 소집을 알았을 때부터 막연하게 특권계급의 음모를 두려워했다. 왕의 삼부회 소집령으로 해방이 통고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영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할 것이라고는 한순간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조짐이라도 보이면 사람들은 제3신분을 말살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이 농민반란의 흐름을 확대하고 격하게 만들었지만 원천은 아니었다. 1789년 여름의 반란은 봄의 반란과 본질상 다르지 않은, 기근과 실업으로 인한 빈곤이 원천인 것이었다. 그러나 7월의 운동이 봄의 소요와 구별되는 점은 특권계급의 음모라는 관념과 파리 봉기의 영향 하에서 반영주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봉건적 부과조 납부를 거부했고, 곳곳에서 봉기해 그 폐지를 요구하고 문서들, 심지어는 성을 불태웠다. 그들은 이것이 왕과 국민의회의 소망에 답하는 것이라 믿었다. 농민들은 삼부회 소집 시부터 그것이 왕이 자신들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믿었고, 그런데 음모로 인해 군주와 국민의회가 의도한 것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음모자들의 권력을 분쇄하는 것은 왕의 소원에 답하는 것이며, 왕의 그런 명령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특권층이 숨겼기 때문이고 그 역시 음모의 일부라고 믿었다.

농민반란이 집단적 광기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징세 사무소에 방화하면 세금이 폐지되고, 영주를 무력으로 협박해 봉건적 권리의 포기를 약속받으면 봉건적 부과조가 사라진다고 믿었다. 너무 단순한 믿음이었지만, 그렇게 폐지되는 것을 되살리는 것은 항상 어려웠다는 점을 보면 타산적 관점에서 현명했다. 특권계급 사람들의 거처를 공격할 때도 방화를 하면 마을로 옮겨 붙을 수 있으니 대개 가구를 밖으로 던진 후 조각 내 태우고 지붕을 차근차근 뜯어냈고, 차지농들과 하인들의 물건을 사전에 치워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도 했다. 반란자들은 시장이나 축제에 몰려가는 것처럼 즐거워하며 행진했으며, 사제관이나 성에 도착해서는 먹을 것이나 마실 술을 요구한 뒤 영주가 봉건적 권리의 포기를 받아들이면 대개 별다른 해를 끼치지 않고 물러났다. 도착적인 행동도, 여자들에 대한 사소한 공격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공포

농민반란은 인근 마을의 폭도들이 자신의 마을로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국지적 공포를 촉발했다. 질서 유지를 위해 파리와 지방 도시들에서는 부르주아 민병대를 창설하는 안전 조치를 취했는데, 이 때문에 비적들이 진압을 피하기 위해 지방으로 흩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 정부 당국자들은 소요를 순전히 외부인 탓으로 돌리면서 관할 주민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하는 데에 급급했다. 추수가 다가옴에 따라, 부랑자들이 이제 익고 있는 곡식을 수확 전에 빼앗아 갈 것이라는 공포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모두가 공포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공포는 별 어려움 없이 퍼졌다. 공포의 물결은 다섯 개로 그리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프랑스 대부분이 대공포로 뒤덮였다.

바짝 경계하고 있던 사람들이 행군해 오는 군대를 자신들을 진압하러 오는 특권계급의 용병으로 착각하거나, 경작농민과 추수를 해주는 날품팔이 사이에 일어나는 흔한 싸움, 부랑자의 실행하지 않은 협박, 가축 떼가 지나가면서 일으킨 먼지 등을 비적들의 습격으로 착각하는 등의 작은 공포들이 공포의 물결을 시작시킨 '원초적 공황(panique originelle)'이 되었다. 이런 원인들은 농촌에 늘 공포를 가져다주었던 사회경제적 차원의 것으로서 1789년의 위기로 인해 악화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특권계급의 음모 관념과 비적들이 대도시를 벗어나 흩어졌다는 소문과 제3신분의 적들이 비적들을 이용한다는 의심이 작은 조짐에서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다급하게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경계태세를 취하게 했다. 공포를 전하는 사람들은 비겁하다는 비난을 들을까봐 소문을 과장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분노하는 경향이 있었고, 새로 들어선 부르주아지의 시 정부나 구체제의 당국자들도 비적에 대한 두려움은 광범위한데 정보를 신속히 구할 수 없었기에 일단 경계 태세를 취하고 보았다.

수가 많지 않은 원초적 공황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다른 공황들이 파생했는데 이것들을 경계공황(panique de l'annonce)이라고 부른다. 이는 대공포의 가장 잘 알려졌거나 유일하게 알려진 형태이다. 경종이 울리면 이미 포위당했다는 생각에 마을 전체가 공포에 빠지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급히 피신하고 남자 어른들은 대부분 촌장, 사제, 영주의 부름에 호응해 모인다. 그리고 공포와 혼란 속에서 보초를 세우고 바리케이드를 쌓고 정찰대를 보내는 등의 방어 준비를 하고, 인근 도시를 도우러 진군한다. 결국 사태가 파악되어 공포가 끝나면 도시에서는 자신들을 도우러 온 사람에게 잔치를 베풀고 돌려보낸다. 상기했듯 원초적 공황이 사회경제적 상황과 주로 연계되어 있었던 반면, 경계공황 중에 횡행했던 소문은 항상 당시의 정치적 상황, 즉 봉기한 도시들로부터 비적들이 출발한 것이나 특권계급의 술책들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리고 경계공황 중에 진군한 농민들 때문에 혹은 원초적 공황처럼 차지농과 날품팔이의 일상적 다툼, 낯선 사람들의 등장, 잡초 태우는 연기 따위 때문에 새로운 공황이 대공포의 확산 도상에서 다수 발생함으로써 대공포의 전파에 중계자 역할을 했으니, 이를 2차공황(panique seconde) 혹은 중계공황(panique de relais)이라고 부른다.

대공포와 농민 반란은 별개였다. 공포가 농민 반란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도피네 주의 사례 하나뿐이었다. 도피네 주의 농민 반란은 퐁-드-보부아쟁에서 전파된 공황에 뒤이어 7월 27일에 부르구앵에 주변 농민들이 모인 것에서 발발했다. 그들은 길에서 밤을 지새운 뒤 자신들로 하여금 하루를 허탕 치게 만들려고 공포의 소식을 전해준 귀족들을 지체 없이 공격했고, 소요가 광범위하게 번지면서 8월 9일까지 매우 광포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 80개의 성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대공포를 경험하지 않았던 지방들에서도 소요가 계속 나타났으며. 십일조 징수자와 영주들에게서 독립하려는 경향을 대공포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영향 및 결과

위원회의 조직과 인민의 무장은 대공포가 지나가기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대공포가 지나간 후 모든 촌락들이 민병대를 갖추게 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촌락의 위원회와 민병대 조직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거나 문서상으로만 존재했으나, 대공포로 인해 위원회가 조직되고 행동하고, 무기와 탄약을 확보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대공포 때문에 무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농촌의 소읍들과 촌락들에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도시와 그 주변지역, 도시들 간의 연대가 강화되었다. 도망치려 한 사람도 많았고 무기의 수준도 조악했으며 시민병을 훈련시킬 생각은 누구도 못했지만, 전국적 관점에서 보면 대중 동원의 시도였다. 대중 동원 과정에서 혁명의 전투적 정신은 종종 인기 있는 구호로 나타났는데, "승리 아니면 죽음"처럼 1792~1794년의 혁명의 급진적 시기에 나타난 혁명 방어 의지를 예기하는 것이었다. 농민들은 특권계급의 패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봉기했고 대공포는 제3신분 성원들 사이의 계급적 연대를 분명히 나타나게 했다.

대공포와 농민 반란은 농민들을 무장하게 하여 농촌에도 도시처럼 위원회와 민병대가 조직되고, 봉건제(정확히 말하면 그 잔재[주 2])를 공격했다. 많은 부르주아들이 몰락귀족에게서 토지와 영주의 권리를 사면서 봉건적 토지 소유와 부르주아적 토지 소유의 경계가 흐려져 있었던 당시 상황에서, 농민들의 폭력에 겁 먹은 제헌국민의회는 그것을 진압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결국 제3신분 내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789년 8월 4일에 봉건제 폐지 선언을 했다. 이렇게 해서 대공포 및 농민 반란은 봉건제의 붕괴를 재촉하고 혁명의 전투적 열정을 나타나게 한 것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부연 설명

  1. 사실 분석과 평가적 언술 대부분 조르주 르페브르 《1789년의 대공포》를 참고했다. 해당 도서는 농민반란 및 대공포를 겪은 농민들이 광기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합리적 이유에서 그랬던 것임을 주장한다. 명성 높은 혁명사가가 광범위한 연구를 기반으로 주장한 것이지만,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 주장이기에 주관적 서술 틀을 사용한다. 다른 관점의 서술도 추가 바람.
  2. 이 항목의 상위 항목인 프랑스 혁명 항목의 통치 체계의 모순 부분에서 설명하듯 생산 양식으로서의 봉건제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봉건적 부과조의 명목으로 농민들이 영주에게 바치고 있던 세금과 부역 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