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캐슬린 올덤 켈시(영어: Frances Kathleen Oldham Kelsey, 1914년 7월 24일 ~ 2015년 8월 7일)는 미국의 캐나다계 약리학자이다. 미국 내에서 탈리도마이드 약해를 최소화하여 막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심사관(reviewer)으로 담당한 수면제의 탈리도마이드의 안전성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 미국 내 시판 허가를 약 1년간에 걸쳐 거절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의 우려는 약 1년 후에 탈리도마이드가 심각한 최기성[주 1]을 갖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켈시의 업적은 제약업계에 대한 FDA의 감독을 강화하는 법률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저명한 연방 공무원에 관한 대통령 상을 수여받은 두 번째 여성이다.
생애
켈시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쇼니건 레이크에서 태어나,[1] 주도에 위치한 세인트 마가릿 스쿨을 15세에 졸업하였다.[2] 1930년부터 31년까지 빅토리아 컬리지에 다녔고, 맥길 대학교에 입학하여 약리학에서 1934년 학사 학위를 1935년 석사 학위를 받았다.[1]
이름 해프닝
켈시는 EMK 게일링(EMK Geiling) 박사에게 편지를 써 졸업 후 일할 수 있는 직책을 요청하였다.[2] 영어권에서 이름 '프랜시스'는 여성 이름으로도 남성 이름으로도 자주 쓰이는데, 철자가 Frances일 경우 여성, Francis일 경우 남성이다. 그런데 게일링은 프랜시스가 남성이라고 짐작하고 켈시에게 직책을 주었고,[3] 켈시는 게일링의 답장이 "친애하는 올덤 씨(Mr. Oldham)"로 시작하는 것을 보고 이름 프랜시스의 영어 철자에 ‘e’가 있으면 여자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답장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4] 결국 켈시는 제안을 수락하여 1936년에 일을 시작했다.[3]
게일링 연구팀 활동
알약인 설파닐아미드(Sulfanilamide)는 박테리아 감염 치료에 오랫동안 사용되어 탁월한 성과를 낸 경이로운 약이었다. 그러나 제조사는 아이들이 쉽게 섭취할 수 있게 액체 형태로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약물을 화학물질에 녹여 추가 테스트를 거치지도 않은 채 바로 출시했다.[4] 그러나 이 새로운 형태의 약물은 환자 107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켈시가 속한 게일링 박사 연구팀은 1937년 미국 식품의약국의 요청에 따라 이 신약 '엘릭시르 설파닐아마이드(Elixir Sulfanilamide)'와 관련된 사망 사건들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FDA와 긴밀히 협력하게 되었다. 연구팀은 곧 용매인 독성 물질 다이에틸렌 글리콜[주 2]이 원인임을 밝혀냈다.[4]
게일링 연구팀의 이 연구는 연방 식품, 의약품 및 화장품에 관련한 법의 제정을 이끌어낸 계기가 되었다.[4] 미국 의회는 연방 식품, 의약품, 화장품법을 1938년에 통과시켰다.[2] 신설된 이 법에 따르면, 어떤 약이 시장에 출시되기 전에 제조사는 동물 실험, 화학 실험, 그리고 임상 연구를 토대로 안정성을 입증해야 했다.[4]
박사 학위 취득
1938년 켈시는 자신의 연구를 완료하여 시카고 대학교에서 약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게일링과 연구하면서 그는 기형학과 선천성 장애를 유발하는 약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5]
업적
탈리도마이드 승인 거절
FDA에서의 첫 임무
1960년 8월, 그는 FDA의 의약 검열관으로 임명되었다.[4]
FDA에서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임산부의 입덧에 처방하기 위해 특정 적응증이 있는 진정제 및 진통제로서의 탈리도마이드 약물에 대한 리처드슨-머렐(Richardson-Merrell)의 신청서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탈리도마이드는 '콘테르간(Contergan)'이라는 이름으로 서독의 제약회사인 그뤼넨탈에서 1957년 출시된 진정제이자 수면제로서, 의사 처방 없이도 구입할 수 있는 약물이었다.
탈리도마이드는 동물실험에서 어떠한 부작용도 보이지 않았기에, 그뤼넨탈사는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았음에도 콘테르간이 무독성 제품이라고 광고했다. 이 약물은 입덧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어 전세계의 많은 임신부들이 이를 복용했다.
제약사 리처드슨-머렐(Richardson-Merrell)은 이 탈리도마이드를 케바돈(Kevadon)이라는 브랜드로 FDA에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때까지 콘테르간은 유럽에서 널리 허용되는 약이었다. 따라서 별 문제 없이 FDA를 쉽게 통과할 수 있다고 여겨졌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4] 탈리도마이드에 대한 허가 신청과 승인은 일종의 요식행위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저는 신참이었기 때문에, 탈리도마이드 적합성 판단과 같이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저에게 배당되었습니다.
끈질긴 거절과 끈질긴 압박
그러나 켈시는 동료들과 함께 리처드슨-머렐사가 제출한 문서를 검토하면서 수많은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다.[4]
제약사는 동물 실험은 물론 임상 연구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게다가 거울상 이성질체 중 어떤 분자가 테스트에 사용되었는지도 명시되지 않았다. 특히 프랜시스 켈시의 시선을 끈 것은 약의 효능을 증명했다는 의사들의 이름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는 그들 중 몇몇이 미국 의학협회에서 정식으로 거부된 논문을 쓴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4]
이에 켈시는 추가 테스트와 추가 문서를 제약사에 요구했다. 이들 사이에 수많은 공문이 오고 갔다.[4] 허가는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기고 이미 창고에 탈리도마이드를 가득 비축해 뒀던 리처드슨-머렐사는 초초해져 전방위 로비를 펼치며 켈시 박사를 압박했다. FDA 고위층에게 켈시 박사가 “까다롭고, 고집 많고, 비합리적인 관료”라며 항의하기도 했다.[6]
이때 영국 의학저널에는 탈리도마이드가 팔, 다리 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는 글이 실렸고,[6] 이 약물의 사용과 말초신경염[주 3]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이 널리 퍼지자 제약사는 예방책으로 겉포장에 약의 위험성을 표시하겠다고 FDA에 제안했다.[4] 그러나 켈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 약물이 임신부의 입덧 치료에 사용되는데도 불구하고 제약사가 임신부 사례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았던 데다 말초신경병증 증세는 대개 장기간 복용한 후에만 발현되어[4] 약물의 치명적인 부작용을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탈리도마이드 베이비
그런데 이 약을 복용한 임신부들에게서 사지가 없거나 짧은 기형인 해표지증을 앓는 신생아들이 태어나는 것이 점차 보고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아이들에게서는 단지증, 심장 기형, 뇌 손상, 시력.청력 상실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고, 생존률 자체도 낮았다. 1962년 말에 탈리도마이드가 임신부에게 복용될 경우 태아의 심각한 선천적 장애를 유발한다는 충격적인 뉴스가 미국에 전해졌고, 리처드슨-머렐사는 약의 승인 신청을 철회했다.[4]
약품은 곧바로 전면 회수됐지만, 그때까지 탈리도마이드 복용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태어난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는 1만2천 명에 이르렀다.[6]
미국의 영웅
그러나 켈시가 시판 허가를 내주지 않은 덕에 미국에서 태어난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는 17명에 그쳤으며, 이마저도 제약사가 1천 명의 미국 의사들에게 연구 목적으로 나눠준 샘플로 인한 피해였다.[6] 미국의 인구 수는 당시에도 매우 많았기 때문에, 만일 FDA에서 시판이 승인되었다면 미국의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는 어마어마한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미국의 의약품 허가 제도는 켈시 박사 덕분에 한층 강화됐다.
켈시는 곧장 소신을 지킨 강직한 공무원의 표상으로 부상하며 미국 전역의 스타가 됐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즈 등 거대 언론이 켈시 박사의 업적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켈시 박사는 기형아 출산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의약품 규제 법률의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했다.[4][6]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신약의 안전성에 대한 켈시 박사의 탁월한 판단력으로 미국내 기형아 탄생이라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며 공무원에게 주는 최고상인 연방 민간인 봉사 부문 대통령상을 수여하기도 했다.[4][6] 켈시는 전국 규모의 갤럽 여론 조사에서 재클린 케네디, 엘리자베스 여왕 2세 등의 유명인과 같이 가장 존경받는 여성 10명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2000년에는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National Women’s Hall of Fame)에도 올랐다.[4]
그가 탈리도마이드 사건 조사에 착수했던 해로부터 정확하게 50년 후, FDA는 공공 의료를 보호하려는 미덕과 용기를 기리는 켈시상을 제정해 해마다 FDA 직원에게 수여했다. 첫 번째 수상자는 90세가 된 프랜시스 켈시였다.[4]
출처
- ↑ 1.0 1.1 “Frances Kelsey”. 《Canada Heirloom Series》. Heirloom Publishing Inc. 986. 2009년 8월 15일에 확인함..
- ↑ 2.0 2.1 2.2 Bren, Linda (March–April 2001). “Frances Oldham Kelsey: FDA Medical Reviewer Leaves Her Mark on History”. 《FDA Consumer》. 2006년 10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8월 15일에 확인함..
- ↑ 3.0 3.1 "When Kelsey read Geiling's letter offering her a research assistantship and scholarship in the PhD program at Chicago, she was delighted. But there was one slight problem — one that 'tweaked her conscience a bit.' The letter began 'Dear Mr. Oldham,' Oldham being her maiden name. Kelsey asked her professor at McGill if she should wire back and explain that Frances with an 'e' is female. 'Don't be ridiculous,' he said. 'Accept the job, sign your name, put 'Miss' in brackets afterwards, and go!'" Bren (2001).
- ↑ Spiegel, Rachel. “Research in the News: Thalidomide”. 2007년 8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8월 15일에 확인함..
- ↑ 6.0 6.1 6.2 6.3 6.4 6.5 “'기형아 유발약 막아낸 영웅' 미 켈시 박사 별세”. 《한겨레》. 2021년 7월 17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