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7일 (화)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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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6월 18일 독일 출생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하버마스와 비판 이론

하버마스의 철학적 기획은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와 문명의 자기비판"이라는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의 핵심 토대 위에 놓여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수장이었던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현대 사회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자연과 인간 스스로를 도구화하는 이성적 행위방식, 즉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에 의한 자기파멸에 이르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이 자기파멸을 돌이킬 방법은 도구적 이성이 전면화되기 이전 신화시대로의 복고가 아니다. 자기파멸을 돌이킬 수 있는 이론적 전망은 없으며, 우리가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문명의 끝없는 자기비판 뿐이다.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의 전면화라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기본 테제를 계승한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끝없는 자기비판과 부정이라는 방식을 선택하지는 않는데, 하버마스는 아도르노가 합리성이 가지는 여러 성격을 간과하고 합리성을 오직 도구적 이성만으로 한정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도구적 이성의 돌이킬 수 없는 전면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대적 생활 양식의 탄생 이후 발생한 다양한 측면의 합리성들이 간과되고 목적론적 합리성만이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합리성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 단지 목표를 위해 효율적인 수단을 채택하는 것만 합리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을 정당한 당위를 근거로 이행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부르고, 기쁨이나 슬픔 등을 웃음이나 눈물 등 상식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부른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런 여러 가지 합리적 행위를 도구적 행위라는 틀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점에서 나온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목적을 위해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능력은 당연히 중요하다. 예컨대 공무원이나 기업가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이는 권장된다. 그러나 타인을 기만하고 조종하기 위해 자신이 느낀 것과 다른 감정 표현을 한다면 이는 비합리적이고, 어떤 당위와도 무관하게 오직 기분이 좋아서 법률을 수행하는 것 또한 비합리적이다.

합리성의 분화와 세계 연관

하버마스는 합리성이 가지는 여러 측면이 현대 사회에서는 각자의 방향으로 분화되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이런 방향으로 분화된 세 가지 합리성으로 ①목적론적 행위의 합리성, ②규범에 의해 규제되는 행위의 합리성, ③자기표현의 합리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합리성이 토대를 두고 있는 기반적인 합리성으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토대를 제시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합리적인 표현은 논증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고, 논증은 잠정적 명제나 명시적 명제들로 원칙적으로는 환원될 수 있다. 따라서 목적론적 행위, 규범규제적 행위, 자기표현행위라는 세 행위는 각각이 다루는 지식의 집합이 존재한다. 이 집합은 각각 객관세계(사실을 기술하는 명제들의 총체), 사회세계(규범을 포함한 사회적 규칙을 입법하는 명제들의 총체), 주관세계(개인의 내적 심상을 표현하는 명제들의 총체)로 구분된다. 세 가지 합리적 행위의 기반으로 의사소통행위가 존재하고, 세 가지 합리적 행위는 각각 그 행위가 연관되는 세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의사소통행위에 연관되는 4번째 세계 또한 존재한다. 이 세계가 바로 생활세계이다.

의사소통적 행위의 정당화 근거로서 생활세계

생활세계는 문화, 사회, 인격이라는 세 요소로 구성된 상식적 지식들의 총체이다. 예컨대, 모든 사람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극소수 전공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성 이론이 비교적 정확한 이론이며, 인공위성 등이 올바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매 순간 이론적 정당화를 요구하지 않는데도 상식적 지식에 의해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상식적 지식들의 총체가 생활세계이다.

후설의 생활세계와 철학적 전통

본래 생활세계는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에 의해 제시되었다. 후설이 생활세계 개념을 제시하게 된 데는 독일의 철학 전통에서 기인한다.

독일 현대 초기 철학을 집대성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경험적 대상감각으로 지각하여 지성을 가지고 사고한 결과가 바로 지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대상과 감각이 전혀 다른 것임을 알고 있고, 칸트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따라서 칸트는 지식이 대상에 대해 설명하려는 명제인 것은 확실하며, 사고의 대상이 없는 지식은 공허한 말장난이라고 주장하지만, 역설적으로 대상은 감각을 매개하지 않으면 전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우리의 의식과는 독립적이다. 따라서, 의식의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상 자체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모든 익은 사과는 빨갛다"라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런 사과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연하지만 지구 건너편에는 골든 딜리셔스 종과 같은 "노란 익은 사과"도 당연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 사과 품종을 키우는 지역과 교류하지 않는 이상, 노란 익은 사과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는 "모든 익은 사과는 빨갛다"는 참인 명제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험에서 모든 사과가 익은 후 빨갛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유용한 명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을 거치지 않는 노란 사과와는 독립적이다. 따라서 "모든 익은 사과는 빨갛다"라는 지식은 사과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긴 지식이지만, 우리는 사과 자체에 대해서는 궁극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런데 오직 대상 자체로부터만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대상 자체를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이상해 보인다. 실제로 칸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름다움과 자연, 종교의 가능성을 다루는 『판단력 비판』을 저술했다. 그러나 이 저작은 미완성 저작이어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하지만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제시한 판단의 새로운 양상, 즉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개념은 이후 독일 철학에 계승되었다. 주관적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의 판단이 필연적 법칙에 따라서 유도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그의 판단에 동의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그의 판단은 누구에게도 반박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필연적으로 연역되지는 않는 지식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판단은 그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주관적 보편성을 가진 판단이다.

후설 또한 칸트가 제시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을 구성하는 잠재적 지식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잠재적 지식은 자각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일상적 체험에 수반된다. 이 잠재적 지식이 바로 생활세계이다. 문제는 후설이 생활세계 개념이 갖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생활세계는 궁극적 지식과 일상적 지식이라는 두 가지 층위를 함께 가진다.

슈츠의 생활세계와 하버마스의 보완

현상학적 사회학자 슈츠는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활세계가 갖는 궁극적 지식으로서의 성격을 빼버린다. 대신 슈츠는 생활세계가 사회학적 연구를 위해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서 전제한다. 생활세계는 이제 온전히 일상적인 지식이 되었다. 반면 생활세계가 갖는 구조가 명확히 해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한다고 전제되었다는 점에서 슈츠의 주장은 결함을 가진다. 하버마스는 이 생활세계 개념을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문화, 사회, 인격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분할한다.

의사소통행위이론적 법이론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하버마스는 자신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개진된 이론적 기반과 캐서린 맥키넌, 데보라 L. 로드, 아이리스 영 등의 여성주의 법이론을 참조하여 새로운 법이론을 제안한다.

비판

하버마스가 물질 재생산과 상징적 재생산, 사회통합적 행위와 체제통합적 행위를 뚜렷히 구분하여,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할이라는 가부장적 분할을 그대로 답습하였다는 지적이 있다. 낸시 프레이저는 하버마스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연결성을 생각치 않고 종속의 토대를 옹호한다." "젠더를 은폐한다"고 말하며 비판하기도 했다.[1]

또한 하버마스가 제안한 토의윤리는 아이리스 매리언 영으로부터 동질적인 의사소통적 행위 주체들을 가정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현대 사회의 다양한 억압 양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 유색인종, 장애인, 아메리카 원주민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주체들의 상황과 이들의 윤리적 태도를 경청할 수 있어야 하는데, 토의윤리의 주체인 의사소통적 행위자가 과연 이러한 이질적 주체들을 포용할 수 있냐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그 이후 이러한 반박에 대응하기 위해 『사실성과 타당성』을 저술하며 여성주의 철학을 비중 있게 다루게 된다.

출처

  1. 페미니즘 정치 사상사. 캐럴 페이트만&메어리 린든 쉐인리. 도서출판 이후. p16